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혼돈의 시작
“에헴, 에헴!”
코를 한껏 올리고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는 웃음을 꾹 참고 나름 진지하게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릴리안 아가씨. 그동안 평안하셨나요?”
“당연히 평안하지 못했어요! 선장 오빠는 흐음… 뭐, 괜찮아 보이네요!”
“저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건 당연히, 이익! 숙녀에게 그런 걸 물어보다니 무례하네요!”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거고, 도대체 어느 부분이 무례한 건데?
대화는 나와 하고 있지만 부지런히 주변을 탐색하는 눈동자를 보니 알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뻔히 보이는 시치미를 떼면 놀리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이런, 제가 무식한 놈들과 부대끼다 보니 예절에 밝지 않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릴리안 아가씨.”
“흠, 흠, 그, 그건 내가 한 번만 용서해 주겠어요. 그런데….”
“누구를 찾으십니까?”
“네! 그…!”
내가 던진 떡밥을 힘차게 물고 뛰어오르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아하! 시니아 양을 찾아오셨군요?! 시니아 양이라면 저쪽….”
“내 말도 안 듣는 언니 따위! 누가 언니 보고 싶대요? 보나 마나 멍청이 게리 오빠랑 놀고 있겠지!”
갑자기 화를 내며 볼을 부풀리는 릴리안은 가을의 화려함과 싱그러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오펜과 비슷할 텐데 어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군.
아마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달라서일 것이다.
그래서 난 그녀의 마음이 부담스럽고 걱정된다.
“으아아앗!”
우르타 저 녀석도 오펜과 비교해서 더 나을 것 없는 삶을 살아온 녀석이라서 말이다.
“잘생긴 오빠!!”
선원들과 시시덕거리며 갑판으로 나오던 우르타가 릴리안을 발견하고 기묘한 소리를 지르자, 한 박자 늦게 릴리안이 손을 번쩍 들면서 우르타를 불렀다.
“선장 오빠, 난 저기 잘생긴 오빠랑 이야기할게요, 그럼 이만!”
마음이 급한 와중에도 양손으로 드레스를 들고 무릎과 허리를 굽혀 인사한 릴리안은 빠른 걸음으로 우르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의 호위 두 사람이 그 뒤를 따르며 내게 목례를 해 왔다.
릴리안이 뛰어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녀를 피하지도 못하고 울상을 짓고 있는 우르타와 그런 우르타를 놀리는 선원들, 그리고 얼굴이 빨갛게 변했으면서도 당당하게 우르타에게 다가가는 릴리안이 보인다.
그나저나 해가 좀 남았으니 후작을 만나러 가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누구를 데리고 간담?
***
-다음 날 아침, 스코타 후작 저택 -
식기를 치워가는 하인들의 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후에 아인델프가 약간 어두운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제독,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으음….”
얼굴을 익힐 겸 함께 온 베기어 함장 역시 표정이 약간 어두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조차도 이상함을 느낄 정도라면 거의 확실하게 뭐가 있다는 뜻이다.
“…좋게 생각하자고. 어제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후작 각하는 워낙 바쁘신 분이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거야. 이전에는 이보다 더 오래 기다린 적도 있었고.”
“그건 그렇지만 입항을 하기도 전에 항구에 사람을 보내 놨을 정도로 급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베기어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나는 짐짓 쾌활한 척을 하며 대답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항하면 바로 와서 보고하라는 것이지, 급한 일이 있다고 한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함대에서 이탈해 단독행동을 했으니 각하께서 화가 나실 수도 있죠. 이 정도는 다 예상 범위 안쪽 아닙니까?”
“하지만 제독, 저택 분위기가….”
“쉿.”
나는 약간 언성이 높아지는 아인델프에게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하지만 아인델프는 물론이고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저택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원래도 그리 시끌벅적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사는 공간인 만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생활 소음이라는 것이 있었다.
일부러 신경 써서 노력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그런 소음들 말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저택에서는 그런 생활 소음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택의 거주 인원이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들어 버린 기분이 들 정도다.
“목소리 낮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듣는 귀가 없다는 뜻은 아니니까.”
“아, 죄송합니다.”
“어찌 되었건 괜한 억측은 좀 자제하자고. 그렇게 긴장해봐야 괜히 실수만 잦아질 뿐이야. 베기어 함장도 긴장 풀어요. 각하께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후작 저택은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요.”
내 말에 베기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독을 따르기로 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만, 정말 쉽지 않은 명령만 내리시는군요.”
베기어에게 익숙함이라고는 1도 없는 후작 저택에서 편히 쉬라는 것은 마치 사자 우리 안에서 낮잠을 자라는 말과 비슷한 모양이다.
아무리 그 사자가 배가 부르고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이 그 상황에서 잠이 오겠냐고.
***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날 저녁까지 후작은 우리를 호출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하인에게 몇 번이나 후작이 바쁜지 물어봤지만, 늘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습니다.’였다.
심지어 집사를 불러달라는 요청에도 ‘전달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끝이었다.
집사 비슷한 녀석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라.
세 사람 모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저녁 식사는 영 즐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음식도 그저 먹는 시늉만 하는 정도에 그쳤다.
“크흠,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지 배가 고프지 않군요.”
베기어 함장이 가장 먼저 항복을 선언했고,
“점심에 너무 많이 먹은 모양입니다. 속이 별로 좋지 않네요.”
온갖 향신료와 조미료가 뿌려진 고오급 스테이크를 절반도 먹지 못한 아인델프가 그 뒤를 이어 손을 들었다.
우리 우르타보고 먹으라고 하면 혼자서 세 접시는 해치울 텐데.
“나도 계속 기름진 음식을 먹었더니 영 들어가지 않네. 그럼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우리가 시선을 교환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식당의 문이 활짝 열리며 한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어, 리안 선장! 아니, 제독이었나? 오랜만이구만!”
“어? 제먼 씨?”
“뭘 그리 놀라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하하하!”
당신이 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면 당신이라도 불러달라고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제먼 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우리는 복도를 걸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하, 연구실에 박혀 있느라고 자네가 왔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지 뭔가? 그래서 식사를 끝내기 무섭게 찾아온 길일세.”
“아, 네. 그동안 평안, 하셨지요?”
나는 그의 머리카락으로 쏠리는 시선을 최대한 붙들어 잡으며 어색하게 물었다.
거짓말 안 하고 10년은 젊어진 것 같은데 잘 못 지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
숱이 풍성해지고 색이 짙어진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얼굴의 주름도 더 엷어진 것 같다.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셨나?
“물론! 물론이지! 사실 지금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네, 다 자네 덕분일세!”
“아, 그거 정말 다행입니다만….”
뭐가 내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끝없는 제먼의 칭찬과 감사를 받으며 내 방으로 안내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작의 집에 있는 손님방이고 나는 잠시 쓰는 처지지만, 일단 내 방이라고 하자.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아, 잠깐. 그러지 말고 내 방으로 가는 건 어떤가? 자네에게 내 연구 결과도 좀 보여주고 싶고 말이야.”
“네?”
나는 순간적으로 제먼과 눈이 마주쳤고, 그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시죠. 그렇지 않아도 제먼 씨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했으니까요.”
능청스럽게 제먼에게 대답한 나는 지금까지 우리를 안내한 하인에게 말했다.
“이봐, 잠시 제먼 씨의 방에 다녀올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주게.”
내 말에 하인은 살짝 당황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리안 상단장님, 후작 각하께서는 상단장님과 일행을 방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 명령이 우리를 방에 가두라는 명령은 아니지 않소?”
“다, 당연히 아니지요.”
“이미 시간이 늦어서 후작 각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지는 않으실 것 같은데, 저택에 살고 있는 지인의 방도 가면 안 된다는 거요? 이 저택에서 일을 한다면 여기 제먼 씨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당황하며 버벅거리는 하인에게 나는 쐐기를 박았다.
“제먼 씨를 일레드의 마수에서 탈출시켜드리고 각하께 소개시킨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런 나마저 제먼 씨와 편하게 만날 수 없다면 제먼 씨가 감금 비슷한 것을 당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
“아니, 그건 아닙니다! 제먼 님은…!”
“리안 제독, 그만하게. 저 친구가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야. 최근에 새로 온 사람들이 좀 있거든.”
***
결국 자리를 옮기는 것에 성공한 우리는 제먼의 연구실이라는 곳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연구실에서도 안쪽에 있는 좁은 공간에 들어간 후에야 제먼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손님 접대가 엉망이라서 미안하네, 여기는 내 개인 공간이라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 대충 아무거나 깔고 앉게.”
앉기에 책상은 너무 높고, 사방에 쌓인 책을 쌓아놓고 앉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아무리 앉을 곳이 없다고 해도 학자의 방에서 책을 깔고 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대충 바닥을 치우고 자리에 앉자, 눈치를 보던 아인델프와 베기어도 적당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여기 이분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제먼이 베기어를 보며 내게 묻자, 베기어가 먼저 엉거주춤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먼 씨. 리안 제독과 함께하게 된 베기어라고 합니다.”
“이번 전투에서 만난 베기어 함장입니다. 용병함대 출신이고 드라이언이라는 용병함의 함장이죠.”
“그렇군. 자네는 볼 때마다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는구만, 허허허.”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다 이해한다는 듯이 푸근한 미소를 띠던 제먼이 곧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들려줄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뭘 먼저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뭐가 제일 궁금한가?”
“먼저 전쟁, 어떻게 된 겁니까?”
“전쟁이라, 자네에게는 그게 제일 중요할 수도 있겠군. 대충 소문은 들었을지 모르겠네만, 연합군이 패배했네. 불행 중 다행으로 재기불능 수준까지는 당하지 않는 모양일세. 지금 수리 중이라고 빼놓았던 전투함들을 소집해서 재편성 중이라고 하네.”
수리 중이었던 전투함들이라니?
최근에 큰 전쟁이라고는 이번 전쟁밖에 없는데 전력에서 제외된 전함들이 그렇게 많다고?
“그게 무슨 말, 설마 아니죠?”
내가 어이가 없어서 되묻자 제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석하게도 지금 생각하는 것이 맞아. 벨로키나 왕국도 쿠샤 왕국도 말은 연합군이라고 하면서 전력의 상당 부분을 뒤로 빼돌렸던 거지. 일레드 왕국을 물리치고 나면 다시 두 나라가 경쟁해야 하니까 꼼수를 쓴 모양인데, 그게 너무 과했어.”
“아무리 그래도….”
“물론 일레드 왕국의 숨겨둔 전력, 4함대라고 하는 그 전력이 예상을 한참 뛰어넘기는 했다더군. 완편된 정규 함대 수준의 전력이 시논 섬에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그래도 두 나라가 전력을 다했다면 아마 그렇게 허무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걸세.”
“후작 각하의 입지가 좋지 않겠군요.”
전쟁을 주도한 사람이 후작이라는 말은, 패전의 책임을 가장 크게 져야 하는 사람도 후작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하지만 내 말에 제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의용 2함대, 그러니까 자네 때문에 조금 묘하게 되었네. 실질적인 피해는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일단 벨로키나와 쿠샤 왕국이 연합군을 구성한 표면적인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나? 해적 토벌 말이야. 패전의 책임은 총사령관이었던 남작이 뒤집어쓴 모양이야.”
“남작이라면 샌더슨 제독 말입니까?”
“어, 그런 이름이었지.”
그때 가만히 있던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저택 분위기가 이상한 것은 전투의 패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군요. 솔직히 후작이 정치적으로 상당한 위기에 몰린 줄 알았습니다만.”
“아인델프 선장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세. 그런데 문제가 더 크다네.”
뭔데 도대체?
패전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 수가 있나?
“후작의 건강이 상당히 안 좋은 모양이야.”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후작은 원래 노인이었다.
심지어 이번 전쟁 때문에 상당히 과로를 했을 테니 몸에 무리가 갔을 수도 있다.
최근에는 계획이 다 틀어지고 패전까지 해버려서 스트레스가 심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제먼 씨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고작 감기로 골골거리는 수준이 아니라는 뜻인데….
“혹시 목숨이 위험할 정도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후작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는 소문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조금씩 돌았어. 하지만 워낙 외부인도 자주 만나고 모습을 자주 보이니까 그냥 소문에 그쳤었지. 그런데 벌써 닷새째 후작과 대면한 사람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네. 지금 저택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것은 장남인 라우반 스코타지.”
제먼의 말에 베기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독, 분명히 입항하면 바로 저택으로 오라는 스코타 후작의 명령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장남이라는 사람이 시켰을지도 모르죠. 전언 정도야….”
내 말에 제먼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다른 문제야. 라우반이 아무리 명실상부한 후계자라고 해도 아직 후작은 아닐세. 그저 스코타 후작의 장남이자 영지인 플라비아의 남작일 뿐이지. 농담으로라도 후작의 명을 사칭할 수는 없어. 굳이 사칭을 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면 나를 부른 사람은 와병 중인 스코타 후작이라는 말인데.
…아무래도 일이 많이 꼬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