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외전)칼로 흥한 자의 결말
라프나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배가 침몰하면서 발생하는 와류는 매우 강력해서, 조금만 늦어도 삽시간에 빨려 들어간다.
한칼 얻어맞은 옆구리에서 지독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지금 당장은 정신을 잃지 않게 해주는 좋은 각성제이기도 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그런데 그게 오늘이라고?
자신에게 한 방 먹였던 애송이 놈들이 움직인다는 정보를 접하고 미리 매복해서 기습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결말은 상상도 못 했었다.
엄청난 굉음, 폭발, 섬광.
상상도 못 한 그 폭발만 아니었다면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른스트라고 했나? 지독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뭔가 익숙한 이름이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갑자기 화가 났다.
‘그 영감탱이가 감히 내게 사기를 쳐?’
분명히 전에 만난 그 영감탱이가 스스로 에른스트라고 했다.
그 옛날 붉은모래 해적단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잿빛 공포.
피바람을 몰고 다닌다는 전설적인 갑판장.
분명히 제도에 있는 섬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었는데.
수십 년 전이지만 그래도 나름 유명했던 인사라 꼬박꼬박 선배라고 대우까지 해줬건만.
어쩐지 명성에 비해서 행색이 초라하더라니.
살아 돌아가기만 한다면 반드시 그 영감탱이를 잡아다가 껍질을 벗겨버릴 테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정신없이 헤엄을 쳤더니 그럭저럭 위험 범위에서는 벗어났다.
일단 한숨 돌린 라프나는 머리만 수면 위로 살짝 내놓은 채 상황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기함을 침몰시키고 다른 배를 구하겠다고 뱃머리를 돌리고 있는 놈의 배를 보니 이제 기가 막힌다.
분명히 다 이긴 싸움이었는데.
미친 영감탱이의 자폭 공격 때문에 어이없이 패했지만, 저놈들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런데 또 싸우러 가는 거다, 미친놈들.
오트라스 호가 완전히 선수를 돌려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라프나는 바로 근처에 떠다니던 나무통을 끌어안았다.
당장 죽을 위험은 벗어났는데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어서 시한부 인생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근처에 육지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결국 물고기 밥이 될 운명이었다.
“젠장, 대양이 비좁다고 설치던 내가 고작 저런 애송이 때문에 죽다니.”
벌써 두 번째 만남.
솔직히 첫 번째야 영업하러 갔던 것도 아니고 잠깐 놀러 나갔다가 만나기는 했었는데, 첫 만남부터 아주 강렬했다.
그의 도끼를 그렇게까지 받아낸 녀석은 그 애송이가 처음이었다.
물론 어깨의 상처가 없었다면 진즉 놈을 반으로 쪼개버렸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어깨에 도끼를 박아 넣은 노인네가 바로 그 노인네였다.
장담하건대 오늘 죽은 그 노인이 진짜 에른스트였을 것이다.
내일 당장 관짝을 짜야 할 만큼 늙었어도 사자는 사자라는 거지.
‘그래도 그 늙은 사자는 내가 이긴 거야, 놈은 죽고 난 아직 살아있으니까.’
늙은 사자를 사냥했다고 위안으로 삼아 보았지만,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새끼 사자, 아니지, 이제 다 자라서 젊은 사자가 된 애송이에게 한칼을 먹고 숨이 간당간당하는 상황이 아닌가.
물론 노인네가 갑자기 자폭을 해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손발이 꼬여서 그렇지, 다시 붙으면 젊은 사자도 때려잡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
언제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다시 정신을 차린 라프나는 자신의 몸이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팔과 다리에 추가 달린 쇠사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꼴을 보아하니 포로가 된 모양이었다.
“젠장, 그냥 바다에 빠져 뒤질 걸 그랬나?”
혼자서 투덜거려보지만 말라비틀어진 목에서는 갈라지는 쇳소리가 더 크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옆구리는 왜 치료해 놓은 거지?
산 채로 잡아가서 현상금이라도 받을 생각인가?
이대로 포획당한 짐승처럼 다른 놈들의 구경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 라프나가 무섭다고 느낀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냥 이건 그래! 추워서 그런 거다.
상황이 개같이 꼬였지만 그래도 ‘외날의 라프나’가 자존심이 있지, 공포를 느낀다는 게 말이 되나?
“여어, 대해적 나으리, 몸은 좀 어떠신가?”
라프나는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억지로 눈을 떠 보니 창살 밖으로 흐릿하게 인영이 보였다.
눈에 조금 더 힘을 주자 말을 한 놈의 얼굴이 보였다.
어째서 저 재수 없는 얼굴이 저기에 있는 거지?
그리고 저 말투, 저놈 설마….
“크, 크큭, 도노반이냐? 이 애미도 팔아먹을 벌레 같은 놈.”
“도노반 제독이시지.”
“제독은 개뿔. 너 같은 놈이?”
빠악!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도노반의 주먹이 라프나의 얼굴을 때렸다.
“퉤.”
금세 입안에 가득 고이는 피를 뱉어낸 라프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흐흐, 역시 네놈은 남자도 아니야. 주먹이 이렇게 물렁해서야 원.”
“이 꼴이 되어서도 허세하고는. 곧 뒤질 놈을 살려놨으면 고맙다고 먼저 인사를 하는 게 도리 아닌가?”
“도리를 찾는 해적 놈이라니, 발 달린 생선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크크크큭, 개자식, 아직도 네놈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군?”
퍼억!
퍽!
퍼억!
퍽!
빠악!
.
.
.
저 비열한 놈을 진즉에 정리했어야 했는데.
머리는 쓸만해서 조금만 쓰고 버린다는 게 이 사달을 만들었다.
그래, 계속 쳐라.
더 쪽팔림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게 더 낫지.
하지만 라프나의 마지막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
엄중하게 관리되는 창고 안에서 히스테릭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씨발! 어디냐고! 어디에다가 숨겼어!”
“크큭, 크흐흐, 뭘, 숨겨, 해적 새끼가, 흐흐, 숨기긴, 뭘, 크크큭.”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괴인을 노려보던 도노반은 한쪽에 넘어져 있던 의자를 다시 들고 와서 앉았다.
“개 같은 놈. 어이, 라프나 선장. 우리 이제 그만 합의합시다. 보물창고 위치만 알려줘. 그러면 살려준다니까? 그 꼴로 다시 배는 못 타겠지만 저쪽 어디 섬에다가 내려줄게, 응? 물도 있고, 먹을 것도 있는 곳에 내려준다고.”
“크흐흐, 내 똥이나, 처먹어라, 쓰레기야.”
라프나는 애초에 도노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살려주기는 개뿔, 그대로 곱게 죽여주기만 해도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라고 할 판인데.
그리고 보물창고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하 놈들이 뒤통수를 치지 못하게 그런 헛소문을 퍼트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왜 그 사실을 저놈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말인가?
뭐, 말해준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지만.
“아아아아아악!”
라프나가 실실 웃거나 욕만 주워섬기자 자기 분을 못 이긴 도노반이 온갖 물건을 집어 던지며 난장을 피웠다.
라프나를 더 고문하고 싶었지만, 여기에서 더 때리면 진짜 죽어버릴까 봐 고문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라프나가 숨겨둔 보물창고의 보물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보물만 있다면 일레드 왕국으로 가서 번듯한 해군으로 신분 전환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난 네놈을 죽일 거야. 바로 깔끔하게 죽여줄게. 보물창고 위치만 말해! 그러면 진짜 두말없이 그 거추장스러운 목을 떼 준다고!”
“딱, 딱 하나만, 줘.”
“뭐?”
“흐으, 흐으, 하나만, 하나만….”
도노반이 눈을 번쩍이며 득달같이 라프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급하게 물었다.
“뭔데? 뭘 달라는 거야? 뭘 주면 되는데?”
“흐흐, 흐흐흐, 그거….”
“그게 뭐냐고?!”
“네 거시기 말이다, 퉤엣!”
“이 미친놈이!”
빠악!
***
요즘에는 도노반의 방문이 뜸했다.
그렇다고 처우가 나아진 것은 아니라서 라프나는 천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도노반이 고문을 한다고 후벼 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피고름이 흘러나왔고, 언제부터인가 멀쩡하던 눈도 보이지 않았다.
팔다리를 제대로 놀리지 못하게 된 지는 꽤 시간이 지났다.
이제 손발에 묶여있는 구속구가 없더라도 라프나는 혼자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바다가 보고 싶구나….’
도노반이 오지 않게 되면서 말도 하지 않는 바람에 이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혼잣말도 할 수 없게 된 신세가 어이없고 서글프고 화가 났다.
차라리 도노반 놈이라도 들어오면 목이 찢어지건 말건 욕이라도 퍼부을 텐데.
해적질을 시작하면서부터 라프나는 생각했다.
자신은 어떻게 죽을까?
좋게 포장해서 영업이라고 하지만, 해적들에게도 해적질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영업을 열 번쯤 뛰고 보면 처음 영업 뛸 때 봤던 놈들 중에 살아있는 놈이 절반이 될까 말까였다.
다 그렇게 죽었다.
마흔 살을 넘긴 해적은 정말 희귀한 놈이었다.
그래서 막연히 자신의 마지막도 바다 위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배 위에서 칼을 맞고 죽건, 바다에 빠져서 숨이 막혀 죽건, 자신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곳은 바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뭔가.
이제 평생 동안 지겹도록 보았던 바다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끊임없이 들리던 파도 소리,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지긋지긋한 바다 냄새, 피 냄새, 화약 냄새….
그놈.
그 어린 애송이 놈.
대양을 주름잡던 외날의 라프나를 이런 시궁창에 처박은 놈.
그놈과 딱 한 번만 더 싸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놈을 죽이고 죽건, 그놈에게 죽건, 그렇게 죽었다면 꽤나 만족스러운 죽음이었을 거다.
***
빛, 빛이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빛인가.
아니지, 이제 보이지는 않는구나.
그래도 느낄 수 있었다.
썩어가는 몸뚱이에 떨어지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감각을 잃어가는 몸에도 느껴지는 바람, 그리고 바다 냄새.
라프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최후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악명을 쌓는데 단단히 한몫했던 튼튼한 몸은 최악이 상황에서도 모진 목숨을 붙여주었고, 결국 이런 더러운 꼴을 보고 죽게 생긴 것이다.
교수형? 참수형? 화형?
뭐가 되었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햇살도 느꼈고, 바람도 느꼈고, 어머니 바다의 내음까지 맡았으니 이제 아쉬울 것도 없었다.
음, 솔직히 한 가지는 아쉽다.
그 애송이 놈 얼굴을 보고 싶은데.
언제부터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비열한 도노반 놈의 얼굴마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좀 억울했다.
죽으면 유령이 되어서 도노반 그놈을 괴롭혀줘야 하는데.
얼굴을 기억 못 하면 찾아갈 수가 없지 않나.
아니지, 내가 유령이 되면 내가 죽인 놈들이 선배 유령이랍시고 나를 괴롭히려나?
그러면 그냥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
아까부터 웅웅거리던 무슨 소리가 이번에는 조금 가까이에서 들렸다.
“…프나.”
라프나는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들었다.
“라프나.”
목소리가 익숙한데?
설마 그 애송이? 이게 환청은 아니겠지?
“그륵, 애, 애, 소옹, 크륵, 이이….”
며칠, 어쩌면 몇 달 동안 신음 소리 외에는 나오지 않던 목구멍에서 기적처럼 겨우 알아들을 법한 말이 흘러나왔다.
“…맞군. 차라리 그때 죽지 그랬나?”
젠장 맞을 놈.
라프나는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속을 뒤집는 애송이 때문에 얼마 남지 않는 피가 빨리 도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와 별개로 ‘어쩌면 저놈이라면’이라는 한 가닥 기대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송이에게는 자신도 죽일 놈이겠지만 도노반 그 개만도 못한 놈도 똑같은 해적 놈 아닌가?
“배애시인, 크르륵, 자아… 저어… 주우, 주우겨어….”
“그런가. 다 네가 자초한 일이지.”
애송이의 기척이 멀어져간다.
그리고 라프나가 기대했던 도노반의 비명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
대륙력 2716년 10월 08일, 벨로키나 왕국의 스코타 후작은 공식적으로 해적 토벌이 성공했음을 발표했다.
해적 집단의 수괴인 ‘외날의 라프나’는 델라 항구의 광장에서 참수당했다.
그 외에도 거의 30여 명의 해적이 함께 참수당했는데, 특별히 라프나의 목은 광장에 그대로 전시되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근육질의 괴한이라는 악명이 무색할 정도로 참수당한 남자는 볼품없이 말랐으며, 스스로 걷지도 못했고, 얼굴 반쪽이 썩어서 그대로 둬도 하루도 못 살 것 같은 몰골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형집행을 구경했지만, 그 몰골이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에 ‘과연 진짜 라프나가 맞는가?’에 대한 의문은 끝없이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