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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99화 (300/420)

299화. 마법같은 순간

게론드, 34세, 키 175cm 전후, 몸무게는 대략 75kg 정도. 아! 지금은 70kg 정도겠지, 팔 하나가 팔꿈치 아래로 없으니까.

회계사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얼굴도 장난기가 가득해서 그렇지, 아주 못생긴 편은 아니라서 외팔이만 아니라면 인기가 꽤 많을 것 같은 친구다.

그러니까, 팔이 정상이라면 말이다.

회계사가 하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왼팔이 없다는 것은 조금 불편할지는 몰라도 불가능한 부분은 아니다.

그런데 팔 하나 없는 걸 가지고 죽음까지 운운하니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목숨을 잃은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건데?

물론 회계사가 맡은 업무 중에 전투는 포함되지 않고, 장애를 가진 사람은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세상인심을 생각하면 좀 그렇지만….

“회계사, 아니, 게론드.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나도 염치가 있어서 차마 계속 배를 타 달라고는 못 하겠어. 그래도 죽었다고 이야기를 해 달라니? 그게 지금 무슨….”

“지금 선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약간 화가 난 내 말을 중간에 끊은 게론드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선장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당한 일이니 이제 와서 구차하게 선장님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선장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팔을 잃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선장님조차 쓸모없다고 내치려고 하시는데 제가 어디로 간들 사람 취급을 받겠습니까? 아버지에게도, 시니아에게도! 병신인 게론드보다 죽어버린 게론드가 더 나을 겁니다!”

“…게론드.”

거의 절규에 가까운 그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숨이 막혔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장애를 가져본 적도 없고, 그런 삶이 어떤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으니까.

유복한 집안에서 천재로 태어나 전도유망한 회계사의 길을 걷던 게론드다.

아마 저 나이까지 세상에 아쉬운 것이 없게 살았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사람의 절망을 내가 너무 쉽게 본 것 같다.

“후우, 관두죠.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동안 해왔던 일은 정리 다 해놨고, 여기는 금고의 잔여 내역입니다. 제 급여는 제가 알아서 챙겼습니다. 델라 항구에 가셔서 저에 대해 선장님이 뭐라고 떠들건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이대로 이곳을 떠날 테니 어떻게 알려져도 상관없겠죠.”

일그러진 그의 표정에 바닥없는 절망이 보인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진짜 당장 자살이라도 할 기세라서 나는 조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정신 차려!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일단 나는 자네를 내칠 생각이 전혀 없어. 자네만 괜찮다면 오히려 자네를 더 붙잡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자네는 굳이 배가 아니더라도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아도 되고, 시니아… 양과 오스팔트 가문의 일을 맡아도 되지 않겠나? 팔이 하나 없다는 것이 자네에게 큰 불편일 수는 있지만, 난 그것이 게론드라는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그럴까요?”

나는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서 대답했다.

“당연하지! 불편한 몸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면 오트라스에 남아줘. 오히려 남아준다면 나로서는 감사하고 미안한 일이지. 자네 말대로 결국 나 때문에 팔을 잃었는데도 함께 해준다니 말이야.”

“아니, 아닙니다, 그건 제가 화가 나서 그만….”

“화가 날 법도 하지. 아무리 자네가 자진해서 나섰다지만 결국 위기 상황을 만든 것은 나잖아. 그때 상황이 정말 안 좋기는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선 거잖아.”

“…….”

내가 한 말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잘 안다.

게론드는 정말 위기감 때문에 나섰다기보다는 자만에 취해 전투에 참여했던 것이 분명하다.

애초에 회계사를 뽑는 기준에 칼솜씨나 전투 능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대한 적도 없지만, 그 당시 게론드의 칼솜씨는 꽤 훌륭했다.

마구잡이로 칼질을 익힌 웬만한 선원이나 해적들은 상대하기 힘든, 제대로 교육받은 티가 팍팍 났을 정도니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사실 게론드가 전투에 참가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순수하게 돕고 싶다거나 손 하나라도 보태지 않으면 전투에서 지겠다 싶어 뛰어들었겠지.

그런데 실제로 목숨이 오가는 싸움을 해 보니까 자기 실력이 먹혔던 거다.

시니아에 대한 문제만 아니면 늘 성공만 해온 게론드였으니 과도한 자신감이 붙었을 테고, 그 자만이 이번 참사를 부른 것이다.

나쁘게 말해서 그 전투, 게론드가 없었다고 해도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장님, 전….”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실로 돌아가게. 지금 배에서 내리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 자네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마찬가지야. 내 배에 탄 사람, 내 사람이고, 내 배에서 몸을 다친 사람이네. 내가 어째서 게론드 자네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나?”

“후우….”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하는 꼴을 보니 적당히 진정된 모양이다.

“거기, 밖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들어와!”

내가 방문을 향해 소리치자 넋을 놓고 있던 게론드가 화들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짝 열려있던 문이 열리며 얼굴이 붉게 변한 네이선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안 보이기를 바랐어?”

“아니, 난 큰소리가 나길래 그냥….”

“됐고, 회계사 좀 방까지 데려다줘.”

내 말에 게론드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괘,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도 잘 갈 수 있습니다.”

“아니, 도망칠 것 같아. 네이선, 모셔다드려.”

“응!”

***

“냐아아아옹.”

잠깐 손이 떨어지는 순간 리아가 귀신같이 야옹거리자 우르타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리아의 목덜미를 살살 긁기 시작했다.

“팔 아파….”

“아, 그러니까 왜 안고 들어왔어? 방에 털 날리잖아!”

“리아가 들어오고 싶다고 했어!”

“너 이제 고양이랑 말도 하냐?!”

“리아는 나빠!”

“발음 똑바로 해!”

“내 발음이 어때서! 리아 미워! 리안이 더 예뻐!”

“거봐! 너도 헷갈리잖아!”

아니야, 그만하자.

이 바보랑 말을 섞다 보면 지능이 떨어지고 유년기로 회귀하는 기분이 들어.

나는 리아를 끌어안고 징징거리는 우르타의 머리를 한 번 쥐어박고는 시선을 돌려 네이선을 보았다.

이놈은 이놈대로 문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싸우거나 말거나 턱을 괴고는 허공을 보며 웃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신 나간 백치라고 생각할 것 같다.

“야, 너는 뭘 그렇게 생각해?”

“…….”

“야!”

쿵!

얼씨구?

어차피 피할 거라고 생각해서 홧김에 턱을 받치던 팔꿈치를 쳤더니 아무런 저항 없이 턱으로 테이블을 찍는다.

“아악, 혀 잘릴 뻔했잖아! 무슨 짓이야?!”

“진짜 큰일이네.”

“당연히 큰일이지! 내 혀가 잘리면 우리 데보라랑 키, 키스, 으히힛!”

“무슨 개소리야?! 난 오트라스 갑판장의 정신이 완전히 나가서 큰일이라는 건데?”

“어? 갑판장? 나?”

…말을 말자.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는 네이선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구나.

다행히 데보라 옆에 남는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제발 게론드 앞에서 저런 얼빠진 표정은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출항 전에 난리를 친 게론드는 그 이후로 잠잠하기는 한데, 지금도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기분이거든.

“그렇게 좋은데 데보라 양을 두고 어떻게 왔냐? 난 조금 더 있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

이제 아빠가 되어버린 네이선을 계속 끌고 다니는 것이 맞는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가족이 함께할 시간을 주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닌지 말이다.

네이선이 빠진다면 급한 대로 행크를 갑판장으로 올리면 그럭저럭 될 것 같기는 하다.

물론 네이선이 있는 만큼의 안정감은 없겠지만 말이다.

“어, 그게, 나도 리안이 좋기는 한데 뭐랄까, 애기는 정말 피곤하더라고. 너무 자주 울어. 그리고 데보라가 계속 리안만 신경을 써서 기분도 좀 그렇고. 리안 때문에 나랑 입 맞출 시간도 없다니까?”

“으히히히히, 재밌다. 리안은 왜 자꾸 둘 사이에 껴서 그래? 눈치 없기는!”

“닥쳐!”

언제 맞았냐는 듯 헤헤거리며 내 속을 긁어대던 우르타는 내가 시선을 돌리자 찔끔하며 저 멀리 도망갔다.

그리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네이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꼭 네 아들 이름을 리안으로 지어야 했냐?”

“당연하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가장 똑똑하고 존경스러운걸! 난 내 아들이 너처럼 똑똑했으면 좋겠어!”

정말 고맙기는 한데, 차라리 네이선 주니어가 더 나을 뻔했다.

***

드디어 델라 항구에 입항하자 고조된 선원들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론 항구를 먼저 들르기는 했지만 충분히 쉴 시간을 주지 못했고, 멜라나인 항구는 솔직히 유흥거리가 조금 부족했다.

선원들이 흥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마 내가 이번에 입항하면 열흘 정도는 쉴 거라고 공표를 해 놓은 부분도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리안 선장님 되십니까?”

원래대로라면 나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문이 걸리자마자 찾아온 이 남자와, 저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아가씨가 아니라면 말이다.

“제가 리안인데, 누구신지?”

“스코타 후작 각하의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입항 즉시 저택으로 와 주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각하의 심중까지 제가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이미 함대가 복귀했는데도 선장님께서 단독행동을 하셨다니까 각하께서 그리 기분이 좋으시지는 않을 겁니다.”

옷차림과 하는 행동을 보면 귀족은 아니다.

그런데 말하는 투가 영 건방지다고 할까?

내가 누군지 밝히고 이름을 물어보면 자기 이름부터 말하는 것이 기본 예의이거늘.

하지만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냥 모르는 척하며 남자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가 떠나기 무섭게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리안 선장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시니아 아가씨,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게리(게론드)는요?”

“아직 회계실에 있을 겁니다. 선원들 정산해줄 것도 많고 해서요. 일이 끝나는 대로 보내드리도록 하게….”

“게리!”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니아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내 옆을 지나쳐 뛰어가기 시작했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통로에서 나오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게론드의 모습이 보였다.

언젠가 마주해야 할 일이기는 한데,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부딪히게 될 줄이야.

시니아가 빠른 걸음으로 게론드에게 다가가는 그 짧은 사이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비어있는 게론드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힘없이 흔들리는 소맷자락을 보았는지, 시니아의 발걸음이 덜컥 멈추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 2m 정도, 딱 두 걸음만 더 걸으면 되는데….

게론드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더니 고개를 숙여 흔들리는 왼쪽 소매를 응시했다.

상륙할 생각에 신이 나서 잡담을 하던 선원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조용해졌고,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던 선원들이 표정을 굳히고 몸을 돌렸다.

그것은 진정 마법이었다.

마치 오트라스 호만이 세상에서 유리(遊離)된 듯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만큼은 쉬지 않고 달려들던 파도도 숨을 죽였다.

그 순간에는 모든 공기 분자에 추라도 달린 듯 바람이 멈추었다.

찢어질 듯한 두 사람의 내적 고통이, 마치 이 세상의 한순간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게리….”

“시니아, 여기는 왜, 아니, 어떻게, 그러니까….”

시니아가 천천히 다가서자 게론드는 마치 그녀에게 밀려나듯 뒷걸음질을 쳤다.

덥썩.

마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왼쪽 소매를 그녀에게서 멀리 떼어놓으려던 게론드의 시도는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무산되었다.

그녀의 손이 비어있는 옷소매를 더듬으며 위로 올라간다.

드디어 뭉툭한 팔의 단면이 잡혔는지 잠시 한 부분을 매만지던 그녀의 손이 옷을 떠나 게론드의 얼굴을 향했다.

“많이 아팠구나. 못 알아볼 뻔했어. 왜 이렇게 말랐어?”

“나는… 그게….”

“기다렸어. 처음에는 너무 괘씸해서 진짜 다른 놈이랑 결혼하려고 했는데.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돌아왔으니까….”

시니아의 마지막 말이 눈물에 젖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이 게론드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짝!

나는 입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려는 그레이그의 등짝을 찰지게 때렸다.

“일등항해사,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저 친구들 선실로 들여보내. 아주 구경났군, 구경났어.”

“윽, 좋지 않습니까? 저도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데요?”

하긴, 자기 때문에 게론드의 팔이 날아간 꼴이니 그레이그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겠다.

“미안하면 축의금이나 많이 내.”

“네? 축의금이요?”

“딱 보면 모르겠어? 결혼할 기세잖아?”

분위기만 보면 당장 내일 애라도 나올 것 같다, 어휴.

이제야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은 두 사람이 허겁지겁 자리를 옮겨 선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선내에 여자를 불러들여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문제인데, 그게 애인이라면 용서해야 되는 부분인가?

그러면 네이선이 꽤 화가 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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