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마지막 한 수
“이쪽은?”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물어보는 이튼의 표정이 냉랭하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듣는 쪽의 울화통을 돋우는 말과 표정이겠지만, 지금은 꿀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그의 태도는 결국 왕녀 수색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래서 너무 신나는 티가 나지 않게 나도 살짝 안색을 바꾸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게브너 상단에 소속된 신시엘라 호의 안톤 선장입니다. 잠깐 인사차 들렀다가 지금까지 못 나가고 있었죠.”
“게브너 상단? 굳이 이런 상황에서 방문해야 할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
하, 이 자식 선 넘네?
“이튼 경, 말씀이 과하시군요. 후작 각하의 문제라서 협조하기는 했지만 내가 특별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지인도 만날 수 없다는 겁니까?”
“뭐? 지금 뭐라고 했소?”
“말조심하시오. 나 역시 국왕 폐하께서 임명한 남작이오. 서로 불필요한 말은 없었으면 좋겠소만.”
강경한 내 말에 이튼은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언제까지 내가 굽신굽신할 줄 알았던 모양인데, 그건 날 너무 물로 본거지.
델라 항구를 관리하는 제르넹 가문의 사람과 괜히 척을 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계속 저자세로 나가는 것도 그리 좋지 않았다.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 아니, 권리인 줄 아는 법이니까.
애초에 방금 전의 발언은 그가 선을 많이 넘은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이고, 남작님이 되셨습니까? 왜 그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 참, 제가 민망하군요.”
경색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안톤이 너스레를 떨며 끼어들었다.
확실히 상단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아주 능수능란하다.
“그리고 이튼 기사님이라고 하셨지요? 사실은 최근에 폰테 섬에 대한 이런저런 소식을 접해서 말입니다. 마침 여기 리안 선단장, 아이고 또 실수를! 남작님이 후작 각하를 따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정보를 조금 더 얻으려고 왔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저어되네요.”
“흥. 신경 쓸 것 없다.”
하여간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진짜 남작이 되지 않았으면 오늘 무슨 수모를 당했을지 생각만 해도 머리에서 열이 나네.
“저, 그런데 언제쯤 나갈 수 있습니까? 제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안톤의 말에 나를 쏘아보던 이튼이 ‘휙’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돌아서며 낮은 음성으로 사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돌아간다.”
이튼의 뒤를 따라 후작가 사병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가운데 시종일관 말없이 굳은 표정을 유지하던 알렌이 스치듯이 나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주시하던 나조차도 고개를 끄덕였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살짝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나와 악수를 하던 안톤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만약에 걸린다면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아시죠?”
나는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톤도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하니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톤은 왕녀님의 신분은 모른다.
그저 내가 빼돌리고 싶은 아가씨가 있는데 검문을 피하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그 ‘아가씨’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이미 느꼈을 것이다.
아마 출항 전까지 정보를 모으면 왕녀님의 신분까지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조금 헐겁기는 하지만 안전장치를 하나 마련하기는 했다.
목숨을 구해준 보답에 더해 앞으로 폰테 섬에서의 우선 교역권까지 약속한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섬이지만, 한 달 전에 후작이 폰테 섬을 공개하면서 베르엘바(침대 내장재용 풀)와 아이렌 목재에 대한 정보도 알음알음 퍼지는 중이다.
당연히 안톤 역시 폰테 섬과 이들 상품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그 상품들이 언제쯤 외부 상선에게 풀 정도의 물량이 생산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하루 이틀 장사하고 접을 게 아니라면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막말로 왕녀님의 정체를 눈치채고 나를 후작가에 신고해봐야 그가 받을 수 있는 것은 공치사 정도?
잘해봐야 돈 몇 푼 정도 받을 텐데 그걸 받자고 배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튼에게 우선 교역권을 요구하는 교섭을 벌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 말을 꺼내려면 자기가 왕녀님을 숨겨주고 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야 교섭이 될 리가 없잖아?
***
“그래서, 모르아 갑판장… 은 안 걸렸어?”
상황이 대충 정리되자마자 그레이그를 불러다 놓고 물어보면서도 참 불필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벽 두께까지 재가며 확인하는 놈들이 떡하니 갇혀있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걸리기야 걸렸습니다. 저도 막상 상황이 닥치고 나서 알아채는 바람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죠.”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게 조금 이상한데, 일단 그 기사들은 모르아 갑판장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모르아 갑판장도 별말을 하지 않았구요. 그냥 베기어 함장이 적당히 둘러대니까 별 의심하지 않던데요?”
알렌이야 알아도 모르는 척을 할 테고, 이튼이 모르아를 모른다면 사실 의심할 건덕지가 없기는 하다.
나이도 성별도 왕녀님과 전혀 상관없는 중늙은이가 갇혀있건 말건 그들이 신경이나 쓰겠는가?
하지만 모르아가 먼저 입을 열면 문제가 커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모르아가 ‘나는 후작 각하께 리안 선장의 동정을 보고하던 사람이오! 어젯밤에 아가씨께서 이곳에 오셨소!’라고 하면 그냥 끝장인 것 아닌가.
이튼 그놈이라면 티끌만 한 의혹을 가지고도 나를 고문해서라도 왕녀님의 위치를 알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흠, 아무래도 모르아 갑판장이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네.”
자신을 가둔 나를 끝장내고 자신은 무사히 풀려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다니?
이 정도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베기어 함장이 그런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때?”
“흠, 모르아 그 사람, 선장님 편으로 돌아서기로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기는 한데, 바로 며칠 전까지 충실한 후작의 첩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아리송한 내 질문에 그레이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때 노크 소리가 울리며 오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장님, 오펜입니다.”
“어, 잠시만.”
내가 일어날 것도 없이 그레이그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자 간단히 목례를 한 오펜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니, 일등항해사도 같이 듣지.”
나는 자리에 앉지 않고 바로 나가려는 그레이그를 붙잡았다.
사실 이번 일에 미안했던 것도 많고, 여기까지 온 이상 그레이그와 최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편이 유사시 대응도 편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방금 현문을 나섰습니다. 진짜 나가는 것처럼 개인 물품까지 다 챙겼습니다.”
“돈은 다 찾아갔지?”
“그게… 제가 몇 번이나 권했지만 두 사람 다 소액만 찾아갔습니다. 괜히 난리통에 잃어버리기 싫다면서.”
가만히 듣고 있던 그레이그가 잠시의 침묵을 틈타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왕녀님 말이야, 다시 배에 태워야 하잖아?”
“그렇죠.”
“어떻게 태우지?”
내 말에 떨떠름한 표정의 그레이그가 반문했다.
“거기까지 다 생각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대충 생각은 해 놨는데, 이튼 그 새끼를 보니까 생각이 바뀌더라고.”
사실 알렌의 쪽지 때문이지만, 굳이 거기까지는 밝힐 필요가 없겠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새끼, 과연 우리가 출항할 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까?”
“아…!”
그레이그가 나지막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확실히 그놈 아주 집요하고 비열해 보였습니다. 분명히 출항하기 직전에 다시 확인한다고 나설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조금 돌아가기로 했어. 마침 운 좋게도 괜찮은 협력 대상도 나타나고 해서 말이야.”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그레이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장님, 그런데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이튼인가 이틀인가 하는 그놈이 과연 신시엘라 호는 그냥 보낼까요?”
“아마 괜찮을 거야. 우리가 여기에 있는 한 그놈의 신경은 우리에게 쏠려있을 테니까.”
“아!”
안톤 선장의 선단은 이틀 후에 출항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보다 하루 늦게 출항할 예정이다.
우리에게 온갖 신경이 쓰이는 상황에서 오늘 그의 자존심까지 건드려 놓았으니, 우리보다 먼저 출항하는 안톤 선장의 선단에까지 신경을 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수상한 행동을 한다면 더욱 그렇겠지.
***
- 이튼 제르넹 -
굳은 표정으로 오트라스 호의 현문을 내려온 이튼은 한 발자국 뒤에서 걷던 남자를 손가락으로 불렀다.
이미 이튼의 밑에서만 5년이 넘게 부관 역할을 수행해 온 남자는 그의 작은 손짓에 빠르게 따라붙어 귀를 가까이 댔다.
“항구관리관이건 치안관이건 당장 찾아서 게브너 상단의 선박들 전부 검수하라고 전해.”
“하지만 경, 그러면 지금 진행 중인 항구 수색 인력이 부족할 겁니다.”
“알아, 항구 수색보다 게브너 상단의 선박들이 먼저다. 특히 방금 봤던 그놈이 선장으로 있는 배부터 뒤지라고 해.”
이튼은 대열의 맨 뒤에서 굳은 표정으로 따라오는 알렌을 살짝 흘겨보았다.
그의 감은 범인이 바로 저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가씨의 더러운 추종자, 기사의 긍지를 짓밟은 옛 우상….
저놈이 아니라면 아가씨 혼자서 어떻게 저택을 탈출한단 말인가.
심지어 아가씨는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납치는 아니었다.
저놈이 감히 아가씨를 납치했다면 여기에서 저렇게 태평하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아가씨께서 좋지 않은 선택을 하셨다는 뜻인데, 저 더러운 놈은 좋다고 아가씨의 탈출 계획에 동조했겠지.
아니라는 듯 숨기고 있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의 눈동자에는 아가씨를 향한 추악한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심지어 주군이었던 후작 각하의 호의조차 몇 번이나 거절한 자였다.
아무리 아가씨라고 하지만, 고작 여자에 미쳐서 기사의 본분과 긍지마저 저버린 자라니.
한때나마 그를 동경했던 자신이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미친 듯이 분노하는 알렌의 반응은 가소로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저놈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들, 아가씨가 향할 수 있는 곳은 리안이라는 놈의 배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우 단승남작 주제에 작위를 받았다고 건방을 떠는 그놈의 배에 아무런 흔적도 없을 줄이야.
그의 선단에 소속된 배를 꼼꼼히 뒤져보고,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오스팔트 가문의 사유지과 고용인들까지 다 확인했지만, 아가씨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문득 지난 새벽에 아가씨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리안이라는 놈을 지목하며 배를 수색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알렌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연기를 하는 줄 알았다.
어차피 긍지도 자존심도 없고 이제 기사조차 아닌 자이니, 거짓으로 화를 내는 정도가 뭐가 어렵겠나 싶었다.
설마 그 분노가 진짜였을까?
그렇다면 아가씨를 빼돌린 것이 리안이라는 자의 단독 범행이라는 말인데, 그게 가당키나 하냐는 말이다.
최근 들어 승계 문제로 저택의 사람도 많이 바뀌고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일개 뱃놈이 아가씨를 감쪽같이 데리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게브너인가 뭔가 하는 상단의 선박을 다 수색하라고 했지만, 솔직히 거기에도 아가씨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놈들은 그가 한참 수색을 벌이고 있을 때 항구에 들어온 놈들이다.
그 중간에 아가씨가 있을 만한 곳이 없지 않은가.
감은 분명히 이쪽이 맞다고 말하는데, 일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다.
굳이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 보자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제삼자가 있을 수도 있다.
준비를 마치고 있다가 리안이라는 놈이 방문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아가씨를 빼돌리는 거다.
당연히 의심은 유력한 용의자인 리안을 향할 테니 수색망이 이쪽으로 쏠리는 틈을 타서 아가씨를 모시고 멀리 탈출한다….
…글쎄.
그렇게까지 해서 아가씨가 얻을 것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애초에 아가씨는 왜 가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는가.
고작 정략결혼이 싫어서?
귀족 영애의 운명은 정략결혼이 아니면 수녀원뿐인데?
신분을 숨기고 평민이 된다고 한들 그 운명이 과연 정략결혼보다 더 나은 결과일까?
후작가를 떠나서 그녀의 신분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프레티아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 전에 정식으로 왕좌를 차지한 배다른 동생인 데이먼.
그가 원하는 그녀의 역할은 후작가에서 추친하는 정략결혼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더 나은 역할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프레티아 왕국까지 육로로 가는 것은 성인 남자에게도 쉽지 않은 길,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 온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