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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04화 (305/420)

304화. 리안 스펜서 남작

내 대답에 한동안 말없이 나를 보던 라우반이 말했다.

“폰테 섬에 갈 예정인가?”

“네. 그 전에 몇 가지 준비할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급한 일이 없다면 더 머물지 그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마굴(魔窟) 같은 곳에 더 머물라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를 굳이 더 머물라고 하는 것은 대충 이유를 알겠다.

그런데 지금 그런 말을 해야 할 정도로 후작가의 후계 구도가 불안정한가?

후작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전에 그 자식들에 대해서 살짝 알아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후작의 나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유사시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장남인 라우반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플라비아 지방을 영지로 하는 남작위도 가지고 있으며, 거의 5년 이상 후작을 대신해서 스코타 성을 관할하며 후작령을 전반적으로 다스려왔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후계 구도는 명확하다.

애초에 스코타 후작이 해야 할 기본 업무를 5년 이상 시킨 것보다 더 강력한 후작의 후계 의지 표현이 또 있겠는가?

그나마 경쟁상대가 될 수 있었던 두 살 터울의 차남은 이미 10여 년 전에 요절했다고 하고, 그 아래 장녀는 엘리안 왕녀님의 모친이자 프레티아 왕국의 전대 왕비, 메릴린이다.

마지막으로 삼남이 있기는 한데, 나이 차가 좀 나는 편이다.

이제 막 20살 초반이나 되었을 것이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아직 공부 중이라고 하던데, 따로 받은 작위라거나 재산 같은 것은 없는 모양이다.

힘도, 세력도 없고, 물리적으로도 후작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사실상 위협적인 상대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우반이 불안할 일이 뭐가 있지?

“모르는 척은 관두게. 스코타 가문의 가신으로서 남작 역시 새로운 스코타 후작이 탄생하면 다시 충성 맹세를 해야 할 것 아닌가?”

뭐 이런 불속성 효자 놈이 다 있지?

그러니까 지금 자기 아빠가 곧 죽을 거라고 저렇게 태평하게 말하는 거야?

지금까지 두 사람의 상황을 보면 그리 애틋한 부자 관계는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이런 패드립은 좀 그렇다.

“물론입니다, 남작님, 그런데 아직 후작 각하께서는 정정하시더군요.”

귀족적인 생각으로는 라우반의 말이 백번 옳다.

그리고 가신이라면 모름지기 새 후작의 등극을 가장 가까이에서 축하하고 눈도장을 찍어서 너 많은 권력과 권한을 위임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법이지.

그런데 나도 꼭 그래야 하나?

내 힘과 가치는 후작의 신뢰와 후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끄는 선단에서 나온다.

물론 새로운 후작이 등극하면 형식적으로 늦게라도 와서 충성 맹세야 해야겠지만, 그게 내 황금 같은 시간을 갈아 넣어가며 기다릴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정하다? 정말 그리 생각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남작님. 혹시 후작 각하께서 제가 모르는 병이라도 앓고 계십니까?”

“으음…. 아니네. 그보다 자네가 조나단을 안다고 하던데?”

조나단이 누구더라?

“조나단…… 말입니까?”

“자네의 배에 함께 탄 적이 있다고 들었네. 시논 총독에게 다녀올 때 말이야.”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생각났다, 그 재수 없는 놈.

요즘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죽었나 했더니 죽지는 않은 모양이군.

설마 그놈이랑 또 뭔가를 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후작 가문 산하의 티벡 선단에서 일하고 있지. 정확하게 말하면 거의 선단을 장악한 모양이야. 복귀 명령에 불복하는 중이지.”

어? 뭘 장악해?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나?

조나단은 잘해봐야 30대의 청년이다.

심지어 나를 만나기 전에는 배에 타 본 적도 없다고 했지.

그게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선단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을 수가 있나?

비록 후작이 좀 아끼는 녀석인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선단을 만들기 위해서 했던 노력과 시간을 생각하면 좀 허무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티벡 선단이라면 후작가 산하의 3개 상선단 중 명실공히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선단이다.

대충 듣기로는 소속된 선박만 8척, 총배수량은 5,000톤이 넘는다고 하던데.

아, 갑자기 현자타임이 세게 오네?

내가 평생 일군 것보다 더 큰 선단을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갖게 된 조나단에 대한 질투와 자괴감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문득 라우반의 다른 말이 생각났다.

분명히 복귀 명령에 불복하고 있다고 했지.

미친놈인가?

고작 8척의 상선으로 후작 가문에 반기라도 들겠다는 거야?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 정도면 반역 아닙니까?”

“뭐, 비슷하네.”

“그놈들은 도대체 뭘 바라고 그런 무모한 짓들을 벌인 겁니까?”

상황을 주도한 놈이 조나단일지는 몰라도, 이렇게 되면 티벡 상단 전체가 반란을 일으킨 꼴이 되어버린다.

능력이 조금 있는 것 같기는 했다지만 조나단 이 새끼, 도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거지?

“자네가 그것까지는 알 것 없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걸세. 조나단 그놈, 혹시 만나면 죽여버리게. 그리고 티벡 상단에는 당장 델라 항구로 복귀하라고 전하면 되겠지.”

“그게 후작 각하의 뜻입니까?”

“…내 뜻이 곧 후작 각하의 뜻이네. 그리고 자네도 그놈을 꽤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이것 봐라?

아직 후작위를 넘겨받기도 전에 처음 보는 내게 살인 청부를 한다고?

냄새가 나는데?

나는 속마음과 다르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티벡 상단과 마주치게 되면 남작님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만 일어나지.”

내가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아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라우반의 눈빛이 살짝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내 방에서 앞에서 서성거리던 아인델프와 베기어가 빠른 걸음으로 마중을 나왔다.

“제독! 어떻게 된 겁니까?”

“걱정했습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걱정 말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준 뒤 나를 안내하던 하인에게 물었다.

“내 일행들에게 상황을 알리지 않았나?”

이전과 다르게 더 이상 하오체를 쓰지 않았지만, 하인은 더욱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후작 각하를 접견하신다고 이야기는 전했습니다만 대공자님과의 식사에 대해서는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쯧,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스펜서 남작님.”

“가보게.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지.”

“네.”

하인은 대답은 했지만 여전히 조용히 나를 따라왔다.

아마 문 앞에서 대기할 모양이다.

“다들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지.”

내가 문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말하자, 그들은 그제야 허겁지겁 나를 따라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아인델프의 질문이 날아왔다.

“제독? 제가 지금 뭔가 잘못 들은 겁니까? 남작님이라니요?”

“저는 똑똑히 들었습니다, 제독을 보고 남작님이라고 하던데.”

베기어 함장까지 의문을 참지 못하고 가세했다.

“흥분하지 말고 일단 앉지. 사실 나도 지금 좀 얼떨떨하거든.”

“헉! 그럼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란 말입니까?!”

“갑자기 남작이라니 이게 무슨….”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두 사람을 일단 자리에 앉힌 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니, 나는 나름대로 차분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제대로 다 전달된 건지 잘 모르겠다.

아인델프가 흥분해서 날뛰는 것을 막느라고 힘들었거든.

“…귀족이라니 정말 대단하군요.”

“그래봐야 단승남작이라 별것 없어. 진짜 귀족들에게는 귀족 취급도 못 받는 것은 물론이고 혜택도 없지.”

이미 몇 번째인지도 모를 감탄을 터뜨리는 베기어에게 내가 겸양을 떨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인델프가 나섰다.

“물론 제독 말씀대로 귀족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만, 평민들로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귀한 분이 되신 것 아닙니까? 별게 아니라뇨!”

“아인델프 선장의 말이 맞습니다. 최소한 항구에서 항구관리관 따위가 개수작을 부릴 여지도 없고, 치안관이니 하는 놈들도 함부로 나대지 못할 테니까요.”

오, 그렇구나?

내가 계속 폰테 섬에 꽂혀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계속 뱃놈들과 항구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런데 뱃놈이나 항구 사람들은 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으니, 사실상 항구에서 내가 제일 ‘귀하신 분’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항구관리관도 아닌 놈들이 관리관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은 볼 일이 없겠군.

“이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네요.”

“그런데 저희는 언제까지 이곳에서 기다립니까? 오늘 아침에 후작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나요?”

“특별히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대충 아무 때나 출발해도 될 것 같아. 잠시만.”

나는 역시나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하인을 불러들였다.

“혹시 내 거취에 대해서 후작 각하께서 별도로 말씀을 하신 것이 있나?”

“집사장이 후작 각하께서 남작님께 드리는 포상금과 섬 개발에 도움이 될 만한 하사품을 준비 중입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포상금과 하사품이면 가치가 상당하겠는데?

***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후작이 준비한 포상금과 하사품의 양은 엄청났다.

역시 후작쯤 되면 스케일이 우리 같은 잔챙이들과 다른 모양이다.

“건설용 철제 자재들과 도구들입니다. 개인이 급하게 대량으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라서 각하께서 미리 준비하셨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후작 각하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하게.”

“물론입니다, 스펜서 남작님.”

“그런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신다는 것은 폰테 섬에 대한 정보를 일반에 공개해도 된다고 해석해도 되나?

“네, 이미 한 달 전에 폰테 섬과 인근 100km 이내의 모든 도서 지역을 벨로키나 왕국의 영토로 선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달 전이면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뜻이군.

예상보다 조금 빨리 공개된 느낌은 있지만,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있다.

일단 이주민을 모으는 것은 더 수월해질 테니까.

개발이건 뭐건 일단 인구를 늘리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대형 마차 네 대 분에 이르는 엄청난 자재가 준비를 마치자 한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렌 경.”

“리안… 후우, 이제 이렇게 부르면 안 되겠군요. 스펜서 남작.”

갑작스러운 알렌의 존댓말에 살짝 당황했다.

물론 알렌은 이제 기사도 뭣도 아니니까 경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라서 내게 존대를 하는 것이 옳기는 한데, 세상일이 그렇게 원칙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실 라우반이나 후작 역시 나와 동등한 귀족이니까 상호 존칭을 해야 맞지만, 그들은 계속 내게 평대하지 않았던가.

뭐, 그 사람들이 존대를 하면 그편이 더 이상할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 좋아 같은 귀족이지, 후작 가문과 나 사이는 대기업 회장님과 인턴사원 정도의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니 말이다.

“아, 그러니까, 네, 아니아니, 경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상대가 기사도 귀족도 아니라고 갑자기 평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애매한 태도로 이상한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말만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중요한 짐이 많으니 항구까지 남작을 호위하라는 후작 각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

우리가 복귀하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뜬금없이 내가 귀족이 되어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갔는지 델라 항구의 항구관리관도 인사를 하러 달려왔다.

내가 항구관리관의 입에 발린 아부를 듣고 있는 동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적 과정까지 세심하게 살피던 알렌이 내게 다가왔다.

“스펜서 남작, 하사품은 무사히 옮겼으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요.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은데요.”

“돌아가는 마차는 비어있으니 말을 재촉하면 너무 늦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뭐지? 이 사람 뭔가 전과 달라진 것 같은데?

애써 숨기려 하고 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에 불안감과 은은한 분노가 얼핏 비친다.

역전된 나와의 상하 관계가 좀 배알이 꼴리는 건가?

그렇게 알렌이 빈 마차와 호위병들을 이끌고 떠나고, 가지 않겠다는 항구관리관을 보낸 뒤에야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간부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없다 보니 다들 얼굴이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가장 큰 화제는 스펜서 남작이 된 나였고, 두 번째는 폰테 섬의 개발 계획이었다.

“엄청 큰 조선소를 짓는 겁니다! 드웰 아저씨를 납치해서!”

우르타 저놈, 술 취해서 진짜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만.

물론 우르타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반응이 재밌으니 대거리를 해주는 것뿐이지.

그나저나 이 중에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 배에서 일어난 일을 미주알고주알 후작에게 일러바치는 녀석 말이다.

우르타와 네이선, 오펜은 일단 제외했다.

이 녀석들에게까지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지 않겠어?

아인델프와 발드 역시 제외했다.

아인델프는 말할 것도 없고 발드 역시 내가 아니었으면 절름발이 거지가 되었을 운명이다.

설마 저 두 사람이 배신하지는 않았을 거다.

당연한 말이지만 베기어와 드라이언의 승조원도 제외다.

베기어가 나에게 합류한 것까지 후작의 계획이라면, 그런 괴물과 싸우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쪽이 속 편하다.

그리고 선박과 항해 정보에 접근하기 힘든 조리장들도 제외했다.

저들은 후작이 알고 있던 수준의 정보를 애초에 알지도 못한다.

그러면 남는 사람이 일등항해사 그레이그와 탈리스, 이등항해사 에오멕과 바우어, 삼등항해사 크리스티앙, 갑판장 왓킨과 모르아, 돌격대장 행크와 발타, 포술장 클라톤 그리고 회계사 게론드다.

하나씩 꼽아보니 은근히 많군.

후작의 추천으로 합류해서 의심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생각에 매몰되지는 않기로 했다.

솔직히 후작 정도라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을 매수해서 첩자로 삼았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똑, 똑, 똑.

“누구야?”

비록 회의 시간은 아니지만 네 선박의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는 만큼 노크를 할 사람은 선원들밖에 없었다.

“…….”

“뭐야? 누구야?”

“…….”

내가 두 번이나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자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씩 입을 닫기 시작했다.

긴장감을 살짝 끌어올린 나는 이미 일어서서 나를 바라보는 네이선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모두가 주시하는 가운데 네이선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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