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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16화 (317/420)

316화. 불편한 동거의 시작

“끄응…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 정말 괜찮을까? 요?”

그레이그가 불편함 심정을 미간으로 표시하며 중얼거렸고, 네이선이 죽은 듯이 잠든 엘리안 왕녀를 힐끔거리며 불안함을 토로했다.

“넌 말 하지 마.”

“…어?! 아니, 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오물거리는 우르타를 미리 제지하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저 방정맞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상상도 못 하겠다.

내가 다쳤다는 말에 하나씩 달려온 간부들이 복작복작거린다.

선교를 맡은 오펜 빼고 다 달려온 모양이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대책 회의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다들 진정하고, 방금 말한 대로 아가씨의 존재는 알려져서는 안 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야 사태의 심각성을 아니까 알아서 입을 조심하겠지만, 선원들은 어디에서 말이 샐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선원 중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후작의 첩자 때문이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기는 조금 민망하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다들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선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네만, 아무리 그래도 젊은 아가씨와 한방을 쓰는 건 좀….”

“으히히히!”

닥터 롱베르의 우려 섞인 말에 우르타가 음흉한 웃음을 흘린다.

저 녀석은 매번 맞으면서도 자기가 왜 맞는지 모르는 걸까?

“하지만 선장님 말씀이 맞기는 합니다. 최소한 아가씨에게 식사라도 제공을 해야 할 텐데, 어디에 모시더라도 선원들 눈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선장실이라면 조리장님이 직접 선장님 식사와 함께 가지고 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지금 선장님은 대외적으로 다리를 다친 상태 아닙니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선원들은 선장실에 올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게론드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하자 네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그게 최선이기는 하죠.”

다들 기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사실 제일 난감한 사람은 바로 나라고!

“선장님, 얼굴에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어디 아프십니까아?”

“푸웁!”

우르타의 말에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행크가 분수를 뿜어냈다.

…내가 언젠가는 저놈을 마스트에 거꾸로 매달고 말 거다.

***

“…리안 선단장.”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깨니, 힘겨운 모습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엘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런! 왕녀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여기가 어딘가?”

“오트라스 호의 선장실입니다. 지금은 케이라 왕국의 로제 항구로 향하는 중입니다.”

“그래, 고맙고 미안하네.”

“이러지 말고 좀 누워 계십시오. 부드러운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몸이 너무 마르셨습니다.”

희미한 촛불 덕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약간 괴기스러울 정도로 말라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람 얼굴이 저렇게 되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탈출을 준비하시려면 체력을 안배하셨어야지요. 정말 위험했단 말입니다.”

말을 하다 보니 왜인지 화가 나서 의도치 않게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덕분에 말을 끝내며 혹시라도 그녀가 자존심이 상하거나 화를 내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후우, 자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탈출이 성공해야 체력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나? 최대한 몸무게를 줄이다 보니 이렇게 된 것뿐이네. 혹시 물을 마실 수 있을까?”

“아, 지금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작은 상자에 숨어서 탈출하기 위해 일부러 체중을 줄였던 모양이다.

아마 용변 처리 문제도 있으니 한동안은 아예 굶기까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상태에서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물도 제대로 못 마셨으니 빈사 상태에 이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잠시만 여기에 계십시오.”

닥터가 마련해 준 목발을 들고 일어서는데 그녀의 말이 뒷덜미를 잡았다.

“발은 어찌 된 건가? 다친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왕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장한 것뿐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

문을 잠그고 나와서 선장실에서 그나마 가까운 갑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네이선.”

“어?”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네이선의 얼굴이 나타났다.

머리를 보면 자고 있었던 모양인데, 무슨 반응이 이렇게 빨라?

“미안한데, 조리장에게 간단한 요깃거리 좀. 그리고 왕녀님을 위한 스프도.”

“아, 알았어.”

내 말을 이해한 네이선이 빠른 걸음으로 떠났고,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방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접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물론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상태로 밖까지 들리게 소리를 낼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것은 조심해야 하니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좀 누워 계십시오. 음식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나에 대해서는 몇 명이나 알고 있는가?”

“간부들에게야 어쩔 수 없이 알렸습니다만, 그 외에는 아가씨를 호위했던 두 명이 전부입니다. 믿을만한 자들이니 염려 마십시오.”

“그런가.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건가? 여기는 선장실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우,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그게, 저… 섬에 도착할 때까지는 여기에서 지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의심을 피하기 위해 당분간 섬으로 가는 것을 피할 작정이 아니었던가? 지금도 다른 항구로 가는 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이 방이 아니라면 항해 중에 선원들의 눈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네가 불편하지 않겠나? 선장이 선장실을… 응?”

그녀의 묘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설마, 자네와 함께 지내야 하는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조차 말하는 것만큼은 당당하던 그녀의 음성이 살짝 떨리며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정말 대답하기가 죽기만큼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룬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 않는가.

“…네, 하지만 아가씨,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고….”

“그리하시게.”

“죄송합니다! 다른 방법을, 네?”

그동안 준비했던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입에 시동을 거는 데 바로 말을 잘라버리는 그녀의 말에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그리고 사과를 하면서 깨달았다.

그녀가 변명 따위는 듣지도 않고 이미 허락을 했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동안 변명을 하고 설득을 해도, 그녀의 동의를 얻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고, 그녀의 눈 역시 고요했다.

양 볼이 살짝 상기된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아마 기분 탓이겠지.

***

“선장님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조리장 비에론이 테이블 위에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놓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귀찮겠지만 앞으로도 부탁해.”

조리장이 떠나고 문단속을 마친 나는 여전히 침대에 위태로운 모습으로 앉아있는 엘리안에게 다가갔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다른 음식은 부담스러운 것 같고, 스프라도 조금 드시지 않겠습니까?”

“혹시 이리 가져다줄 수는 없겠나? 일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군.”

난 군말 없이 스프가 담긴 식기와 스푼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몸이 이 모양이니 일어서서 걸을 용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가져다준 스프를 몇 번 떠먹던 그녀가 잠시 주저하더니 물었다.

“혹시, 그러니까 치, 침대도 같이, 써야 하는가?”

“아, 아닙니다! 어찌 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허나 침대가 아니면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보이네만.”

당연한 말이었다.

선장실에 굳이 침대를 두 개나 설치할 이유는 없으니까.

“저는 여기에 있는 의자들을 붙이고 자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그녀는 당황스러운 신음성을 흘렸지만 차마 침대를 함께 쓰자는 제안은 못 하겠는지 다시 스프를 먹는 것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계산을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야.

이번 사건에서 내가 감수해야 했던 피해는 끔찍할 정도였다.

돈도 돈이지만 받은 스트레스와 정신노동, 사회적 자원(도움)의 사용까지 계산하면 절대로 싸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녀가 진심으로 섬에 숨어 살기를 바란다면 이후로 내가 감수해야 할 위험까지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폰테 섬은 외부에 개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아가씨, 아니, 왕녀님. 지금도 제가 발견한 폰테 섬에 가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네.”

“아가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그 섬은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곳입니다. 살기에 매우 불편하고 부족한 것도 많은 곳이죠. 물론 위험하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릴 필요조차 없을 지경입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섬에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 내가 내 의지로 내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곳이, 그곳 외에 또 있겠나?”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준 후에 입을 열었다.

“왕녀님의 고향, 프레티아 왕국으로 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안 왕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네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왕녀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조금 실망스럽군.”

“하지만 왕녀님,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물론 나는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다.

프레티아 왕국으로 간다면, 국왕이 된 동생의 뜻에 따라 전리품, 혹은 포상처럼 늙고 영향력 있는 귀족에게 하사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일이 그렇게 될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꼭 이 예상이 100% 확률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도 없다.

일단 프레티아 왕국은 내전으로 엉망진창인 상태이니 그녀가 힘을 모으면 아무리 국왕이라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기 어렵게 할 수 있다.

게다가 내가 듣기로 그녀의 동생은 아직 매우 어리고, 이는 현실의 권력 공백을 그녀가 꿰찰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

드물기는 하지만 왕실의 여성이 권력을 쥔 사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런 부분을 설명하자 말없이 내 말을 들어주던 엘리안 왕녀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렇게 해서 내게 뭐가 남는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힘을 얻으시면 본인의 의지대로 마음에 드는 자와 결혼을 하셔도 되고, 하고 싶으신 일을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결국 자네도 여자의 목표라고 할 만한 것은 결혼이라고 생각하는군.”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이런 젠장, 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란 말인가?

세상의 눈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남성들과의 자유로운 만남을 가지는 것?

내가 딱히 변명할 말이 없어 말을 잃자,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프레티아 왕국으로 돌아가야 자네는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얻을 수 있겠군.”

글쎄요, 왕녀님이 프레티아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저는 후작에게 상당히 신뢰를 잃을 게 분명해서 말이죠, 그건 거의 손실 보전이 힘들 것 같은데?

“꼭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사실 그냥 넘기기에 이번 일로 입은 피해가 크기는 합니다. 주신다면 감사히 받을 뿐이죠.”

“굳이 프레티아 왕국에 가지 않더라도 내가 보상을 준비해 두었네. 만족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상황이 그러해서 특별히 챙기지는 못했네만….”

잉?

무게와 부피에 대한 부담을 줄이려고 장신구와 의복도 최소한으로 하고 몸무게까지 감량했던 분이 그 와중에도 성공 보수를 준비하셨다는 말이지?

그런데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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