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26화 (327/420)

326화. 그물 (1)

지루한 회의를 거쳐 남을 사람이 결정되었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섬 생활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던 선원 17명과 새로 남기로 한 20여 명이 추가되었고, 계속 섬을 지키기로 한 콘베르테 호의 임시 선장은 피오렐의 이등항해사 바우어, 갑판장은 모르아가 맡기로 했다.

물론 다시 합류한 슬레어는 피오렐의 이등항해사가 되었고, 로데스는 피오렐의 갑판장을 맡았다.

“모르아 갑판장.”

“네, 제독.”

“무리할 필요는 없어.”

“허허, 아닙니다. 돌아가면 필연적으로 후작가와 접촉을 하셔야 할 텐데, 당분간은 이러는 편이 서로를 위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누군가 ‘그 배‘를 관리해야 하니까요.”

“음.”

모르아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후작가의 집사장은 은퇴를 할 확률이 높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확실하게 안전해질 때까지 모르아가 섬에 남는 편이 좋았다.

일단 섬에서는 후작가와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나도 굳이 의심을 할 필요가 없고, 모르아도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리고 모르아의 말대로 배를 관리한 경력이 오래 된 사람이 트리토나 함을 관리할 필요도 있었다.

모르아와 굳게 악수를 한 나는 시선을 돌려 바우어를 보았다.

“바우어 항해사, 잘 부탁해. 어차피 봄이 오면 교대해 줄 테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걱정 마십시오, 제독.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잘 쉬고 있겠습니다.”

쉬기는 개뿔, 섬에 있는 것이 더 바쁠 수 있다는 것을 그도, 나도 알고 있다.

그저 서로 마음이 편하려고 하는 인사치레일 뿐.

하지만 바우어는 아직 내게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자신이 신뢰받고 있다는 것을 느껴인지 표정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엘리안 왕녀를 마주 보고 섰다.

“어, 음, 그러니까 섬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섬은 걱정 말아요, 남작님.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보다 무사히 돌아오시길.”

“저야 뭐, 크흠.”

“봄에는 꼭 돌아오시는 건가요?”

“아, 물론입니다. 지내시던 곳보다 겨울이 더 추우니 늘 건강을 챙기시구요. 지금도 몸이 많이 여위셨습니다.”

“풋, 제가 뚱뚱해지기를 바라시는 것 같군요.”

그녀가 작게 웃자 내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다 못해 입으로 튀어나올 기세다.

심박수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위기보다 더 위기 상황이다.

아니야! 그만둬, 이 멍청한 심장아! 주제 파악을 해야지,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일국의 왕녀님을 내가 감히….

…그런데 어차피 왕녀님이 여기에서 계속 머무신다면 현실적으로 나 말고는 대안이 없… 어휴, 관두자.

“그럼 촌장님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혹시라도 외부의 침입이 있다면 다른 생각은 마시고 무조건 사람이랑 식량만 챙겨서 콘베르테 호를 타고 도주하세요. 사람만 살아있다면 이까짓 거주지 다시 짓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어허허허, 걱정 마십시오, 총독님. 그보다….”

허비 촌장의 시선이 왕녀님을 향하는 것을 본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도 절대로 내 심장에 좋은 말은 아닐 거다.

“전 함선 출항 준비!”

***

“전방에 선박 두 척,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울리는 우르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항로도 아닌 곳에 배가 있다고?

“오펜, 해도 보고 현 위치 찾아봐.”

“넷!”

GPS가 없는 세상의 망망대해에서 현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상당히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고 시간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당연히 지금 당장 오펜이 현 위치를 특정해 올 방법 따위는 없다.

하지만 매일 위치를 특정해서 해도에 표시하기 때문에 지난 측정시간과 이후의 침로, 속도를 알면 현재 위치를 대충이나마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펜이 그 정도 일도 못 했다면 아무리 내가 예뻐하더라도 이등항해사를 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해도실에서 나온 오펜이 굳은 표정으로 보고 했다.

“선장님, 현재 위치 일레드 왕국 최북단에서 북서쪽으로 550km쯤 되는 지점입니다. 아무래도….”

“그래, 저 새끼들 아무래도 우리랑 볼일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저들을 발견했다면 저들 역시 우리를 발견했다는 것과 같다.

망망대해에 이질감을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와 저들밖에 없는데, 발견을 못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심지어 저들의 목적은 아마 우리, 혹은 폰테 섬이었을 것 같으니까.

“견시수! 전방의 미확인 선박 주시하고 정체가 식별되면 바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선장!”

다른 것은 몰라도 우르타의 눈과 감, 포술 실력은 믿을 수 있다.

“조타수, 우로 10도! 오펜, 선미로 가서 선단에 침로 변경 사항 신호로 보내. 각 함선 간 거리 100 유지하고 선행 선박을 주의해서 따르라고.”

“알겠습니다.”

오펜이 잰걸음으로 선교에서 떠난 뒤, 갑판을 주시하던 나는 선수 창고 쪽 통로에서 나오는 네이선을 발견하고는 그를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선장님?”

“일단 저쪽 좀 봐.”

내가 건네주는 망원경으로 이쪽으로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두 척의 선박을 확인한 네이선이 침음성을 삼켰다.

“으음, 아직 정규 항로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굳이 이쪽으로 항해하는 배라면….”

“어, 아직 전투가 벌어질지는 몰라. 가능하면 피하고 싶지만… 저놈들이 만약 일레드 놈들이면 우리가 먼저 공격해야 할 수도 있어.”

“일단 돌격대장과 돌격대만 대기시키겠습니다.”

“그래, 아직 무장시키지는 말고, 내부 정리만 좀 해줘.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일등항해사 좀 깨워오고, 전령으로 쓸 선원 두 명만 올려보내.”

“네.”

우리는 네 척, 저들은 두 척.

상식적으로 전투가 벌어지면 우리가 유리하다.

무장이 빈약하고 전투력이 거의 없는 리버티를 빼더라도 오트라스와 피오렐, 거기에 드라이언까지 있으니 저들이 먼저 시비를 걸 확률은 낮았다.

물론 저놈들이 살벌한 무장을 하고 있는 대형 군함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멀리서 봐도 6~8백톤 급의 중형 선박이다.

문제는 우리가 항해 해 온 경로.

우리를 지나쳐 우리가 온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면 폰테 섬이 나온다.

아직 항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누군가의 방해만 없다면 방향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저놈들의 목적이 폰테 섬이라면 절대로 그냥 보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나 현재 전쟁 중인 일레드 왕국 소속이라면 더더욱.

당장 방어력이 거의 없는 폰테 섬은 발견이 어려운 것이지, 점령은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니까.

한쪽 뺨에 베게 자국이 그대로 남은 그레이그가 헐레벌떡 뛰어 올라올 때쯤 견시를 보고 있던 우르타의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좌현 320도 선박 두 척, 일레드 왕국 군함입니다! 왕국기, 해군기 확인! 거리 3,500, 계속해서 접근 중!”

“선장님.”

선교에 올라오자마자 망원경으로 일레드 왕국 해군을 확인한 그레이그가 잠이 완전히 달아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잠깐만. 생각 좀 하자.”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각 함선마다 골고루 분배한 짐은 그리 많지 않았고, 심지어 부피에 비해서 가볍기까지 했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크게 돌리면 아마 저들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폰테 섬은… 심지어 그곳에는 왕녀님까지 계시지 않나.

일반 상선이라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일단 나는 폰테 섬의 총독이고, 왕실이나 후작에게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 폰테 섬의 공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니까 말이다.

일단 상선들의 진로를 막아 정선시키고, 폰테 섬은 아직 외부인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타이르면 된다.

아, 물론 교섭 중에 드라이언과 피오렐이 포구를 드러내고 있겠지만, 그건 그냥 협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윤활유 같은 거지.

돌아간다고 하고 돌아가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무슨 소리, 우리가 따라갈 건데.

솔직히 하루 정도만 돌아가면 다시 현재의 위치를 찾아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온 방향을 대충 가늠해서 가 봐야, 정확하게 폰테 섬에 도착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거리가 먼 만큼 3~4도만 틀어져도 그냥 망망대해만 나올 텐데.

탐험선의 귀환율이 낮은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문제는 상대가 벨로키나 왕국과 전쟁 중인 나라의 해군이라는 것이었다.

적국 상선이 하는 경고 따위 귓등으로도 안 들을 테고, 전쟁 중인 만큼 폰테 섬이라는 거점 공격에 대한 당위성도 충분하다.

“아무래도 저놈들, 여기에서 수장시켜야겠다.”

“선장님, 하지만 우리 무장이….”

당황한 오펜의 말대로 우리의 무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최대한 많은 자재와 물자를 싣기 위해 포탄과 화약을 진짜 생색이나 낼 수준으로밖에 챙기지 않은 것이다.

대포를 떼어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내 기억에 의하면 잘해봐야 일제 사격으로 서너 발이나 쏠 수 있으려나.

“포격전은 회피하고 바로 백병전으로 들어가야지. 씨발, 내가 해적이 된 기분이네.”

내가 입술을 짓씹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그레이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투 배치 시킵니까?”

“어, 전 함선 전투 배치. 교전기는 내가 신호하면 올려. 포격은 생색만 내고, 최대한 접근해서 바로 백병전을 벌인다.”

***

“적함에서 신호, 접근 금지, 현 위치에 정선하랍니다!”

“무시해!”

“교전기 올립니까?”

“아니, 저놈들이 공격할 때까지는 교전기를 올리지 않는다.”

어차피 포격전을 오래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우리 선단의 포구는 모두 막혀있었다.

물론 견시대를 내려간 우르타가 포갑판 내부에서 포격을 준비하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공을 내어주기로 한 이상, 포구를 조금 늦게 열어도 별 상관없었다.

다만 최대한 접근해서 포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최고 속도로 돌격 중일 뿐이다.

퍼퍼퍼퍼퍼퍼펑!

잠시 후, 우리를 향해 측면을 드러내고 있던 적함에서 자욱한 포연이 일어나며 오트라스의 전방 50m쯤 되는 곳에 무수한 물기둥이 치솟았다.

경고사격이다.

아마 다음번에는 우리를 노리고 쏘겠지.

“조범수 각 마스트에서 대기! 신호가 떨어지는 즉시 모든 돛을 접는다!”

아직 거리가 먼 만큼 우리의 속도 변화에 둔감할 거다.

결국 저들이 가늠한 우리의 속도를 예측해서 포를 쏴야 하는데, 속도가 빠르게 떨어지면 맞추기 더 어렵겠지.

속으로 30쯤을 센 뒤에 신호를 보냈다.

“모든 돛 내려!”

내 외침이 끝나자 모든 마스트에서 기다렸다는 듯 돛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돛이 모두 내려가기 무섭게 다시 포성이 울렸다.

“전원 피격 대비!”

내 외침에 갑판 위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선원들이 자세를 낮추며 가까운 구조물을 붙잡았고, 잠시 후 바람을 가르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선미 쪽에서 다수의 착탄음이 들려왔다.

우리가 돛을 내리는 것을 보고 급하게 포각을 수정한 모양인데, 역시나 모두 헛방이었다.

“교전기 올려! 드라이언은 좌측으로 돌아서 적을 압박하고, 피오렐은 우측으로 돌아 후방을 차단한다! 리버티는 외부 경계!”

저놈들도 고작 두 척의 군함으로 뭘 어쩌겠다는 것은 아닐 테니, 분명히 우리를 잡기 위해 파견된 여러 수색조 중의 하나겠지.

재수 없으면 근처의 다른 수색조가 포성을 듣고 합류할 수 있으니 외부 경계는 필수였다.

리버티 호는 전투에서 별로 도움이 안 되기도 하고.

“풀 세일! 모든 마스트 돛 올려! 조타수, 우로 전타!”

“네? 우로 전타 맞습니까?”

“어! 일단 멀어져!”

갑판에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마 욕을 한 놈도 쉴 새 없이 힘든 일을 해야 하니 무심결에 나온 말이지, 날 모욕할 의도는 없을 것이다.

배가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할 때 다시 포탄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오트라스의 좌현 쪽 10여 미터.

적함의 포술이 상당한지 계속된 변속과 변침에도 불구하고 탄착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재수 없으면 다음번에는 맞을 수도 있겠는데.

“선장님! 포격 준비합니까?!”

“아니! 포구는 열고 일단 대기한다! 지금 쏴봐야 맞지도 않아!”

방금 전에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가능한 일제사 횟수는 고작 3회, 이렇게 먼 거리에서 포탄과 화약을 낭비할 상황이 아니다.

아무리 우르타라도 이 거리에서, 심지어 급기동 중에 적을 맞추는 것은 힘든 일이니 말이다.

“전령, 갑판장에게 돌격대 준비시키라고 해!”

“네, 선장님!”

전령이 뛰어나가고 나는 바로 오펜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이등항해사가 타륜 잡아! 조타수 전령 대기!”

“넷!”

“네, 선장님!”

이후로 두 번의 포격이 있었지만, 다행히 피격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두 번째는 지근탄이 두 발이나 나오는 바람에 갑판 위가 물바다가 되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좌현 전타! 우리는 목표 2번 함에 접현한다!”

“좌현 전타!”

“전령! 포술장에게 우현 포격 준비하라고 해!”

오펜이 급하게 타륜을 돌리고 잠시 후 배가 크게 기울면서 방향을 바꿨다.

갑판 위에 나동그라지는 몇몇 선원들이 보이고, 화가 난 네이선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방향을 바꾸자 놈들은 그제서야 우리에게 멀어지려고 방향을 틀었지만, 이미 앞과 뒤 모두 드라이언과 피오렐에게 차단당한 상황.

설마 고작 상선단인 우리에게 공격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거기까지 예상을 했다면 고작 중형함 두 척으로 수색조를 짜지도 않았을 거다.

좌표가 알려지지 않은 폰테 섬을 찾을 엄두는 안 나니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출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섬에서 나오는 우리를 이용해 뭐라도 해볼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너희는 날 너무 물로 봤어.

“피격 대비!”

콰지지직! 쿠우웅!

갑판 쪽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린 직후, 배가 크게 흔들리며 나무 파편이 비산했다.

“좌현 피격! 좌현 피격!”

견시대에서 견시수의 외침이 들리고, 필사적인 움직임으로 겨우 넘어지는 것을 면한 내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피해 상황 보고!”

“좌현 선수가 피격당했습니다! 인명 피해 무!”

“항해에 지장 없으면 수리하지 마! 조범수, 돛 좌로 15도 돌려!”

저놈들, 오트라스만 집요하게 노리고 있다.

오트라스보다 큰 드라이언이나 더 강력한 무장을 갖춘 피오렐이 아닌 오트라스가 기함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최종병기 네이선이 있다는 것은 모를 거다.

붙기만 하면 우리가 이긴다.

콰아앙!

이번에는 피해가 조금 컸다.

두 발의 포탄이 선수와 중앙갑판을 훑고 지나갔고, 대략 십여 명의 선원들이 죽거나 다쳐서 비명을 질렀다.

난간이 박살 난 것은 덤이다.

네이선과 행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부상자를 옮기라고 지시하는 것이 보였다.

제기랄,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키운 부하들인데.

“선장님!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앞으로 적어도 서너 번의 포격은 더 견뎌야 합니다!”

“일등항해사, 우리가 버텨야 해. 그래야 드라이언이나 피오렐이 놈들에게 안전하게 접근할 것 아냐!”

“젠장, 버티는 게 의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버티는 것은 오트라스지,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리 의지가 충만해도 오트라스가 걸레짝이 되어버리면 버틸 방법이 없다.

그리고 포격을 가하는 적에게 선수를 들이대고 달려드는 것은 심장이 쫄깃할 정도로 위험한 짓이기도 했다.

그나마 이제 선회가 끝나서 우리도 반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랄까.

“포술장에게 준비되는 대로 쏘라고 해! 포탄 소진 즉시 포대 인원도 백병전 준비시키고!”

“넷!”

전령이 대답과 동시에 선교에서 뛰어나가고, 잠시 후 오트라스의 우현 포대에서 포성이 울렸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콰아아앙!

.

.

.

콰아아앙!

.

.

.

“조타수 좌로 15도! 030도 잡아!”

“030도 잡습니다!”

“전령! 갑판장에게 쇠뇌 공격 대비시켜!”

“네!”

우르타는 훌륭하게 본인의 임무를 완수했다.

고작 세 번의 일제사로 2번 적함에 무려 네 발의 포탄을 명중시킨 것이다.

물론 고작 포탄 네 방을 맞았다고 적함이 백기를 올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무려 열두 발의 포탄에 피격당한 오트라스는 사방이 깨져나갔으니 놈들은 자기들이 이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것은 그 와중에도 오트라스가 기적적으로 기동력은 거의 잃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목표로 잡은 2번함과의 거리는 150m 정도, 딱 한 번의 포격만 버티면 저놈들은 모조리 사망 확정이다.

그리고 우리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1번 적함에 접근한 드라이언 역시 얼마 안 되는 포탄을 쏟아부어 솜씨 좋게 1번함의 진로를 막아 속도를 떨어뜨리면서 접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등항해사, 현재 피오렐 위치!”

“피오렐 호 현재 2번 적함 우측으로 우회해서 접근 중입니다! 2번함까지 거리 800!”

대략 750톤가량 되어 보이는 일레드 군함, 승선 인원은 최대로 잡아도 150명이다.

오트라스의 가용 전투원이 90여 명, 피오렐의 가용 전투원도 70명쯤 될 테니 네이선과 행크의 돌격대를 막을 수 있는 규격 외의 인간이 없다면 우리의 낙승이다.

이미 포각이 나오지 않는 1번 적함은 타겟을 드라이언으로 돌렸고, 2번 적함의 마지막 포격이 터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과 함께 사방에서 비명이 울린다.

“우현 피격! 우현 피격 세 곳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갑판을 보니 네이선이 급하게 몇 명의 선원을 선실로 보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좀 크게 맞은 모양이다.

“갑판장! 피해 보고!”

“포탄 한 발이 흘수선 근처에 맞았습니다! 긴급 복구를 위한 인원을 파견했습니다!”

방금 가용 전투원이 열 명쯤 빠져나갔다.

수리를 하려고 내려간 인원은 네 명이지만, 다른 한발이 갑판을 때리면서 빠지거나, 죽거나, 다친 인원이 대여섯 명쯤 된다.

그래도 아직 네이선과 행크, 돌격대는 건재하니까 괜찮아.

“사격 준비!”

“발사!”

우렁찬 네이선의 외침이 들리고, 강철의 대가리를 가진 나뭇대가 하늘을 날았다.

이미 적들도 바리케이트를 쌓아놓은 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겠지만, 전투라는 것이 원래 비효율적인 거다.

그렇게 서로 쿼럴을 주고받기를 몇 번, 드디어 이쪽에서 줄갈고리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웃기는 것은 놈들도 우리에게 줄갈고리를 던졌다는 것이다.

어차피 도망치기는 글렀으니 피오렐이 합류하기 전에 우리를 무력화시키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놈들은 네이선이 어떤 괴물인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한심한 발상이다.

“우와아아아!”

갑자기 갑판에서 함성이 일어 바라보니, 몇 가닥 놓인 얇은 줄을 묘기를 부리듯 지그재그로 밟으며 적함으로 뛰어가는 인영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저, 저, 저 미친놈이?!”

“헛, 갑판장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저런 게 가능할 줄이야!”

이봐, 그레이그, 감탄할 때가 아니라고!

아직 적함과 오트라스의 거리는 10m 이상, 널빤지가 놓이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그러니까 네이선이 저쪽으로 건너가 봐야 당분간은 혼자서 버터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네이선이라도 혼자서 저 많은 적들의 공격을 받아 낼 수 있을 리가….

…있네?

번쩍이는 금속 빛에 휩싸인 네이선은 자신을 둘러싼 적들을 상대로 상상도 못 할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방어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간간이 적의 팔에서, 몸에서, 심지어는 목에서 피가 치솟는다.

저놈, 진짜 괴물이 되어버렸잖아?

쿠우우웅!

양쪽이 갈고리를 걸어 당겨대니 곧 두 배의 현측이 충돌음과 함께 나무 파편을 휘날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못 박힌 널빤지가 놓이기 시작했다.

“커억!”

끼이익, 쿵!

끼이이이익, 쿠궁!

그그그그그극!

“으아악!”

널빤지를 놓기 위해 오트라스의 선원들이 바리케이트를 벗어나자 저쪽에서 쇠뇌로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네이선이 갑판을 휘저어 놓은 통에 위력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쇠뇌를 들고 있는 놈들 중에 네이선이라는 태풍에 휩쓸린 녀석은 얼마 안 되었을지 몰라도 당장 옆에서 칼부림이 나서 동료가 죽어 나가는 판에 집중력을 유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게 자연재해 급 인간이라면 더더욱.

“모두 돌격!”

“으아아아아!”

“와아아아!”

“다 죽여버려!”

그래도 쿼럴을 맞은 이가 몇 명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감수할 정도의 피해였고, 그렇게 널빤지가 놓이기 무섭게 행크를 필두로 하는 돌격대가 무서운 기세로 돌격을 개시했다.

놈들의 갑판장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세를 돋우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네이선에게 기선을 제압당하고 돌격대의 돌격을 허용한 적들은 형편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돌격대원 중 일부는 용병들에게 영감을 받았는지 금속으로 만든 팔 보호대 따위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일대 다수의 상황에서 상당히 유용해 보였다.

방패만큼 넓은 면적을 막지도 못하고, 얇은 금속판은 칼에 제대로 찍히면 맥없이 찢기지만, 그래도 급할 때 적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고 팔이 날아갈 상황을 가벼운(?) 부상 정도로 바꿔주니, 그 가치는 충분했다.

뱀브레이스처럼 팔목에서 팔꿈치 정도까지만 감싸고 있어서 활동하는데 방해도 거의 없고, 만약 바다에 빠지더라도 떼어내기 쉽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다른 선원들은 몰라도 돌격대원들의 제식 무장으로 써도 괜찮지 않을까?

“끝났군. 피오렐에게 신호해서 1번 적함으로 가라고 해. 여기는 우리로 충분하겠다.”

“네, 선장님.”

선교에서 대충 헤아려보니 적의 수는 80~90여 명, 이미 기세가 우리 쪽으로 넘어왔으니 굳이 피오렐까지 합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원래 계획은 조금 작은 2번 적함을 빠르게 제압하고 조금 더 큰 1번 적함을 포위공격 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차라리 드라이언과 피오렐이 동시에 접현해서 1번 적함을 제압하는 것이 나으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