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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23화 (324/420)

323화. 다시 찾은 폰테 섬

“이쯤에서 북동쪽으로 침로를 바꾸지. 이쪽이 왠지 더 추운 느낌인데? 쌀쌀해.”

“그러게 말입니다. 원래 위로 올라가면 더 춥기는 하지만, 이쪽은 심하네요. 며칠 전보다 확실히 더 춥습니다.”

그레이그가 두터운 코트 자락을 여미며 코를 실룩거렸다.

하긴 벌써 11월, 우리의 위치보다 남쪽에 있는 대륙도 평균 기온이 15도 근처까지 떨어질 시기다.

대륙에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평균온도가 낮아지는 편이니, 여기가 더 추운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바다가 원래 체감온도가 육지보다 낮은 편인 것을 감안해도, 대충 10도 안팎인 기온은 뭔가 비정상이긴 했다.

어제 아침부터 코를 훌쩍거리는 선원들이 늘어서 닥터가 꽤나 신경을 쓰고 있기도 하다.

“갑판장 불러서 선원들 방한 대책은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하라고 해야겠어. 최근에 들어온 놈들 중에 겨울용 옷이 없는 녀석도 있을 것 아냐?”

“알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곧 교대 시간이니 내려갈 때 전달하죠.”

“그래, 아 참! 혹시 꼬리가 붙었는지는 확인했나?”

내 질문에 그레이그가 엄지를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없습니다. 드라이언에게 일부러 속도를 늦춰 추격하는 선박이 있는지 확인하게 했는데, 흔적도 없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다 선장님의 기만책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금쯤이면 자기들이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돌아가야 할지 말지 갈팡질팡하고 있을 겁니다. 클클클클!”

“차라리 내게 성의 표시를 하면서 항로를 알려달라고 했다면 알려줬을 텐데 말이야.”

“성의 표시를 하려니 아깝고, 모두에게 공개될 때까지 기다리자니 답답했겠죠. 제 생각에는 그놈들을 고용하는 비용도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를 따라오던 그 선박들, 누군가에게 고용된 것일 거다.

어떻게 해서 섬의 위치와 항로를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발각될 확률이 엄청 높은데, 그걸 ‘우리가 했습니다!’라고 알렸다가는 앞으로 내가 얼마나 큰 불이익을 줄지 모르지 않나?

일단 폰테 섬의 총독은 리안 스펜서 남작이니까 말이야.

내가 총독이라는 것을 아직 모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섬을 발견했고 개발에 대한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결론은 다를 게 없었다.

“으아악! 전방! 전방에 모래톱! 모래톱입니다! 거리 150!”

갑자기 비명 같은 견시수의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욕을 내뱉기 전에 조타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장 내 화를 푸는 것보다 배를 살리는 게 중요했다.

자세히 보면 우현 쪽에 너울 뒤쪽으로 뭔가가 있는 것 같아 보여서 일단 좌측으로 틀기로 했다.

“조타수, 좌현 전타! 최대한 돌려! 일등항해사! 돛 줄 다 끊으라고 해!”

“좌현 전타!”

“넷!”

공포에 질린 조타수가 미친 듯이 타륜을 돌리고 그레이그가 직접 선교에서 뛰어 내려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견시 너 내려오면 뒤질, 아니, 후방에 신호부터 보내! 전방 모래톱! 좌우 산개!”

모래톱이라니?

여기가 강이야?!

어떻게 모래톱이 있을 수 있냐고!

***

아슬아슬하게 발견하기는 했지만 정말 뜬금없이 나타난 모래톱은 모두를 패닉 상태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모래톱이 위험한 것은 좌초되면 현실적으로 그걸 빼낼 방법이 없다는 것에 있다.

다행히 우리는 선단이라서 모두 무인도에서 장렬하게 굶어 죽는 엔딩이야 피할 수 있다지만, 어찌 되었건 선박이 좌초되면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너무 뜬금없는 것이, 사방을 둘러봐도 섬이나 육지는커녕 암초 하나 없는 곳에 모래톱 하나만 달랑 있다니, 들어본 적도 없는 기사(奇事)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왕 돛 줄을 죄다 잘라버리는 바람에 수리할 시간도 필요하겠다, 모래톱에 상륙을 시도했다.

애초에 모래톱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커다란 모래섬(?)이기는 했다.

“정말 신기하군요. 대부분 모래인 것 같은데, 이러면 보통 물에 쓸려서 사라지는 게 정상이지 않습니까?”

“그것참, 바다라는 놈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만들어질 수도 없죠. 누군가 인위적으로 엄청난 양의 모래를 가져와서 뿌리지 않는 이상에는요.”

아니야, 아인델프. 네가 말한 게 더 신기하잖아.

바다 한가운데에 인위적으로 모래섬을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모래가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배를 동원해야겠어?

애초에 지금 기술력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거라고!

“보아하니 밀물 때는 완전히 잠기는 모양인데? 저기, 저쪽이 가장 높은 지대 같은데 한번 가보자고.”

상륙을 원하는 승조원들 30여 명을 데리고 모래섬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자, 내 예상대로 물기를 머금은 모래가 우리를 반겼다.

“제독 말씀대로입니다. 최근까지 여기에 물이 차올랐던 모양이네요. 해도에 반드시 표시해야겠군요. 오늘은 지나는 시간대가 좋아서 발견했지, 만약 밀물 때 지나는 중이었다면 좌초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발드 선장이 바닥의 모래를 한 움큼 쥐어보며 하는 말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야 원, 견시 보던 놈을 조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군.”

“하하하! 제독, 적당히 주의를 주는 정도로 하시죠. 보시다시피 모래색이 밝은 것도 아니고, 누가 바다 한가운데에 모래톱이 있을 거라고 예상을 했겠습니까?”

베기어 함장이 호쾌하게 웃으며 제안했지만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발견한 게 고작 150미터 전이었다니까요? 150미터라니, 세상에.”

견시수가 마음이 급해서 150m를 불렀지만 내가 봤을 때는 200m 이상이었다.

방향도 정면이 아닌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진짜 150m 거리에, 그것도 정확히 오트라스의 진행 방향 전면에 이렇게 큰 모래섬이 있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좌초 확정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바로 뒤에 따라오던 피오렐도 안전을 장담하기 힘들었을걸?

“그렇다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큰 벌을 내리기에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끄응….”

베기어 함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모래섬이니 딱히 뭐라고 하기에도 좀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오, 알아냈네! 알아냈어!”

“네?”

신이 나서 바닥을 살피던 닥터 롱베르가 급히 이쪽으로 뛰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표정이 아주 천진난만한 것이 호기심을 해결하는 게 인생 최대의 낙인 천생 학자구나 싶었다.

“잘 보시게, 제독. 여기, 그리고 저기, 저쪽을 보면 말이야….”

닥터의 말을 요약해보면, 이 섬이 세 종류의 조류가 모여서 스러지는 지점이란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힘을 잃은 물살에 실려 온 가벼운 모래 입자들이 쌓였다는 건데, 사실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닥터의 이야기를 듣는 대부분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절대로 나만 멍청한 게 아니다.

멍청한 표정을 짓지 않는 놈들은 누구냐고?

대표적으로 우르타 녀석을 보면, 이미 한참 전부터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손가락만 한 소라게를 괴롭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현상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싶은데 말이야….”

“앗, 그건 안 됩니다.”

나는 논문이라는 말에 급하게 닥터의 부탁을 거절했다.

“응? 안 된다고?”

내가 거절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상당히 당황해하는 닥터에게 나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한 위치는 해도를 보고 확인해야겠지만, 이 모래섬의 위치는 꽤 중요합니다. 케르빈 섬에서 폰테 섬으로 항로가 만들어진다면 그 경로상에 위치할 확률이 높거든요. 인간의 힘으로 제거할 수 없는 최고의 천연장애물이니 정보로서 가치가 있어요.”

“그, 그런가? 그건 좀 아쉽구만.”

똑똑한 닥터는 내 말을 금방 이해했다.

정보가 고작 돈이 되는 정도가 아니고 목숨을 위협하거나 공격하는 무기도 되는 세상이다.

이런 정보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독점하는 편이 좋았다.

“그래도 논문을 쓰시는 것 정도는 괜찮아요. 발표 시기만 저랑 상의해서 진행하시죠.”

“으음, 무슨 말인지 알겠네.”

“각 함선장들도 현 위치 각 해도에 잘 표시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도 가능하면 이 모래섬에 대한 건 말을 좀 아끼도록 해.”

***

“전방의 콘베르테 호(라프나와의 해전에서 나포한 해적선, 리안이 섬에 두고 간 600톤 플로디엄 급 선박)로부터 신호, 복귀를 환영한답니다!”

“우와아아아!”

견시수의 활기찬 외침에 갑판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일었다.

폰테 섬에 처음 오는 녀석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의 한 달 가까이 선상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육지가 그리워지는 법이다.

심지어 그 육지가 ‘우리만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라면 남자가 그걸 참을 수 있을 리가 있나?

남자란 동물은 늙어 죽기 전까지 소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정상이잖아?

“하아, 드디어 도착했네. 바다가 좀 거칠긴 했지만, 이맘때까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렇지?”

“네, 선장님. 하지만 한두 달 뒤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대륙으로 나가시려면 시기를 잘 고르셔야 할 겁니다.”

“음, 원래 이쪽 바다는 겨울에 좀 거친 편이었으니 잘 생각해 보자고.”

심지어 여기는 원래 ‘울부짖는 바다’에 포함된 곳이었지.

나와 그레이그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오펜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귀를 쫑긋거린다.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이 즐거운 소식을 왕녀님께 전해드려야지.

“일손이 여유가 없었을 텐데 임시 부두까지 만들어 놓았군. 그럼 일등항해사가 입항 좀 맡아줘. 나는 귀빈실에 다녀올 테니.”

“아, 알겠습니다.”

귀빈실에 있는 시니아 양과 일행들에게 곧 입항을 하니 하선 준비를 하라는 말을 전하고 선장실로 들어가자, 이미 왕녀님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시니아가 배에 타면서 가지고 온 옷가지 몇 벌을 받았기 때문에 헐렁한 내 옷을 입고 있는 웃기는 꼴은 면한 상태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장도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건강을 되찾은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어, 벌써 준비를 다 끝내셨군요?”

“오늘쯤 도착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밖이 소란스러운 것이 섬에 도착한 듯하여 미리 준비했죠.”

“그러셨군요. 말씀하신 대로 곧 폰테 섬에 입항하게 될 겁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섬이라 실망스러우실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마음 편히 쉬셔도 될 겁니다.”

내 말에 살포시 웃는 그녀를 보며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사실 그녀는 지금도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이야 라우반이 물려받은 후작위를 안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마수를 뻗을 확률이 높았다.

총독직에서 해임할 수도 있고, 산하에 있는 다른 상단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섬으로 파견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이 섬에서 숨겨야 할 것은 왕녀님 하나가 아니다.

***

통나무를 이용해 투박하게 만들어진 부두에 내려서니 반가운 얼굴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나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제독. 무탈하신 듯 보여서 다행입니다.”

“오랜만입니다. 허비 씨. 아, 이제 촌장님이시죠?”

“허허,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탄탄한 몸을 자랑하는 허비 씨와 악수를 나누고, 그 옆에 서 있는 몰라보게 변한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레어 항해사, 고생 많았어. 어휴, 배 탈 때보다 보기가 많이 좋아졌는걸? 섬 생활이 적성에 맞았나 봐?”

“아, 아닙니다, 제독!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해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좋아, 좋아! 다행히 배 모는 법을 까먹지는 않은 모양이야?”

“적어도 열흘에 한두 번씩은 꼭 콘베르테로 주변을 돌았습니다. 전 항해사니까요.”

그들 외에도 슬레어의 동생이자 마을의 대장장이를 맡은 레이튼과 콘베르테의 갑판장으로 임명했던 로데스, 자기는 약초상에 불과한데 의사라니 당치 않다며 난감해하는 아히르까지.

중요한 인물들과 인사를 마치고 나니 겨우 여유가 생겼다.

당연히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되는 곳이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러지 마시고 자리를 옮기시지요. 아직 마을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마을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쓰는 회의실은 있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으니 지금쯤 준비가 끝났을 겁니다.”

허비 씨가 진짜 능숙한 촌장처럼 우리를 안내했다.

정박을 마치고 모여든 선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게 보인다.

하긴 거의 한 달 동안 쉽비스킷이랑 염장 육포를 먹었으니 따뜻한 스프가 그리울 만도 하다.

“선원들이 예상보다 늘었는데 이 친구들 먹을 양은 됩니까?”

“허허, 걱정 마십시오. 다행히 이번에 아슬아슬하게 밀렛 농사에 성공해서 곡물은 충분하니까요. 대신 육류와 술은 제독께서 좀 푸셔야겠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죠. 베기어 함장님!”

“네, 제독.”

“드라이언에 있는 술과 육포 지금 모두 하역하죠. 어차피 화물 대부분을 내려야겠지만, 굳이 오늘 다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내 말에 베기어 함장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말을 안 했지만, 베기어 함장도 네이선 못지않게 술을 좋아한다.

하지만 의외로 선상 음주에 대해 완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이번에 사람 됨됨이도 알아볼 겸 일부러 가지고 온 주류의 절반을 드라이언에 실었다.

오늘 제공되는 술통의 양을 보면 베기어 함장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오스발, 제독님 명령 들었지? 당장 자원자들 데리고 가서 술통과 육포를 모두 하역하게. 촌장님, 물품은 저기 보이는 광장에 두면 되겠습니까?”

“베기어 함장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맞습니다. 마을에 아직 사람이 부족해서 하역을 도와드리기는 힘들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술과 고기를 내리는 일이라면 신나서 할 놈들이 잔뜩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

허비 씨와 대화를 하던 베기어 함장이 모여 있는 선원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함성이 터져 나왔다.

***

허비 촌장의 안내를 따라 간부들을 데리고 회의실이라는 곳을 향해 가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촌장님.”

“네, 제독님.”

“혹시… 죽은 사람이 많습니까?”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야생에서 사람은 굉장히 취약하다.

물론 페리아 족이 적극적으로 도와줬다면 조금 달랐겠지만, 그들의 성향상 그러지는 않았을 테니 그사이에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문명이 없다면, 길을 가다가 발바닥에 찔린 가시 때문에도 죽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니까.

“아, 저곳 말입니까.”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던 허비 촌장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피었다.

“그 포로가 되었던 친구들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묘입니다.”

“아!”

기억이 났다.

분명히 그때 일손이 부족해서 포로로 잡았던 해적들을 두고 갔었지.

꽤 많았던 것 같은데 다 죽었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3명을 제외하면, 다들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던 이들이라 시체를 그냥 방치하기에는 마음이 좋지 않더군요. 남은 놈들의 사기 문제도 있구요.”

“아, 다 죽은 건 아니군요?”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일손이 아쉽다 보니 최대한 죽지는 않도록 나름대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다섯 명이 남았습니다.”

그들에게 약속한 시간은 10년.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대부분이 죽어 나갔으니, 확률적으로 그들이 자유를 찾기는 힘들다.

그래도 모진 게 목숨이라고, 그 10년을 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다섯이라, 얼마 안 남았네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안 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허비 씨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지금의 말투와 표정으로 볼 때, 다음에 나올 말은 분명히 저 해적 놈들을 용서해줄 수 없느냐는 것이겠지.

반년을 넘게 함께 있다 보니 미운 정이라도 든 모양이다.

하지만 저놈들의 본질은 돈 몇 푼을 쉽게 벌기 위해서 선량한(?) 선원들의 목숨을 취하던 놈들이다.

고작 1년도 안 되는 노역형으로 용서될 리가 없잖아?

단호한 내 거절에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피던 허비 촌장은 결국 고개를 저으며 묵묵히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설득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꾸 부탁했으면 나도 불편했을 텐데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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