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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27화 (328/420)

327화. 그물 (2)

피와 시체로 이루어진 길을 달려온 네이선이 피를 흠뻑 먹은 칼을 내질렀다.

카아앙!

카앙!

쨍!

커다란 쇳소리가 빠르게 세 번쯤 울린 뒤에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악!”

갑판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오른팔이 피를 흩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아직도 움켜쥔 화려한 커틀라스가 애처로워 보인다.

그래도 딱히 아쉬워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오른팔이 없어도 딱히 불편하지 않을 테니까.

갑판장의 죽음으로 완전히 전열이 붕괴된 해군은 이제 맞서 싸우는 이보다 좁은 갑판 위를 도망 다니는 인원이 더 많아졌다.

바다에 자진해서 뛰어드는 녀석들도 종종 보였다.

이 날씨에 바다에 뛰어들어봤자 살아날 확률은 거의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나도 다녀올 테니 일등항해사가 선교 좀 맡아.”

“선장님!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굳이 왜 위험을 자초하십니까?”

“함장의 목은 내가 직접 거두는 게 예의 아니겠어?”

나는 턱짓으로 2번 적함의 함교 입구를 가리켰다.

그곳은 이미 네이선과 그를 따르는 대여섯 명의 인원들로 점령당한 상태였다.

아마 내가 건너갈 때쯤이면 네이선이 함장을 반쯤 죽여서 눕혀 놓… 정말 반만 죽일까?

“이런 젠장! 물어볼 게 있는데!”

최대한 빠르게 적함으로 건너갔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다음이었다.

내가 함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위쪽에서 네이선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며 해맑은 웃음을 지은 것이다.

제발 피칠갑을 하고 저렇게 웃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여어어! 너희 함장, 항해사 몽땅 뒤졌다! 항복해!”

항복 권고를 왜 네 맘대로 해?!

“후우, 후우, 어? 선장님? 여기까지 왜 오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행크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핏물로 지저분해진 돌격대원 세 명이 내 옆과 뒤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피비린내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

“함장에게 뭘 물어보려고 했는데, 보다시피 늦었네.”

“아….”

행크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내 눈을 피해 딴청을 부리는 사이, 사방에 가득하던 쇳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인원들은 부질없는 저항보다 차라리 항복을 택한 것이다.

쯧, 원래 다 죽이려고 했는데.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 포로와 나포한 함선은 어떻게 할까요?”

“포로는 묶어서 선창에 집어넣고, 부상자는 우리 애들만 챙기고 그대로 둬. 일단 돛줄을 다 자르고 투묘한 상태로 철수한다.”

“알겠습니다.”

행크가 떠났음에도 돌격대원들은 여전히 내 주변에서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교에서 내려온 네이선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임무 완료! 함장실로 가시겠습니까, 선장님?”

“아니, 남은 녀석을 먼저… 아니다. 함장실이랑 금고만 먼저 털자.”

“넵.”

함장실에서 항해일지와 돈이 될만한 고급용품들을 챙긴 뒤, 금고의 문을 부수고 안에 들어있던 활동 자금을 모조리 약탈한 우리는 그대로 철수했다.

이미 1번 적함은 양쪽에 드라이언과 피오렐이 붙어서 치열한 백병전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두 손보다 세 손이 더 나은 법, 나는 그대로 오트라스를 몰아 드라이언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니까 리버티에서 갑자기 날아온 신호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드라이언에 접현했을 것이다.

“리버티에서 신호! 270도 방향에 미확인 선박 3척 출현!”

“뭐?!”

나는 급히 망원경을 들어 서쪽 바다를 살폈다.

저 멀리, 수평선 근처에 세 척의 선박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이런 젠장.”

신경질적으로 망원경을 내린 나는 우측의 드라이언을 보았다.

거리는 대략 500m 정도, 조금만 더 다가가면 서로 말을 할 수 있는 거리가 된다.

“일등항해사! 접현은 취소한다. 최대한 드라이언에 붙여! 난 우현에 가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

“베기어 함장! 베기어 함장을 불러와!”

나는 드라이언에 접근하기 무섭게 뱃전에 매달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잠시 후, 흐트러진 복장의 베기어 함장이 달려와서 물었다.

“제독! 무슨 일입니까?!”

“함장, 리버티에서 온 신호 봤죠?! 적의 원군이 온 모양입니다! 지금 전투 상황은 어때요?!”

“거의 종료되었습니다! 지금 후속 처리를….”

“그럴 시간 없어요! 당장 적함을 자침시키고 남쪽으로 퇴각합니다! 포박하지 못한 포로들이 있다면 모두 죽여도 무방합니다!”

“네?! 항복한 이들을 죽이라는 겁니까?!”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도의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쓸데없는 선비 짓을 하다가 내 사람이 더 다치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우리가 온 방향, 구성, 전투 방식 뭐가 되었건 놈들에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어요! 당장 자침, 아니, 함장실과 금고만 털고 자침시켜요! 생존자가… 있으면 안 됩니다. 명령입니다!”

멀쩡한 몸으로도 물에 빠지면 버티기 힘든 날씨다.

배가 침몰하면 배 안에 있던 부상자와 생존자들은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알겠습니다, 제독.”

명령을 전달한 나는 선교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돛 올려! 우리는 나포한 2번 적함으로 간다! 빨리 움직여!”

적의 원군으로 추정되는 세 척이 도달하기까지 예상 시간은 한 시간 미만, 그 안에 2번 적함을 약탈할 시간은 없다.

아깝지만 그냥 자침이라도 시켜야지.

군함 한 척이면 돈이 얼마인데 이걸 그대로 놈들에게 넘겨주겠는가?

게다가 배가 넘어가면 분명히 어딘가 구석에 숨어서 살아남은 적들이 우리의 전력을 낱낱이 보고할 거다.

크게 선회해서 방향을 돌리는 동안 드라이언과 피오렐의 선원들이 함장실과 금고를 털어서 옮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항복한 일레드 해군을 포박하고 있었고….

휴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베기어 함장 역시 상황의 심각함은 알 테니 너무 늦지는 않을 것이다.

***

2번 적함을 자침시키고 항해를 시작할 때쯤 드라이언과 피오렐이 늦지 않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일레드 왕국 해군기를 펄럭이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세 척의 선박은 우리와 2km까지 따라붙은 상태였다.

“저놈들 속도가 얼마나 되는 것 같아?”

“대략 7노트 정도입니다. 무장을 덜어냈는지 꽤 빠르군요.”

“우리처럼 순풍을 받으면 비슷해지겠지?”

“네.”

아무리 속도가 비슷하다고 해도 만약 다른 수색조가 우리의 진로를 막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당장 다가오는 세 척 중 한 척은 1,000톤에 근접해 보이는 대형함, 우리가 전력으로 맞서도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 것 같으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한 번 전투를 겪어서 선체도, 선원도 피해를 입은 상태라서 더 문제다.

“전 선단에 신호, 모든 대포를… 파기한다.”

애초에 쾌속선으로 제작된 오트라스, 쾌속전투함으로 제작된 피오렐, 상선보다 둔중하기는 하지만 짐을 가장 적게 실은 드라이언, 무장 자체가 없는 리버티.

대포만 버리면 중무장에 장갑이 두꺼운 군함보다는 속도가 잘 나올 거다.

그런데 문제는 비싸기 그지없는 대포를 버려야 한다는 것인데….

명령을 내리는 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무려 대포다.

오트라스, 피오렐, 드라이언에 설치된 대포 가격을 생각하면, 심지어 최근 전쟁으로 금속과 무기 가격이 수직 상승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절로 눈물이 날 정도의 손해였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그럼.

“정말 대포를… 다 파기합니까?”

“응, 대포는 물론 남은 화약과 포탄도 다 버려. 고작 저런 소규모 분함대로 일레드 왕국의 영역을 벗어나서 쫓아오지는 못할 거야. 앞으로 사나흘 정도만 죽으라고 달리면 돼.”

열혈남아인 그레이그도 차마 한 번 더 붙어보자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승패에 상관없이 전투가 벌어지면 방금 전 전투로 입은 피해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게 뻔했다.

게다가 운 좋게 이긴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막을 수 없고, 저들이 끝이라는 보장도 없다.

아니, 위협도 되지 않는 선수포를 계속 날리는 것으로 봐서 분명히 근처에 수색조가 더 있다.

“일등항해사, 지휘 좀 부탁해.”

“어디 가십니까?”

“해도실.”

해도실에 들어온 나는 오펜이 표기한 현 위치와 전투가 벌어진 지역을 노려보았다.

일레드 왕국 놈들이라면 대충이나마 폰테 섬의 위치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내 뒷조사를 했을 것이고, 내가 자기들이 전멸시킨 제국 함대의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확률이 높으니까.

지금쯤이면 울부짖는 바다의 영역이 축소되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폰테 섬이 옛날 울부짖는 바다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그물을 치고 있을까.

승기를 잡았다고 해도 아직 벨로키나-쿠샤 연합군과 전쟁 중이니 많은 전력을 할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포위망은 최대로 잡아도 두 겹, 만약 1차 포위망이 뚫린다면 예측 가능한 경로는 대략….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세상에 장거리 통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위성 전화나 무전기까지 갈 것도 없이 신호탄만 있었어도 우리는 사망 확정이다.

한참을 해도실에서 끙끙거리며 머리를 혹사시킨 나는 선교로 돌아와서 명령을 내렸다.

“조타수, 좌로 5도, 160도 잡아.”

“좌로 5, 네?!”

“어서!”

내 재촉에 오펜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좌로 5도 맞습니까? 그러면 일레드 왕국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맞아. 저놈들도 바보가 아냐. 분명히 우리가 1차 포위망을 돌파하면 최대한 빨리 일레드 왕국의 영역을 벗어나려고 좌측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내 예상대로라면 좌측으로 틀면 얼마 안 가서 놈들의 2차 포위망에 걸려들 거야.”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오펜이 차마 타륜을 돌리지 못하자 그레이그가 나섰다.

“선장님, 하지만 일레드 왕국 쪽으로 움직인다면 오히려 더 위험한 것 아닙니까? 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가는 진짜 옴짝달싹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일등항해사, 이야기 못 들었어? 연합군의 항구 봉쇄가 풀렸다잖아. 일레드 해군들이 바보도 아니고 봉쇄가 풀렸는데 굳이 항구 근처에서 맴돌고 있을까? 심지어 자기들이 유리한 상황인데? 대부분 먼 바다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일레드 왕국 쪽으로 가서 크게 돌아 서쪽으로 나간다. 주요 항로만 피하면 이 빌어먹을 그물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도박이군요.”

“죽을 자리인 줄 알면서 찾아가는 것보다는 낫지.”

우리가 대화를 마치자 단단한 오펜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재 침로 195도! 좌로 5도, 160도 잡습니다.”

“좋아, 후방 경계는 피오렐이 맡도록 하고, 서쪽은 리버티가, 동쪽은 드라이언이 맡도록 해. 견시수는 전방 경계에 최선을 다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등항해사도 좀 쉬지. 선교는 이등항해사가 맡아.”

“네, 선장님도 좀 쉬시지요.”

***

그레이그의 제안대로 선교에서 내려왔지만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전투를 벌였다지만 예전처럼 몸을 직접 움직이면서 싸운 것이 아니라 체력이 바닥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돌아가면 되나?

직접 싸우다가 다친 놈들 얼굴은 한번 보고 들어가야지.

“닥터, 부상자들은 어때요?”

“죽은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다친 사람들은 일단 응급 치료는 마쳤네. 그런데….”

“왜요?”

“중상자가 있어.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군.”

“…보죠.”

작은 선실 하나를 임시로 개조한 병동에 들어서자 피비린내가 확 풍겨오며 십여 명의 신음 소리가 중구난방으로 들려왔다.

이래서 전투 따위, 하고 싶지 않은 건데.

착잡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감정이 묻어나지 않게 닥터에게 물었다.

“몇 명이나 돼요?”

“총 14명이네. 그리고 이쪽으로.”

의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침상으로 다가가자 창백한 얼굴로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젠장, 트레비스….”

“아는 친군가?”

“꽤 오래 함께한 사람이죠. 그래도 칼질 좀 하는 녀석인데 어쩌다가.”

“뒤에서 칼을 맞았어. 사람은 앞밖에 보지 못하니 실력이 뛰어나도 별수 있나. 꽤 초반에 당한 모양인데 그래도 이송을 빨리해와서 겨우 목숨은 건졌네. 조금만 늦었어도 과다출혈로 죽었을 거야.”

숨결조차 미약한 트레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출혈은 잡았어요?”

“일단 상처를 봉합하기는 했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오늘과 내일이 고비일 거야.”

“약은요?”

내 말에 주변을 한번 둘러본 닥터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런 말이 조금 잔인하겠지만, 일단 하루 정도만 두고 보세. 그 약은 제독도 이제 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면 굳이 쓸 필요가 없겠지. 제독이 급할 때 쓰라고 한 게 세 알 남았으니 열이 심각하게 오르면 내가 알아서 처방하겠네.”

몇 안 되는 이름까지 아는 선원이다.

심지어 최근에 왕녀님 탈출 작전에서 한 축을 담당해 주기도 했었고.

마음 같아서야 항생제고 뭐고 다 써서라도 살리고 싶지만, 닥터 롱베르의 의견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여기는 그래도 닥터가 있어서 다행인데 다른 배가 문제네요. 피오렐과 드라이언에도 부상자가 꽤 될 텐데.”

아무리 양쪽에서 협공을 했다고 하지만, 피오렐과 드라이언에는 네이선이 없다.

압도적인 격차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면 사상자가 꽤 나왔으리라.

“그러니까 말이네. 아히르 씨가 제안을 받아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지나간 일을 후회하면 뭐 합니까. 그리고 아히르 씨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요. 섬에도 의사가 한 명쯤은 있어야 하니까요.”

“그냥 그렇다는 말일세. 그런데 지금도 쫓기는 중인 것 같은데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나?”

“우리가 조금 더 빠르니까요. 이변이 없는 한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그럼 부상자들 잘 부탁드려요. 특히 트레비스 이 녀석은… 휴, 잘 부탁드려요.”

씁쓸한 마음을 추스르며 방으로 들어서는데 이질적인 것이 눈에 띄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테이블 위에 놓인 네모난 상자.

뭐지?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문의 잠금장치를 다시 확인했다.

왕녀님이 없는 이상 내가 없는 선장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건 네이선이나 우르타라도 안 되는 거다.

“지금이라도 나오면 용서할 수 있어.”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지만, 방 안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잠금장치를 딱히 강제로 연 것 같지도 않은데?

게다가 상황을 봐도, 다른 곳도 아니고 폰테 섬에서 머물다가 나오는 길이다.

그런데 갑자기 암살자, 도둑, 아니, 물건을 두고 갔으니 도둑은 아니고, 하여간 나에게 적대적인 누군가가 배에 타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지금이라는 시점도 또 말이 안 되지 않나.

배가 출항한 지 벌써 며칠이 흘렀는데 이제 와서?

안전하게 네이선이나 선원을 부를까 하던 나는 퍼뜩 드는 생각에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 천천히 상자에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본 상자는 밋밋한 회색의 거친 느낌이었는데, 안에 물건이 들어있다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의 물건이 들어갈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대낮에 포장까지 해서 주신 적은 없지만, 혹시 지고스 님의 선물은 아닐까?

그러면 모든 게 말이 되니까 말이야.

그런데 트리토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선물을 안 주실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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