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바보와 천재 사이의 어디쯤
“우, 우와! 맛있어!”
“…천천히 먹어, 평소에 내가 굶기냐?”
우르타를 보는 엣킨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서 내가 조용히 주의를 주었지만, 이미 음식에 정신이 팔린 우르타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엣킨스 저 사람도 그렇지, 괜히 사람을 초대해서 눈치를 주는 건 또 뭐야?
우리 우르타 기죽게?
“그러니까 선단장의 말대로라면 껍데기뿐인 승리라는 말이오?”
“제 주제에 그런 깊은 것까지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사실만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껍데기뿐인 승리는 맞지.
실컷 해적들과 싸워서 이겼는데, 깨끗해진 케르빈 제도는 일레드 왕국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니.
그리고 아슬아슬하게나마 일레드 왕국은 해적 연합과 동맹이라는 악명도 벗었다.
벨로키나 - 쿠샤 연합에 있어서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꼴이다.
“그나저나 정말 빠르군. 벌써 분함대를 보냈다니. 시기상으로 따져보면 아군이 패퇴하자마자 바로 분함대를 보냈다는 말인데.”
“저도 의아하긴 했습니다. 케르빈 제도의 섬이 한두 개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우리와 해적들이 대치한 곳을 찾아냈을까요?”
“크흠, 그건 내가 말을 하기는 어렵군.”
말하기 어렵긴.
해적이랑 일레드랑 짝짜꿍했으니까 그렇지.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일레드 해군 함대가 나타났을 때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만.”
“나도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겠소. 그쪽은 내 담당이 아니라서.”
아니, 분명히 론 항구를 담당하는 게 당신이라며?!
들리는 소문이 적지 않을 텐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시네?
원치 않는 식사 제공의 대가로 일방적인 정보제공을 강요당한 뒤 배정된 방으로 들어오자, 우르타가 번개 같은 속도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으아아아, 편하다! 맛있고! 배부르고! 푹신푹신해!”
그래도 네이선은 내 속을 뒤집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몸만 날려서 침대를 차지했을 뿐.
방에 침대가 네 개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어휴.
***
다음 날 우리는 엣킨스와 함께 발레리아 백작의 성을 방문했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집사가 우리를 맞이했고, 백작은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나라가 패전으로 우울해 있는 상황인데 너무 밝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군, 리안 선단장! 이번에 큰일을 겪었다지?”
“안녕하십니까, 백작 각하. 무례한 제 도움 요청에도 흔쾌히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도움은 무슨.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보낸 지원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모양이던데.”
“흠.”
예전처럼 백작의 옆에 달라붙은 집사장이 작은 기침으로 백작의 말을 끊었다.
“집사장? 몸이 좀 안 좋은가?”
“아닙니다, 주인님. 나이를 먹으면 원래 목도 자주 마르고 여기저기가 아픈 법입죠.”
“그러니까 좀 쉬라니까 고집은, 쯧.”
“허허허, 그동안 제가 발레리아 가문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 일을 태만하게 하겠습니까.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주인님을 모셔야지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백작이 어느새 헤실헤실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이 성의 실세는 저 집사장인 것 같다.
기침을 한 이유도 일부러 백작의 말을 끊으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쓸데없이 나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말라는 의도겠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백작 각하께서 보내주신 지원이 아니었다면 해적들을 효과적으로 압박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일레드 왕국 해군도 그렇게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호오,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백작이 흥미를 보이자 나는 준비한 말을 읊었다.
어제부터 엄청나게 준비한 말이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일레드 왕국 해군의 수는 무려 12척이었습니다. 정규 군함으로 12척이었죠. 하지만 백작 각하께서 지원하지 않으셔서 지원이 늦어졌다면 아군은 고작 24척으로 일레드 해군을 맞이해야 했을 겁니다.”
“그래도 무려 두 배 아닌가? 아무리 상대가 해군이라 한들….”
“아닙니다. 아군은 해적 놈들을 봉쇄하기 위해서 늘 12척이 해적들의 근거지 근처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해군과 동일한 수의 12척이 맞이했겠죠.”
“그렇다고 해도, 흐음….”
“에이디엘 남작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본국과 일레드 왕국이 전쟁 중이며, 아국의 민간 선박을 공격 및 나포할 생각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특히나 의용 함대는 준군사조직이니 공격해도 할 말이 없기는 해.”
“그래서 백작 각하의 지원이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 아군의 수가 위협적이지 않았다면 굳이 남작이 말로 좋게 끝냈을까요?”
“현장에 있었던 자네가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이겠지. 내 도움이 유효했다니 정말 다행이군, 하하핫!”
백작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호의가 무시당하는 것도 싫어할 확률이 높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보낸 지원이 별 도움이 안 되었다고 하면 기분이 안 좋은 정도를 넘어서 그 도움을 요청한 나에게 앙심을 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밤새도록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했는데, 이건 내가 들어도 꽤 설득력이 있다.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가정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들통 날 염려도 없고, 얼마나 좋아?
“그런데 리안 선단장, 혹시 그 이야기 들었나? 새로운 섬이 발견되었다던데.”
“…네?”
대답이 미묘하게 한 박자 늦었을 만큼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했다.
그만큼 그의 말은 뜬금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내 머릿속에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폰테 섬이 떠올랐다.
“뭘 그리 놀라나? 최근에 스코타 후작이 새로운 섬을 발견해서 자신의 영지에 편입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자네라면 혹시 들은 게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걸세.”
“백작 각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정말 후작 각하의 수많은 부하 중 한 명일 뿐입니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알 위치가 아니죠. 심지어 저는 최근까지 전장에 있지 않았습니까?”
잘했다!
이 정도면 임기응변치고 정말 잘한 거야.
그런데 분명히 폰테 섬 이야기 같은데, 백작이 어떻게 알고 있지?
설마 백작은 후작에게 첩자 같은 것을 붙여놓은 걸까?
“아, 그렇지. 아직 후작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내게 먼저 왔다고 했던가?”
그런 오해할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말라고!
마치 내가 후작을 배신하고 당신에게 붙은 것 같잖아?!
“아하하, 다른 여러 가지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백작 각하께 도움을 요청한 주제에 감사 인사도 드리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좋아, 처음부터 나는 자네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혹시라도 재밌는 이야기를 들으면 주저 없이 나를 찾아오게. 최근에 말이야, 아주 대단한 마술사가….”
그때 잠자코 있던 집사장이 보라는 듯이 허리를 크게 굽히며 말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반치노 백작이 와서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먼저 반치노 백작과 회담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그랬지. 이거 일부러 와줬는데 더 시간을 내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요즘 귀찮은 일이 많아서 말이지.”
“백작 각하께서 늘 왕국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시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난 사실 발레리아 백작이 왕궁에서 무슨 자리를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쯧,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럼 엣킨스, 한 번만 더 고생해주게. 이번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 치하하도록 하지.”
“도움이 되셨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각하.”
“그래, 집사장. 손님들을 밖으로 모시게.”
“네, 주인님.”
***
엣킨스는 백작을 만나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오트라스가 정박해 있는 동안 자기 집에서 머물 것을 권했으나, 나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은 확실히 편한데, 그것 말고는 다 불편하단 말이다!
우르타는 그냥 먹는 것과 자는 것만 편하면 그만인 것 같지만….
엣킨스의 마수에서 벗어나 술집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저녁을 겸해서 술을 마셨다.
“야, 우르타. 너 왜 안 투덜거리냐?”
“뭘?”
“아아니! 초대를 했는데 왜 거절하는 거야! 나는 어제 먹었던 스테이크가 또 먹고 싶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내가 우르타를 흉내 내며 놀리자 우르타는 오히려 나를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왜 자존심이 상하지?
“쯧쯧, 리안.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떡해?”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내 청각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네이선 역시 뜨악한 표정으로 우르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너무 기가 막혀서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라고?”
“나처럼 편안한 사람도 있어야 다른 사람들도 안심하고 재밌어하지. 모두가 리안이나 네이선처럼 재미없고 진지하다면 없는 의심도 생기게 만든단 말이야.”
우르타 이 새끼, 사실 천재가 아닐까?
“그런데 나 그거 보고 싶다, 마법사!”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얘는 정신연령이 십대 초반에서 멈춘 바보일 뿐이야.
내가 뜬금없는 마법사 타령에 반응하려는데, 뒤쪽 테이블에서 큰 소리와 함께 화가 잔뜩 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진짜 손에서 불덩이가 생겼다니까?”
“누가 뭐라고 했어? 알았다고~~.”
“야 이 새끼야, 너 방금 다 눈속임이라며?”
“눈속임이건 뭐건 불덩이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인마. 뭘 그걸로 이렇게 화를 내?”
나는 잠시 술 취한 두 남자의 말싸움을 구경하다가 우르타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저런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
“응! 신기하잖아?!”
예전에 잠시 동행했던 마공학자 제먼 씨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마법사’라는 직업은 없다.
마공학자는 마정석을 회로처럼 가공해서 마도구를 만드는 학자이자 기술자일 뿐, 마법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고대에는 실제로 직접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신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이 힘을 잃고 멈추면서 마력조차 굳어서 그런다고 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는 존재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법사라고 부르지만, 하는 일은 지구의 마술사와 비슷하다.
손기술과 장치, 트릭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지구의 마술사와 다른 점이라면 프로의식을 가지고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마술사’들과 달리, 이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부당한 이익을 얻거나 사기를 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정도일까?
“그런 사기꾼들을 뭣 하러?”
내가 해적, 도적놈들만큼 싫어하는 것이 사기꾼들이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약간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어이, 거기 어린놈.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크기도 약간 컸던 모양이다.
속으로 엉뚱한 우르타를 욕하며 뒤를 돌아보니 한 덩치 하는 아저씨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뭘 노려봐? 엉? 뒤지고 싶어?”
보아하니 술도 마셨고, 친구랑 말싸움을 해서 화는 나는데 차마 친구는 못 치겠으니 대신 때릴 샌드백을 찾는 모양이다.
나는 기꺼이 그 샌드백을 찾아 줄 용의가 있었다.
“갑판장, 처리해.”
“에이, 귀찮게.”
누가 샌드백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말은 귀찮다고 했지만, 네이선은 심심하던 참에 잘됐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거기 늙은 놈, 지금 우리 선장에게 뭐라고 씨불인 거야?”
“뭐?! 이런 시러배 잡… 놈… 을… 크흠.”
안정적인 발걸음, 탄탄한 몸매, 굳이 노려보지 않아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깊은 눈빛.
싸움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네이선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사람을 죽여 봤다면 그보다 더 심한 피 냄새를 맡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은 안 죽이신 것 같고.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 나에게 처맞고 실려 나가는 것과 지금 당장 두 발로 곱게 나가는 거지.”
“시비는 저놈이… 이익!”
뭔가 말하려던 남자는 네이선이 주먹을 말아 쥐자 그대로 꼬리를 내렸다.
“쳇, 술맛 다 버렸군. 딴 데로 가자!”
갑자기 절반쯤 남은 맥주를 보고 투덜거린 그는 가만히 있던 친구에게 짐짓 한 마디를 건네더니, 친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다.
역시 믿고 쓰는 네이선이라니까?
“여기에는 얼마나 있을 거야?”
“하루 정도만 더 쉬다가 멜라나인 항구로 가려고.”
“멜라나인? 왜? 드웰 아저씨한테 할 말 있어?”
따악!
나는 속없이 엉뚱한 질문을 하는 우르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에이씨! 왜 때려!”
“멍청아, 데보라 양이 임신한 게 언제야?”
“데보라? 아, 네이선의?”
“닥터한테 이야기 못 들었어?”
“선의님? 몰라?”
이놈은 최근까지 닥터한테 치료를 받았으면서 정작 알아야 할 건 왜 하나도 몰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은 네이선을 슬쩍 보니 술잔에 아예 코를 박고 있다.
취했는지 얼굴도 조금 빨간 거 같고.
“너 왜 얼굴이 빨개지냐? 좋냐?”
“…….”
저 난리를 치는데 그냥 지나가면 가만히 있겠어?
그나저나 데보라 양이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이 시대의 산모와 신생아 사망률이 워낙 높아야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