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17화 (318/420)

317화. 흔들리는 배와 흔들리는 마음

“제독, 여기서 뭐 하십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얼굴의 돌격대원이었다.

어깨에 로프 더미를 메고 있는 것을 보니 일을 하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람이나 쐬려고.”

“갑판장을 불러올까요?”

“아니.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하도록 해.”

“아, 네.”

내 반응이 석연치 않았기 때문인지 돌격대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서 멀어졌다.

“하아….”

단전 아래 그 어딘가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며 방금 전에 선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15분 전, 선교 -

“선장님? 언제부터 올라와 계셨습니까?”

“어? 아까, 아니, 방금.”

“네?”

오펜에게 지휘권을 인계받은 그레이그가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등항해사가 특이사항은 보고하지 않았는데요.”

인사를 하려고 내 옆으로 다가오던 오펜이 움찔했다.

그런 걸 물어보려면 애가 들어간 다음에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야?

하긴, 뱃놈들에게 무슨 예의까지 바라겠냐마는.

“저….”

“어, 수고했어, 이등항해사. 이만 들어가.”

“네….”

돌아서는 오펜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무래도 자기가 뭔가 놓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등항해사!”

“네, 선장님!”

“쓸데없는 걱정 말고 쉬어. 오늘 아주 잘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딱히 잘할 것도 없다.

바람이 조금 강했지만 심한 수준은 아니었고, 파고도 1m 정도로 그리 높지 않았다.

순조롭고 지루한 항해에서 뭘 특별히 잘하고 못하고 할 게 있나?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가끔씩 돛이나 조절해주고 틀어지는 방위를 확인해서 조타수에게 침로만 바꾸라고 하면 되는데.

정규 항로로 복귀해서인지 드물게 다른 상선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경계를 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준 녀석도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약간 어깨가 처진 오펜이 자리를 떠나자 그레이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등항해사는 다 좋은데 마음이 너무 여립니다. 진짜 뱃사람이 되려면 아픔을 더 많이 겪어야 할 겁니다.”

글쎄? 길거리 출신에 자기를 부모님처럼 아껴주던 형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기까지 했는데, 얼마나 더 아파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고 저 녀석이 아프기를 바랄 수는 없지. 제발 말 좀 조심하게.”

“에이, 뭐 그 정도로 의기소침할 녀석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어이구, 그만하지.”

“그런데 진짜 왜 올라오신 겁니까?”

“어? 크흠, 선장이 선교 올라오는데 이유가 있나?”

“네?”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그레이그를 피해 괜히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방에 있기 어색해서 나와 있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말 그녀와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막상 둘이 되면 왜 이리 어색한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가 지불할 대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후… 오늘 아침 게론드의 보고를 토대로 계산할 때, 이번에 왕녀님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발생한 손실만 73만 로스에 달한다.

그로 인한 부수적인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50만 로스는 마이너스라고 봐야 한다.

거기에다가 사회적인 손실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200만, 어쩌면 그 이상의 손실을 본 거다.

그리고 그것을 커버할 수 있는, 그보다 더 클 수도 있는 가치는 딱 하나밖에 없다.

그나마 그레이그가 눈치는 없을지 몰라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무리 선교가 일반 선원들이 함부로 왔다 갔다 하는 곳은 아니지만, 조타수도 있고 아무래도 말이 새기 쉬운 곳이라서 왕녀님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아주 묘하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를 자꾸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결국 그 불쾌한 시선을 견디다 못한 내가 도망친 곳은 고작 우현 선수였다.

아닌 말로 손바닥만 한 배에서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다고 선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디 창고 같은 곳에 짱박힐 수도 없지 않나.

***

상황을 직접 보기 위해 선교를 내려갔던 그레이그가 내게 다가오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파고가 심상치 않군요. 방향이 좋지 않아서 흔들림도 꽤 있습니다.”

“지금 파고가 2m라고 했던가?”

“방금 전 보고 온 바로는 2.5m입니다.”

“피항할만한 곳은?”

“현 위치에서 남동쪽으로 향하면 일루딘 항구 인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바람과 파도가 좋지 않아서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빼서 어두운 하늘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잔뜩 찌푸린 것을 보니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기세다.

“쯧.”

“황천 대비를 시킬까요?”

“그렇게 하지. 갑판장에게 황천 대비시키고, 다른 배들에도 전달해.”

“알겠습니다.”

그레이그가 오펜에게 상세한 지시를 내리는 동안 나는 몸을 돌렸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지금 기상 상황은 왕녀님에게 전달을 해드려야겠지.

그리고 내 방의 집기들도 난장판이 되지 않도록 고정할 필요가 있으니까.

“일등항해사,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보고하게. 나는 선장실에 가 있겠네.”

“아, 알겠습니다.”

선장실에 들어가자 살짝 불안한 표정의 왕녀님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필요할 것 같아서 거금을 들여 사 놓기는 했지만, 나조차도 몇 페이지 읽지 않은 역사서였다.

저자라는 인간이 글을 쓰는 기본조차 안 되어있는 사람이지 뭔가?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딱딱한 서술형 문장으로 때려 박아놨으니 재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왔는가? 배가 평소보다 많이 흔들리는 것 같군.”

“네, 왕녀님. 지금 바깥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폭풍이 몰아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폭풍이라면 위험한 상황인가?”

“아직 폭풍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만약 폭풍이 오더라도 괜찮을 겁니다. 내해의 폭풍은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니까요.”

“믿고 있겠네. 혹시 내가 도와야 할 일이 있나?”

“아닙니다. 다만 제가 방 안의 집기들을 고정시켜야 해서 독서에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아니네, 그, 내가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살짝 상기된 표정의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며칠 식사를 제대로 했다고 전보다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손만 대도 부러질 것 같은 몸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몸에 근육이라는 것이 남아있기나 한 건지 궁금할 지경인 사람에게 뭘 시키겠나.

“그러면 조금 도와주시겠습니까?”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 그러지.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분명히 향수 같은 것은 가지고 오지도 못하셨을 텐데 왕녀님이 다가오자 풋풋한 사과 향 같은 것이 느껴진다.

***

내해가 비교적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폭풍이라는 것은 무섭다.

물론 우리 선단에 소속된 배들은 모두 중형, 혹은 중대형 선박으로 웬만한 폭풍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파고 보고!”

내가 소리를 지르자, 잠시 후 아래쪽에서 네이선이 소리를 질렀다.

“4.5m입니다!”

“전방 파도! 충돌!”

촤아아아악!

거대한 파도가 오트라스 호의 정면을 때리며 부서진다.

“일등항해사! 방향 확인해!”

“아직 괜찮습니다!”

“견시! 견시! 다른 선박 확인되나?!”

“으아앗! 180도 방향, 400! 피오렐 확인됩니다!”

“나머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얼굴에 잔뜩 튄 빗물과 바닷물을 한번 쓸어내리고 배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두운 데다 장대 같은 비까지 내려서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별 이상은 없어 보인다.

파도는 높지만 바람이 그리 강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드라이언은 물론이고 발드 선장이 이끄는 리버티도 겨우 이 정도에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비록 지금 시야에는 잡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너무 가까우면 서로 충돌하며 대참사가 발생할 수 있으니 차라리 안보이는 쪽이 나을 수도 있었다.

방향만 잘 잡으면 리버티 역시도 이 정도 파도는 혼자서 견딜 수 있으니까.

빗소리와 천둥소리, 파도 소리 사이에 퍼지는 선원들의 외침, 그리고 그 소리들을 압도하는 우당탕거리는 소리.

선내의 집기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면서 내는 소리다.

어, 물론 선원들이 굴러다니는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까지 구분하기는 힘들고.

그런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크게 들려왔다.

“…선장님!”

“어?!”

“이 와중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왜?”

“우현에 침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갑판장이 확인하러 갔구요!”

“어, 어, 잘했어.”

“선장님?”

그나저나 왕녀님은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다.

설마 넘어져서 다치거나 쓰러진 물건에 다치신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해진 상태라 균형을 잡거나 빠르게 피하는 것도 못 하실 텐데.

***

“왕녀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날이 밝으면서 폭풍이 가라앉자, 피곤하다는 핑계로 뒷정리를 그레이그에게 맡기고 급하게 선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난장판이 된 방이었다.

최대한 고정할 수 있는 건 고정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자잘한 것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굴러다닌다.

뒤이어 눈에 들어온 왕녀님은 피곤한 모습으로 이제 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나는 괜찮네. 그보다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미안하군. 도저히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어.”

“아닙니다, 다치지 않으셨으면 된 거죠. 어차피 폭풍을 지나오면 이런 잡동사니들이 엉망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내 말에 그녀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폭풍이었을 테니 당연히 한숨도 못 잤을 것이다.

“음, 나는 괜찮네. 자네야말로 밤새도록 시달렸을 텐데 오늘은 편하게 침대를 쓰게.”

세상에, 그녀와 같은 침대를?!

아니,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의 침대에서 잠을, 잠깐만, 저거 원래 내 침대잖아?

그렇지만 지금 저 이불에 그녀의 체온이….

잠시 불경한 상상을 하던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 나가봐야 합니다. 왕녀님이 무사하신지 확인만 하려고 온 겁니다.”

“피곤한 것 같아 보이네만.”

“아닙니다! 푹 쉬십시오!”

나는 재빨리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아무것도 아님에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정말 탈출할 때 입고 있었던 얇은 옷 하나밖에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내 옷을 적당히 걸쳐 입고 있었다.

당연히 사이즈가 말도 안 되게 차이 나기 때문에 소매와 바짓단은 둘둘 말아 올리고, 허리와 엉덩이 쪽 통은 몇 번이나 접어서 고정시켰기 때문에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흐트러진 그녀의 자세로 인해 살짝 드러나는 하얀 살결은….

내가 다시 선교에 올라가자 그레이그와 오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선장님?”

“어? 뭘 두고 가셨습니까?”

“상황은 어때?”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질문을 던지자, 그레이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답했다.

“우현 하부에 발생한 침수는 거의 수습했다고 합니다. 완전히 침수된 구역은 없고, 균열은 임시로 보수했으며 지금 물을 퍼내는 중입니다.”

그레이그의 보고가 끝나자 오펜이 말을 이었다.

“현재 손망실된 물품을 파악 중입니다. 폭풍으로 인해 부상자 일곱 명이 발생했지만 심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선의님께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음, 알았어. 다른 함선들은?”

“전 함선 무사합니다. 현재 대형을 맞추기 위해 천천히 운항하고 있습니다. 최후미에 있던 드라이언이 약 2,500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나는 뒤쪽에서 정렬 중인 피오렐과 리버티를 확인하고는 망원경을 들어 멀리 떨어진 드라이언 역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두 겉으로 보기에 큰 손상은 없어 보인다.

“현재 위치 파악은 했어?”

“네, 원래 항로보다 남쪽으로 많이 벗어난 모양입니다. 예정 날짜보다 이틀 정도 더 소요될 것 같습니다.”

“조리장 좀 호출하지.”

“넵.”

잠시 후 조리장 비에론이 떡 진 머리를 하고 선교로 올라왔다.

“부르셨습니까, 선장님.”

“아, 조리장. 간밤에 식료품 손실은 어때?”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못 먹게 된 비스킷이 두 통 정도, 조만간 부패할 것으로 보이는 염장 고기가 반 통정도 됩니다. 식수는 한 통을 잃어버렸습니다.”

“날짜로는?”

“평소 배식 상태를 유지할 경우 닷새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이틀이 더 걸리면 도착 예정 시간이 언제야?

“나흘 후입니다.”

“간당간당하네.”

내가 잠시 고민을 하고 있자 오펜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선장님, 식료품이 빠듯하면 다른 함선에서 옮겨오면 어떨까요? 한 척 정도는 여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드라이언까지 화물을 채워 넣었는데 여유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다른 함선에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해상에서 물자를 주고받는 일 자체도 워낙 고역이다.

당장 우리가 굶어 죽을 상황이 아닌 이상 선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내가 부드럽게 오펜의 제안을 기각하자 그레이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배식을 조금 줄이시죠. 한 10%만 줄여도 하루 정도 더 버틸 수 있지 않습니까? 선원들이야 귀신같이 양이 줄어든 것을 느끼겠지만 그 정도야 뭐.”

“어휴, 굳이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별일 없으면 식량이 부족하지도 않을 텐데.”

두 사람의 제안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조리장은 상하기 쉬울 것 같은 것을 최대한 빨리 배급해서 치워. 양은 평소와 같이 하고.”

“그렇게 되면 만일의 사태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만.”

“어차피 항구는 아니더라도 육지까지 고작 하룻길이고, 태풍이 또 오지 않는 이상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

원래 머피의 법칙은 동서양은 물론이고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도 통용된다는 것을 깜빡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