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선행은 되돌아오는 법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내막을 잘 몰라서 불만을 내뱉기만 하던 선원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하나씩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괜히 허리춤이나 가슴팍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이튼과 함께 중앙갑판에서 어색하게 서 있어야만 했는데, 아주 고문이 따로 없었다.
이튼은 나보고 배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편안하게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개도 못 믿을 소리였다.
자기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매우 불친절한 감시원을 붙이겠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제법 비싼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서 수색이 끝났다고 말할 할 때는 공기가 가벼워진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튼 경, 더 이상은 찾아볼 곳이 없습니다. 벽면은 앞뒤의 두께까지 확인해서 빈 공간이 없도록 다 확인했습니다.”
우와, 지독한 놈들.
비밀공간이라고 하지만 결국 물리적으로 차지하는 공간을 줄일 수는 없다.
그래서 비밀공간을 만드는 장소는 벽면이나 가구 등으로 착시 효과를 만들어서 공간이 없어 보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저 사람은 지금 모든 벽면(배는 벽이 매우, 매우 매우 많다)을 일일이 앞뒤 두께를 재가며 확인했다는 거다.
어쩐지, 손바닥만 하… 지는 않지만, 고작 배 한 척을 수색하는 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나 했네.
“흠, 그럼 치안관 자네는 남은 경비대를 데리고 새로 합류했다는 용병함을 수색하게. 조건은 똑같아. 내부 인원은 격리하고, 외부 출입을 절대 금하도록. 그 저기 저 사람도 데리고 가고. 나도 곧 따라가지.”
“알겠습니다, 이튼 경.”
치안관이라는 남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살짝 굳은 표정의 이튼이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하도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부목이라도 대고 있는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하필이면 가까이에 있는 피오렐이 아니라 다른 부두에 있는 드라이언을 먼저 수색한다고?
드라이언은 아무래도 조금 불편한데.
자꾸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배들과 달리 내가 직접적으로 지휘하지 않기 때문일까?
“스펜서 남작, 실례가 많았군.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서 부하 몇 명을 남기겠소.”
봉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말이다.
“아 참,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원은 부하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꼭 서로 인사를 했으면 하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원은 모두 검문하겠다는 뜻이겠지.
“마지막으로 불편하겠지만, 내가 돌아와서 다시 인원 파악을 하고 싶으니 추가된 인원들과 기존 인원들을 확실히 구분해 주셨으면 하오. 본인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말이오.”
얼핏 들으면 추가된(배로 복귀한) 인원을 자기가 직접 보겠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기존 인원도 말입니까?”
“물론이오.”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나갈 수 없다는 거다.
아예 이 배에서 어떤 연락도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다른 함선에 이번 일에 대한 대응을 지시하기 위해 파견한 그레이그, 우르타, 네이선에게도 감시하는 인원이 두 명씩 붙었다니 말 다 했지 뭐.
그나마 그들이라도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내가 이제 귀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내 허락도 없이 선단을 마구잡이로 뒤집어 놓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겠지.
물론 후작의 이름만 가지고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협조라는 부분에서는… 잠깐만!
이놈들, 후작의 명령을 받은 것은 맞아?
“후작 각하께서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걱정입니다. 이번 일, 각하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습니까?”
내 말에 약간 풀려있던 이튼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무슨 의미요, 스펜서 남작?”
“의미라니요? 그저 후작 각하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물은 것뿐입니다.”
“흠, 후작 각하께서는 괜찮으시오.”
아니,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이 새끼, 후작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다.
플라비아 남작 라우반의 명령을 받았거나, 이놈의 독단이겠지.
후작가 사병들과 경비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후작의 명령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동안 쌓인 그의 권위로도 충분했을 테니까.
게다가 그의 성은 제르넹, 이 항구의 관리를 맡고 있는 제르넹 자작 가문 사람이다.
아마 그의 아버지 정도가 제르넹 자작이 아닐까?
그런데 후작의 건강이 나빠진 틈을 타서 이튼이 엉뚱한 생각을 했건, 이미 라우반에게 충성을 맹세했건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나는 왕녀님만 무사히 탈출시키면 그만이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군요. 이런, 제가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은 모양입니다.”
“…부디 다음에도 웃으면서 만났으면 좋겠소, 남작.”
“물론이죠, 이튼 경.”
마지막으로 나를 차갑게 응시하던 그가 이미 대기 중이던 사병들을 인솔해서 현문을 나서자, 멀리서 얼쩡거리던 오펜이 다가왔다.
“어, 잘왔어, 오펜. 난 들어가서 쉴 테니까 돌격대장이랑 같이 선원들 딴짓 못 하게 해.”
파견된 그레이그, 네이선, 우르타는 조금 늦을 것이다.
내가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해도 상황을 보고할 사람은 필요해서 수색이 끝날 때까지 있다가 오라고 했거든.
물론 다시 돌아오라고 했어도 그들이 쉽게 돌려보내지도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저, 선장님 그런데….”
“어? 뭐 할 말이라도 있어?”
“그 무섭게 생긴 기사님이 이런 걸 몰래 주셨어요.”
“응?”
무섭게 생긴 기사면 아무래도 알렌 경일 것이다.
이튼은 굳이 말하자면 야비하거나 잔인하게 생겼고, 굳이 이따위 쪽지를 줄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오펜이 건네주는 작은 쪽지를 펼쳐보았다.
목탄 같은 것으로 급히 휘갈겨 쓴 것 같은 내용은 이러했다.
[마지막까지 긴장]
아, 쉽게 안 풀릴 것 같은데?
답답한 기분을 참으며 선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계속 오펜이 따라왔다.
“이등항해사, 왜 따라 와?”
“그, 괜찮을까요?”
“뭐가?”
“드라이언 말이에요.”
어린 오펜도 드라이언이 수색당하는 것은 불안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합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온전히 내 소유인 다른 배들과 결이 조금 다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별수 없지 뭐. 그래도 일등항해사를 보내놓았으니 베기어 함장이라면 이해해 줄 거다.”
함선장들은 왕녀님의 정체도 알고 있고,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 거기에 모르아 갑판장을 가두셨잖아요. 후작가의 첩자 혐의로….”
“?!”
제기랄! 뭔가 빠진 것 같더라니!
***
급히 갑판으로 뛰어나갔지만 이미 이튼의 일행은 상당히 멀어진 이후였다.
그리고 현문 아래쪽을 지키고 서 있는 후작가 사병 네 명.
저들은 이튼의 명령이 없다면 절대로 길을 비켜주지 않을 것이다.
그게 설혹 나라고 해도 말이다.
“선장님!”
오펜이 나를 부르며 허겁지겁 따라오자 갑판을 어슬렁거리던 선원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침착, 침착해야 해.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이튼보다 빨리 드라이언 호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다.
그걸 이튼이 그냥 두고 보겠어?
그럼 최대한 빨리 가도 이튼과 같이 가는 것이 고작인데, 그래봐야 상황이 바뀌기는 힘들다.
배에 처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도, 드문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하필이면 ‘후작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감금당한 모르아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튼이 모르아를 알고 있어도 문제, 모르아가 쓸데없는 말을 해도 문제….
상황을 알고 있는 그레이그가 먼저 갔다지만 그라고 무슨 방법이 있을 리가 있나.
죽여서 입막음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뾰족한 수가 없는데, 베기어 함장이나 그레이그나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
“어, 어떡하죠?”
“…어차피 내 손을 떠났는데 안절부절못하면 뭐 하겠어? 잘 풀릴 것을 전제로 다음 일이나 생각해야지. 삼등항해사는 아까 내가 시킨 일이나 진행해. 특이사항 생기면 내게 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모르아가 입을 열어도 끝장이고, 오스팔트 가를 수색하러 간 항구관리관이 왕녀님을 찾아도 끝장이다.
그렇게 되면 발각된 왕녀님이 알렌 경과 함께 나를 협박했다는 식으로 둘러대지 않는 이상 목숨도 구하기 힘들 거다.
그러니까 그 시간에 차라리 왕녀님을 다시 어떻게 데리고 올지나 고민하자.
오펜을 보내고 선장실로 향하는데, 선수 방향에서 타종 소리가 울리더니 선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막 입항한 배였다.
그런데 저 깃발은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말이야.
위치나 형태로 볼 때 소속된 상단을 표시하는 상단 깃발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문장을 만들어야겠구나.
작기는 해도 일단 상선단을 이끌고 있고, 벨로키나 왕국의 남작이니,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그럴싸한 문장이 필요했다.
…이번에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
왕녀님이 수색에서 발각되지만 않으면 다시 태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스팔트 가문의 아가씨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회계사의 피앙새이고, 한 사람은 방앗간 지나치는 참새 수준으로 방문하고 있다.
시녀, 하녀 몇 사람이 동행한다고 이상할 일도 아니고, 그중에 은근슬쩍 한 사람이 줄어도 그 변화를 눈치챌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긴장]
나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해진 쪽지를 꺼내서 한참 노려보다가 잘게 찢어서 입에 넣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멋지게 태우고 싶은데, 알다시피 배에서는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물통에 물과 함께 쪽지를 억지로 삼키고 다시 머리를 쥐어뜯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손님이라고?”
“네, 게브너 상단의 안톤 씨라고 전해달랍니다.”
게브너 상단의 안톤이라면, 아?
“이봐, 가빈. 선원 중에서 자네랑 가장 친한 사람이 누구야?”
“네? 갑자기 그건 왜…?”
손님의 방문을 알리러 왔다가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가빈이 머리를 긁적이며 당황해했다.
하지만 내가 대답을 종용하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대부분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굳이 꼽는다면 트레비스 녀석입니다.”
어? 그게 가능해? 제일 원수 같은 사이 아니었어?
“트레비스라면 자네를… 그 뭐야, 누명을 씌웠었잖아. 그런데 트레비스랑 가장 친하다고?”
“하하하, 그게 언제적 이야깁니까? 뭐, 그게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 녀석이 미안한지 저에게 참 잘해줬거든요. 처음에는 꼴도 보기 싫었습니다만, 남자가 쪼잔하게 티를 내기도 그렇고, 같이 지내다 보니 사람이 단순해서 그렇지, 나쁜 놈은 아니라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때 누명도 그놈이 의도해서 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그 범인 놈의 말에 넘어간 것뿐이니까요.”
“하여튼 트레비스랑 제일 친하다 이거지?”
“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시킬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트레비스도 지금 선내에 있나?”
“네, 방금 복귀해서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돈 받아서 다시 나가려고 했는데 못 나간다구요.”
“좋아, 안톤 선장은 선장실로 모시고, 자네는 트레비스랑 같이 대기 좀 하고 있어. 아, 지금 해야겠군. 잠깐 실례하겠네.”
빠악!
“컥, 서, 선장님?”
내 기습 공격에 반사적으로 허리의 단검 손잡이를 움켜쥐던 가빈이 얼얼한 왼쪽 볼을 부여잡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 내가 나중에 사과도 하고 보상도 할 테니 지금은 그냥 장단 좀 맞춰 줘. 자네는 지금 내게 살짝 장난을 쳤고, 나는 과민반응을 한 거야. 알았지?”
“네? 네, 네.”
갑자기 얻어맞아서 경황이 없는 중에도 작게 속삭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가빈이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일부러 노려서 때리기는 했지만, 광대 부분이 벌써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시각효과는 괜찮을 것 같다.
“자, 이해했으면 이제 화가 난 것을 티 내면서 나가서 안톤 선장을 모시고 오게. 아니, 나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다른 친구에게 안내를 맡기는 것이 좋겠군.”
당황, 분노, 짜증이 살짝 섞여 있던 가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번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렇게 눈치도 빠른 친구를 굳이 다짜고짜 때릴 필요가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람은 미리 준비한 상태와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근육 긴장 정도가 다르다.
내가 만약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네가 한 대 맞아줘야겠어.’라고 가빈에게 말했다면, 가빈의 광대 쪽에 저렇게 예쁜 증거가 남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저 정도 증거를 남기려면 훨씬 더 아프고 세게 때려야 했을 것이다.
***
“오랜만입니다, 리안 선단장님.”
“반갑습니다, 안톤 선장님.”
“전쟁이다 뭐다 아주 난리가 아니라서 안녕하냐는 인사는 드리기 민망하네요, 괜찮으신가요?”
미묘한 뉘앙스의 표현.
아마도 입구를 봉쇄한 후작 가문의 사병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하하하,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오늘 바쁜 일정이 없으시면 저와 이곳에서 저녁 식사라도 하시죠?”
저녁은 개뿔, 이제 겨우 점심시간이다.
그러니까 오트라스에 승선한 이상 이튼 그놈이 수색을 마칠 때까지 나갈 수 없으니 여유 있게 있다가 가라는 뜻이었다.
내 말을 이해한 안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분명히 현문을 봉쇄한 병사들이 들어가면 나갈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을 텐데 그게 저녁까지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럴까요? 아무래도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좀 많을 것 같군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하하하, 그런데 현문이 좀 번잡스러웠을 텐데 혹시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렇게 와봤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 수많은 말이 오갔다.
어,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안톤이 어땠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
“이쪽으로 앉으시죠. 방금 입항하신 것 같던데, 언제 출항하십니까?”
“글쎄요, 출항 일정은 선장과 이야기를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 선단장님이 이번 의용함대에 포함되었다는 소식들 들었습니다만, 정말입니까?”
“네,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요. 출발할 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