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이유
침입자를 공격할 타이밍을 놓친 잭들이 ‘어어’ 하는 사이에 네이선, 우르타, 아인데프, 베기어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쩌다 보니 자기네 아지트에서 수적으로도, 무장으로도 열세가 되어버린 잭들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당황이 묻어났다.
“누, 누군데 보스를 오라 가라 하는 거… 요?”
그나마 조금 눈치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호기롭게 말을 하다가 내 복장을 보고 말꼬리를 고쳤다.
귀족들이 입는 복장은 실용성과 워낙 거리가 있다 보니 챙겨 입지는 못하지만, 나름 때 빼고 광낸 선장의 복장은 밑바닥 인생들이 함부로 하기에 어려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인내심을 발휘하게 하는 이유의 절반 정도는 칼을 뽑아 들고 흉흉한 기세를 풀풀 날리는 네이선과 그 일당이겠지만 말이다.
덜컥.
우르르르…!
하지만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뒷문이 열리고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날붙이를 들고 합류하자 기세가 죽었던 네 사람이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어?! 선장, 뒤!”
급박한 우르타의 말에 뒤를 보니 우리가 들어온 문으로도 험악한 사내들이 보기만 해도 위험해 보이는 물건들을 들고 속속 입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새로 나타난 얼굴 중 낯익은 한 남자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이름이 뭐였지? 오랜만이야!”
“…당신은?”
“아직 발레아스 아저씨가 그쪽 보스라면 좀 불러주지 그래?”
독보적으로 험악한 인상을 가진 남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왼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 무기 내려. 보스의 손님이다.”
그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잭들은 주저하면서도 무기를 든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저 남자, 이전에 봤을 때도 한자리하는 것 같더니 조직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남자는 기분이 꽤 상했는지 빈정거리듯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거, 올 때마다 꼭 이렇게 요란하게 할 것 없잖소? 꼬리에 불붙은 송아지 새끼도 아니고.”
하지만 그는 곧 낯빛이 하얗게 질리면서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고 말았는데, 다름 아닌 네이선 때문이었다.
“그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스펜서 남작님이다. 네놈 따위가 함부로 입에 올려도 되는 분이 아니야.”
물론 그 내용도 무서웠지만, 그보다 네이선이 뿜어내는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옆에 있는 나도 소름이 돋을 정도니 그 기운을 정면으로 받은 저 남자는 보이지 않는 칼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일 거다.
“아, 알겠소.”
쥐어짜듯이 겨우 대답한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문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에게 손짓했다.
“너는 빨리 가서 보스 모셔와. 전에 방문했던 애송, 아니, 나, 남작님이 오셨다고 전해라.”
“네? 아, 네.”
생각해보니 나 남작이었지.
얼떨결에 받은 작위인데다가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어서 나조차도 종종 까먹는다.
“좁아터진 곳에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좀 나가지?”
어색해진 공기가 싫어서 한마디를 하자, 얼굴은 험악하게 생긴 남자들이 눈치를 본다.
“다들 나가봐. 어, 나, 남작님? 이쪽으로 앉으시죠.”
낯익은 잭의 말이 떨어지자 덩치들이 슬금슬금 앞뒷문으로 사라졌고, 나는 그가 소매로 닦은 의자로 가서 앉았다.
“이름이 뭐였더라? 잭이라는 헛소리는 하지 말고.”
“네, 베롯입니다.”
“그래, 베롯. 보아하니 조직에서 힘깨나 쓰는 모양이야? 전에도 보니까 아저씨가 꽤 신뢰하는 것 같던데.”
“보스 밑에서 잡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한동안 베롯과 잡담을 하고 있으니, 문이 벌컥 열리면서 걸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여어, 리안! 잘 살아 있었냐?”
“아저씨도 여전하네요?”
“어허허, 내가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게 몇 년인데? 그보다 오늘은 무슨 일이야?”
말투는 똑같지만, 표정이 뭔가 어색하다.
자꾸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왜 자꾸 눈치를 봐요?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요?”
“어? 아, 그, 뭐냐…. 내가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네가 남작이라고….”
“아, 남작 맞아요. 얼마 전에 있었던 토벌전이 끝나고 벨로키나 왕실에서 받았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코타 후작의 봉신이지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지, 진짜 남작님이 되었, 아니, 되셨다는 겁니까?”
화들짝 놀라는 발레아스 아저씨의 표정이 웃기다.
그리고 갑자기 극존대로 바꾸는 말투는 더 웃겼다.
“으하하하하, 그게 뭐예요? 편하게 해요, 편하게.”
“아무리 그래도 이제 귀족 나으리신데….”
“귀족이라고 밥 안 먹고 똥 안 쌉니까? 그런 거로 불편하기 싫으니까 편하게 하세요.”
사실 그렇다.
공식적이고 다른 귀족들이 보는 자리라면 몰라도,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낯간지럽게 존칭을 듣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될까?”
“물론이죠.”
“그러면 나야 고맙고.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데?”
“요즘 치안은 어때요?”
“응? 갑자기 무슨 치안? 요즘은 나도 자리 잡아서 딱히 분쟁거리도 없는데?”
“뒷골목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난민들 말이에요. 여기까지도 꽤 밀려왔을 것 같은데.”
“아아, 그거야 좀 그렇지. 이제 곧 겨울이라서 꽤나 많이 죽어 나가지 않을까 싶어.”
“흠, 그래서 말인데요….”
내 이야기가 끝나자 발레아스 아저씨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침도 떨어진다, 더럽게.
“그, 그러니까 네가 그 소문의 폰테 섬을 발견한 사람? 게다가 총독이라고?!”
“총독이라고 해봐야 아무것도 없는 섬의 총독이 뭐가 있기나 하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총독! 총독 아니냐! 세상에 총독이라니! 몇 년 전의 그 발랑 까진 꼬마가 총도오옥?!”
“아오, 더러워. 침 튀지 말고, 돼요 안 돼요?”
“어, 아, 그래, 미안하다. 안될 것은 없다만, 사람을 많이 모으면 아무래도 관리들 눈치가 보인다는 말이지.”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발레아스 아저씨는 밀수업자이고 장물아비이며 뒷골목 조직의 보스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치안 담당자들이 곱게 볼 리가 없지.
난민 모집은 난리가 났던 프레티아 왕국이나, 그 옆의 바티아넨 왕국 쪽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왕녀님을 빼돌린 것이 아닌지 의심을 받는 판에 괜히 의심스러운 출입항 기록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단순하게 이주민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장거리 항해를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건강 상태를 가지고, 과거 기록이 좀 깨끗한 사람이 필요한 거란 말이다.
괜히 타국의 첩자나 사이코 연쇄살인마, 전염병에 걸린 놈 등을 굳이 이주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부분은 내가 한번 해결해 볼게요.”
“어? 그게 될까?”
“귀족들에게야 씨알도 안 먹히는 단승남작이지만, 치안관이나 행정관 정도라면 어느 정도 먹히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도 난민들 때문에 골치 아플 거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뭐, 그 부분은 그럼 네가 관리 놈들을 처리한 다음에 이야기해 주도록 하고. 혹시 다른 건 없냐? 저번에 가지고 왔던 것처럼 뭐….”
본성이 어디 가지는 않는지 아저씨의 눈이 교활하게 빛난다.
전에 왔을 때처럼 대박이라고 할만한 장물을 원하는 모양이다.
“없어요, 그딴 거. 그것보다 전쟁 소식은 뭐 새로운 거 없어요? 시논 섬 방향 말고 일레드 왕국 서해안 쪽이요. 해상봉쇄를 했다고 들었는데.”
“어휴, 말도 마라. 지금 여기 로제 항구를 기점으로 동쪽은 난장판이야. 벨로키나 - 쿠샤 연합군은 해상봉쇄를 포기하고 돌아갔고, 항구에서 풀려난 일레드 왕국 군함들이 자국 선박이 아니면 대놓고 두들겨 패는 모양이야. 프레티아 왕국은 내전에서 입은 피해를 수습하느라 일레드 왕국과 말싸움할 여력도 없고, 바티아넨 왕국은 너도 알다시피 워낙 힘이 없으니까.”
예상대로였다.
이대로 전쟁이 흘러가면 결국 벨로키나 - 쿠샤 연합군의 판정패다.
이 판을 엎으려면 대해전이라도 벌여서 일발 역전을 노려야 하는데, 당장 전쟁을 주도하던 스코타 후작이 와병 중이니 그마저도 힘들 거다.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데 오늘은 영감님과 함께 오지 않았냐? 그 사이에 꼴까닥 하신 건 아니지?”
“어….”
갑자기 튀어나온 에른스트 부선장에 대한 안부 인사에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실실 웃던 발레아스 아저씨도 천천히 인상이 굳었다.
“뭐야, 농담이라고. 그렇게까지 정색할 건 없잖아?”
“…돌아가셨수다.”
내 대신 대답을 한 사람은 네이선이었다.
고마웠다.
차마 그 사람의 죽음을 내 입에 담고 싶지 않았으니까.
“허어, 진짜 천년만년 살 것 같던 영감님도 결국 가시는구만. 힘들었겠다.”
“…지나간 일이에요.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그래.”
***
발레아스 아저씨와 헤어지고 바로 찾아간 로제 항구의 치안관은 내 제안에 쌍수를 들고 반겼다.
“남작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로서는 감사할 일이죠. 그렇지 않아도 계속 몰려드는 난민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난민들을 겨우내 먹이고 입히려면 돈이….”
나는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내 옆에 선 아인델프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아인델프가 미리 준비한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남작님께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선발하고 보살피는 것은 따로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치안관께서는 그들이 행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도록 편의를 조금 봐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소소하지만 행정비용이라고 생각하고 넣어두시지요.”
“어험, 그런 일은 아무래도 제가 직접….”
재빨리 주머니를 확인하고는 더 욕심을 부리는 치안관에게 쐐기를 박았다.
“쓸데없는 욕심은 부리지 말지. 바티아넨이나 프레티아 쪽의 바다에 밸로키나 왕국의 깃발들 달고 직접 들어가기는 힘들다고는 하지만, 번거로운 방법을 쓰면 못 갈 것도 없다는 것을 알 텐데?”
“그, 그게… 아, 아닙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무런 잡음도 나오지 않게 잘 처리해 놓겠습니다!”
치안관에게 확답과 함께 이런 사항이 명시된 허가서를 받아 나오는 길에 아인델프가 묘한 감탄을 했다.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자의 욕심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는데.”
“어휴, 말도 마. 이 옷 엄청 불편한 거 알아?”
“으흐흐, 잘 어울리십니다. 제독.”
베기어 함장의 말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타이트한 목 부분의 옷을 당겼다 놓았다.
로제 항구의 치안관과는 일면식도 없다 보니 급하게 귀족들이 자주 입는 의상을 맞춰 입었던 것이다.
우르타는 그냥 국왕으로부터 받은 임명장을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떤 귀족이 그런 것을 일일이 들고 다니며 평민들에게 확인시켜주나?
귀족은 그냥 보는 순간 ‘아, 귀족이구나!’라는 느낌이 와야 하는 법이다.
“네이선은 이 허가서랑 자금을 발레아스 아저씨에게 전달해 줘.”
“알겠습니다, 선장님.”
“나도 갈래! 요!”
뭘 기대하는지 눈이 반짝거리는 우르타를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 같이 가면 심심하지는 않겠지.
“그래, 너도 가라.”
저놈은 여전히 내가 그동안 보여준 현대 물품을 뒷골목 암시장에서 구한 줄 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어떻게든 신기한 물건을 구하겠다고 뒷골목을 기웃거리다가 눈탱이를 맞고 오는 거다.
발레아스 아저씨라면 다른 놈들보다 적당히 하겠지. 뭐.
***
다음 기항지를 결정하기 위해 수리가 끝난 오트라스 호의 선장실에 모인 각 함선의 장들과 항해사들이 어이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발드 선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독, 농담이시죠?”
“아니. 이미 회계사에게 델라 항구에서 비싸게 팔릴만한 물건 위주로 알아보라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제 말은….”
발드 선장은 말을 하다 말고 한쪽에 자리한 왕녀님의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폰테 섬에 가기 전에 델라 항구에서 보급을 하는 게 좋아. 남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그리고 내가 오스팔트 가문과 이야기해 놓은 것도 있으니 제법 저렴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을 거야.”
합리적인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굴에 ‘반대’라고 써 붙여놓은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휴…. 네, 다들 말은 못 하니 제가 대표로 말하지요. 저기 앉아계시는 아가씨를 모시고 다시 델라 항구에 가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눈을 질끈 감은 발드 선장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내질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발드 선장의 말이 맞다.
지금도 이튼은 눈에 불을 켜고 왕녀님을 찾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델라 항구로 돌아가면 다시 미친개처럼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이튼은 이미 내게 상당히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
그 짓을 해서라도 왕녀님을 찾았다면 모두 용서될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끝내 왕녀님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간 내게 또다시 무리한 요구를 한다?
그 뒷수습도 문제지만, 이튼의 드높은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런 의심도 들겠지.
내가 만약 왕녀님을 빼돌렸더라도 이미 로제 항구건 어디건, 다른 곳에 잘 숨겼으니까 당당하게 다시 델라 항구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다.
설마 내가 왕녀님을 다시 모시고 델라 항구로 돌아왔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 거다.
지금 함선장들과 항해사들이 모두 반대하는 것처럼 누가 봐도 미친 짓이잖아.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전체 회의에서 듣기 힘들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어, 오펜 항해사?”
“오펜?”
“으응?”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오펜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지만,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분명히 우리는 델라 항구를 떠날 때 아가씨에 대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수색할 명분이 없죠. 그리고 애초에 설마 우리가 아가씨를 모시고 다시 델라 항구로 돌아올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내 가능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본인에 대한 이야기이니 한마디 하지.”
갑자기 내 뒤에서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반쯤 일으키고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와, 아가씨.”
반사적으로 나오려는 ‘왕녀님’이라는 단어를 황급히 집어넣으며 대답하자 그녀가 조용조용하게 말을 시작했다.
“이미 내가 실종된 지 보름이 넘었어. 이튼 경은 야심이 많고 능력도 있어 맡은 일이 꽤 많은 사람이지. 지금까지 그가 나를 찾는 일에 매달려있을 리가 없네. 특히나 지금은 후작 각하의 건강이 좋지 않은 시점이 아닌가. 아마 그에게는 나를 찾는 것보다 차기 후작의 눈에 드는 쪽이 더 중요할걸세.”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그리고 다들 잘 생각해봐. 내가 지금 이대로 폰테 섬으로 가면 이튼은 분명히 폰테 섬을 확인하려고 할 거야. 근시일 내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말이야. 나는 폰테 섬에 후작의 직접적인 눈이 닿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 싶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의견에 따라 주었으면 해.”
내 말에 갈등하던 인원들이 하나씩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크리스티앙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크리스티앙 항해사. 할 말이 있나?”
“만약, 만약입니다만, 그래도 혹시나 이전과 동등한 수준의 수색을 한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만약 입항 중에 수색을 한다면 그때는 피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크리스티앙의 우려가 아주 무시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가능성이 낮다고 무시했다가 무슨 꼴을 보는지 얼마 전 폭풍 때 확인하지 않았던가.
“아가씨를 숨길 거야.”
“네?”
“아가씨가 급히 숨을만한 공간은 마련해 뒀어. 수색하는 사람이 설혹 이튼이라도 선장실을 샅샅이 뒤질 수는 없지. 그러니까 만약 수색이 이루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책임자를 선장실로 불러서 잡담이나 하면 돼. 전폭적인 협조를 하는데도 내 방을 뒤지겠다고 하는 것은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니까 감히 그런 짓을 할 놈은 없을 거야. 그리고 이튼이라면 나와 아가씨가 같은 방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하지 않을까?”
말을 마치며 아가씨가 있는 방향, 그러니까 내가 요 며칠 동안 준비한 아가씨가 숨을만한 비밀 공간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갑자기 아가씨가 얼굴을 붉히며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