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잠자는 상자 속의 공주
“전방의 선박에서 신호, 어?”
신호를 받고 호기롭게 외치던 우르타가 멍청한 감탄사로 마무리를 했다.
나 역시 신호를 보고 있었기에 우르타가 왜 갑자기 말문이 막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 전방의 신시엘라 호에서 신호! 항해하기 좋은 날이다?”
우르타가 자기가 신호를 제대로 해석한 것인지 확신을 하지 못하고 기묘한 의문문으로 말을 끝맺었지만, 이는 이미 안톤 선장과 이야기된 부분이었다.
일단 ‘항해’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니 아무 이상이 없다는 뜻인데….
“신호 보내. 현 위치 정선하라.”
“네, 선장님.”
오펜은 뭔가 눈치를 챈 것인지 별 관심이 없는 것인지, 내 말을 듣고는 부리나케 선교를 내려갔다.
하지만 그레이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브너 상단이라면 꽤 큰 상단이라고 알고 있는데 영 글러 먹었네요.”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이 되는 거야?
나는 제안을 하면서도 ‘누가 보면 바로 의심할 텐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안톤 선장과 미리 약속한 신호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지. 그런데 왜 배가 한 척이 없지?”
“설마 안톤 선장이 배신을?”
바로 얼굴이 굳어지는 그레이그에게 조용히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작게 속삭였다.
“선교에는 어차피 내가 있어야 해. 자네가 갑판으로 내려가서 상황이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공격 지시를 내리도록 해. 준비는 갑판장이 다 해놨을 거야.”
“하지만 선장님, 그럼 선장님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보이지 않으면 상대방이 바로 이상함을 눈치챌 테니까.”
그게 안톤 선장이라면 겁을 먹을 것이고, 안톤 선장이 배신하게 만든 누군가라면 바로 우리가 눈치챘다고 생각하겠지.
잠시 후, 우르타의 외침이 다시 들려왔다.
“게브너 상선단 모두 정선했습니다. 현재 투묘 중입니다!”
어라? 투묘까지 한다고?
투묘를 한다는 것은 교전이 벌어질 경우 얌전히 얻어맞겠다는 말이랑 다를 바가 없다.
그럼 확실히 우리를 어떻게 해보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
“어떻게 할까요?”
“후우, 리버티는 후방 1km에 대기, 피오렐은 좌측, 드라이언은 우측을 경계하고 우리는….”
잠시 말을 끊었더니 오펜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신시엘라에 최대한 가깝게 정선한다.”
“알겠습니다.”
***
신시엘라의 좌현과 오트라스의 좌현 사이의 거리는 고작 30m가량, 접현을 하기에도, 포를 쏘기에도 애매한 거리였다.
선교에서 내려온 나는 중앙 갑판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시엘라의 이곳저곳을 노려보던 네이선에게 말했다.
“갑판장, 단정 내려. 두 척으로 간다. 한 척은 돌격대장과 돌격대원 6명, 한 척은 나와 갑판장, 돌격대원 둘이 탄다.”
“직접 가십니까?”
당연한 말이다.
왕녀님을 모셔야 하는데 내가 가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를 보낼까?
그 전에 의문점 정도는 확인해야겠지만 말이야.
네이선에게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준 나는 좌현의 난간에 다가섰다.
맨눈으로도 신시엘라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 얼굴이 보인다.
“안톤 선장님!”
아랫배에 힘을 주고 힘껏 소리를 질렀다.
신시엘라의 갑판 위에서 움직이던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나를 보더니 몇 사람이 선실 방향으로 뛰어간다.
뭐지? 진짜 아무 일도 없나?
잠시 후, 안톤으로 보이는 남자가 난간에 다가오더니 손을 흔들었다.
“리안 선단장님!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나는 마주 손을 흔들어준 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망원경을 들어 상대를 살폈다.
확실히 안톤 선장이 맞았다.
그리고 그 뒤에 선 두 사람은 트레비스와 가빈?!
뭐야, 두 사람이 왜 저기에 있어?
“어떻게 된 겁니까?! 두 사람이 왜 거기에 있어요?!”
“아! 아가, 물건! 물건을 가지러 넘어오시면 설명 드리겠습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뒤로 돌아서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그레이그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전혀 이상하지 않아. 일단 트레비스와 가빈도 있고.”
“흠….”
그때 옆에 있던 네이선이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장님, 준비 끝났습니다. 단정에 승선시킬까요?”
“그래, 가 봐야지.”
이쪽은 전투준비를 마친 상태고 두 선박 사이의 거리는 고작 30m 정도다.
위급한 상황이 되더라도 네이선과 행크는 물론 돌격대원 8명이면 바다에 뛰어들 여유는 만들어 낼 수 있겠지.
***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뱃전에서 안톤 선장이 직접 손을 내밀어 나를 끌어당겨 주었다.
“신시엘라에 승선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리안 스펜서 남작님. 방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닙니다. 무리한 부탁인데 이렇게 완벽하게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하, 조금 놀라셨지요? 두 사람을 태운 배가 더 이상 말려들기 싫다고 하는 바람에 화물과 두 사람을 옮기고 먼저 보냈습니다.”
나는 주변을 돌격대원들이 완벽하게 장악한 것을 확인하고 작게 속삭였다.
“혹시 그 소형 상선이 화물을 알아챈 겁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만 그자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자이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깨달은 모양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밀수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기랄.
이런 불안 요소가 남겨지는 건 너무 싫은데.
하지만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틀, 아니, 거의 사흘을 상자 안에 갇혀있는 왕녀님은 지금 건강상에 치명적인 문제를 겪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트레비스와 가빈이 남몰래 죽지 않을 정도의 물은 공급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육체의 고통보다 정신, 그 부분은 내가 정말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물론 그녀의 사정이 환경적으로는 내가 테일러에게 당한 고문보다는 낫겠지만, 그렇다고 사흘을 쉽게 버틸 수 있는 환경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물건 상태가 걱정돼서 회포를 나누기는 어렵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 뵐 때는 제가 크게 한번 대접하도록 하죠.”
“하하하, 어차피 거래 아니겠습니까? 어찌 되었건 일이 이렇게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무사 항해를 기원합니다, 안톤 선장님.”
“남작님께도 바다의 신의 가호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안톤 선장과 악수를 나눈 나는 돌격대원 두 사람에게 눈짓으로 이미 준비된 상자를 들게 했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한 트레비스와 가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이만 돌아가자.”
“네, 선장님!”
두 사람의 얼굴에 뿌듯함이 감도는 것을 보니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진짜 저 상자에 왕녀님이 있기는 한 걸까?
일단 상자를 드는 두 사람이 너무 수월하게 들어 올리기도 하고, 정말 그런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명의 기운이랄까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
우리가 다시 단정을 타고 오트라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신시엘라를 포함한 게브너 상단의 선박들은 닻을 끌어 올리고 항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단정을 끌어올릴 때쯤에는 돛을 펼쳐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갑판장은 전원 무장 해제시키고 평시 상태로 돌려. 그리고 각 함선에 신호, 우리도 출항한다. 선두부터 오트라스, 피오렐, 리버티, 드라이언 순서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트레비스와 가빈은 힘들겠지만 상자 들고 선장실로 옮겨줘.”
“넷! 선장님.”
“알겠습니다.”
잠시 후 선장실로 상자를 옮긴 두 사람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왕녀님의 상태 확인이 먼저였다.
“아가씨, 리안입니다. 괜찮으십니까?”
“…….”
“아가씨?”
나는 와락 걱정이 들어 급히 상자의 뚜껑을 뜯었다.
상자 안에는 형편없이 마른, 심지어 그 마른 몸을 최대한 웅크린 왕녀님이 창백한 얼굴로 구겨져 있었다.
예의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급히 그녀의 목을 받쳐 들며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야?! 언제부터 이러셨어?!”
“네? 그게 무슨, 아니?!”
“서, 선장님, 분명히 오후까지만 해도 기력이 쇠하기는 했지만 말씀하시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당장 의무실로 가서 닥터 모셔와!”
“넵!”
“잠깐!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하면 내가 넘어져서 발목이 부러진 것 같다고 해!”
어떻게 넘어지면 발목이 부러지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알아듣겠지.
“네? 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허겁지겁 방을 뛰쳐나가는 순간 죽은 듯이 감겨있던 그녀의 눈이 떨리며 살짝 떠졌다.
“왕녀, 아니,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안 서, 선단장인가?”
“네! 리안입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고, 고맙네. 내, 내가 너무 큰 폐를….”
“그만 말씀하십시오! 일단 몸을 일으키실 수 있으십니까?”
잘게 떨리며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하는 그녀의 입술이 형편없이 부르터 있었다.
이제야 자세히 보이는 그녀의 피부조차 군데군데 벗겨지고 얼룩이 진 것이 정상적인 상태는 확실히 아니었다.
몸을 가누기는커녕 목조차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내 침대에 눕혔다.
안아 든 그녀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조금만 세게 쥐어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진짜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후작의 손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것일까?
왠지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가씨, 어디가 가장 불편하십니까?”
“…….”
젠장! 닥터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
“흐음.”
“닥터, 어때요?”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아. 단지 영양이 굉장히 부족하고 피로가 쌓인 것으로 보이네. 며칠 정도 잘 먹고 푹 쉬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네만.”
“그렇게 대충 말하지 마시고! 제대로 진찰 하신 거 맞아요?”
오늘따라 닥터 롱베르도 다른 보통 의사라는 작자들처럼 돌팔이로 보인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내가 이 아가씨의 옷을 벗겨놓고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왜 정신을 못 차려요?!”
“허어, 자네 오늘따라 자네답지 않군? 흥분을 좀 가라앉히게.”
그게 무슨 속 편한 소리인가 싶은데, 생각해 보니 닥터는 왕녀님의 정확한 정체도 모르는구나.
내가 몇 번 심호흡하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자, 그 모습을 보던 롱베르 씨가 말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아마 긴장이 풀려서가 아닐까 싶네. 분명히 자네와 제정신으로 대화를 했다고 하지 않았나?”
고작 두 마디지만 말을 하기는 했지.
“그렇긴 하죠.”
“일단 수분이 굉장히 부족해 보이니 깨끗한 수건으로 입술을 계속 축여주면 될걸세.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그 정도면 충분해.”
“그다음은요?”
“응? 정신을 차리면 의무실로 옮기도록 하지. 내가 특별히 신경을 써 줄테니.”
“안 됩니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깜짝이야. 환자가 놀라서 깨겠네. 도대체 왜 그러는 게야?”
아, 왜 이렇게 진정이 안 되지?
그리고 왕녀님을 도대체 어떻게 한담?
“일단 이 아가씨가 제 방에 있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아, 부목이랑 붕대 가지고 오셨죠?”
“그래, 발목이 부러졌다는 헛소리를 하길래 가지고는 왔네만, 부러지기는커녕 접질린 것 같지도 않구만?”
“사람이 넘어지면 최대로 어느 정도까지 다칠 수 있어요?”
닥터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되물었다.
“그냥 걷다가 말인가?”
“네.”
“뭐, 발목이 접질릴 수 있겠지? 바닥에 뭔가 있었다면 부러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그런 상황은 아닐 테고.”
“그럼 대충 발목에 붕대 좀 감아줘요. 부목은 치우고. 심하게 접질려서 당분간 걷기 힘든 거로 하죠.”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군. 어찌 되었건 알겠네. 오른쪽으로 해줄까, 왼쪽으로 해줄까?”
“아무 데나요.”
나는 붕대를 감는 닥터에게 몇 번째 신신당부했다.
“절대, 절대로 이 아가씨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진짜 우리 다 죽을 수도 있어요.”
“아, 알겠다니까. 그런데 이 아가씨가 누군데 그러나? 혹시 자네 애인인가?”
이 아저씨가 큰일 날 소리를!
그런데 닥터에게는 알려줘도 되겠지?
어차피 한동안 왕녀님을 진찰하셔야 하는데 궁금증을 계속 안고 계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
“큰일 날 말씀은 하지 마시구요. 이분은 스코타 후작의 외손녀인 엘리안 왕녀님이십니다.”
“스코타 후작의 외손녀?! 응? 그런데 왜 왕녀인가?”
“프레티아 전대 국왕의 따님이십니다.”
붕대를 감던 손이 멈췄다.
“……자네 지금 농담하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제가 왜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겠어요?”
“허, 허허, 미칠 노릇이군. 스코타 후작의 외손녀만 해도 큰일인데 공주님이라고?”
“후우, 진짜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걸까요?”
말없이 반쯤 풀려버린 붕대를 다시 꼼꼼하게 감은 닥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 지금, 그런 왕녀님과 같은 방에서 생활하겠다고 말하는 건가?”
어?
깜빡하고 있었다!
나 심지어 왕녀님을 안아 들어 옮기고 머리카락 치운다고 얼굴도 쓰다듬었는데?!
깨어나자마자 나를 죽이겠다고 방방 뛰시는 거 아냐?
아니지, 어차피 나를 못 죽일 건 아니까 설마 자살 시도를 한다거나…?
이건 도대체 누구랑 상의해야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