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명탐정 이튼
‘나는 지금 상황을 전혀 모르는 거다. 하지만 너무 멍청해 보이지 않게.’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되새기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잔머리와 눈치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갑자기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식의 멍청한 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더 의심을 받을 거다.
진짜 화가 난 것처럼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대는 저 남자 말고, 저 복도에 숨죽이고 있을 사람에게 말이다.
“아가씨라,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엘리안 아가씨일 텐데, 그분을 왜 여기에서 찾는 겁니까? 아가씨라면 저택에, 설마 아가씨가 납치라도 당하신 겁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라! 네놈이!”
“그만! 알렌 경, 적당히 하시지. 내가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난 이 나라의 당당한 귀족이라고 말이야. 기사였던 자가 귀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조차 모르나?”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진짜 수색 책임자가 들으라고 일부러 내 ‘작위’를 강조하며 알렌을 쏘아 붙였다.
아무리 심증이 있어도 일단 내가 귀족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함부로 대하기 힘들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세히 보니 난폭한 언사와 달리 알렌의 눈빛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확실히 왕녀님과 미리 이야기 된 것은 맞군.
저 눈이 어딜 봐서 분노로 맛이 간 눈이야?
살짝 안심한 내가 한마디를 더 하려고 하는 순간, 문 뒤에서 새로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새롭기는 했는데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오랜만이오, 리안 스펜서 남작.”
“…이튼 경.”
“저 …한 자가 멋대로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지. 하지만 이쪽 상황이 좋지 않으니 협조를 부탁드려도 되겠소?”
나 분명히 들었어. 지금 ‘무식한 자’라고 한 거 맞지?
기사라는 작자들이 대부분 가방끈이 긴 편은 아니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말하면….
하지만 목숨을 건 결투를 해야 할 모욕을 당했음에도 알렌은 얼굴을 붉힐 뿐,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튼이 선장실 안으로 들어오자 한쪽으로 물러서기까지 하는 꼴이 부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허어, 이 둘 사이에도 뭔가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지금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지.
“후작 각하를 모시는 자로서 후작가의 일에는 당연히 최대한 협조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알면 더 적극적인 협조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흠, 대충 예상한 것과 같소. 오늘 새벽 아가씨께서 실종된 것이 확인되었고, 남작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소.”
“그렇다면 제가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는 아가씨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뜻인가요?”
“별로 놀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이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놀랐고, 아가씨가 사라진 시점에 하필이면 제가 저택을 방문했으니 모든 의심이 제게 쏠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미 아가씨를 밀항시킨 전력이 있고, 제먼 씨를 일레드 왕국에서 탈출시킨 적도 있으니까요. 심지어 아가씨께서 불러서 일을 맡기거나 담소를 나눌 만큼 친분을 가진 외부인이기까지 하니, 와우! 제가 제 삼자였다고 해도 저부터 의심하겠군요.”
내 차분한 설명에 이튼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시는군?”
이제 나도 귀족이다 보니 말은 함부로 못 하지만, 여전히 그 말투에는 나를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가장 의심스러운 게 저인데 제가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요? 협조라면 선내 수색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얼마든지 수색하십시오. 어차피 항구에 며칠 더 머물 생각이니 편하게 수색하셔도 됩니다. 아 참, 피오렐과 리버티에 대한 수색도 필요하시겠군요.”
나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튼이 비릿하게 웃으며 한 마디를 추가했다.
“새로 합류했다는 용병함까지.”
“아, 드라이언 말입니까? 그렇게 하시죠.”
드라이언은 좀 그렇긴 한데, 사람을 보내서 설명하면 베기어 함장도 이해해 주겠지.
지금 이 찝찝한 기분은 베기어 함장에게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나는 아직도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네이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칼 집어넣어.”
“하지만….”
“이튼 경? 혹시 지금 당장 저를 체포하실 생각입니까?”
“물론 아니오, 스펜서 남작. 왕국의 적법한 귀족을 상대로 그리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지금 알렌 경의 태도는 단순한 위협이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이튼은 굳은 얼굴로 알렌을 보고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심지어 도움도 되지 않는군. 나가서 수색 작업이나 지휘하시오.”
“…알겠소, 이튼 경.”
저렇게까지 막말을 한다고? 알렌은 그걸 또 참고? 허허허...
마지막까지 나를 노려보는 일품 연기를 선보인 알렌이 입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며 선장실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선장실 밖에서 어색하게 웅성거리는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후작 각하의 명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한다! 최대한 협조해 드려!”
내 말이 떨어지자 선원들은 구시렁거리며 흩어지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선장실을 입구를 봉쇄하려고 했다.
“선장님!”
잠옷 차림으로 난입한 그레이그와 행크 등의 간부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입구에서 병사들에게 진입을 저지당한 그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본 나는 이튼에게 물었다.
“일등항해사와 간부들입니다. 안으로 들여도 되겠습니까?”
“난 이곳에 남작과 나만 남으면 된다고 생각하오만.”
“…그렇다면 이 녀석들도 내보내도록 하죠.”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우르타와 네이선에게 고개짓을 하자, 우르타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나, 난 여기 있을래!”
“야, 포술장. 나가서 간부들에게 상황 설명이나 해 줘.”
“시, 싫, 우읍!”
재빨리 우르타의 입을 막은 네이선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눈빛을 보니 아니라면 몰래 신호라도 보내라는 것 같다.
그런데 뭐, 너희가 있다고 딱히 유리할 것도, 없어서 불리할 것도 없단 말이지.
“응, 나가서 일등항해사랑 다른 간부들에게 상황 설명하고 갑판장은 피오렐에, 일등항해사는 드라이언에, 포술장은 리버티에 가서 각 함선장들에게 상황 설명해 줘. 특히 괜한 충돌 나지 않게 주의하고, 저쪽에서 요구하는 건 가능하면 최대한 들어 주라고 해.”
“…알겠습니다.”
안심하라는 눈빛을 본(이해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네이선이 버둥거리는 우르타를 끌고 나가자, 그레이그와 간부들이 두 사람에게 폭풍처럼 질문을 퍼붓는 것이 들렸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말이다.
탁.
입구를 봉쇄한 병사 중 한 사람이 선장실의 문을 닫자, 밖에서 나누는 대화는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변했다.
“앉읍시다, 스펜서 남작.”
“아, 제가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두었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나는 이미 의자를 빼고 멋대로 앉고 있는 이튼에게 의례적인 말을 하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빠르게 선공을 가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제가 아가씨를 납치했다면 알렌 경은 공범입니다. 그런데 그자가 어째서 수색에 합류한 겁니까?”
“알렌이 공범이라?”
“이튼 경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제 저택에서 이곳까지 저를 호위한 사람이 알렌 경입니다. 알렌 경이 눈치 채지도 못하게 아가씨를 납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납치라….”
나를 탐색하는 눈길을 늦추지 않던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금 네가 앉자고 했잖아, 인마!
“선장실은 밀수품 수색에서도 제외되는 곳이라고 하더군. 그렇지 않소?”
“아,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특별히 혐의가 없다면 선장실은 적당히 둘러보는 정도로 수색을 마치는 경우는 있죠.”
너 알렌을 싫어하는 거 아냐?
공격할 구실을 줬으면 얼른 물어뜯어야지, 왜 말을 돌리는 건데?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선장실은 내가 좀 둘러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바로 대답했다.
왕녀님은 지금쯤 나도 모르는 모종의 장소에 숨어있을 텐데 여기를 백날 뒤져봐야 뭐가 나오겠는가?
만약 랜턴이랑 무전기를 찾아서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조금 애매하기는 한데, 마도구와 장식품이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찾는 게 손바닥만 한 물건도 아니니까 서랍까지 뒤져보지도 않을 것 같고.
내 예상대로 옷장과 큼직한 공간을 위주로 살펴보던 이튼이 나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내가 듣기로 남작은 배에 특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취미라고 하던데, 보여주실 수 없소? 이렇게 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하던데.”
벽을 두드리고, 발을 굴러보고, 바닥의 나무 틈을 한동안 노려본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안일하게 생각하고 왕녀님을 비밀 공간에 숨겼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고 걸릴 뻔했다.
적당히 숨기면 그만 아니냐고?
왕녀님도, 알렌도, 제먼 씨도 모두 후작 저택에 머물고 있다.
그 세 사람만 모아서 이야기를 들어도, 내가 설치하는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비밀 공간’ 이야기는 다 나온다.
물론 그보다 더 가볍고 뻔한 비밀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꼼꼼한 수색으로도 무조건 발견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의미가 없다.
내가 잠시 시간을 끌어서일까, 수색을 중단한 이튼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약간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물었다.
“스펜서 남작? 설마 보여주기 어렵다는 것은 아니겠지? 분명히 전폭적인 협조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아, 아닙니다. 물론 보여드려야죠. 따라오시죠.”
“잠깐.”
“네?”
“혹시 이 방에는 없소?”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
이튼과 함께 갑판으로 나오자 욕을 섞어가며 불만을 내뱉는 선원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사방을 돌아다니는 엄청난 수의 경비대원들도 보였다.
“도대체 경비대를 얼마나…?”
“후작가의 중대사요. 델라 항구의 관리들이 모두 호출되었고, 현장 지휘를 치안관과 항구관리관이 하고 있으니 이 정도 병력은 동원해야겠지.”
꼴을 보아하니 이놈들이 어지른 것을 정리하는 데에 하루는 꼬박 걸리게 생겼다.
그리고 반대쪽 부두에 정박한 피오렐을 슬쩍 보았는데, 4명의 후작가 사병이 현문을 봉쇄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부두에 정박한 드라이언이나 리버티도 비슷한 꼴을 당하고 있을 거다.
쭈뼛거리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오펜에게 손짓을 하자, 냉큼 이쪽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선장님?”
“응, 일등항해사랑 갑판장, 포술장에게 각 함선에 말을 전달하라고 시켰는데, 다들 갔어?”
“네! 조금 전에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색 작업 보조는 행크 돌격대장이 맡고 있습니다.”
“그래, 이등항해사도 혹시 선원들이 문제 일으키지 않게 잘 관리해.”
불안감에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오펜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준 후, 이튼을 보며 한쪽 방향을 정중하게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시죠. 보통 비밀 장소는 창고에 놓습니다. 그래야 관리가 편하니까요.”
“흠, 그곳을 보기 전에 말이오.”
“네?”
이튼은 차가운 눈으로 쭈뼛거리는 오펜을 보면서 말했다.
“창고 말고 제먼 님이 몸을 숨겼다는 장소를 먼저 보고 싶소.”
“하지만 그곳은….”
미친놈인가?
설마 내가 왕녀님을 화장실 아래에 숨겼겠냐고.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닙니다, 그럼 이쪽으로.”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이는데, 그까짓 거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지.
내가 오펜에게 자기도 모르는 신호를 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숨겨놓은 왕녀님을 다른 데 옮기라는 신호라든가 그런 것 말이다.
그나저나 이제 누구 밀항 시키는 것은 포기해야겠네, 이렇게 다 까발려져서야 원.
“거기 너희 둘, 여기에 있는 인원 ‘모두’가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못하게 해라.”
내 짐작이 맞았는지 이튼은 바로 근처에 있던 경비대 두 사람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모두’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며 오펜을 슬쩍 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화장실에서도, 비밀 공간에서도 그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비밀 공간에 뽀얗게 쌓인 먼지가 내 결백함에 더 힘을 실어 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내가 한숨을 돌리려는 찰라, 약간 서두르는 듯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땀에 흠뻑 젖은 항구관리관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후우, 후우, 이튼 경 여기에 계셨군요.”
“무슨 일인가?”
“어, 그것이….”
항구관리관이 뭔가 말을 하려다가 나를 보고 머뭇거리는 것을 본 이튼이 내게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소.”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은 나에게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후에 항구관리관이 귓속말을 전했다.
살짝 굳어있던 이튼의 표정이 비릿한 미소로 바뀌는 게 영 불안해 보인다.
“남작, 오스팔트 가문과 교류가 깊은 모양이오?”
망할!
아니, 아니야.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부분이잖아?
“아, 우연히 안면을 튼 자들입니다. 회계사를 맡은 친구를 추천해준 곳이기도 하고, 회계사가 그쪽 가문과 관계가 조금 깊어서 약간 인연이 있습니다.”
“새벽에 그 가문의 여자가 배에 방문했다던데, 왜 숨긴 거요?”
“숨기다니요? 회계사와 관련된 문제로 회계사를 급히 소환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번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내 말을 끊은 이튼은 항구관리관을 보고 명령을 내렸다.
“너는 지금 당장 오스팔트 가문과 관련된 모든 곳을 수색해라. 지금 있는 병력 중 절반을 맡기지. 나도 곧 따라가겠다.”
“알겠습니다, 이튼 경.”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내가 예상한 것을 넘어서지는 않았지만 여기까지 일사천리로 뚫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제발, 제발.
설마 안일하게 왕녀님을 그냥 시녀나 하녀로 위장해 놓은 것은 아니겠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튼, 저 녀석은 왕녀님의 얼굴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