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격변
한참 출항 준비에 분주한 시간, 나는 세 명의 회계사와 함께하고 있었다.
최종 교역품 선적 내역, 선원들의 입출금 내역, 각 선박의 잔여 금액… 꼼꼼하게 훑어보기에는 만만치 않은 양이다.
게론드가 없이 이걸 내가 다 처리했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좋네, 조금씩 늘어도 괜히 전쟁에 휘말려서 애들 죽어 나가면서 목숨값 받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문제라면….”
세 사람의 눈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한다.
침대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엘리안 왕녀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이 보인다.
그녀 때문에 입은 손실은 고작 한두 번의 무역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으니.
“크흠.”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이만 마무리 하시겠습니까? 출항 전에 선장님께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여기 두 사람이 들어도 별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일에 여러 사람의 시간을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이제 곧 출항 시간이니 두 사람에게 적응할 시간도 필요할 거고….”
다시 말이 길어지는 게론드에게 손을 들어 말을 끊고 살짝 긴장한 표정의 머레이와 빌리를 보며 말했다.
“이미 게론드에게 들었겠지만 앞으로 빌리 회계사는 피오렐을, 머레이 회계사는 리버티의 개별 회계를 담당하게 될 거야. 어차피 교역과 보급에 관련된 것은 계속 게론드가 총괄하겠지만, 아무래도 일이 잦은 선원들의 입출금은 두 사람이 전담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게론드 선배님께 충분히 배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네.”
자신감 넘치는 빌리의 대답에 이어 무뚝뚝한 머레이가 대답하는 것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각자 담당 선박으로 이동하라고. 선장들에게는 이미 이야기 해 두었으니 앞으로는 선장과 이야기하면 될 거야. 어차피 각 선박 소속 승조원들의 급여나 상여금에 대해서는 선장들에게 일임했으니까. 짐은 이미 다 챙겨두었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한 두 사람이 떠나자 게론드는 아직도 비어있는 왼팔이 허전한지 헐렁이는 옷을 흔들다가 왕녀님에게 말했다.
“아가씨도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가씨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응?”
“나? 나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나도 당황했지만, 그 못지않게 당황한 엘리안 왕녀가 어색하게 걸어와서 테이블에 자리하자 게론드가 본론을 꺼냈다.
“선장님, 다음 기항지가 델라 항구, 아마 그다음은 폰테 섬이겠지요?”
“음,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렇게 되겠지. 아가씨를 계속 불편한 배에 모실 수는 없으니.”
폰테 섬이라고 해서 선장실보다 더 편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외간 남자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겠지.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왕성에서 탈출하고 후작 저택에서 탈출하면서 고생이라는 것을 충분히 경험한 왕녀님이 굳이 미개척지인 폰테 섬으로 가겠다고 하는 이유인 그 ‘자유’라는 것 말이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 따위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인데.
“아마도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폰테 섬에서의 생활은 어려울 겁니다. 특히 그곳에 있는 몇 안 되는 거주민들은 대부분 밑바닥 생활을 하던 사람이라 외로움을 느끼실 수도 있구요.”
게론드답지 않게 말을 걸렀지만, 외로움보다는 아마 위험이 더 클 거다.
아직 살이 덜 올라서 너무 마른 느낌은 있지만, 왕녀님은 귀족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다.
그녀를 보면, 끼니 걱정하며 사느라고 외모를 꾸밀 여유가 없는 평민 여자만 접하던 남자들의 눈이 돌아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폰테 섬에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니라서 그들에게 왕녀님이 노출된다면 사실 그녀의 안전을 책임지기가 쉽지 않다.
“나는 괜찮네. 필요하다면 내 손으로 직접 일을 하지. 무, 물론 그런 일을 해본 적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네.”
왕녀님이 황급히 대답했지만 게론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아가씨가 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요. 애초에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왔는데 서로 어울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지만….”
“그래서 말입니다, 선장님. 시니아를 데리고 가는 것은 어떨까요?”
“응?”
무슨 대화의 흐름이 이렇게 널을 뛰냐?
갑자기 여기에서 시니아 양이 왜 나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질문에 게론드는 눈을 빛내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아가씨 혼자서 그 섬에서 뭘 하겠습니까? 농사를 짓나요? 벌목을 합니까? 건물을 지을까요? 혹시 옷을 지을 줄은 아십니까? 하다못해 요리는요? 이대로 아가씨를 혼자 폰테 섬에 떨어뜨려 놓으면 왕녀님은 외로움 때문에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실 테니까요.”
거기까지 급하게 말하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신 게론드가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게 관심에서 멀어지면 위험하기도 하겠죠. 그곳에 미친놈이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시니아가 같이 있다면 많은 부분이 해결됩니다. 시니아는 비록 귀족 영애는 아니지만 충분한 교양을 쌓았으니 아가씨의 말동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어차피 누군가가 폰테 섬의 관리를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가씨는 절대로 선장님을 배신할 수 없는 사람이니, 관리를 아가씨가 맡고 회계와 관련된 부분은 시니아가 담당한다면 아주 적절하지 않을까요?”
이번만큼은 게론드의 말을 끊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반박할만한 구석이 전혀 없잖아.
억지로 흠을 잡는다면 여자 둘이 있어도 안전 문제는 여전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여자 하나보다는 둘 쪽이 낫다는 것은 명백하다.
난민들까지 모집해봐야 고작 수백 명이 거주하게 될 곳이다.
왕녀님이 똑똑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알고 있으니 섬의 관리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 세상의 평민들은 뭐랄까, 지배받는 것에 익숙하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귀족, 혹은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는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심 같은 게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려 후작가의 외손녀, 아니, 굳이 그 정체를 밝히지 않더라도 누가 봐도 자신들과 신분이 다른 왕녀님이 섬의 관리를 맡는다면 반발하는 사람도 적을 것이다.
물론 섬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공식적인 총독인 내가 인정했다는 정당성 정도야 필요하겠지만.
왕녀님의 눈치를 보니 당황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살짝 홍조가 어린 것이 꽤나 기뻐하는 것 같다.
설마 그녀가 원하는 삶이 이런 것이었을까?
“아가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로서는 매우 기꺼운 제안이네. 무, 물론 자네가 날 믿어준다는 것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말이야. 비록 깊이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왕실의 일원으로서 통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니 믿어도 될 걸세.”
“그렇습니까….”
“선장님, 고민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처음 생각이 난 이후로 몇 번이나 검토한 제안입니다. 선장님 입장에서는 손해 볼 일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그만, 그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 더 고민해 보자고. 게다가 시니아 양의 의견은 알고 있지만, 란데르 씨나 그 부친 되는 분의 의견도 들어야 할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
서류를 정리한 게론드가 나가고, 나 역시 출항 준비를 위해서 자리를 뜨려는데 왕녀님의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잠깐 시간을 내주지 않겠나?”
“네? 방금 전 이야기라면 제가 조금 더 생각을….”
“스펜서 남작.”
정확하게 말해서 출항 준비보다는 왠지 자리가 불편해져서 자리를 떠나려던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호칭에 몸이 굳었다.
내가 그녀에게 남작이 되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어찌 아셨습니까?”
“얼마 전에 그 예쁘게 생긴 선원이 이야기해 주었소.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그 사람이 더 놀라더군. 이름이 우르타라고 하던가?”
하여간 그놈의 방정맞은 입을 꿰매버리든가 해야지 진짜.
그보다 지금 왕녀님이 반공대를…?
“왕녀님?”
“그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그대 역시 당당한 귀족이니, 후우….”
갑자기 한숨을 내쉬면서 자세를 고쳐 앉은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안합니다, 스펜서 남작. 생명의 은인이시고 저 때문에 모진 일을 겪게 했는데도 그동안 제가 너무 무례했군요. 저는 이제 왕녀도, 무엇도 아니니 존경을 표하는 것이 옳겠지요.”
“어, 어, 그, 그러지 마십시오, 왕녀님. 갑자기 이러시면 매우 불편합니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하다.
그러니까 그녀가 더 이상 왕녀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왕녀라도 귀족인 나에게는 적당히 공대를 하는 게 정상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알렌 경에게 공대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어색하게 이러면 좀 그렇잖아.
“아니에요, 이게 옳은 겁니다. 만약 남작이 그 섬에서 내게 일을 맡긴다면, 내가 남작에게 하대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 그건 아직 결정이!”
“만약에 말이에요.”
“네….”
어색하기는 한데 뭔가 가슴 어딘가가 간질간질하다.
딱히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랄까?
***
“030도 방향 선단, 현재 거리 2500!”
견시수의 보고에 오펜이 망원경을 들었다.
한동안 망원경으로 30도 방향을 살펴보던 오펜이 망원경을 내리며 말했다.
“침로는 본 선단 방향이 아닙니다. 그냥 상선단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기적으로 살펴보고, 그쪽 선단 규모가 얼마나 된다고?”
“총 여섯 척입니다, 1,000톤 전후의 대형선박이 세 척, 700톤 전후의 중형선박이 세 척인 것 같습니다.
“진짜 큰 선단이네. 식별기는?”
“벨로키나 왕국기를 달고 있습니다만, 소속을 나타내는 깃발이 없습니다.”
“응?”
저 정도 규모의 선단이 소속 가문이나 상회의 깃발이 없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지만 나는 곧 관심을 껐다.
드물기는 하지만 저런 중대형 선박 한 척을 소유한 선주와 선장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뭉쳐 다니는 것 역시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6척이면 규모가 조금 크기는 하지만, 둘 혹은 세 집단이 방향이 같아서 함께 이동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해군들은 전쟁 때문에 전전긍긍 난리일 텐데 오히려 상선은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저는 전쟁이 나면 바다 위에 상선들이 하나도 없을 줄 알았거든요.”
“왜?”
“그야, 전에 선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략선도 돌아다니고 뭐 그러니까….”
“물론 위험이야 있지. 하지만 평소라고 위험이 없나? 어차피 해적 놈들이 판을 치는데? 그런데 지금은 해적들이 숨을 죽이고 있으니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는 거지. 예를 들어 우리도 그렇고 저쪽 상선단도 그렇고, 벨로키나 왕국기를 달고 있으면 이 근처에서는 안전하잖아? 그리고 상선이 항구에 처박혀있으면 선장부터 말단 선원까지 다 굶어 죽는데 별수 있어?”
“아!”
결국 최종적인 문제는 생계의 문제라는 거다.
상선이 쉬면 당연히 선원들도 놀 수밖에 없다.
쉬는 상선이 한두 척이라면 다른 배로 가면 되지만, 상선이란 상선은 몽땅 바다로 안 나가면?
다 굶어 죽, 아니, 대부분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아마 돈이 떨어진 선원 수와 늘어나는 범죄자 수가 동일하게 될 거다.
그리고 항구가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은 덤이다.
해적이 무서워서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선장이 없는 것처럼, 전쟁이 나도 사략선이 무서워서 배를 못 띄우는 선장도 없는 법이지.
나는 난간에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오펜에게 조금 더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전쟁은 조금 양상이 달라. 어차피 한 방 싸움이 되어 버렸거든. 이등항해사는 전쟁 중에 사략선을 운용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 글쎄요? 적이니까요? 적의 자금을 빼앗아 자금을 확보하려고?”
오펜이 확신이 없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마 그런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해 본적이 없을 테니 틀리는 것도 당연하다.
“아니지. 사략선이 약탈한 약탈품을 온전히 나라에 바치는 것도 아닌데 자금 확보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 오히려 적국의 자금을 마르게 하고 보급을 막으려는 거야. 사실 보급을 막는 역할이 더 크지.”
“그렇군요. 그런데 왜 지금은?”
“사략선은 운용하면 그 효과가 나오는 것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야 해. 하지만 세 나라의 지휘부는 그 효과가 나오기 전에 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사략선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략허가는 내주기는 쉽지만 회수하기가 쉽지 않아. 세 나라가 아주 끝장을 볼 기세로 싸우는 것도 아닌데 전쟁이 끝나면 사략선들 처리가 얼마나 골치 아프겠냐?”
내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오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무럭무럭 자라라, 너 하나만 잘 키워도 내 10년 후가 두세 배쯤은 편해질 거다.
***
“항해 내내 아무 일도 없다니, 역시 사람이 늘 운이 나쁘라는 법은 없는 겁니다, 으하하하!”
“그런 말 하지 마. 그러면 꼭 이제부터 운이 나쁠 것 같잖아.”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호탕하게 웃던 그레이그가 뒷머리를 벅벅 긁는데, 네이선이 낯익은 사람을 데리고 선교에 올라왔다.
“남. 작. 님! 항구관리관이 뵙자고 합니다.”
하지 마! ‘남작님’이라는 말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오히려 어색하다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펜서 남작님.”
“그래, 항구관리관인가? 검문 때문이라면 굳이 나에게 보고할 필요 없네.”
“아, 아닙니다!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도 명령을 따라야 하는 입장인지라….”
사실 저놈이 여기까지 올라와서 살짝 쫄았는데 다행이다.
물론 왕녀님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선장실 내 모종의 장소에 숨어계신다.
“그거야 뭐, 아가씨가 실종되셨다니 후작 각하를 모시는 입장에서 협조를 해야 하는 일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이튼 경의 태도가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만, 그게 그대 잘못은 아니니까.”
용서하는 척 말을 하며 내가 아직 마음에 담아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흘리자 항구관리관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혹시 아직도 아가씨를 찾지 못했나?”
“네? 아,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수색을 담당하신 이튼 경은 진즉에 복귀하신지라.”
역시 왕녀님의 예상대로군.
내가 출항할 때까지 찾지 못했다면 일단 항구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튼이 항구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한층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항구관리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대가 굳이 내게 올 필요가 없을 텐데?”
“아차! 남작님!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후작 각하의 저택으로 가보셔야 합니다!”
“응? 후작 각하께서 날 찾으셨나?”
“그게, 그게, 후작 각하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말을 끊고 한참을 머뭇거리는 그에게 살짝 짜증을 냈다.
“말을 하게. 무슨 일인데 그래?”
“후작 각하께서, 그러니까 후작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
나는 복잡하게 꼬이는 머리를 부여잡고 최대한 놀라면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를 다그쳤다.
“언제?! 분명히 내가 뵐 때만 해도 곧 털고 일어나실 것 같았거늘!”
물론 거짓말이다.
솔직히 마지막에 본 후작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보면 죽기 전에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타이밍이 너무 빨라서 의외일 뿐, 후작의 죽음은 예상 가능했던 부분이다.
후작의 죽음은 나에게 일장일단이 있다.
먼저 후작이 죽었으니 아무래도 왕녀님에 대한 관심은 조금 줄어들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차기 후작인 라우반이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면 더 좋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라우반에게 당장 그녀를 찾는 것보다는 후작위를 완벽하게 승계하는 것이 더 급할 테니까.
반대로 단점이라면 지금까지 쌓아온 후작과의 관계가 모두 사라졌다는 부분이겠지.
남작위야 절차상 국왕이 임명한 것이니 회수하지는 못하겠지만, 후작령에 포함된 폰테 섬의 총독 자리는 라우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회수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작과 나 사이에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전략적 제휴 관계 역시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할 테고.
하여간 당분간은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생겼네.
“소식이 알려진 것은 이틀 전입니다. 아마 그 전에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만.”
“그만하지, 지금 이럴 시간이 아니지 않나. 검문을 진행하겠다면 내가 먼저 단정으로 항구로 들어가지.”
“아, 아닙니다! 전 그저 소식을 전하려고 온 것뿐입니다. 검문이라니요, 어서, 어서 움직이십시오.”
“고맙군. 이 호의는 꼭 기억하겠네.”
“그저 남작님을 생각하는 제 작은 마음일 뿐입니다, 헤헤헤.”
후작의 죽음이라.
그의 죽음은 단순하지 않다.
그는 몰락해가던 스코타 후작가를 부흥시킨 철혈의 정치인이자 벨로키나 왕국의 가장 강력한 실세 중 한 명이며, 이번 전쟁을 주도한 사람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벨로키나 왕국의 정계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고, 이번 전쟁 역시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국제 관계까지도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내 인생 설계에서도 바꾸거나, 버리거나, 추가해야 할 일이 생기겠지.
항구관리관이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후작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일단 왕녀님은 안심이다.
하지만 늘 격변의 순간에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법, 사태가 흘러가는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입항 즉시 후작 저택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전에 만났을 때 라우반이 요구한 것이 조나단의 목이었지?
흠,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