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그녀의 재능
짝!
갑자기 우르타가 박수를 치며 벌떡 일어섰다.
“뭐, 뭐야?!”
“좋은 생각이 났어!”
“또 쓸데없는 말이기만 해봐.”
네이선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코를 하늘로 치켜든 우르타가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이 시간에 여자가 돌아다니면 이상하지.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
왠지 그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일단 그의 말을 끊었다.
예상하는 그 말이라면 나랑 네이선 앞에서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아니지?”
“아니라고 해라, 진짜 너 오늘 죽는 수가 있다?”
우르타는 살기 어린 네이선의 반응에 찔끔했지만, 금방 표정을 고치며 뭐가 문제냐는 듯이 금단의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창녀들을 불렀다가 그사이에 왕녀님을 끼워서 내보… 꾸에에엑!”
“죽어! 오늘 그냥 죽자, 어차피 너 때문에 오래 살지도 못할 것 같으니 속 편하게….”
“아아악! 그만 때려, 힘만 쎈 멍청아!”
“아얏! 눈, 눈! 이 자식아, 손 치워!”
후우, 이 멍청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엉겨 붙어서 굴러다니기 시작한 두 사람을 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만! 도대체 언제까지 애처럼 굴 거야?! 특히 네이선 너는 아들까지 생겼….”
내 말에 움직임을 멈춘 두 사람이 슬쩍 떨어지는데, 옷이 말려 올라가며 반쯤 드러난 네이선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는 다 아물었다지만 여전히 엉망진창으로 부풀어 오르거나 검붉은 흔적이 남은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얼마 전에 돌격대장 행크의 고백을 들은 나에게는 더욱 아픈 기억이다.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네이선이 각오하고 벌인 일이고, 당시로서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네이선이 빈사 상태까지 갔던 일이었다.
당연히 쉽게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반대로 굳이 상기시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우리 앞에서 창녀를 배로 끌어들이자는 이야기를 꺼내?
백번 양보해서 그게 정말 효과가 있다면 못 할 것도 없다.
네이선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다 죽는 것보다는 그냥 좀 미안한 게 낫지.
그런데 간부들이 모여서 한참 놀던 타이밍도 아니고 이제 와서 창녀들을 부른다고?
네이선이 왜 채찍을 맞았는지 아는 선원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둘째치고 그 자체가 의심스럽잖아.
그러니까 우르타 이 새끼, 하지 말라니까 괜히 말을 꺼내서 진짜.
***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더 좋은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고, 뭔가를 꾸미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오트라스 선내에 준비해둔 비밀공간이 있기는 한데, 대부분은 고귀한 아가씨에게 권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게다가 왕녀님이 이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세하게 다 수색한다면 아무리 교묘하게 숨긴 비밀공간도 걸릴 확률이 너무 높았다.
“정말 그렇게만 전하면 돼?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해?”
“그럼 진짜 마지막 수단을 써야지….”
“마지막?”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움직여! 시간 없다니까?”
내가 시킨 일을 가지고 계속 의문을 표하는 우르타를 쫓아 보내고, 네이선의 어깨를 두들겼다.
“네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부탁한다.”
“으음, 그런데 이거 정말 먹힐까? 무엇보다 회계사가 굳이 이 일에 개입할 것 같지 않은데….”
사실 나도 그게 좀 걱정이었다.
지금 게론드의 선단에서 위치는 붕 떠 있는 상태다.
명시적으로 계약종료에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벌써 며칠째 오트라스에 복귀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은행 업무도 나와 오펜이 떠맡고 있고 말이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이 기회에 게론드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뭐, 아쉽기는 하지만 내가 그를 붙잡을 염치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게론드가 굳이 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이 부탁은 게론드뿐만 아니라 연인인 시니아 양과 오스팔트 가문의 도움까지 필요한 것이었다.
아무리 결혼은 기정사실이라지만, 결혼도 하기 전에 처가에 큰 민폐를 끼치는 일인데 어떤 예비 사위가 좋아하겠어?
괜히 일도 성사되지 않고 오스팔트 가문의 호의마저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란데르 씨가 새로운 회계사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네이선이 내가 시킨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떠나고, 나는 엘리안 왕녀가 머물고 있는 부선장실로 향했다.
“리안 선장, 어찌 되었나?”
문을 닫기 무섭게 물어보는 엘리안 왕녀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대충 동이 트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두 시간 정도, 일이 틀어져서 급하게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그녀를 찾는 수색대가 출발했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나 역시 마음이 급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인사도 생략한 채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가 꾸미는 일이 잘 해결되면 아가씨 한 분이 시녀 여럿과 배를 방문할 것입니다. 그때 시녀용 여벌 옷을 가지고 오라고 할 테니 그 옷으로 갈아입고 그녀를 따라가십시오. 오래 숨어있을 곳은 아닐지 몰라도 당장 이 오트라스에 대한 수색을 피할 수는 있을 겁니다.”
내 말에 안색을 굳힌 그녀가 물었다.
“그렇다면 배에 다시 어떻게 돌아오겠나?”
“왕녀님을 모시고 갈 아가씨의 가문과 연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번 고비만 넘기면 어떻게든 길이 생길 겁니다.”
그녀를 오스팔트 가문에 맡겨둔다는 선택지는 좋지 않았다.
오스팔트 가문에 너무 큰 부담인 데다가,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상회인 만큼 소문이 나거나 밀고자가 생길 확률도 너무 높았다.
그리고 애초에 델라 항구에 머무는 기간을 최소로 하는 것이 왕녀님에게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무조건 이번 출항에 그녀를 데리고 떠나야 한다.
“그보다 앞으로 시녀 역할을 좀 해주셔야 하는데….”
“이미 내 신분을 다 포기한다고 하였네. 시녀 역할이 무슨 문제겠나? 그보다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 지금 준비하는 일이 틀어지면 어떻게 할 셈인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만, 마지막 수단 정도는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그녀를 화장실 밑에 숨기면 된다.
여벌 옷도 없는 그녀에게 그곳에 들어가라고 말할 용기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다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해야겠지.
제발 우르타 이놈이 잘 해줬으면 좋겠다.
엘리안 왕녀와 말을 맞추고 난 뒤, 금고 앞에 서서 상황이 진행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갑판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약간 빠른 발소리와 함께 네이선과 열댓 명의 선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자다 깼는지 차림새와 표정이 엉망진창이었다.
내 앞까지 다가온 네이선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보고했다.
“현재 선내에 있는 모든 선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좋아. 거기 둘.”
나는 먼저 얼굴이 눈에 익은 돌격대원 두 사람을 지목했다.
“너희는 여기에서 금고를 지켜. 내가 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가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두 사람은 믿음직스럽게 대답을 마쳤고, 나는 나머지 인원을 세다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좀 모자란데….”
“그렇다면 제가 현문을 맡겠습니다.”
“음, 그래. 어차피 나도 회계사를 기다려야 하니 나와 갑판장이 현문을 맡도록 하지.”
천연덕스럽게 네이선과 준비된 대화를 주고받은 나는 두 사람을 선수 방향에, 두 사람은 선미 방향에, 두 사람은 하부갑판에 배치했다.
“회계사 외에 다른 인원이 접근하면 무조건 경고 울려. 알았어?”
“네, 선장님.”
내 지시를 받은 선원들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비장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던 나는 냉정하고 화가 난 표정을 연기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몰래 오트라스를 이탈하려는 인원이 있다면 무조건 저지하되, 정 안되면 사살해도 좋다.”
이미 잠은 다 달아난 선원들 사이에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마 엄청난 일이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겠지.
실제로 엄청난 일이 진행 중이기는 한데, 아마 이 친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게 될 거다.
“자, 나머지 인원은 개인실로 간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는 어떤 간부도 선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
“네?”
“선장님, 그게 무슨…?”
이번 명령은 약간 의외였는지 몇몇 선원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선상 반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선장이 간부 전원을 구금(?)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음, 하루에 두 번이나 이런 꼴을 당하면 간부들 기분이 좋지야 않겠지만, 지금은 일일이 하나씩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시간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밤은 좀 시끄러울 수 있다는 말 정도는 미리 해놨으니까, 나중에 해명하면 수습 정도는 가능할 거다.
일등항해사 그레이그가 꽤 화를 낼 것 같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오늘 밤에는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 간부들도 자기 선실에서 대기한다. 너희들끼리도 혹시라도 이탈하려는 녀석 있으면 선 조치, 후 보고해도 좋아.”
“…….”
내 말이 끝나자, 비장하기는 하지만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는 명령을 받아 든 선원들이 빠른 걸음으로 흩어졌다.
***
오트라스가 정박한 부두의 안쪽에서 몇 개의 불빛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그렇게 선미 쪽을 지키는 선원들에게서 먼저 신호가 오고, 잠시 후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네이선이 작게 속삭였다.
“성공한 모양인데?”
“지금부터 시작이야. 잘해라.”
“내가 이쪽은 또 전문이지!”
아니, 네 전문은 연기가 아니라 칼질이잖아?
잠시 후 가까워진 일단의 무리들은 우르타를 선두로 하고 있는 8명이나 되는 대인원이었다.
우르타는 물론 게론드와 건장한 호위 두 명, 가볍게 차려입은 시니아 양과 시녀로 보이는 세 여자였다.
“선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늦은 시간에 급히 불러서 미안하네, 게론드 회계사. 그런데 시니아 양은 왜…?”
나는 시니아와 시녀들을 보며 약간 당혹스러운 듯한 말투로 물었다.
물론 그녀들을 데리고 오라고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리안 선장님. 게리가 작성한 장부에 의혹이 있으시다구요?”
말하는 내용만 보면 정중한 것 같지만 표독스럽게 쏘아보는 표정이 아주 리얼했다.
이 연극의 주역인 그녀가 상황을 모를 수 없는 만큼 진심은 아닐 텐데, 관중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하셨다.
혹시 모를 관객을 위한 연기임에도 불구하고 내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면 말 다 했지 뭐.
“의혹이라기보다는 회계사가 하는 일이 워낙 많았던데다가 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변명 같은 내 말을 끊은 그녀는 더 당차게 몰아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하다니요? 이 정도면 거의 횡령이나 그에 준하는 범죄 의혹이 있어야 인정할 만한 무례 아닙니까?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이 사람은 바보같이 괜찮다고 하지만, 전 할 말은 해야겠어요.”
와우, 이 아가씨는 회계사라더니 무슨 연극을 부전공으로 배우셨나?
각본을 내가 짰는데도 내 말문이 턱턱 막힌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호위 분들은 제가 따로….”
내가 말문이 막힌 듯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하며 호위를 떼어내려는 척을 하자, 그녀가 바로 내 말을 다시 끊으며 치고 들어왔다.
“아니요. 이번만큼은 호위들과 동행할게요. 솔직히 선장님의 배에서 우리 둘이 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하게 느껴지거든요.”
“시니아 아가씨, 말씀이 과하십니다.”
나는 짐짓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구겨보았지만, 그녀의 연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흥, 이 시간에 사람을 보내서 오라는 것보다 무례하지는 않죠! 저도 나름 회계사니 함께 장부를 확인하겠어요. 괜찮겠죠, 선장님?”
“크흠!”
내가 불편하다는 듯이 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선수 쪽도 선미 쪽도 선원들이 슬쩍 다가와서 집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선장님, 시니아가 함께한다면 검토 시간이 짧아질 겁니다. 함께 하게 해주시죠. 어차피 그 장부는 누가 봐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오스팔트 가문이 우리와 적대하는 상회도 아니구요.”
게론드가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중재하듯이 말을 걸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일행 전체를 안내했다.
“그럼 따라오시죠.”
나는 게론드와 함께 걸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
소란스러움을 느끼기는 했겠지만 정확한 내용은 몰랐을 금고를 지키던 돌격대원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태도로 우리를 맞이했다.
게론드 일행이 오기 전에 네이선이 무기를 반출해서 지급했기 때문에 이미 칼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게 여차하면 일단 칼질부터 할 기세였다.
“어? 선장님?”
나는 두 사람에게 괜찮다는 듯 두 손으로 진정시킨 뒤 우리가 온 방향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현문이 비었으니까 두 사람은 현문을 지키도록 해.”
“네?”
내 말에 둘 중 한 사람이 날카롭게 내 뒤에 선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가 협박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일 리가 없었다.
당장 남자만 해도 모르는 사람은 둘에 불과한데, 낯이 익은 사람으로 나와 게론드, 우르타가 있었고, 저 뒤쪽에는 무려 네이선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여자 네 사람은 뭐, 위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테고.
성별을 떠나서 시니아와 시녀들이 입은 옷은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전투력을 70%쯤 깎아 먹는 복장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확인하듯이 뒤쪽의 네이선을 바라보았다.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이 네이선 역시 안심하고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을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통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나는 품에서 열쇠를 꺼내 창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르타에게 신호를 보냈다.
우르타는 알았다는 듯 윙크를 날리더니 시니아와 시녀 한 명을 데리고 조용히 부선장실로 향했다.
“들어가지.”
내가 금고 문을 열고 말하자 남은 사람들은 말없이 내 말에 따라 금고로 들어갔다.
왕녀님이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필요하니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휴우, 조마조마했습니다.”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고마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론드에게 내가 감사 인사를 하자 그는 재빨리 양손을 흔들려다가 어색하게 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다행히 시니아가 바로 도와줘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와…아니, 하여간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도대체 왜 그분이 선장님을 찾아오신 거죠? 사실 전 선장님을 처음 볼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이건 정말이지, 지금도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깐, 게론드. 여기가 방음이 잘 되기는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높은 건 좀 그렇지 않겠나?”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한 모양이군요.”
사실은 그런 문제는 아니고, 당신 어째서 말하는 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로 돌아가 버린 거야?
그동안 내게 말을 중간에 커트 당하면서 장황하게 말하는 버릇이 상당히 고쳐지지 않았어?
심지어 팔을 잃은 후에는 과묵해졌었잖아….
얼굴을 보니 피부색도 좋고, 살도 조금 오른 것 같아서 보기에 좋기는 한데, 굳이 투머치토킹 스킬까지 옛날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그보다, 시니아 양과는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군?”
“아!”
내 말에 게론드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었다.
그러더니 이내 자랑하듯이 빠르게 떠들기 시작했다.
“일단 약혼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조만간 이쪽으로 직접 오셔서 세부 내용을 조율하기로 했죠. 아직 제 부상에 대해서는 모르시는데, 약혼 소식을 받고 오시는 거니 제가 좀 다쳤다고 해도 충격이 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사자인 제가 괜찮다는데 뭐 어쩌겠습니까? 하하하핫. 그리고 배 말인데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나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쿨하게 말했다.
“아, 자네에게 더 배를 타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네. 그동안 고생도 했고 부상도 당했으니 넉넉하게 챙겨주겠네. 그런데 게론드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일이 보통 상선의 회계사와 좀 다르지 않나? 그래서 후임자가 결정되는 대로 교육을 좀 맡아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굳이 배를 탈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선내의 은행 시스템이라던가 지금까지 나와 게론드가 해왔던 결재 체계 정도는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없이 처음부터 회계담당자를 가르칠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찔해진다.
아예 이 기회에 란데르 씨(시니아의 오빠)에게 질척거려서라도 회계사를 두세 명 소개받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선박이 세 척이나 되는데(드라이언의 회계는 내가 직접 관리하지 않는다) 오트라스에서 모든 회계를 처리하는 것은 약간 비효율적이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모르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폰테 섬에도 회계를 담당할 재무관을 두어야 하는데, 이쪽은 진짜 신뢰를 쌓은 친구를 임명해야 했다.
예산을 쥔 놈의 권력은 강할 수밖에 없는데, 섬의 재무관은 배와 달리 내가 직접적으로 관리하고 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섬을 개발하겠다고 지금 당장 선단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폰테 섬에 틀어박혀서 지낼 수는 없는 일이잖아.
“어? 저 그럼 해고입니까?”
잠시 멍하게 있던 게론드가 살짝 실망한 어조로 물었다.
“해고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어차피 결혼도 해야 하고 하니까…. 혹시 계속 배를 탈 생각이 있나?”
미묘한 어감 때문에 내가 살짝 기대를 담아서 묻자, 게론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다시는 전투에는 나서지 않는 조건으로 겨우 설득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장님.”
게론드, 이 멋진 자식!
내가 게론드와 굳은 악수를 나누고 있는데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가 끝난 모양이군. 왕, 아니, 아가씨를 잘 부탁하네, 게론드.”
“네. 걱정 마십시오, 선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