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은행과 마법사
한동안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 뒤 슬슬 자리를 파하려고 하는데 제먼 씨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들 마법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마술사요?”
“마법사라면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것 아닙니까?”
“제먼 씨가 마법사는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인델프, 베기어, 내가 차례로 대답하자 그는 혀를 끌끌 차면서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이걸 잘 보게.”
그는 갑자기 눈을 감고 인상을 쓰며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 하시는… 어?”
아인델프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제먼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고, 우리는 그의 손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크기는 대충 라이터 불의 두 배 정도?
사람에게 위협이 될 정도 크기는 아니었지만, 손 위에서 불타는데 화상은 안 입나?
“오오, 진짜 불꽃 같네요. 마법 같아요.”
“손은 괜찮으십니까?”
“이런 건 또 언제 배우셨습니까?”
대략 3초 정도 불꽃을 유지하던 제먼은 손을 털어 불을 없애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마법일세.”
“…….”
우리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멀뚱멀뚱 바라보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진짜 마법이란 말일세! 내가 마법사가 되었다니까?”
“네에….”
“어, 으음… 대단하십니다?”
짝, 짝, 짝, 짝….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박수를 치던 베기어 함장에게 시선이 쏠리자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런데 뭐, 무슨 반응을 바라고 말씀하시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네.
뭘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손바닥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은 신기하다.
그렇다. 조금 신기하기는 하지만 딱 그 정도 아닌가?
“어이구, 전혀 이해를 못 하는군!”
“아니, 충분히 이해한 것 같은데요? 신기합니다, 대단해요. 우와!”
마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신기한 일이겠지만, 글쎄?
지구에서 꽤나 보편화된 마술에 대한 지식 때문에 마술에 사용하는 각종 화학약품, 트릭, 기술이 있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다.
그러니까 손바닥에 불이 타오르는 정도는 내게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다.
지구에서는 눈속임으로 사람 몸도 떼었다가 붙이는데 고작 라이터 불쯤이야.
잠깐만.
지금 마술사가 아니고 ‘마법사’가 되었다고 한 거야?
자기 입으로 이 세상에 ‘마법사’는 없다고 단언했던 사람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자네들까지 딱 네 명뿐인 놀라운 일인데 반응이 이래서야 원.”
“자, 잠깐만요. 제먼 씨. 그러니까 그게 눈속임이 아니고 진짜 ‘마법’이라는 겁니까?”
“오오! 드디어 이해했나?!”
나는 뛸 듯이 기뻐하는 제먼을 보며 혼란에 빠졌다.
뜬금없이 마법사라니?
물론 마법의 존재야 이미 알고 있었다.
페리아 족의 정신 조작이라는 고차원의 마법을 직접 경험한 몇 안 되는 당사자중에 한 명이 바로 내가 아니던가.
그런데 인간은 이미 마법의 힘을 완전히 잃은 것 아니었어?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어휴, 이게 축하할 일인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게 개인에게 마냥 축하할 일이냐고 하면 조금 애매했다.
새로운 것은 배척받는 법이다.
그것은 변화가 적고 정체된 사회일수록 더욱 심하다.
뜬금없이 나타난 마법사를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바라볼까?
심지어 그 능력이 월등하지도, 초월적이지도 않고 그냥 이질적이기만 하다면?
“그래. 역시 리안 제독은 이해가 빠르군. 그래서 나도 고민 중이네.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숨겨야 할지 말이야.”
제먼 역시 이미 생각을 많이 한 듯 바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지금까지는 잘 숨겨왔을 것이다.
평생을 공부만 한 양반인데 나보다 더 생각이 깊으면 깊었지, 내가 바로 생각해낸 부분을 고려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니 말이다.
나에게 밝힌 것은 그렇다고 해도 처음 보는 베기어가 있는 자리에서 마법에 대해 밝힌 것은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숨기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술 취해서 누구 앞에서 불꽃을 뿜어내지만 않으면 누가 의심이나 하겠습니까?”
예전과 너무 달라진 제먼의 얼굴을 보면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나는 일부러 쾌활하게 대답했다.
누가 봐도 느껴질 정도로 젊어지기는 했더라도 그 사실을 마법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슷한 사람을 본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지.
뭐… 소문 정도는 돌 수 있을 것이다.
제먼의 정체가 뱀파이어라거나, 밤마다 순결한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한다거나, 악마와 계약을 했다거나, 후작의 생명을 갈취했… 어우, 마지막은 너무 위험한데?
그런데 원래 마법사가 되면 젊어지는 거야?
그렇다면 나도 좀 탐이 나는데.
생각을 정리하느라 내 시선이 그의 얼굴에 너무 오래 머물렀던 모양이다.
내 시선을 느낀 제먼은 바로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허허, 자네도 이미 신경 쓰고 있지 않나. 내 얼굴을 보면 너무 이상하지 않나?”
“어… 음… 그러니까 그게….”
“그냥 말하게.”
“…회춘하셨네요.”
“정답이네!”
아, 제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다.
이게 지금 저렇게 신나서 이야기할 내용이 아니지 않나?
물론 젊어졌다는 것 자체는 정말 기적이요, 축복이겠지만, ‘마법’을 숨기는 것에 있어서는 웃을 일이 아닐 텐데 말이다.
아인델프와 베기어는 이미 대화의 맥을 놓쳐버렸는지 공허한 눈빛으로 우리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나 역시 살짝 눈치를 보자 제먼이 바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게 굉장히 신기한 일이라는 말이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았네. 내 몸 안에서 흐르는 마력이 느껴지는 거야. 분명히 내 상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인데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더군. 그것이야말로 신비 그 자체였지. 그때부터 내 몸이 급속도로 변하는 것을 느꼈네. 진짜 젊어진 것이지. 이건 눈속임이 아니야. 진짜 신체 나이가 역행했다네. 고대 문헌들을 살펴보다 보면 100살을 넘어 140세까지 살았다는 마법사의 이야기가 종종 나오거든? 지금까지 학계에서 그런 기록은 어디까지나 대상을 영웅화하거나 격을 높이기 위한 과장법이라는 것이 정설이었지.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진짜 140년을 산 것은 아닐까? 지금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고작 마력회로 연구 따위는 이제 취미 축에도 못 끼네. 그런데 이걸 누구에게 털어놓는다는 말인가? 자네 말대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두 손을 들었다.
“으아아, 제먼 씨, 그동안 답답하셨다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받아들이기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더 이상 이야기를 들었다는 내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 일단 제먼의 말을 막았다.
오, 게론드, 여기에 너 따위는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진짜 괴물이 살고 있어.
“어, 미안하네. 내가 너무 흥분했군. 원래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닌데….”
“더 해주실 말씀이 있으세요?”
내가 반쯤 기가 질려서 반문하자, 그는 민망한 표정으로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마법에 대한 건 자네가 좀 알아봐 주게. 나 말고 다른 마법사가 생겼는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통점은 뭔지, 마법은 나와 비슷한 것인지 뭐 이런 것 말이야. 물론 비밀 엄수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네, 뭐, 힘닿는 데까지 알아볼게요. 그런데 먼저 이런 이야기 꺼내기는 힘드니까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시간이 걸리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
당연한 말이지만 정보를 알아본다고 해도 내가 먼저 ‘혹시 마법사에 대해서 아쇼?’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거나 의심의 여지를 주게 된다.
그러니까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한 발 빼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정보 수집이 어려울 것 같지도 않다.
무려 마법사다.
진짜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다.
세상에 마법사가 제먼 한 명이 아니라면 분명히 어디선가 말이 들리겠지.
마법사건, 마술사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젊음을 얻은 자건….
그러고 보니 최근에 어디서 듣기는 했던 것 같은데?
“그 건은 알겠고, 또 해주실 말은 뭔데요?”
“내 우려대로 일레드 왕국이 은행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네.”
“네?”
그러고 보니 제먼 씨는 은행의 통신 마법에 매료된 사람이고, 은행에 호의적인 사람이다.
아마 망명을 선택한 이유가 일레드 왕국이 은행에 적대적이라는 이유였던가?
그런데 은행이 아무리 세력이 크다지만 나라도 아닌데 무슨 전쟁을 선포해?
“발단은 뻔한 일이었네.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일레드 왕국은 은행에 거액의 대출을 요청했고, 은행은 거절했지. 원래 은행은 예전부터 국가나 영지 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관여한 적이 없거든. 그런데 이 거절을 빌미로 일레드 왕국 내의 모든 은행에 대한 압류를 실시한 것이지. 누가 봐도 무리한 폭거였지만 이를 제지해야 할 다른 강국들과 이미 전쟁 중인데 거리낄 게 있었겠나?”
“그럼 일레드 왕국이 혼자서 이 전쟁에 뛰어들 결심을 한 것도 그 압류 자금 때문입니까?”
“그것까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미 일레드 전역의 은행에 남은 현금이 별로 없었다고 하던데?”
“호오….”
이 양반은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정보를 얻는 것일까?
물론 후작 저택이 여러 가지 말이 흘러 다니는 곳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택에서 지내기만 하면 신뢰성 있는 고급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나저나 내 생각에 정체를 다 파악한 사람도 없다는 비밀결사 수준인 은행의 진정한 힘은 상당하다.
물론 금력(金力)이 무력과 권력에 비해 꽤나 약세인 세상이지만, 그래도 세계의 유일한 은행의 힘이 약하다면 그게 더 웃기는 일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얻어맞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나 다를까, 제먼은 살짝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이다음이라네. 은행 측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네. 일레드의 폭거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는데, 압류를 취하하고 적절한 배상을 하지 않는다면 이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지.”
거기까지 말한 제먼은 몸을 살짝 떨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야.”
제기랄, 일이 도대체 어디까지 꼬이는 거야?
이 정도면 은행이 역사상 있었던 모든 사건, 사고의 흑막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이후 은행의 첫 번째 행동이 바로 자네가 소속되었던 의용 2함대에 파견한 추가 병력이네. 믿거나 말거나 지원 요청이 오기 전부터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더군. 토벌 지역이 케르빈 제도라고 했지? 그곳에는 은행의 통신망도 없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정보를 얻은 것인지 이해가 안 되더군.”
***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 아니야.”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아인델프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보다 오늘 들었던 이야기는 둘 다 그냥 잊어야 할 것 같아. 괜히 밖으로 나돌면 여러 사람 죽어 나갈 것 같거든. 베기어 함장님도 무슨 말인지 아시죠?”
“걱정 마십시오. 밖으로 내돌리려고 해도 대부분은 이해도 못 했으니까요.”
내 말에 베기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했다고 할까요?”
“그걸 누구에게 이야기해?”
“혹시 모르니 말입니다.”
아인델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쉽게 대답해 주었다.
“그냥 우리 전쟁 이야기했다고 해. 그리고 적당한 시점부터는 후작이 아프다는 소식 정도는 들었다고 흘려도 될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암묵적으로 입을 닫았다.
우리를 안내하기 위한 하인이 복도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방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아까 전에 하지 못한 생각에 잠겼다.
정보는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수많은 정보가 모이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추측이 아니라 예측 말이다.
그런데 정말 케르빈 제도에서 아무런 소식을 받지 않아도 케르빈 제도의 전투 상황을 예측해낼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세밀하고 방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정보망을 구축해야 하는 걸까?
그 정보들을 취합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그런 일을 인간의 머리로 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 마치 욕심이라는 개념이 없는 인공지능이 운영하듯이 지속된 은행이라는 단체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
어제 생각이 많아서 조금 늦게 잠이 든 탓인지 기상이 조금 늦은 모양이다.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깰 정도니 말이다.
아마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것이겠지.
“크흠, 지금 나가겠소.”
여운을 남기는 잠을 떨쳐내고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자, 남자 하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리안 상단장님, 후작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각하께서?”
“네. 지금 잠시 시간이 나신 거라서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조금 서둘러 주시지요. 시간이 이른 만큼 예에 어긋난 복장을 하셔도 괜찮다 하셨습니다.”
“알겠소, 간단히 옷 좀 입을 테니 내 일행들을 깨워주시오.”
“죄송합니다만 상단장님, 각하를 알현할 수 있는 사람은 상단장님 뿐입니다. 일행분들께는 따로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후작이 많이 아프다고 했지.
어쩌면 지금 날 부른 사람이 후작이 아닐 수도 있겠다.
상당히 긴장한 상태로 하인을 따라가자 자주 왔었던 접견실로 안내를 받았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있는데, 드디어 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멀쩡해 보이는 후작이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오게, 리안. 오래 기다렸나? 요즘 일이 조금 많아서 말이야.”
“아, 안녕하십니까, 후작 각하.”
뭐야?! 아파서 내일모레 하는 것 아니었어?
내가 말을 더듬은 것은 순전히 제먼 씨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