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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21화 (322/420)

321화. 장례식과 새로운 후작

당연한 말이겠지만 후작 저택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아니지, 초상집이 맞구나?

“그런데 보통 이런 일은 가문의 중심이 되는 성에서 진행하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아무래도 고인을 안장할 묘역도 보통 그 가문의 중심 성에 위치하니까.”

일단 초상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누가 뭐래도 고인을 안장하는 일이다.

그러니 아마 장례식은 스코타 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저택을 먼저 찾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후작가의 편의를 제공받기 위함이었다.

스코타 성은 우리 중 누구도 가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택에도 사람이 엄청 많네요.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지만요.”

아인델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후작은 죽었지만 스코타 후작은 계속 존재한다.

단지 사람이 바뀔 뿐이니 스코타 후작과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스코타 후작에게 인사를 하러 와야만 했다.

“귀족들은 스코타 성으로 갔겠지. 실질적인 장례와 승계 절차는 그곳에서 이루어질 텐데 굳이 여기에 왜 오겠어?”

“그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뭡니까? 제독 말씀대로라면 여기에 있어 봐야 아무 의미도 없을 텐데요.”

아인델프의 의문에 대답해 준 사람은 베기어 함장이었다.

“감히 장례식에 참가할 수 없는 자들이겠지요. 스코타 후작의 눈에 들기는 해야 하는데 장례나 승계 절차가 끝난 후에는 새 후작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지금 기회를 만들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그래서 저렇게 저택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나저나 사람이 모여 있다는 것은 아직 후작 저택에 후작이 머물고 있다는 뜻일까요? 우리에게 썩 나쁘지는 않은 소식입니다.”

베기어 함장의 말대로였다.

인파를 헤치고 당당하게 후작 저택 정문에 서자 안면이 있는 집사가 두꺼운 철문 뒤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스펜서 남작님.”

“음,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소.”

“일단 들어오시지요.”

우리가 자신들을 밀어내고 문 앞으로 갈 때만 해도 나지막하게 투덜거리던 자들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어졌다.

다들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 어깨에 힘 좀 준다는 사람들이겠지만 감히 귀족에게 욕을 날리고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나와 함선장들이 줄줄이 저택으로 들어섰다.

내가 들리지 않게 문을 지키고 있는 사병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린 집사는 다시 한번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정중하게 저택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나는 당연히 객실로 안내할 줄 알았는데 집사가 안내한 곳은 바로 후작의 집무실이었다.

내가 집무실 앞에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제서야 집사가 말을 했다.

“남작님이 입항했다는 소식을 들으신 라우반 도련님께서 남작님이 저택에 오시면 바로 안내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도련님이라.

플라비아 남작을 굳이 내려놓은 것은 아닐 테고, 후작위를 받을 후계자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는 것이겠지.

전 후작이 사망한 순간부터 후작위는 라우반에게 상속되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후작이라는 왕관을 받기는 했는데,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은 것이다.

문을 두드린 집사가 내가 왔음을 알리자 안쪽에서 바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플라비아 남작님.”

“스펜서 남작, 이렇게 달려와 주어 고맙네. 자네라면 바로 달려올 줄 알았지.”

“뭐라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위로는 무슨. 이미 연로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라우반의 표정을 보니 겸양의 말이 아니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죽었다기보다는 상사가 퇴사해서 여러 업무를 물려받은 표정이다.

뭐가 그리 바쁜지 책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서류를 확인하고 서명한 라우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나 내일쯤 스코타 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네. 아버지의 시신은 이미 보내 두었고. 그쪽에 앉지.”

“감사합니다.”

라우반이 가리킨 부드러운 쇼파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자, 몸을 던지듯이 상석에 앉은 라우반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작도 스코타 성에 함께 가겠나? 어차피 그러려고 온 것이겠지?”

“아, 네. 당연히 후작 각하의 장례식에 가야 하니까요. 제가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흠, 일단 객실에서 쉬고 있게. 처리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서 말이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라우반을 뒤로하고 물러났다.

그렇게 문 근처에 다가갔을 때, 지나가는 듯 무심한 라우반의 말이 들려왔다.

“이전에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나?”

“?!”

부탁이라면 역시 조나단의 일인가.

굳이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는 과연 조나단이 꿀꺽한 티벡 선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티벡 선단과 마주치지 못해서 부탁하신 일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음? 그럴 리가. 분명히 마주쳤을 것 같은데 말이야.”

“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의 부탁을 받고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을 항해했을 뿐이다.

로제 항구에 다녀온 것이 전부가 아닌가?

물론 그사이에 스쳐 지나간 상선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티벡 선단으로 보이는 배는 없었는데?

의욕적으로 그가 시킨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티벡 선단의 식별기 정도는 외워놨단 말이지.

막말로 조나단 그놈이 티벡 선단을 지휘하고 있다면 우리를 선공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후작 가문의 산하에서 가장 큰 선단이라는 티벡 선단 정도면 상선단이라고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고기가 크면 꼬이는 파리가 많은 것처럼 그냥 한번 찔러보는 놈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서 한탕을 노리는 놈들까지 수많은 위협에 노출되는 만큼, 무장 수준도 상당할 거다.

솔직히 우리 선단과 정면으로 붙는다면 우리 쪽 승산이 그리 높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까 먼저 발견해서 여차하면 튀어야지 않겠어?

“자네가 입항하기 얼마 전에 델라 항구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동쪽으로 도주했다는 보고를 들어서 말이야. 시기를 보면 아마 만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보지도 못했다?”

라우반의 서늘한 눈빛이 나를 훑었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기억을 훑었다.

라우반이 말하는 시점이면 대충… 아!

“죄송합니다. 설마 그놈들일 줄은….”

“그놈들?”

“그게, 오는 길에 이상한 상선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형선박과 중형선박 각 세 척으로 구성된 대형 선단이었는데, 국적기만 달려있고 식별기가 없더군요.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저희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여러 선박이 목적지가 같아 동행하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겨우 기억해낸 의심스러운 선단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라우반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난 자네가 내 ‘부탁’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네. 그러는 편이 앞으로 우리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폰테 섬의 총독인 자네와 나 사이에는 긴밀한 협조가 필요할 것도 같고. 그렇지?”

아직 후작에 오르지도 않은 놈이 총독 자리를 놓고 협박질을 하네?

그런데 그 협박이 너무 효과적이라서 배가 아프다.

“물론입니다. 앞으로는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좋아. 이만 물러가게.”

집무실을 나오는데 온몸에 쇠사슬이 칭칭 감긴 느낌이 드는 것이, 영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래도 엘리안 왕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는 것이, 진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기는 하다.

***

후작의 장례식은 별게 없었다.

전통적인 귀족들은 내가 접근하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려댔고, 좋건 싫건 그래도 아는 사람인 이튼 경은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안 보일 수도 있나?

“혹시 알렌 경을 본 사람 있어?”

“알렌 경 말입니까?”

“아, 그 눈에 핏발이 서서 아가씨를 수색하던 기사 말입니까?”

“그자는 왜 찾으시는지요?”

베기어의 담담한 질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대답했다.

“뭐, 나랑 인연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얼마 전에 봤을 때 참 안돼 보여서 말이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스코타 성에서 우리에게 제공된 객실이지만, 어디서 말이 샐지 모르기 때문에 늘 언행을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남들이 듣는다고 해도 오해나 의심이 사지 않을 정도로 평이하게 대답을 했다.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지나다가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

“하인들이?”

“제가 모퉁이 뒤에 있어서 있는 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스코타 성의 사용인들은 저택의 사용인들보다 긴장감이 약간 느슨한 느낌이었다.

후작 저택을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도 하인과 하녀들의 소문이나 그들만의 대화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런데 스코타 성에서는 종종 그들이 모여서 잡담을 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베기어 함장만큼 쓸모있는 정보를 얻은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데?”

“어디까지나 하인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문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고 들어주십시오.”

“물론.”

“우리가 출항한 이후 이튼이라는 기사는 저택으로 복귀했는데, 제독이 찾는 알렌이라는 기사는 복귀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인들 말로는 자살을 했다는 둥, 아가씨와 도피를 했다는 둥 말이 많더군요.”

“아예 복귀하지 않았다?”

“네. 그건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튼이 별말이 없다고?”

그때 분위기로 볼 때 이튼이 알렌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아가씨와 관련된 의심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이튼이, 알렌이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는 것을 방조했다?

이거 냄새가 조금 나는데?

“다른 말은 없었고?”

“조금 더 듣기는 했습니다만 별 의미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흠. 알았어. 다들 좀 쉬지. 내일은 하루 종일 마차를 타야 하니 피곤할 거야.”

다음 날 아침, 나는 제발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떠나기 전에 라우반 스코타 후작 각하께 인사를 하겠다는 말을 전달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지금은 바빠서 배웅을 못 해 미안하다며, 인사는 생략하고 돌아가라는 메시지뿐이었다.

하긴, 보아하니 장례식에 모인 귀족만 줄잡아 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 모두와 개인적인 면담 시간을 갖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 따위를 만날 시간은 나지 않겠지.

뭔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드네.

***

오트라스 호에 복귀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당연히 선장실이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선장실에 다가가자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네이선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잘 다녀왔어?”

“응, 별일 없었지?”

“그렇지 뭐. 내가 조금 피곤한 것만 빼면.”

선장이 없는 선장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특별하게 내 지시를 받고 열쇠를 받아서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네이선과 우르타에게 내가 없는 동안 선장실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피로감이 느껴지는 네이선의 얼굴을 보니 내가 기대한 것보다 조금 더 과한 주의를 기울인 모양이다.

똑, 똑똑.

이제 ‘아가씨, 저 리안입니다.’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본다면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이 할 짓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 방에 들어가기 전에 방문 앞에서 정중히 중얼거리는 사람이라니.

하여튼 그래서 약속한 신호가 바로 저 노크 소리였다.

당연히 내 방을 들어가기 전에 내가 노크를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 약간 습관적으로 리듬을 타는 듯이 문을 툭툭 두드리는 것이다.

왕녀님에게 신호를 보내고 열쇠를 꺼내 잠금장치를 해제하며 물었다.

“우르타는?”

“지금 완전히 뻗었을걸?”

“그래? 너도 피곤해 보이는데 그만 쉬어. 고생했어.”

“따로 필요한 건 없고?”

“응, 어차피 식사용 음식은 떠나기 전에 충분히 넣어드렸으니까.”

하지만 네이선은 내가 문을 다 따고 열 때까지 딴청을 피우며 꿋꿋하게 내 옆에서 버텼다.

“왜? 할 말 있어?”

“아니? 그냥 있는 건데?”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오늘따라 네이선의 눈빛이 매우 오만불손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인가?

“나 들어갈 거야.”

“응.”

“너 안 가냐?”

“어? 가. 가야지.”

“…그러니까 왜 안 가냐고?”

내가 문을 열기 전에 놈을 쫓아내려고 하자, 네이선은 오히려 내 옆에 슬그머니 붙으며 속삭였다.

“나도 인사나 드릴까?”

“미친놈이?! 당장 꺼지지 못해?!”

살짝 열린 문 안쪽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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