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다시 움직이는 세상
“어찌 되었건 섬에 남을 사람은 필요해. 주민이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운용할 수 있는 배가 한 척도 없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만약이지만 외부의 적이 침범해 온다면 섬의 주민들은 도망갈 곳이 없다.
섬이 크니까 사방으로 흩어져서 어찌저찌 목숨은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침입자들이 거주지를 약탈하고 파괴하면 어차피 굶어 죽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페리아 족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다면 너무 무책임한 일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운용할 수 있는 배 한 척이 있다는 것은 생존에 매우 유리했다.
정원도 채우지 못한 중형 선박으로 침입자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침입자를 조기에 발견하면 최소한 식료품을 싣고 도주할 수는 있으니까.
어떻게든 사람만 살아 있다면 상황을 수습하는 것은 가능했다.
물론 침입자 놈들이 거주지에 알박기를 시전하면 내가 돌아와서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하겠지만 말이다.
적의 전력이 압도적이면 어떻게 하냐고?
내키지는 않지만, 그때는 후작가에 지원을 요청해야지. 일단 후작의 영지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남으려는 항해사가 있겠습니까?”
아인델프가 한쪽에 서서 오펜, 우르타와 잡담을 하는 슬레어를 힐끗 보면서 대답했다.
전투를 싫어하고 상당히 소극적인 성향이던 슬레어조차 버티지 못하고 차라리 나를 따라나서겠다고 하는 섬 생활이다.
대부분이 외향적인 성향을 가진 항해사나 갑판장 중에 누가 이곳에 남으려고 하겠는가?
우리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가 오는 것을 대비해서 남는 것이지만, 실제로 올 가능성도 낮고, 오히려 오면 큰일이라서 매일 밍숭맹숭한 연안 항해나 하는 것이 확정인데 말이다.
슬레어의 말대로라면 내가 가지 말라고 한 지역을 제외한 해안 탐사는 이미 끝나서, 솔직히 항해보다 육지에서 몸 쓰는 일을 하는 날이 더 많을 거다.
지금만 해도 내가 다음에 데려오기로 한 이주민들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 정신이 없는 상황이니 어쩔수 없는 일이다.
“가서 이야기를 좀 해봐야지.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이게 희생 맞아?
몸이야 조금 힘들겠지만, 사실 휴가 비스무리한 것 아닌가?
지금 자리에 없는 발드 선장은 자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발드 선장은 오랜만에 본 썸녀(?)와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지금도 아마 그 아주머니랑 쪽쪽거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제독, 그 아이렌 나무라고 했던가요? 이곳의 원주민들이 건축재료로 제공했다는 목재 말입니다.”
“네? 아, 네. 원래 원주민… 들이 어떻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 섬을 탈출할 때 가지고 갔던 목재를 델라 항구에서 약간 풀었던 적이 있거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이름이 붙었더라구요.”
내 대답에 꽤 많이 자란 턱수염을 몇 번 문지르던 베기어 함장이 다시 물었다.
“정말 가지고 가지 않으실 겁니까? 선창에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닌데요.”
“저도 가지고 가고 싶기는 하지만….”
그동안 페리아 족이 아무도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건축에 쓰일 목재로 잘 건조된 아이렌 나무를 공터에 쌓아 놓기도 했고, 식량으로 쓸 수 있는 곡물이나 과일 등을 쌓아 놓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 중에 그 누구도 페리아 족을 본 적이 없지만, 주민들은 ‘원주민’이라고 알려진 그들에게 매우 고마워하며 약간 정령 같은 존재라고 믿는 것 같다.
과일이나 곡물이라면 몰라도, 부피도 크고 무게도 나가는 목재를 아무도 모르게 마을 중앙의 공터에 가져다 놓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어쨌건 그런 이유로 마을 창고에는 아이렌 목재가 상당량이 남아 있었는데, 문제는 이 녀석들 상태를 보면 최소한 1년 이상 정성 들여서 건조시킨 느낌이 팍팍 난다는 것이었다.
후작을 비롯해서 이 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원주민’인 페리아 족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고, 고작 수개월 전에 내가 첫 이주민들을 이주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1년 이상 잘 말린 목재를 가지고 온다? 누가 봐도 이상한 거다.
그전에야 드웰 씨가 7년이나 섬에 갇혀 있었으니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게 안 되는 거지.
게다가 저 목재, 가능하면 팔지 않고 나만 독점적으로 쓰고 싶다는 욕심도 조금 있다.
아무리 돈이 된다지만 대륙의 다른 목재들에 비해서 월등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목재를 굳이 공유할 필요는 없잖아.
***
우리가 입항하는 것을 본 마을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부두로 달려왔다.
원래 아이들이 배를 저렇게 좋아했던가?
“저 아이들에게는 선원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응?”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슬레어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곧 어색하게 손을 내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소심한 성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흠, 흠, 대륙에서 선원들이 받는 대접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사회적으로 최하위 계층에 해당하죠.”
최소한 범죄자나 부랑아, 거지는 아니니까 완전 바닥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적 위치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
“항해사라고 하면 그나마 좀 나은 대접을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배를 탄다고 하면 일단 좀…. 전 그래서 제독이 존경스럽습니다. 남작위를 받으시고 총독까지 되셨는데도 여전히 배를 타시다니요.”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귀족 중에도 선단을 이끄는 사람이 좀 있는 걸로 아는데?”
“네. 몰락한 귀족이나 돈으로 작위를 산 상인들은 탄다고 합니다만, 그들과 제독은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까?”
슬레어의 말에 나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다른 것 같지도 않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보다 먼지 섞인 육지의 바람이 더 좋고, 흔들리는 선실보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땅 위의 침상이 좋다.
식사는 말할 것도 없지.
아무리 선장이라고 해도 결국 쉽비스킷과 걸레 맛 육포, 조리되지 않은 보존식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거금을 들여서라도 조리용 마도구(그래봐야 가스버너 수준도 못 되지만)를 하나 구입할까 고민 중이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선단을 이끄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빠른 대응을 위해서, 두 번째는 선단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일레드 왕국에, 스코타 후작에, 내가 얽혀있는 문제가 한두 개여야지.
최소한 폰테 섬이 탄탄한 내 기반이 되기 전까지 나는 배에서 내리지 못할 팔자인 것 같다.
“한 10년쯤 후에는… 아니지, 한 20년쯤 후에는 나도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까?”
20년이 지나도 내 나이 고작… 이 아니잖아?! 이 세상에서 40대 후반이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이다.
***
“아저씨! 아저씨는 큰 바다에 가봤어요?!”
“아저씨! 아저씨는 해적들을 열 명이나 죽였다면서요?!
“아저씨!”
“아저씨!”
일단 바다는 다 큰데 큰 바다가 도대체 어디인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내가 죽인 해적이 고작 열 명이겠니?
내 손에 죽은 놈만 50명쯤 될 거고, 내 명령으로 죽은 해적은 한 천 명쯤 될걸?
아, 천 명은 과장이 좀 심했나?
그리고 무엇보다….
“조용해, 이 꼬맹이들아! 내가 왜 아저씨야?!”
나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단 말이다!
그리고 결혼도 안 했다고!
“아저씨! 아저씨는 공주님이랑 결혼했어요?!”
“컥!”
이제 막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내 역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있던 꼬질꼬질한 여자아이의 질문에 나는 숨을 들이쉬다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이런 꼬맹이들까지 공주님의 정체를 안다고?!
“고, 공주님이라니. 누가 그런 말을 했니?”
“공주님이니까 공주님이죠.”
“그러니까 누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냐고?”
“아니, 공주님을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건데….”
“그러니까 누가!”
내 닦달에 여자아이가 약간 겁먹을 표정을 지으며 주춤 물러서자, 그나마 머리가 굵은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녀석이 대신 대답했다.
“촌장님 집에 사는 공주님이요! 엄청 예쁜 공주님! 원래 공주님은 다 예쁘잖아요!”
“예쁘면 공주야?”
“네! 저 공주님은 처음 봤어요!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요!”
“어허허허허….”
하긴, 그걸 아는 사람이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애들이 아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내 주변에 몰려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허비 촌장이 당황하는 나를 보더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타일렀다.
“허허, 이 녀석들! 총독님께 아저씨라니! 또 그러면 혼날 줄 알아라.”
“총독님이 높은 건가요?”
“촌장님보다 높아요?”
“공주님보다 높은가요?”
어휴, 시끄러.
애들은 멀리서 볼 때만 귀여운 것 같다.
멀리서 바라볼 때만 넓고 멋진 바다처럼 말이지.
***
“아가씨, 리안입니다.”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리자, 시니아의 하녀가 문을 열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총독님.”
그녀를 따라 왕녀님의 방에 들어갔더니 작은 티 테이블에 낯선 여자와 마주 앉아 있던 왕녀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나요, 오늘쯤 오실 것 같았습니다.”
“네, 그런데 손님, 어?”
섬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낯선 여자가 있을 수는 있다.
잠깐 스쳐본 여자의 얼굴까지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녀를 보니 페리아 족이 아닌가?
거주민들과 비슷한 느낌의 옷을 입었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는 페리아 족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소개는 필요 없겠지요? 예전부터 남작님에게 비밀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설마 전설의 종족과도 교류가 있으실 줄이야. 놀라워요.”
“아니, 그러니까 이게 지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야?
페리아 족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나와 네이선, 우르타, 아인델프, 오펜 그리고 모르아 갑판장뿐이다.
아, 드웰 씨도 있구나.
하여튼 내 선단 대부분의 간부들은 물론 섬의 거주민들에게조차 정체를 알리지 않았던 자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왕녀님에게?
상황을 유추하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름답기는 하지만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페리아 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리안 님. 인간들은 이렇게 인사하는 것이 맞나요?”
“어, 네, 뭐 그렇기는 한데,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잘….”
“저희는 그분의 의지를 따를 뿐입니다. 여기 엘리안 님에게는 저희를 보여도 된다고 하셨으니까요.”
물론 앞으로 두 종족 간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는 왕녀님이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편하기는 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급하게 전개될 줄은 몰랐던 거지.
신의 뜻이라면 그냥 믿고 따른다라, 뇌가 할 일이 없어서 편하기는 하겠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일이나 물어보자.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좀 논의해 보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스펜서 남작님.”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녀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로 인해서 이 섬은 인간에게 개발될 겁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당신들의 거주지까지 우리의 손길이 닿겠지요.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인간에게 개발이란 자연을 인간에게 맞춰서 뜯어고치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인 인간들이 인간의 수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한 페리아 족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지.
내가 그들을 보호하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까지일 뿐, 다수의 인간이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 결국 나의 보호는 무너지고 페리아 족은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리안 님 때문에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마력이 흐름을 갖게 되었고, 수많은 미지와 신비가 부활할 겁니다. 이제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우리도 알지 못해요. 그 흐름에서 우리가 도태된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자신들의 멸망을 감정 없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니 왠지 소름이 돋네.
“걱정 말아요. 나와 스펜서 남작이 끝까지 그대들을 지켜줄 테니.”
따뜻한 왕녀님의 말에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엘리안 님, 그렇게까지 우리를 지키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도 무력하게 일족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을 테니까요. 리안 님이 그 길을 우리에게 주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감정 없는 그녀의 눈을 보자, 불현듯 꿈인지 환상인지에서 보았던 거대 문어가 떠올랐다.
망할, 결국 그놈과 한 판 붙어야 할 운명인가.
그런데 공략 방법이 없는 보스를 도대체 어떻게 잡냐고!
게임이면 반복적인 재시도를 통해 약점을 찾아내고 전략을 보완하겠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란 말이지.
첫 시도가 실패하면 그 피해는 말도 못 할 정도로 클 거다.
애초에 두 번째 시도가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리안 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 이전에 있었던 그 누구보다도 잘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그분께서도 곧 깨어나실 수 있겠지요. 그리고 아무리 마력이 부활했다고 해도 당분간은 인간들이 우리의 거주지를 감싼 결계를 깨지는 못할 겁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걷기도 전에 뛸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늘 인간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났으니, 조금 서두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력이 부활했다고?
설마 마법사, 그래! 마법사! 분명히 제먼 씨가 마법사가 되었다고 말했지?
그게 마력이 부활해서라고?
그런데 그전에도 마정석을 이용한 마도구가 있었잖아.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는지 저 괴상한 종족이 또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묻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농축되어 고정된 마력을 단순히 소모시키는 것과 세상에 흩어진 마력을 비틀어 변화를 주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마력에 대해 잊은 인간들에게는 꽤 큰 혼란과 충격이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막말로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마법을 뿌려대는 마법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초능력자가 중구난방으로 나타나서 깽판을 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테니.
치안이 21세기의 지구에 비하면 형편없다는 말조차도 아까운 이 세상에서는 상당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기회가 되는대로 제먼 씨에게 경고를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