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95화 (296/420)

295화. 갑판장의 기분이 좋은 이유

임시 거점, 전초기지, 정박지… 뭐가 되었건 한동안 의용 2함대의 주요 거점이 되었던 섬에 모여든 함장과 선장들의 분위기는 묘했다.

일이 끝났으니 후련하고 좋으면서도 앞으로의 전망이 어두우니 기뻐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만약 이대로 전쟁이 끝나고 일레드 왕국이 해상패권을 쥐게 된다면 여기에 모여 있는 함선들은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했다.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가 점점 시끄러워질 때쯤 아무 말 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알센더트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을 꺼냈다.

“모두 조용. 남작이 우리에게 준 시간은 고작 하루요. 여기에서 아무리 떠들어 봐야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 어찌 되었건 임무가 완수되었으니 회군을 명하겠소. 모든 함장, 선장들은 내일 오전에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도록 하시오.”

“이렇게 애매하게 끝낸다고?”

“그렇지 않으면? 해군과 한 판 붙기라도 하자는 건가?”

불퉁거리는 대머리 바냐도르에게 알센더트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물러서면 무식쟁이 바냐도르가 아니지.

아니나 다를까.

“에이 싯펄, 우리는 수송선 빼고도 28척이나 있소. 저놈들은 다해봐야 12척이고. 두 배가 넘는 전력인데 못 싸울 것도 없잖소?!”

다행스럽게도 그런 미친 생각을 하는 놈은 바냐도르밖에 없는 듯 모든 사람들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바냐도르를 바라보았다.

알센더트 역시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바냐도르 함장. 앞으로 바다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레드 왕국의 해군을 공격하자고? 그래, 당신 말대로 이길 수는 있겠지. 우리가 전력을 다한다면 말이야. 그런데 저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일 수는 있나? 한 놈만 돌아가도 어마어마한 함대가 우리를 덮칠 텐데?”

알센더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해군을 전멸시킨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배에 타고 있는 선원, 용병들의 입 역시 그리 믿을만하지 못하니 말이다.

현실적으로 승패에 상관없이 우리가 먼저 일레드 왕국 해군을 공격하면, 그 사실은 알려질 수밖에 없다.

운 좋게 일레드 해군을 박살 내고 무사히 복귀하더라도, 다른 선원들은 배에서 내리면 되지만 최소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예 지명수배가 될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격에 가담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끄응….”

말은 하지 않아도 다들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자기도 안 되는 것을 알면서 그냥 해본 말인지 바냐도르는 못마땅한 신음성을 흘리며 그대로 침몰했다.

“바냐도르 함장이라고 현실을 모르겠습니까? 답답해서 해본 말이지요. 찝찝하기는 하지만 제독의 말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표면적인 의뢰, 그러니까 해적 토벌은 확실히 끝났습니다. ‘외날의 라프나’의 신병까지 확보했으니 증거로는 충분하죠. 그러니까 철수하기에 앞서 전리품 분배를 어떻게 할지나 이야기합시다. 빨리 회의를 끝내고 짐을 챙겨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럽시다.”

“다른 것보다 나포한 선박들이 문제요. 배를 쪼개서 가지고 갈 수도 없으니 이에 대해 논의를….”

“당연히 나포한 함선의 소유가 되는 건데 뭘 나눈다는 거요?”

“뭐? 당신 혼자였으면 그 배를 나포할 수는 있었을 것 같아?”

“멀리서 얼쩡거리며 맞지도 않는 포나 쏴 재낀 놈들이 전리품을 바란다고?”

***

“정말 이 정도로 되겠는가?”

“조금 아쉽지만, 따로 행동하겠다고 말한 건 저니까요. 그보다 돈 관계가 너무 얽혀서 어쩝니까?”

“뭐, 귀찮은 만큼 수입이 되니까. 우리 같은 상인들에게 돈보다 중요한 게 어딨겠나?”

“조심하십시오. 돈보다 목숨이 중요한 법이니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냥 예향 중인 배들을 포기하세요.”

내 말에 줄줄이 실려 나오는 물자와 화폐 상자를 보던 피어스 선장이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알센더트 제독이 불편해서 따로 가겠다는 것은 이해하네. 드라이언 호 때문에 바냐도르 함장과도 껄끄러워졌으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자네의 선단이 이탈해도 서른 척이 넘는 대함대일세. 별일이 있겠나?”

그중에 일곱 척이 수송선이고, 절반쯤은 나포한 배를 예항하고 있거나 이것저것 짐을 잔뜩 실어서 굼뜨기 그지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건데.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워낙 먼 길이잖아요.”

“그런데 어디로 가려고 그러는 건가? 어차피 자네는 그 스코타 후작에게 먼저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용병들이 내려달라는 곳이 론 항구라서요. 그곳이 조금 더 가까우니 먼저 들렀다가, 좀 한산할 때 델라 항구로 갈 예정입니다.”

“용병들? 그런 녀석들을 그렇게 신경을 써줄 필요가 있나?”

별종을 본다는 듯 질문하는 피어스에게 나는 살짝 웃으며 미리 준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들러야 할 곳도 있습니다. 제 친구 녀석이 지금쯤 아빠가 되었을 것 같거든요. 자기 자식 얼굴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 그거 축하할 일이군. 부디 건강한 자식이 태어났기를 바라네.”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그럼 기회가 되면 좋은 모습으로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피어스 선장과 인사를 나누고 한창 짐을 옮기는 곳으로 걸어가자 네이선이 다가왔다.

“작업을 재촉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해 지기 전에는 힘들 것 같아. 피오렐과 리버티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어쩔 수 없지. 드라이언에는 다른 짐 싣지 않았지?”

“응, 네 말대로 드라이언에는 전투용 물자와 식량, 식수만 실었어. 그래도 되겠냐고 베기어 함장이 미안해하던데.”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최소한 우리가 짐을 버릴 때까지는 드라이언이 혼자서 우리를 지켜야 해. 피오렐과 리버티가 조금 힘들겠지만 참으라고 해.”

“으응, 다들 괜찮다고 하기는 했지만.”

내가 네이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다른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응? 애꾸?”

“애꾸…… 아니, 어휴, 그냥 마음대로 부르쇼. 것보다 제독 말대로 용병들은 모두 다른 배로 옮겨 탔소. 귀찮게 왜 짐을 옮겨야 하냐고 말이 많기는 한데….”

“그런 말이 안 나오게 하려고 용병대장을 시켜준 거잖아. 돈을 더 받으려면 일을 더 하라고.”

“그렇지 않아도 그런 놈들은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소. 일이 끝난 것 같으니 다들 긴장이 풀린 모양이오.”

“똑바로 전달해. 계약 종료는 론 항구에 기항한 다음이야. 그 전에 문제 일으키는 놈들은 전부 다 매달아버릴 거라고 해.”

“알겠소. 그런데….”

나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레건을 바라보았다.

뭘 잘못했는지 나랑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아니, 아니요. 그럼 난 이만 가보겠수다.”

급하게 멀어지는 레건의 뒷모습을 보다가 네이선에게 조용히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리버티 호에 돌격대원 다섯 명 파견해. 발드 선장에게 말해서 용병들이 문제 일으키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조지라고 하고.”

“아, 알았어.”

용병함인 드라이언은 말할 것도 없고, 피오렐도 돌격대도 있고 자체 전투력이 상당한 반면, 리버티에는 싸움에 영 소질이 없는 친구들만 모아 놨다.

싸움을 못 한다고 해도 일반인에게 얻어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문 싸움꾼인 용병들에 비하면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리버티에 타는 용병의 수가 매우 적기는 하다.

하지만 용병대장의 태도도 시원치 않으니 미리 안전장치는 해 두어야지.

***

“허허, 진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나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허허거리는 그리운 이름의 촌장에게 괜히 한 번 쏘아붙였다.

아직 이 사람은 내게 나쁘게 한 적도 없고, 갑판장님의 옛 동료라니까 좀 잘해주고 싶은데, 그놈의 이름 때문에 영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직도 말씀해 주실 수 없는지요? 다들 말은 못 하지만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뭐, 구성원이 모두 여성과 노약자인 집단이니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노예가 없는 세상이라지만, 말 그대로 ‘노예계약’이라는 것이 없을 뿐 노예처럼 사는 인간은 수도 없이 많으니 말이다.

에른스트 촌장이 말하는 노예도 바로 그런 의미였다.

“당신들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곳.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피를 짜내지 않아도 배를 채울 수 있는 곳. 사는 것은 조금 힘들겠지만, 어차피 비슷한 섬이니까 괜찮을 거야.”

“허허허… 그런 곳이 있습니까? 말은 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외지인을 반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자신들도 외지인이라면 말이 다르지.”

“외지인만 있는 곳이라….”

헤벌린 표정으로 여자들의 짐을 들어준다고, 안내를 해준다고 부산스러운 선원들을 보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지만 참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육체적인 접촉은 막아도 말이나 섞는 정도는 적당히 눈감아 줄 생각이다.

어차피 여자들이 정착해야 할 폰테 섬에서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남자라고 해봐야 대부분 내 선원들이니.

그리고 선원들이 폰테 섬에서 가정을 이루고 내게 더 소속감을 갖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장님, 승선 완료했습니다.”

“수고했어, 갑판장. 바로 출항할 거니까 준비시켜.”

“네.”

“영감도 이만 들어가서 쉬지. 특별히 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지만, 다른 배의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최대한 자제해줬으면 해. 특히나 여자들은 더 그렇고.”

“알겠습니다, 제독.”

잠시 후 항해를 재개한 오타라스 호는 섬 주변을 맴돌던 피오렐, 리버티, 드라이언과 합류해서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에 맞게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항해는 쾌적했다.

비가 살짝 내리기는 했지만, 바다는 우리 배에 여자와 아이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잔잔하기 그지없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이 난 갑판장 덕분에 선원들도 편안했다.

하루에 두세 번씩 멀리서나마 여자를 볼 수 있다거나, 선원들의 몸에서 나는 썩은 내가 아닌 달큼한 여자의 체향을 가끔 맡을 수 있어서라거나, 나긋나긋한 여자들의 목소리를 가끔 들을 수 있어서 선원들이 더 행복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

땡, 땡, 땡, 땡, 땡, 땡, 부우우우우우!

입항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오트라스를 움직이던 예인선들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제 할 일을 마친 도선사가 내게 슬쩍 고개를 숙이는 것에 화답하고는 쥐고 있던 은화를 튕겨주었다.

그는 깔끔한 동작으로 은화를 잡아채고는 씩 웃었다.

“도선사는 현문으로 내릴 겁니까?”

“네, 선단장님. 점심시간 아닙니까? 선단장님의 다른 선박들은 다른 친구들이 맡았습니다.”

“아, 수고했어요.”

도선사와 대화를 마친 나는 분주하게 선원을 지휘하고 있는 네이선을 한 번 더 재촉했다.

의용 함대 소속임을 증명하고 겨우 검문에서 여자들을 숨기는 것에 성공했는데, 이제 와서 도선사에게 걸리면 그게 무슨 꼴이겠어?

“도선사 내려야 하니까 계류 마치는 대로 현문 설치해!”

“알겠습니다!”

네이선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직접 움직이며 작업을 독촉했다.

덕분에 일이 조금 빨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선단장님?”

“네?”

“그 해적 놈들 토벌하러 간 의용 함대 소속이라고 들었는데, 왜 고작 네 척만 따로 온 겁니까? 설마….”

“설마 뭐요?”

내 말에 내 근처로 다가온 도선사가 작게 속삭였다.

“의용 함대도 패배했다는 소문이 진짭니까?”

“그런 소문이 있어요?”

하여간 이놈의 소문이란.

그런데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기세 좋게 출항한 의용 함대는 케르빈 제도에 진입하자마자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곳, 론 항구로 지원 요청을 바라는 수송선단을 보냈다.

그런데 기다렸던 것처럼 그 지원군을 꾸려서 보낸 것도 이상한 판에 정규 해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이 터졌으니 모든 전역(戰域)에서 패전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돌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원군을 보낸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 지원군은 혹시나 해서 요청했던 거고, 지원이 오기 전에 토벌은 거의 끝난 상태였어요. 해적 놈들이 뭉쳐봐야 뭘 어쩌겠습니까? 죄다 박살 내고 돌아온거죠.”

내 말에도 도선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런데 왜 선단장님은….”

뒷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왜 따로 왔느냐, 도망친 것은 아니냐, 뭐 그런 말이겠지.

“이번 일을 주도하고 의용 2함대를 고용한 사람이 스코타 후작 각하라는 것은 알죠?”

“허허, 론 항구 사람들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백작 각하께서 얼마나 상심하셨는데요.”

“그러니 본대는 델라 항구로 가는 것이 옳고, 그렇다고 이번에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백작 각하께 소식을 전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까 제가 온 거죠.”

“오, 어쩐지! 젊으신 분이 이런 선단을 이끄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도선사의 눈이 조금 변했다.

나를 제법 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문 설치 완료!”

“현문 설치가 끝났군요. 그럼 이만. 제가 일이 조금 바빠서요.”

“네, 그럼 출항하실 때 뵙겠습니다, 선단장님.”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떠나는 도선사를 지켜보고 있으니,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선장님, 선원들 상륙을 허락할까요?”

“어, 당직자들 빼고 상륙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선사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해 주신 겁니까? 그냥 무시하셔도 되지 않았을까요?”

“왜?”

“그게 그러니까, 선장님이 매번 정보는 중요하다고 하셨으니까….”

나는 어물거리는 오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정보는 정말 중요하지.”

“그런데 왜 그런 뜨내기에게 그냥 알려주신 거죠?”

도선사 정도 되는 이를 뜨내기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지적하는 대신 내가 아는 정보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정보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나만 알아야 하는 것도 있고, 필요한 사람에게 값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있지. 그리고 특정인에게 알리지 말아야 하는 정보도 있고, 누군가에게 반드시 알려야 하는 정보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승리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할 정보에 해당한단다.”

“아….”

“이번 전쟁에서 일레드 왕국이 압승을 거두면 우리도 골치가 아파. 특히 폰테 섬은 더욱 그렇지. 그러니까 해군의 패전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진 벨로키나 왕국과 쿠샤 왕국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승전은 더 크고 멋지게 포장해서 알려야만 해.”

덕분에 알센더트만 아주 신이 나겠군.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원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후다닥 뛰어가는 오펜을 보다가 지나가는 행크를 불렀다.

“행크, 잠시 이리 와봐.”

“네, 선장님. 지시하실 일이라도?”

나는 가까이 다가온 행크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는 개인실과 귀빈실 돌면서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물어봐서 몰래 챙겨 줘. 필요한 돈은 회계사에게 청구하고.”

“아, 알겠습니다.”

“…애들 장난감까지 다 사주지 말고.”

“설마요! 제가 그러겠습니까?!”

응, 너 그럴 거 같아.

이번에 항해하면서 보니까 애들 엄청 좋아하더만?

그래도 애들을 좋아하는 만큼 여자들에게 욕먹을 짓은 잘 안 할 것 같으니 이 녀석이 제일 낫겠지.

물론 제일 안전한 건 우르타랑 네이선이지만, 이 녀석들은 나와 함께 가야 하니까 말이다.

오펜이 이야기를 전달했는지 왁자지껄하게 달려 나가던 선원들이 나를 지나치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 나가서 놀 생각으로 어제부터 회계사에게 돈을 왕창 받아 놓았던 녀석들이다.

항해수당, 특별수당에 전리품 분배도 있고 보물섬 습득품을 정산한 돈도 있으니 아마 대부분의 선원들이 태어나서 가장 부자인 순간이 지금일 거다.

아마 오늘은 자기가 세상 최고의 갑부가 된 것처럼 놀겠지.

슬슬 걸어서 우르타의 방을 향하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리아가 태연하게 내 옆을 함께 걸었다.

마치 원래 동행이었던 것처럼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도도한 걸음걸이로 우아하게 걷는 꼴을 보니 기가 막힌다.

선원들이 장난으로 선장님, 선장님 하니까 진짜 자기가 나랑 동급인 줄 아나?

갑자기 심술이 나서 재빨리 리아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

의외의 기습공격이었는지 리아는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내 품에 안겼다.

“이놈! 이렇게 잡힐 줄 몰랐지?”

“야아아옹.”

품에서 몸을 몇 번 꼼지락거리던 녀석은 곧 가장 편안한 자세를 잡고는….

뭐지? 뭔가 내가 당한 기분이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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