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06화 (307/420)

306화. 그녀의 계획

엘리안 왕녀에게 가기 전에 조리장 비에론을 찾아 조리실로 내려갔다.

왕녀의 모습이 너무 짠해서 일단 뭐라도 먹이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숙소에 없던 비에론이 이 시간에 조리실에서 뭘 하나 했더니, 내가 내려가자마자 따뜻한 수프를 내어주었다.

“어떻게 알았어?”

약간 민망해진 내가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고프고 지친 자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따뜻한 스프 아닙니까?”

왠지 내 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더 창피해졌다.

“음, 조리장은 궁금하지 않아?”

솔직히 그렇잖아.

미모의 귀한 집안 아가씨가 한밤중에 불쑥 나타난 거다.

그게 궁금하지 않다면 뱃사람도 아니지.

하지만 비에론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전 항해사도 갑판장도 아닙니다. 항해 중에 남들보다 조금 더 여유 있게 먹는 것과 선장님이 주시는 넉넉한 급여에 만족하고 있죠. 그 여성분이 앞으로 항해에 무슨 영향을 끼치건, 굳이 제가 알 필요가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다들 궁금하지 않을까 해서….”

“뭐, 궁금한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게 저는 아닙니다. 식기 전에 빨리 가지고 가시죠.”

“어? 어, 고마워, 조리장.”

쟁반에 스프를 받쳐 든 나는 부선장실 앞에서 살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 흠흠, 아가씨, 리안입니다.”

물론 주변은 충분히 확인했고 들을 사람은 없지만, 괜히 ‘왕녀’라느니 하는 말은 꺼내지 않는 것이 좋았다.

당연히 선원들에게도 그녀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하는 게 제일 좋겠지.

아무리 후작이라도 간부 중에 첩자를 둘, 셋씩 꽂아 넣지는 못했겠지만, 그것이 선원 중에 첩자가 없다는 뜻은 아니니 말이다.

딸깍.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살짝 드러나는 하얗고 작은 얼굴.

가까이에서 보니 피부도 꽤나 거칠어진 것이 상당한 고초를 겪은 것 같았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들어오게.”

그녀를 따라 들어간 부선장실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깨끗했다.

힘든 일을 겪었던 만큼 침대의 이불 정도는 흐트러졌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고맙군.”

그녀에게 수프를 내주었지만, 그녀는 감사 인사만 할 뿐 차분하게 앉아있었다.

뭐지? 배가 안 고픈가?

“어, 안 드십니까? 따듯할 때 드시는 편이….”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아차, 귀족 여성이 외간 남자 앞에서 식사를 하기에는 좀 그런가?

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례를,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아니, 그보다 조금 있다가 돌아오겠습니다.”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뒤로 돌아서는데, 붉은 얼굴과 달리 차분한 엘리안 왕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게. 식사야 조금 늦는다고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잖나? 선장은 선장뿐만 아니라 수십, 이제 수백 명의 목숨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닌가? 나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하겠지.”

“…….”

말은 바른 말이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런 무모한 짓을 벌였다는 것이 아이러니일 뿐이지.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내가 도로 자리에 앉자, 쟁반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엘리안이 미간을 모으며 말을 꺼냈다.

“다시 한번 미안하네. 자네 말대로 지금 당장 나를 후작 저택으로 돌려보낸다 해서 이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자네가 그리한다 하더라도 내 원망하지는 않겠네.”

“후우….”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내가 이 대책 없는 아가씨에게 헛바람을 넣어 준 것이 문제였을까?

“시간이 얼마나 있습니까?”

약간의 원망을 담아서 머리와 꼬리를 떼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똑똑하기는 정말 똑똑한 아가씨인데 말이야.

“길면 이틀, 짧으면 반나절일세. 나를 데리고 온 그가 급히 돌아간 이유이지.”

그래, 어쩐지 알렌 그 사람 뭔가 어색하더라니.

일부러 알렌이라는 이름을 내뱉는 것조차 피한다는 것은, 말이 새는 것을 왕녀님도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왕녀님도 목숨을 걸었다더니 정말 독한 짓을 했구나 싶었다.

결국 알렌 경의 암묵적이거나 전폭적인 지지 하에 하사품에 섞여서 들어왔다는 말이 되는데, 내가 대충 둘러볼 때만 해도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반나절 이상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 불편한 자세로 있었다는 말이잖아.

설마 몸을 저렇게 바짝 마르게 한 것도 오늘을 대비한 것은 아니겠지?

“그분이 도운 것입니까?”

내 말에 왕녀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내 그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아 괴롭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네. 그래서 이번 일이 벌어져도 그가 살아날 방도를 마련했지만 어찌 될지는 모르지….”

상식적으로 그녀에게 헌신하던 알렌이 외부 일정을 다녀온 후에 왕녀가 실종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대부분의 의심은 알렌에게 쏠릴 것이다.

그리고 나도… 에에엑?!

왕녀와 접점을 가진 사람, 알렌이 최근에 방문한 사람, 사람을 몰래 옮겨주는 일(밀항)에 특화된 사람, 전부 다 나잖아?!

머릿속에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는 것을 확인한 내가 한마디 하려는데, 이전과 달리 그녀가 나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알렌 경이 나에게 접견을 신청할걸세. 내 전담 시녀는 이틀 정도는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조치를 해 놨으니 다른 시녀가 나를 깨우러 오겠지. 만약 그녀가 내 부재를 알아챈다면 내일 아침까지, 그렇지 않고 알렌 경에게 내가 쉬는 중이라고 전하면 다음 날까지도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숨길 수 있을 거야. 알렌 경도 어느 정도는 의심을 벗을 수 있겠지.”

범행 사실이 들통 날 확률이 높은 짓을 스스로 한다면 확실히 혐의가 약간 옅어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확실히 부족할 텐데?

“내 부재가 알려지면 알렌 경은 자네를 가장 먼저 의심하는 척 할 거야. 빠르면 내일 오전, 늦어도 다음 날 아침 정도에는 이곳에 도착하겠지. 알렌 경이야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장본인이니 상관없지만, 후작 가문에서 따로 파견하는 인사가 있을 걸세. 그는 반드시 조심하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상황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주셨으니 지금부터 준비하면 잠깐은 몸을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배에서 내리게만 하면 배를 백날 뒤져봐야 그녀가 발각될 리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잠깐’이라는 말에 강세를 주었다.

델라 항구는 스코타 후작의 텃밭이다.

오트라스 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조차도 스코타 후작의 눈을 피하기 쉽지 않은데, 배를 떠나서는 얼마나 그 눈을 피할 수 있을까?

당장 오트라스로 쳐들어온 알렌과 그 일행들의 눈 정도는 속이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지 않는가.

후작에게 엘리안 왕녀님은 정치적 가치가 상당한 손녀딸이다.

지금 당장 못 찾았다고 ‘아, 가출했네.’라면서 포기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딱 한 번, 이번 한 번만 피하면 될 걸세.”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ㅈ, 아니! 할아버님이 아가씨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없습니다!”

나는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후작이라는 말 대신 할아버님이라는 단어를 썼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후작께서는 오래 살기 어려우실 거야. 저택의 하인과 집사는 플라비아 남작의 사람으로 거의 바뀌었고, 남작은 나에게 별 관심이 없네. 그래서 이번 일도 강행할 수 있었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라는 사람의 정치적 가치가 예전 같지 않아서 감시가 소홀했네.”

사람에게 정치적 가치니 뭐니 하는 것은 웃기기는 한데, 원래 귀족 사회라는 것이 좀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후작이 오늘내일한다고 해도 프레티아 왕국의 왕녀라는 그녀의 정치적 가치가 흔들리지는 않을 텐데?

“그럴 리가요?”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자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내전이 벌어진 나라의 유일한 공주이자 내전을 벌이는 두 세력이 서로 가지고 싶어 하는 결혼 적령기의 처녀, 그랬기에 가치가 있었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 내전을 끝낸 데이먼은 나를 송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어. 아마 생색내기 수준의 보호비를 제시했겠지.”

끝내 제국을 등에 업고 반란을 성공시킨 데이먼 왕자의 요구는 사실 당연한 부분이었다.

잃어버린 누이를 그동안 지켜줘서 고맙고, 그동안 신세 진 비용을 지불할 테니 내 누이를 돌려달라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그녀의 용도를 이리저리 재다가 결국 써먹지 못한 스코타 후작 입장에서는 결코 응하기 어려운 제안이겠지만 말이다.

“후작이 응할 리가 없습니다. 이미 국내에서도 왕녀님을 원하는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말꼬리를 흐렸다.

정략결혼을 포함해서 남에게 강요당하는 인생이 싫다고 가출까지 감행한 아가씨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다.

그리고 정략결혼 상대가 정상적인 남편일 확률은 주사위를 여섯 번 굴려서 모두 6이 나올 확률쯤 되지 않을까?

내가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자 그녀는 슬프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데이먼, 그 아이는 날 송환하지 않으면 왕실에서 제명하겠다고 했네.”

뭐지? 이 더럽고 치사한 새끼는?

프레티아 왕국의 왕녀라는 타이틀을 떼면, 그녀의 정치적 가치는 상당이 떨어진다.

물론 벨로키나 왕국의 실세인 스코타 후작의 외손녀라는 것이 만만한 타이틀은 아니지만, 그조차도 조만간 조카딸이 될 예정이다.

평소에 예뻐하지도 않았고, 얼굴도 몇 번 본적 없는 조카딸의 정치적 가치라.

심지어 플라비아 남작에게는 딸이 셋이나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플라비아 남작이 후작위에 오르면 나는 바로 송환되겠지. 그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전도 끝났고, 이복동생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누나를 찾던 동생이 왕이 되면 그럭저럭 살만한 것 아닌가?

송환되면 그녀는 다시 당당한 일국의 왕녀가 되는 걸 텐데.

“데이먼은 이번 전쟁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

제국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수많은 귀족들까지 그의 진영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었다.

전쟁이 끝난 지금 제국의 요구사항은 아마 만만치 않을 거다.

그리고 4왕자를 지지해 준 귀족들 입장에서도 자기 가문의 운명을 건 대형 배팅이었을 테니 원하는 보상이 상당히 크겠지.

“아, 그래서….”

여기나 저기나 그녀는 상품처럼 팔려 갈 입장인 것이다.

나는 마른세수를 한번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현 후작이 아가씨에 대한 추가 수색 명령을 내리기 전에 사망할 경우 후작가에서는 아가씨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마도 여기에서 수천 km나 떨어진 외딴 섬에까지 사람을 보내서 수색할 정도는 아니지 않겠나? 플라비아 남작에게는 이제 결혼할 나이도 지난 나 따위보다 후작위를 잇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까.”

“후, 알겠습니다. 식사하시고 잠시 쉬고 계십시오. 시간이 촉박하니 계획이 준비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음, 고맙네.”

내가 원래 굉장히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호구 같은지 모르겠다.

***

그녀가 머물고 있는 부선장실에서 나온 나는 내 방이 아니라 우르타의 방을 향했다.

이놈들이라면 분명히 아직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거다.

똑, 똑.

“둘 다 나와.”

노크를 하고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잘생긴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뭐야? 뭐야? 이제 어떻게… 우와아악!”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뭔가를 묻던 우르타의 얼굴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문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조금 더 열리면서 손을 터는 네이선이 걸어 나왔다.

“설마 죽였냐?”

“어? 죽이긴 뭘 죽여? 그보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데?”

“들어가, 들어가.”

네이선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가자 고양이 리아를 안고 씩씩거리는 우르타가 보였다.

이 정도면 그냥 네이선을 방에 들어오지 못 하게 하라고, 멍청아.

“왕녀님을 오늘 동이 트기 전에 배 밖으로 빼서 숨겨야 해. 방법을 좀 생각해보자.”

“그냥 변장시켜서 여관에 넣으면 안 될까?”

우르타가 바로 해맑은 소리를 지껄였다.

그녀의 체격으로 볼 때 남장은 애저녁에 물 건너갔고, 여자라면 이 시간에 항구 어디를 가도 낯선 여자라는 타이틀을 벗기 힘들다.

거기에 심지어 나 혹은 우리 일행들(선원 포함)과 함께 다니는 것이 목격되면 그녀의 가출이 밝혀지는 순간 우리는 전멸 확정이다.

“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니까. 아무도 몰라야 해.”

우르타를 가만히 지켜보던 네이선이 제안했다.

“으음, 거긴 어때? 릴리안 아가씨네. 거기 가게도 크다던데, 여자 점원들도 많지 않을까? 릴리안 아가씨를 불러서….”

말을 끊은 네이선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조금 있으면 새벽닭이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늦은 새벽이다.

이 시간에 결혼도 안 한 아가씨를 불러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런데 나 지금 이게 맞기는 한 건가?

함선장들은 이미 각 함선으로 돌아가 부하 단속에 여념이 없으니 불러오기 좀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왕녀님의 정체를 ‘특별 의뢰를 위해 몰래 방문한 아가씨’로 알고 있어서 함께 이야기하기가 그랬다.

그러다 보니 네이선과 우르타랑 같이 머리를 짜내는 중인데….

나 혼자 하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