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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03화 (304/420)

303화. 후계자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이전과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후작.

평소와 다르게 회의용 테이블의 상석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전에는 늘 집무용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거나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얼굴이 너무 말랐다.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워서 환자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거진 광대뼈와 늘어난 주름으로 볼 때, 옷 속에 숨겨진 몸에도 지방과 근육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후작의 오른쪽에 중년의 남자가 앉아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고, 후작의 뒤에는 하인 복장의 두 남자가 시립해 있었다.

후작이 지금까지 나를 다른 사람과 함께 만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후작의 책상.

늘 위태로울 정도로 쌓여있던 서류들이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최근까지 후작이 크게 아픈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뭘 그렇게 서 있나? 이쪽으로 앉게.”

“네, 후작 각하.”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불쑥 말을 걸었다.

“자네가 리안 선장이군. 나는 라우반이라고 하네. 플라비아의 남작이지.”

“아, 처음 뵙겠습니다, 남작님. 작은 상선대를 운영하는 리안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구나. 라우반 스코타, 차기 스코타 후작.

늙은 스코타 후작보다 더 선이 굵고 강인하게 생긴 남자였다.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알고 뜯어보면 닮은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냥 딱 보자마자 두 사람의 혈연관계를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닮지는 않았다.

“흐흐흐, 일단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 알센더트라는 놈이 올린 보고서는 흠… 자네를 꽤나 싫어하는 것 같던데.”

알센더트 이 옹졸한 놈 같으니라고.

보고서를 도대체 어떻게 쓴 거야?

그래도 다행히 후작은 알센더트의 얄팍한 개수작을 이미 눈치챈 모양이다.

“먼저 케르빈 제도에 진입한 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작은 피식 웃었다.

“결국 자네가 다 했군. 고생했네. 내가 기대한 것보다 더 잘해주었어.”

“과찬이십니다.”

고개를 숙이며 슬쩍 후작의 표정을 살폈지만, 여전히 뭔가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분명히 후작의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 잘했어. 내가 보상을 약속했었지?”

“각하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라우반.”

“네, 후작 각하.”

나와 후작이 이야기하는 동안 마치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던 라우반이 후작의 말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세상에, 호칭이 ‘후작 각하’라니!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어?

말하는 투를 보면 무슨 군대 부관쯤 되는 것 같다.

하여튼 내가 놀라건 말건 라우반은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듯 유창하게 내게 말을 전했다.

“폰테 섬을 발견한 것이 선장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자네가 요구한 건,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어. 귀족도 아닌 자가 어떻게 영지를 소유하겠나?”

“남작님, 저는 어디까지나 섬의 이권에 대한 우선권을….”

“리안, 자리에서 일어나게.”

“네?”

“어서.”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던 남작은 갑자기 나를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내가 후작의 눈치를 살짝 본 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의 책상으로 가서 화려한 두루마리를 가지고 왔다.

설마, 아니지? 진짜?

내 앞에 선 라우반이 두루마리를 펼치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코타 후작령의 가신(家臣) 리안은 무릎을 꿇어라.”

내가 설마 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자 라우반이 두루마리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스코타 후작의 가신이자 용맹한 탐험가 리안은 밝혀지지 않은 북부 대륙으로 향하는 항로 탐색에 큰 공을 세웠으며, 끊임없는 탐험과 도전의 결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폰테 섬을 발견하에 왕국에 편입시켰다. 대 벨로키나 왕국의 국왕으로서 이를 치하하는 바이며, 그 공을 기려 리안을 남작에 봉하고, 스펜서라는 성을 하사한다.”

앞뒤 미사여구를 빼면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 리안 스펜서 남작이 되었다.

“구, 국왕 폐하, 만세.”

“스펜서 남작 리안, 자리에서 일어나게.”

“네, 남작님.”

내가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라우반은 묵직한 칙서(두루마리)를 내게 건네주었다.

“앞으로 이 칙서가 그대의 신분을 보장할 것이네. 고귀한 귀족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네.”

“가, 감사합니다. 남작님, 후작 각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사태에 대한 충격이 가시면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문득 지금의 거창해 보이는 보상이 어쩌면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평민이 귀족이 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몇 대를 귀족 가문에서 가신으로 봉사해도 남작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방에 널렸다.

하지만 영지도 없는 단승남작이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남작이랍시고 귀족 놀이 하면서 저택 짓고 유유자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

“사실 꽤나 곤란했었네. 멍청한 샌더슨 그놈이 대패를 하는 바람에 말이야. 의용 2함대의 활약과 폰테 섬이 아니었다면 꽤 귀찮았겠지. 크흠.”

내가 칙서를 받아들고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자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문장의 말미에 목소리가 급격히 갈라지더니 결국 기침을 내뱉자, 옆에 있던 하인이 거의 동시에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작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리안, 아니, 스펜서 남작. 그대가 내게 충성을 맹세할 때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물론입니다, 후작 각하.”

“좋아. 그 맹세를 잊지 말게. 그렇다면 그대의 충성은 보답을 받을 테니.”

“저는 후작 각하와 각하의 적법한 후계자에게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클클클, 눈치 하나는 쓸만한 친구라니까.”

느낌이 왔다.

후작은 진짜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펜서 남작, 그대를 폰테 섬의 총독에 임명한다. 본국이 노던테라를 공략하는 거점이 될 수 있도록 개발에 최선을 다하도록.”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일을 시켰으면 보상이 있어야겠지. 향후 10년간 폰테 섬에 조성되는 항구의 징수권을 위임하겠네. 또한 항구에 건설하는 기반 시설을 제외한 사유 재산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지. 이만하면 자네의 충성 맹세에 대한 보답으로 충분하겠나?”

“차고 넘칩니다, 각하.”

나는 이미 흥분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일단 주는 것은 받는다.

건강이 너무 급하게 나빠졌기 때문인지 후작의 계책치고는 허술했다.

듣는 순간 내가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정도로 말이다.

‘향후 10년’이라, 정말 웃기는 말이지 않나?

그럴듯한 항구를 짓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판이고, 항구를 다 짓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만 오가는 항구에 무슨 수입이 있겠어?

그렇다면 폰테 섬이 교역선이 오갈 만큼 매력적인 섬이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노던테라를 향하는 항로가 확보되지 않는 이상 폰테 섬은 외따로 떨어진 작은 섬에 불과했고, 특산품으로 생각하는 품목들은 있지만, 그 생산 시설을 만들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 모른다.

한 10년쯤 내 돈과 노력으로 항구를 지어놓으면 꿀은 다른 놈이 빨지 않을까?

그리고 ‘기반 시설을 제외한 사유 재산’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가 기반 시설이고 어디까지가 사유 재산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 하다못해 관습적인 기준조차 없다.

항구 시설뿐만 아니라 교역소, 상가 건물, 시장, 교역품 생산지를 기반 시설이라고 우기면 내가 무슨 수로 맞서겠는가?

법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되고 보호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작이 폰테 섬의 총독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한다는 것은 국왕으로부터 폰테 섬의 소유권을 받았다는 방증이다.

이 세상의 관습상 폰테 섬은 이제 후작의 영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내게 봉지를 주지 않았다.

내가 혼자 갖기에 섬이 너무 크다면 내가 손을 대고 있는 항구 인근만이라도 줄 법도 한데 말이다.

이 정도면 후작의 의도는 대충 알만했다.

나를 이용해서 폰테 섬을 개발하고,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를 찾는다.

그리고 그게 대충 완료될 때쯤, 나를 팽하고 다른 누군가를 그 섬에 앉히겠다는 뜻이지.

나에게 폰테 섬에 대한 권한을 다 주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모든 권리와 권한이 시한부인데다가 후작이 얼마든지 회수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그 후작이 지금의 후작이 아니라 다음 후작, 플라비아 남작인 라우반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재밌는 소문을 들었어.”

“네?”

“옛날에 발호했던 붉은모래 해적단이라고 아나? 자네가 배를 타기 전에 망해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겠지만, 꽤 유명했는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가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각하. 20년쯤 전에는 꽤나 유명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놈들, 일레드 왕국과 대차게 붙었다가 하루아침에 박살이 났었지.”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숨겨둔 보물창고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 혹시 들어봤나?”

“…네?”

“보물 지도니, 보물섬이니, 그런 이야기는 흔하다고 들었는데?”

“하하하, 그런 소문이야 늘 돌아다니지요. 다 헛소문입니다.”

“그런가? 그런데 말이야, 붉은모래 해적단 놈들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바람에 회수하지 못한 보물창고가 있다는 꽤나 신빙성 있다는 소문이란 말이네. 케르빈 제도의 한 섬이라던가?”

나는 순간적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후작은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그사이에 수십 번이나 결정을 번복하며 갈등하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품에 손을 넣었다.

제발 아니기를 바랬는데 후작이 가진 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이상 빨리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낫다.

“너무 기쁜 소식을 접해서 미처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각하. 죄송합니다.”

“응? 뭐가 말인가?”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내가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리자, 뒤에 시립하고 있던 하인 하나가 주머니를 잡아서 열어본 뒤, 내용물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능청스럽게 말하기는 했지만 기억하지 못하기는 개뿔, 이건 후작도 알고 나도 아는 웃기는 쇼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 준비한 뇌물이 워낙 묵직하니까 이번만큼은 이대로 넘어가주기를 바래야지.

“호오, 이게 뭔 줄 알고 내게 주는 건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말로만 들었던 고급 마정석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내게 그냥 주겠다?”

당연히 주기 싫다.

무려 8개나 되는 고급 마정석이다.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저것만 해도 최소한 중형 상선 한 척 값은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후작 각하께서 베푸신 후의에 비하면 아주 약소할 뿐입니다.”

“흐음, 이 마정석을 얻은 경위는 아까 이야기에서 빠진 것 같은데?”

“토벌대의 활동과 전혀 별개의 일이라서 따로 보고 드리려고 했습니다. 사실은….”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에른스트 갑판장님을 팔았다.

그 위치를 마치 갑판장님이 알려준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이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갑판장님뿐이니 진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클클클, 내막을 듣고 나니 더 이상하군. 그렇다면 자네에게도 꽤나 어렵게 얻은 물건인데 이렇게 쉽게 내게 넘겨도 되겠나?”

당연히 쉽게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 미리 준비한 다음 변명을 풀어 놓았다.

“저도 처음에는 욕심이 났습니다만, 돌아오는 항해 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도저히 잡음 없이 처분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른 하급 마정석들이야 어떻게든 처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고급 마정석들은 국가의 전략물자로 취급되는 것들 아닙니까? 괜히 욕심을 부리느니 각하께 맡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클클, 알겠네. 판단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고 해 두지.”

드디어 의심을 지운 듯한 후작의 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제가 급하게 오느라고 미처 챙기지 못했습니다만, 돌아가는 대로 그 동굴에서 잡았다는 괴수의 머리를 저택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괴수의 머리라, 그것 참 기대되는구만.”

하지만 기대된다는 말과는 달리 후작의 말에는 호기심이랄 만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크흠, 내가 요즘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침 식사도 함께하지 못하겠군. 이제 남작이 되었으니 언제 한번 날을 잡아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라우반, 나를 대신해서 스펜서 남작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거라.”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어우, 계속 들어도 라우반이 후작 각하라고 하는 건 정말 적응이 안 되는군.

“스펜서 남작, 이만 일어나지. 후작 각하께서는 다음 일정이 있으시네.”

“알겠습니다, 플라비아 남작님.”

“클클, 잘 가게, 리안 스펜서 남작.”

“...보중하십시오, 후작 각하.”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후작과 눈을 마주쳤다.

방금 전까지 형형하던 눈빛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순간 다 타버린 촛불의 마지막 불꽃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근본도 없고 허울뿐인 단승남작이라도 귀족으로 인정은 하는 것인지 라우반은 직접 나를 안내해서 처음 가보는 식당으로 향했다.

물론 식당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 식사는 급체 확정인 것 같다.

그래도 식당에 도착한 뒤에는 한마디를 해 주기는 했다.

“들지.”

씨발. 부담스러워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고.

이런 걸 보면 날 보자마자 같이 식사했던 발레리아 백작은 정말 털털한 귀족인 거다.

그래도 주인이 권하는 음식을 거부하는 것도 크나큰 무례라는 것 정도는 아는지라, 나는 억지로 스프와 빵, 양념 된 고기 등을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다.

하도 긴장해서 무슨 맛인지 느끼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내 미뢰들은 멘탈이 강한 모양인지 황당할 정도로 맛이 잘 느껴졌다.

에이씨, 사람 민망하게 왜 맛있고 지랄이람?

그런데 그렇게 한참 음식을 집어먹다 보니 라우반이 식사를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귀족들의 식사 예절에 어긋난 짓을 한 모양이다.

얼른 입에 있던 음식을 대충 삼키고 우유로 입가심을 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남작님. 제가 아직 예를 잘 몰라서 실례를 범한 듯합니다.”

“핫! 아니, 괜찮네.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 정도면 방금 전까지 평민이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예의 바른 식사 태도였네. 내가 괜히 그대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군. 편히 들게.”

아니! 그냥 잘못한 게 있으면 마음에 안 든다고 짜증을 내든가, 화를 내든가, 지적질을 하든가 하란 말이야!

밥 먹는 사람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식사 예절이냐?!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나는 잠시 음식을 뒤적거리다가 곧 식기를 놓았다.

“훌륭한 식사에 감사드립니다, 남작님.”

“급하게 준비하느라 마음에 미흡하지 않았나 모르겠군. 식사가 끝났다면 차나 한잔하겠나?”

“영광입니다.”

“흠, 차 대신 음료를 시켜도 되네만.”

“아닙니다, 저도 차향을 맡고 싶군요.”

내 대답에 라우반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설마 내가 평범한 입맛에선 쓰기만 한 차를 마시겠다고 할 줄 몰랐다는 것이겠지.

여러 가지로 재수 없지만, 사실 저런 모습이 귀족의 표준인 거다.

괜히 이런 사소한 문제로 스트레스받으면 나만 손해일 뿐.

잠시 후, 하인들이 테이블을 치우고 차를 내오자 우아한 모습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라우반이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의 건강이 좋지 않네. 이미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습니까? 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훗, 이미 알고 있군. 후작 각하 앞에서 자네는 내게도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었지. 지금도 그 맹세는 유효한가?”

“…저는 스코타 후작 각하께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후작 자리 꿰차기 전에는 나한테 집적거리지 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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