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위기 탈출
광란의 밤이 지나갔다.
애 아빠가 되어버린 네이선은 차마 데보라를 배신하지 못해서 애꿎은 술만 들이켜다가 내가 술값 폭탄을 맞게 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만약 간부들이 다 모인 그 자리에서 네이선이 여자를 끼고 놀았다면 무조건 이 이야기는 데보라의 귀에 들어갈 테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닥터 롱베르도, 흠, 흠.
그 외에 우르타가 신나게 놀다가,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난입한 릴리안에게 귀를 잡혀 끌려가는 사소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눈 한 쪽이 파랗고, 그 아래 볼은 새빨갛게 부어있고, 귀 한 쪽이 두툼해진 녀석이 징징거리는 것은 별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릴리는 나한테 왜 그러지?!”
이제 아주 대놓고 애칭을 부르는구나?
“…몰라서 묻는 거냐, 자랑하는 거냐?”
“어?”
“아니다, 그냥 맞자.”
따악!
“왜 때려!”
“모르면 맞아야 할 정도로 한심한 거고, 자랑하는 거면 일단 맞고 시작할 일이니까. 어차피 결론은 ‘맞는다’잖아. 그래서 그냥 때렸어.”
“…어?”
내 논리적이고 명쾌한 답변에 멍청한 표정을 짓는 우르타를 내버려 두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노크를 하고 기다리고 있던 선원이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이튼 경이라는 분이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어, 알았어. 수고했어. 일등항해사와 갑판장에게 이튼 경이 시키는 일에 최대한 협조하라고 전해.”
“네, 선장님.”
선원이 몇 발자국을 걷기도 전에 통로 모퉁이에 냉기를 풀풀 날리는 이튼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이튼 경.”
“스펜서 남작.”
“오늘은 무슨 일입니까?”
“…….”
퉁명스러운 내 질문에 이튼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기만 한다.
그래봐야 별로 무섭지 않다.
이미 넌 졌어.
오트라스를 판자 단위로 분해해서 찾아도 없는 왕녀님이 뿅 하고 생겨날 리는 없으니까 말이야.
“아 참, 이왕 오셨으니 이리 들어오시죠. 아직 출항까지는 약간 여유가 있습니다.”
내가 몸을 살짝 돌리며 선장실 방향으로 손을 펼치는데 서늘한 그의 말이 들려왔다.
“출항 전에 선내를 수색해도 되겠소?”
뭐, 당연히 그런 이유로 오셨겠지.
하지만 그도 여유로운 내 태도에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배에 왕녀님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선선히 허락해 주기에는 또 너무 아쉽지 않겠어?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튼 경, 제가 듣기로 그날 이후로 항구를 샅샅이 뒤지셨다던데, 이 정도면 아가씨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오늘까지 대놓고 감시하는 것까지는 묵인했지만 이렇게까지 하시면 저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마지막이오.”
“휴우, 이미 보고를 들으셨겠지만, 외부인은 한 명도 태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확인을 하셔야겠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대신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희도 일정이 있는지라.”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튼의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압박을 해줘야 앞으로 나를 얕잡아 보지 않을 거다.
“…고맙소.”
마지못해 웅얼거리듯 고맙다는 말을 한 이튼이 뒤에 선 남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통로로 사라졌다.
“직접 수색하실 생각이십니까?”
“…귀빈실과 금고, 그리고 선장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소.”
“제가 직접 안내하죠. 선장실 먼저 보시죠.”
***
눈 밑이 거뭇거뭇해진 항구경비대와 병사들(후작의 사병)은 이전처럼 의욕적이지 않았다.
함께 다니던 치안관, 항구관리관, 알렌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각각 배를 하나씩 맡은 모양이지만, 다른 곳이라고 별반 다르지도 않으리라.
이 잡듯이 뒤진다고 없는 사람이 나타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아무런 수확도 올리지 못한 이튼은 이를 갈며 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가 현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들으라는 듯이 명령을 내렸다.
“이등항해사, 각 함선에 전령 보내서 출항 준비가 완료되는 즉시 출항하라고 전해. 집결 장소는 항구의 북동쪽 해상, 전령이 모두 복귀하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출항한다.”
“네, 선장님!”
오랜만에 선수에 서서 짠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좋… 기는커녕 피부가 실시간으로 노화되는 느낌이다.
갑판에서는 네이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연속으로 들리고, 복잡한 항구 연안을 빠져나가기 위해 선교에 선 그레이그가 간간이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귓등을 간지럽힌다.
아마 타륜은 오펜이 잡고 있을 거다.
원래 출입항 과정은 손이 많이 가고 상당히 정신없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 배에서 바쁘지 않은 사람은 없어야 하는데, 우리 배에는 꼴통이 하나 있지.
“그런데 그거 알아?”
“뭘?”
“선원들이 그러는데, 네가 때려서 트레비스랑 가빈이 도망갔대.”
“어, 맞아.”
“억?! 진짜 때렸어?!”
에이, 번거로운 녀석!
솔직히 그때는 그런 수준 낮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이튼의 노골적인 감시가 따라다니는 중에 갑자기 배에서 이탈자가 생기면 이튼이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으니까.
두 사람은 배에서 내린 날 술집에서 주정을 부리는 척하며 나를 신나게 씹어댄 덕분에 추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상 파티를 연 게브너 상단의 배도 아니고, 안톤의 신시엘라도 아니고, 전혀 상관없는 소형 상선에 승선했다.
안톤의 선단은 중형 상선 세 척으로 이루어진 든든한 선단이다.
그리고 안톤이 소속된 게브너 상단 역시 제법 이름과 신용이 있는 상단이다.
그렇다 보니 항로가 비슷하면 일부러 그 선단을 따르는 작은 배들이 있게 마련.
내가 가장 오래 탔던 고드실카 호도 이렇게 선단에 묻어 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트레비스와 가빈이 탄 배가 바로 그런 소형 상선이었고, 선장은 안톤과 꽤 친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무리 이튼이라도 인력의 한계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상단도, 게브너 상단도 아닌 소형 상선까지 엄중하게 관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심지어 온갖 페이크가 난무하는 판이었으니, 내 속을 꿰뚫어 보지 않는 이상 이튼이 내 계획을 눈치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짐과 함께 옮겨진 왕녀님은 정말 인생 최대의 고생을 하고 있겠지만,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진짜 때렸냐구!”
“그래, 짜증 나게 굴어서 진짜 때렸다, 왜!”
“하아, 정말 리안은 성질을 죽어야 해. 그 트레비스랑 가빈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들이었는데.”
젠장, 듣는 귀가 너무 많아서 사실대로 이야기해 줄 수도 없고 진짜.
***
“…이상입니다.”
“응, 좋네. 별문제도 없어 보이고. 새로 뽑은 두 사람은 어때?”
내 질문에 게론드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마 로제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만 가르치면 각 함선에 파견해도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빌리는 은행 시스템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많고 이해도 뛰어납니다.”
“그래? 확실히 나도 그 친구가 눈치가 좋은 것 같았어. 그 얼음 가면, 아니지, 이름이 뭐였지?”
“머레이 말씀이시죠?”
“어, 그 친구.”
게론드는 갑자기 작게 한숨을 쉬고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말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시키는 일은 곧잘 하는데, 도통 속을 알 수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 신뢰가 안 가요. 전에는 제가 검수를 하다가 빠진 서류가 있어서 어디 있냐고 물으니까 자기 책상 서랍에서 꺼내 오더라니까요?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회계 서류를 왜 한 장만 따로 보관합니까? 제가 말 안 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 아닙니까? 만약 그놈은 다른 배에 파견하면 진짜 검사를 꼼꼼히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어휴, 엄청 쌓였던 모양이다.
면접을 볼 때부터 조금 애매하기는 했었는데 말이야….
그냥 해고를 해야 하나?
그런데 취업이 안 돼서 허덕이던 사람을 연고지도 아니고 다른 항구로 데리고 와서는 해고하는 건 너무 비인간적인데?
실제로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만, 그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그 친구를 리버티로 보내자고. 어차피 리버티는 사람도 적고 교역품은 자네가 직접 관리할 테니까 장난칠 여지가 적잖아?”
“으음, 그냥 해고를….”
“에이,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럴 수야 있나. 발드 선장이라면 잘 컨트롤할 거야.”
“그렇긴 하죠….”
적당히 잡담을 하다가 일어나려는 게론드를 붙잡아 앉힌 내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도대체 어디다 숨겨 둔 거야? 솔직히 나는 이튼이 웃으면서 오스팔트 가의 상점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고.”
“절대 못 찾죠. 흐흐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집에 도착하자마자 시니아가 그러더라구요. 이 집에서 숨어봐야 수색하면 무조건 걸린다고. 그래서 다른 상점 소유의 창고로 몰래 모셨습니다. 저랑 시니아랑 둘이서요.”
다른 목격자가 없게 둘이서 옮긴 건 참 잘했는데, 다른 사람 소유의 창고라니, 그거 너무 위험한 것 아냐?
하지만 게론드는 내가 묻기도 전에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 다른 상점 소유이기는 하지만 실제 소유자는 오스팔트 가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 상점과 오스팔트 가문과 전혀 접점이 없기 때문에 어떤 수색에서도 걸리지 않는 곳이죠. 보통 큰 상회들은 이런 비밀 창고 몇 개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선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상회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걸리면 껄끄러운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거든요. 이게 워낙 복잡하게 꼬여있어서 아마 뒷골목의 정보상들도 제대로 파악하는 이가 드물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내 앞에서야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란데르지만 그래도 항구에서 가장 큰 공예품점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아마 알게 모르게 불법적인 일에도 한 발 걸치고 있겠지.
“그런 게 있었구나. 그나저나 아가씨는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네.”
“언제 접선합니까?”
“내일 저녁쯤 되지 않을까? 항로에서 조금 어긋난 곳이니 주변에 배는 없을 거야.”
사실 이 계획의 가장 큰 맹점이 있는데, 바로 해상에서 왕녀님을 넘겨받는 부분이다.
게브너 상단이건 우리 상단이건 연안경비대나 해군이 쫓아오면 끝장이잖아.
그런데 다행히 지금은 전쟁 중이란 말이지.
심지어 해군이 시논 섬 인근에서 대패한 지금 상황에서 연안경비대를 외부로 빼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벨로키나 왕국의 모든 군사력은 왕실의 제어를 받고 있으니 후작도 연안경비대에 요청이나 가능할 뿐 명령이 불가능한데, 그 후작의 정식 명령도 받지 못한 이튼 따위가 감히?
***
“견시, 주변에 보이는 것 모두 보고해!”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르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야에 잡히는 것 없습니다!”
“좋아. 조타수, 좌로 15도, 045도 잡아.”
“현재 침로 105도! 좌로 15도, 045도 잡습니다!”
조타수가 재빨리 타륜을 돌리는 것을 보던 오펜이 질문을 던졌다.
“선장님? 그쪽은 항로가 아닙니다.”
“응, 알아. 넘겨받을 게 있어서 그래.”
“네?”
“지금은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안타깝지만 선원들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그녀를 안전한 곳에 내려줄 때까지 선원들은 그냥 모르는 편이 좋으리라.
그나저나 왕녀님을 어디에 모시느냐가 문제인데….
귀빈실은 일단 불가능, 비어있는 귀빈실에 나나 다른 사람들이 자꾸 들락거리다 보면 선원들의 눈을 완전히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배에서 내가 편하게 왔다갔다 할 수 있으면서 선원들 눈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밖에 없단 말이지.
그렇게 망망대해를 세 시간쯤 항해했을까, 우르타가 소리를 질렀다.
“전방에 선박 발견! 세 척입니다!”
어? 최소한 네 척이 되어야 하는 것 아냐?
게브너 상단의 선박이 세 척, 그리고 왕녀님이 탄 소형 상선이 한 척.
심지어 게브너 상단이 출항할 때는 분명히 소형 상선이 세 척이나 쫄래쫄래 따라붙었었는데?
내게 상황을 다 전해들은 그레이그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선장님, 어떻게 할까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잠깐, 잠깐만 기다려 보지. 너무 멀면 소형 상선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갑판장은 불러올리겠습니다.”
“응, 그렇게 해.”
이후로 거의 30분가량을 신중하게 살폈지만 더 이상 시야에 잡히는 선박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내 망원경으로 선박에 달린 식별기가 보일 정도의 거리, 저쪽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천천히 선수를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식별기는 확실히 게브너 상단인데, 왜 게브너 상단의 배만 있는 걸까?
설마, 왕녀님을 태우는데 실패했, 아니지,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튼의 태도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지난 이틀 사이에 왕녀님에게 문제가 생겼나?
“전속력으로.”
“네, 선장님.”
그레이그가 지시를 내리는 사이에 뒤쪽에서 대기하던 네이선에게 다가간 나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내려가서 무기고 개방하고 조용히 선원을 무장시켜. 우르타는 내려와서 포격 준비하라고 하고.”
“응? 그냥 전투배치를 하시지요?”
“그럼 저쪽이 눈치 채잖아. 다른 함선들에게 신호 날릴 필요도 없어. 이 거리에서 신호를 식별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신호를 주고받는다는 것 정도는 저들의 눈에 띌 테니까.”
“설마….”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최악을 대비해야지. 특히 돌격대장이랑 돌격대는 언제든지 적선에 돌격 가능하도록 준비시키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선교를 내려가는 네이선의 뒷모습을 보며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