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떠나보낼 사람
입항을 마치고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용병들의 해산이었다.
최근에 지원군으로 편입된 이들이야 줄 돈이 몇 푼 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따라온 70여 명의 용병들에게 줄 돈은 적은 돈이 아니라서 준비한 돈 궤짝도 상당한 크기였다.
떠나는 마당이라 용병들 역시 자신의 무장을 다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경계를 맡은 오트라스와 피오렐의 돌격대원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모여든 용병들을 헤치고 눈에 상처가 인상적인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인원 점검이 끝난 모양이다.
그대로 내게 다가온 레건은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제독.”
“용병대장, 아니지. 이제 레건 씨라고 불러야 하나?”
“흐흐, 간지럽게 무슨. 지시한 대로 전원 다 모았수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용병대장.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되었어. 이렇게 많은 인원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자네의 지분이 적지 않을 거야. 회계사, 준비한 것 좀 주지.”
내 옆에 있던 게론드가 도와주는 돌격대원에게 궤짝을 열게 하고, 동전 더미 위에 올려져 있던 주머니를 내게 건네주었다.
“약속한 보수네. 고마움을 담아 조금 더 넣었으니 섭섭하지 않을 거야.”
“어이구, 이렇게 무거운 주머니를 받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그는 주머니를 받자마자 열어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어허허, 고맙수다. 이 정도면 몇 달은 일 안 해도 살 수 있겠는데?”
“괜히 객기부리다가 돈도 못 쓰고 죽지 말고 알아서 처신하라고.”
내가 피식 웃으며 악담 같은 조언을 하자 레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칼밥 먹은 세월이 얼만데 그런 실수를 하겠소? 그보다 제독에게 할 말이 있는데….”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고 먼저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급한 게 아니면 자네의 옛 부하들에게 돈부터 나눠주도록 하지. 더 늦으면 다들 달려들 기세야.”
내 말대로 묵직한 돈주머니를 본 용병들의 눈빛이 약간 위험하게 바뀐 상태였다.
아마 절반쯤은 돌격대원들이 아니었다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었을 것 같다.
“쩝,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군. 알겠수다.”
“아, 마지막으로 저놈들이 보수를 받을 때 장난치는 놈이 있는지 옆에서 신원 확인만 해 줄 수 있겠나?”
“그 정도야 뭐, 그러겠소. 어이, 한 놈씩 나와라. 돈 받아야지!”
약간 위험한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용병들은 별문제 없이 보수를 받아서 해산했다.
굳이 문제라면 자기들끼리 줄을 서다가 주먹다짐을 한 정도인데, 그 정도는 일상이니까 딱히 문제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용병들 역시 네이선의 실력에 대해서는 대충 아는 만큼, 감히 내 옆에 버티고 선 네이선 앞에서 허튼짓하는 멍청이는 없었다.
“저놈들은 왜 아직도 얼쩡거려?”
뒷정리를 하는 돌격대원들을 지켜보다가 여전히 얼쩡거리는 몇몇 용병들을 보고 내가 살짝 짜증을 내자, 아직 가지 않고 있던 레건이 대답했다.
“아, 저놈들 나와 같이 움직이기로 한 놈들이요. 날 기다리는 거지.”
“뭐?”
내가 살짝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묻자, 레건은 별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계약이 끝났으니 우리도 또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할 것 아뇨. 물론 당장 돈은 충분하지만, 여기에서 정신 놓고 돈을 뿌리다가는 진짜 제독 말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질지 모르니까.”
“그럼 가보지 그래? 우리도 이제 돌아가야 하니.”
“거참,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아, 그랬었지. 그래, 무슨 이야기인데?”
내 옆에서 네이선이 한 발 가까이 다가오며 슬그머니 칼집에 손을 얹는 것이 보였다.
용병들에게 줄 보수를 정확히 딱 떨어지게 가지고 온 것이 아닌지라 궤짝에는 아직 적지 않은 돈이 남아있었다.
“여기서 말하기는 조금 길고… 점심 안 먹소? 거 이왕이면 점심 한 번 얻어먹읍시다.”
하긴 입항할 때가 점심 무렵이었으니 지금은 조금 늦기는 했다.
행크가 돌격대원들과 함께 궤짝을 옮기는 것을 확인한 나는 경계심을 약간 늦추고 물었다.
“설마 저기 기다리는 놈들까지 다?”
내가 턱짓으로 아직도 근처를 배회하는 스무 명가량의 용병들을 가리키며 묻자, 레건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었다.
“쩝, 우리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소?”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날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 준 사람들이다.
죽어서 보수를 받지 못한 친구들의 몫을 생각하면 한 끼 식사 정도, 사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대신 술은 맥주 한 잔씩만.”
“아 거참! 제독씩이나 되는 사람이 쩨쩨하게!”
“싫으면 말고.”
“아니, 아니요!”
바로 튕기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는 척을 하던 레건은 재빨리 몸을 돌려 대놓고 이쪽을 주시하는 용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제독이 밥을 쏘신단다! 이리 모여!”
***
“나 아직 아파.”
“나도 알아.”
“그럼 맛있는 걸 사줘야지!”
“…먹기 싫어?”
“아니, 아니야.”
포술장이 되고 나서 아주 살만했는지 밥투정을 하는 우르타를 단번에 제압하고, 내 맞은편에서 허겁지겁 빵과 고기를 흡입 중인 레건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봐, 레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쩝쩝, 아, 일단 이것 좀 먹읍시다. 오랜만에 음식 같은 것을 먹으니 아주 꿀맛이구만. 포술장, 그거 안 먹을 거요?”
“으아앗! 내 고기에 손대지 마! 당장 그 포크 치우지 못해요?!”
“어허, 좀 나눠 먹을 수도 있는 거지, 치사하게.”
탁.
나는 일부러 소리가 나게 포크와 스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벌써 3인분은 넘게 처먹은 것 같은데 언제까지 저런 이상한 연기를 할 셈이지?
“레건, 할 말이 있으면 그냥 똑바로 해. 아니면 그냥 조용히 식사나 마치도록 하고.”
“…….”
내 말에 거짓말처럼 동작을 멈춘 레건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할 말이 없으면 그냥 식사나 하지.”
“…쪽팔려서 그렇소.”
“응?”
테이블 위에 포크를 아무렇게나 던진 레건이 몸을 뒤로 한껏 젖히며 시선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야, 그 해군 놈들이 나타난 날부터 마음은 정했는데 말이오, 영 말할 기회가 나지 않더란 말이지. 제독도 알다시피 오는 길에는 또 내가 그 오트라스가 아니고 피오렐이라는 배에 타지 않았소?”
“그런데?”
“그래서 어영부영하다 보니 이렇게 돼버린 거지. 혹시 제독은 용병들이 왜 용병이 되는지 아시오?”
“용병? 모르겠군, 용병이라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고, 용병이랑 엮일 일도 별로 없었으니까.”
대화의 주제가 중구난방이었지만 나는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길래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건지 모르겠다.
“용병도 처음에는 말이오, 멋진 놈이 되고 싶다 이거요. 세상을 구하는 영웅! 크, 멋지지 않소?”
“허, 당신이 아직도 그런 세 살 먹은 꼬맹이 같은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군.”
“아니! 지금 말고 처음에 말이오, 처음에! 칼을 처음 잡을 때!”
“…그래서?”
자기 신세 한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왜 갑자기 용병이 되는 이유 따위를 말하고 난리야?
“그런데 칼질 좀 하다 보면 곧 깨닫는 거지. 하, 내가 아무것도 모른 애새끼였구나, 하고 말이야.”
“그걸 깨닫지 못하면 뒤질 테니까.”
“크크큭, 맞아! 잘 아시는구만! 그렇게 열 놈 중에 아홉 놈이 뒤지는 거요.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려. 영웅이나 위인이 되지는 못해도 칭송을 받을만한 어려운 의뢰를 척척 해결하는 그런 용병이 되고 싶어 하지.”
“이상과 달리 현실이 시궁창이라는 건 선원이나 용병이나 마찬가지야. 굳이 내게 이야기해 줄 필요도 없어. 하고 싶은 말이 고작 신세 한탄인가?”
레건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임시로 고용한 사람이다.
네이선, 우르타는 물론이고 그레이그 정도의 유대감조차 없는 이와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나눌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내가 살짝 짜증을 내며 말을 끊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레건이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쩝,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시다. 제독, 혹시 나와 저 친구들을 장기 고용할 생각이 없소? 보니까 그 돌격대라고 전투만 전담하는 선원들도 있던데. 우리가 뱃일은 잘 몰라도 전투에서는 제법 쓸만하지 않았소?”
“…….”
후우, 뭔가 했더니 프리랜서들의 정규직 채용 요청이었나.
용병은 기본적으로 프리랜서다.
자기가 직접 일을 구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일’이라는 것이 팔자 좋게 매번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심지어 합리적이고 보수도 괜찮은 그런 일은 더더욱 드물다.
일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직종인 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수입조차 안정되지 않은 직업이 바로 용병이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선원 쪽이 용병 따위보다 백 배, 천 배 낫다.
결국 레건의 말은 자신들을 돌격대 같은 전용 타격대로 고용해 달라는 뜻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돌격대원들이 일반 선원들보다 뱃일을 확실히 적게 하는 것은 맞다.
매일같이 네이선에게 얻어맞으면서 훈련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하겠어?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당직에서도 제외되면서 일당은 일반 선원보다 많이 받는다.
하지만 일단 돌격대도 선원이었다.
평시에는 견시대에 올라가고, 돛도 조종하고, 갑판도 청소한다.
그런데 저 용병들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결국 수습 선원 수준의 식충이 20여 명을 받아달라는 거다.
그것도 돌격대만큼 비싼 가격에 말이야.
“그러니까 일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지겨우니 내가 받아 줬으면 좋겠다?”
“제독도 든든한 전투원들이 생겨서 좋고, 우리도 고정적인 수입원이 생겨서 좋고, 서로 좋은 것 아니겠소?”
“아니, 아니야. 자네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정말 쌍방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자네가 지금까지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쪽팔리다’라고 했을 리가 없어. 자네도 이 제안이 자네들에게만 유리한 제안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이지.”
우리는 용병함대도 아니고 상선단이다.
이번에 발드 선장이 새로 고용한 선원들 덕분에 지금 있는 선원만 해도 충분히 많은데 전투원을 더 들이라고?
드라이언은 인사권이 베기어 함장에게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지금 운용 중인 오트라스와 피오렐의 돌격대 20명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전투원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선장이 되고 나서 너무나 많은 전투를 겪었지만, 원래 상선의 본분은 전투가 아니라 교역이잖아.
교역이 목적이라면 선원 수 역시 최소로 줄이는 것이 맞는 거다.
“할 말 없게 만드시는구만.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볼 일 아니오? 전쟁이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전쟁이 어찌 될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난 더 이상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지 않아.”
당연히 흘러가는 상황이나 스코타 후작의 의사를 확인해야겠지만, 진심으로 해군과 해군이 전면전을 벌이는 전장에는 참여하기는 싫다.
거기는 임기응변이나 뭣도 없이 그냥 대놓고 화력전일 텐데 우리 같은 민간 선박이 끼어봐야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
“후우, 알겠수다. 그래도 제독 같은 사람이라면 믿고 목숨을 맡겨볼 만해서 제안했던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 주쇼.”
“지금 상황이 이래서 자네의 제안은 거절하지만, 혹시라도 상황이 바뀌거나 용병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자네를 기억하지. 가능하면 미리 용병 길드에 연락을 넣어 놓도록 하겠네.”
“그러면 고맙지.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봅시다. 괜히 머뭇거리느라 배만 터지게 생겼군.”
거절당했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을 지은 레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들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자! 교섭은 실패다.”
레건의 말에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용병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꽤나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용병들을 보던 나는 레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고맙게 생각해. 빈말이 아니고 용병이 필요하면 꼭 자네를 먼저 찾도록 하지.”
레건은 피식 웃으며 거칠게 내 손을 잡아서 흔들었다.
“부디 조심하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상황이 어렵게 꼬이는 것 같던데.”
“어디로 갈 건가?”
“일단 내륙으로 갈 거요. 거기에서 피로 좀 풀고 생각해봐야지.”
***
“너희는 따로 가서 소문 좀 모아 와.”
“응? 같이 가는 거 아냐?”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라도 알아야 준비할 것 아냐. 같이 돌아서 소문을 언제 다 모아?”
“그럼 선원들 시키면 안 돼?”
“이건 좀 민감한 문제라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 좀 그래.”
우르타의 반대에도 내가 계속 찢어질 것을 주장하자 네이선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반대야. 우르타 녀석은 아직 몸이 이래서 내가 같이 있어야 하고, 리안 너도 칼 쓰는 실력은 거의 안 늘었잖아. 위험해.”
그래도 난 조금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네이선이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나 보다.
“리안 선단장 아니신가?”
“응?”
우리의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지나가던 사람이 반색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40대 중반, 단정한 머리와 옷차림, 호위로 보이는 남자 두 사람까지. 심지어 낯이 익은 사람이다.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기랄, 누구였지…?
분명히 발레리아 백작 가문의 사람이었는데?
“해적 토벌에 참여했다는 소식은 들었소. 이번에 선단장의 부하였던… 음, 다리가 불편한 남자가 백작 각하를 찾아뵈었는데.”
“네, 당시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제가 발드 선장에게 백작 각하께 도움을 구하라고 시켰습니다. 명예를 아는 백작 각하라면 의용 함대의 어려움을 그냥 넘기지 않으실까 싶어서….”
상황이 공교롭기는 하지만 일단 내가 백작의 호의를 입은 것은 사실이고 상대가 백작의 부하인 만큼 일단 백작 얼굴에 금칠부터 시작했다.
그러자 내 아부가 주효했는지 남자는 얼굴에 만족스러운 빛을 띄며 약간 거만해진 말투로 말했다.
“확실히 각하께서는 너그러운 분이시지. 그보다 각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렇다면 여기에서 헤매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시는 것은 어떻소? 내일 성에 함께 들어갑시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폐는 무슨. 주군의 손님에게 이 정도 대접도 하지 않는 자가 어찌 가신이라 칭할 수 있겠소?”
아니요, 그게 아니고 저는 원래 백작을 만날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아저씨, 왠지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알고 오신 것 같아요.
하지만 남자의 말은 충분히 상식적이었다.
평민 나부랭이가 감히 백작이랑 겸상 한번 했다고 도움을 청한 것도 웃기는 일인데, 심지어 백작 각하께서 흔쾌히 도움까지 주셨으니 당연히 직접 찾아가서 그랜절이라도 올리는 것이 도리다.
이 남자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제가 예(禮)를 모르고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습니다.’라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그런데 이 남자 이름이 뭐였지?
분명히 백작의 명을 받아서 나를 찾아왔던 그 사람인데, 이름이 영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저녁 식사 전이라면 함께 하는 것은 어떤가? 거기 같이 있는 부하들도 데리고 와도 좋네.”
“아니, 그게….”
“나 역시 이번 토벌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니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좋소. 어차피 토벌은 끝났으니 군사기밀이라고 숨겨야 할 일도 없을 것 아닌가?”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어설프게 웃으며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비록 일부러 도선사에게 정보도 주었고 선원들도 풀어놓았지만, 벌써 저렇게 토벌이 끝났다고 확신한다고?
정보 획득 속도로 볼 때 이 사람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이름이 에센스 비슷한 뭐였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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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엣킨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