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32화 (333/420)

< <332화> 눈으로 봐야만 믿는 것이 인간 >

분명히 항구관리관이 내 입장을 전했을 텐데도 오트라스에서 현문이 내려지기 무섭게 수많은 인파가 달려들었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델라 항구에서 감히 스코타 후작의 물건에까지 눈독을 들이다니.

내게 이야기를 들은 네이선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소리를 빽 지른다.

“현문 봉쇄해! 허가받지 않은 자는 승선시키지 마! 돌격대장, 돌격대 소집해!”

현문으로 사용하는 널빤지가 부두에 고정되자마자 몇몇 성급한 사람들이 먼저 현문에 오르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현문의 폭은 고작해야 한 사람이 넉넉하게 지나갈 정도인데 입구에서 세 사람이 먼저 발을 디디겠다고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

입고 있는 옷으로 볼 때 적당한 수준의 부호 아니면 상인으로 보인다.

귀족이나 귀족 가문의 사용인은 아니라는 건데, 감히?

내가 알량한 귀족이 되었다고 위세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다.

귀족이 된 이상 결국 귀족들과 마주해야만 하는데, 기본적으로 출신이 천해서 무시받기 딱 좋은 상황에 더해서 평민들이 날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면···.

차라리 작위를 받기 전보다 귀족들을 상대하기가 더 어려워질 거다.

내가 무시당한다는 것은, 곧 내 선단이, 폰테 섬이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말과 같은 말이지.

결국 몸싸움에서 이긴 한 남자가 흐트러진 복장으로 현문에 올라 배로 올라오는 곳을 봉쇄한 네이선과 선원들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이놈들! 비켜라, 선단장을 불러와!”

“선단장이라, 남작님을 오라 가라 하시는 것을 보니 귀족이십니까?”

“뭐? 나, 남작?”

저놈 설마 내가 남작위를 받은 것도 몰랐던 거야?

뾰족하게 반응했던 네이선이 남작이라는 말에 당황하는 그를 같잖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쫓아. 미친놈인가, 남작님을 오라 가라 하다니.”

“아, 아니, 잠깐, 내가 귀족이신 줄 모르고 실언을, 어억!”

귀족 모독죄는 중죄다.

저자가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한 짓은 아니니 목숨을 빼앗기는 좀 그렇지만, 팔 하나쯤 잘라버려도 그러려니 할 정도의 잘못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마침 잘 걸렸다.

저놈을 족치면 날파리들이 좀 덜 달라붙겠지.

“야, 갑판장. 정보도 느리고, 개념도 없고, 내 기분도 잡치게 만들었는데 그냥 보내드리면 되겠어? 겸손을 배우실 수 있게 좀 어루만져드려.”

“흐흐흐, 네, 스펜서 남작님.”

실소를 흘리던 네이선은 이제 막 도착해서 도열한 돌격대를 보며 고갯짓을 했다.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어버려.”

“미, 미안하오! 아니, 남작님,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 쿠에엑!”

약 1분 정도 이어진 집단구타에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린 남자는 곧 선원들에게 팔다리가 들려 부두에 던져졌다.

온몸이 퉁퉁 붓고 여기저기가 터지기는 했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한 것은 아니라서 잠시 바닥에서 끙끙거리던 남자는 잠시 후 몸을 일으켜서 인파를 헤치고 절뚝거리며 사라졌다.

흐음, 이제 좀 소란이 가라앉았군.

돈에 눈이 멀어서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던 사람들이 방금 다수를 위해 희생한(?) 남자 덕에 내가 귀족이라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상륙은 경비대가 도착하면 절반씩 나눠서 실행한다. 물품이 물품이니만큼 총원의 절반은 각 함선을 이탈하지 말도록.”

몇몇 선원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어렸지만,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당장 눈앞에 위험의 증거(?)들이 웅성거리고 있으니 다들 바짝 긴장한 것이다.

“비켜라! 비켜, 비켜!”

서로 눈치를 보던 군중들의 한 귀퉁이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일단의 항구경비대가 오트라스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우리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리안 스펜서 남작님이십니까?”

“음, 내가 리안이다.”

“항구관리관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지금부터 오트라스, 드라이언, 피오렐, 리버티의 경계는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나는 네이선과 우르타를 데리고 오트라스에서 내려오며 경비대의 인솔자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찔러주었다.

“고생이 많아.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술이나 한잔하게.”

“감사합니다, 남작님.”

눈까지 내려쓴 모자 덕분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저놈도 분명히 이런 부수입을 노리고 신나서 달려왔으리라.

내가 경비대를 지나서 군중 사이를 통과하는데, 반대쪽에서 아인델프, 발드, 베기어가 각자 항해사나 갑판장을 대동한 채 군중을 헤치고 마중 나왔다.

“제독.”

“경비대는 어떻게 된 겁니까?”

“선원들을 일단 대기시켰습니다만.”

“아, 경비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후. 작. 각. 하.의 상품을 상대로 장난치려는 놈들이 있을지 몰라서 항구관리관이 파견한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선원들은 절반씩 상륙 허가하고, 경계에 만전을 기하도록.”

내가 일부러 ‘후작 각하’라는 말에 힘을 주자 이쪽에 이목을 집중하던 몇 사람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떠나면, 아니, 어쩌면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치려고 했던 놈들인 모양이다.

하긴, 평민들에게나 내가 ‘남작 나으리’지 귀족들에게는 ‘단승 귀족 나부랭이’에 불과할 테니까 그런 마음을 먹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욕심 많은 돼지 새끼라도 감히 ‘후작 각하’의 물건에 손을 댈 배짱은 없겠지.

“그리고 함선장들은···.”

“크흠, 스펜서 남작님?”

···없기는 개뿔, 역시 세상은 넓고, 사리분별 못하는 정신 나간 놈은 많은 것 같다.

“뭐지?”

“나는 보나후드 백작 각하를 모시···.”

짜악!

“어억?! 지, 지금 무슨 짓을?”

말을 하다 말고 다짜고짜 뺨을 맞은 녀석은 눈에 분노를 피워올리며 내게 덤벼들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감히 귀족도 아닌 자가 내 일을 방해해?”

“아니, 나는 그저···.”

짜악!

이번에는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가며 피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입 다물어. ‘나는’이라고? 네놈이 나와 동급이라는 거냐? 한마디만 더 하면 팔을 잘라버리겠다.”

“···끄으으으.”

머리를 몇 번이나 털면서 정신을 차린 놈이 눈에서 독기를 피워올렸다.

“나는 보나후드 백작 각하를 모시고 있소!”

“보나후드 백작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 교육이 아주 엉망이군.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한마디만 더 하면 팔을 자른다고.”

“하, 백작 각하를 모독하고도 무사할 것 같소?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요.”

“아니, 그렇지 않을 것 같아. 네이선, 잘라.”

“지금 뭐라고? 끄아아아아악!”

네이선은 준비동작도 없이 눈 깜짝할 새에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니까 칼을 뽑나 싶은 순간에 이미 그 개새끼의 왼쪽 팔이 바닥에 떨어지고 피 분수가 터져 나왔다.

아 참, 돼지 멱따는 소리도 덤이다.

“계속 시끄럽게 굴면 목을 잘라주지.”

“끄으으읍···.”

“가서 백작에게 전해. 위아래도 구분 못 하는 멍청한 놈을 보낸 것은 날 무시한 거냐고. 다음에도 같은 일이 있으면 결투장을 받아야 할 거라고 말이다. 이 말을 전하게 하기 위해 네놈을 살려둔 거다. 꺼져.”

내 말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는 떨어진 자기 팔을 집어 들고 등을 돌렸다.

“잠깐.”

“흐으으으, 뭐, 뭐ㅇ···? 아니, 뭡니까?”

뭔가 애매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양팔을 잘라버리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겠지.

“목숨을 살려줬으면 고맙다고 인사 정도는 해야지?”

“···가, 감사합니다, 남작님.”

“좋아, 가봐.”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나니 우리를 둘러싼 군중들이 거의 흩어졌다.

그래서인지 뒤에 있던 우르타가 슬쩍 다가오며 조용히 속삭였다.

“갑자기 왜 그랬어?”

“새끼가 나한테 반말하잖아. 고작 심부름꾼 새끼가.”

“에에엑?”

우르타는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 팔을 잘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애초에 명백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귀족인 나를 감히 자기 일을 보겠다고 평민이 부르는 것 자체가 무례다.

그런데 그 시작이 ‘나는’이라니.

이건 말 그대로 자신과 동격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나 쓰는 말이잖아.

그냥 한 번쯤 봐주면 안 되냐고?

큰일 날 소리.

모여 있는 인원 중에 항구관리관의 말대로 귀족 가문의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이가 한두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오늘 있었던 일은 그들의 주인들에게 낱낱이 보고될 것이고, 이는 귀족들 간의 사교장에서 꽤나 이슈가 될 것이다.

그런데 화제의 주인공, 벼락출세한 천한 출신의 ‘단승 귀족’이 자신의 권리도 챙겨 먹지 못하고 평민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모른다고 하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대우가 기다리겠냐고.

나라고 사람 병신 만드는 것이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은 고마워하지도 않을 호의를 베풀어서 손해를 감수할 만큼 착한 사람도 아니다.

“각 함선장들은 지금 하달한 명령을 시행하고, 후작 각하께 보여드릴 물건을 다 싣는 대로 함께 후작 각하께 갈 테니 준비해서 다시 모이도록 해. 복장에 신경들 좀 쓰고.”

“알겠습니다.”

다른 배의 선장과 항해사, 갑판장들이 돌아간 직후 커다란 짐마차 두 대와 4인승 고급 마차 한 대가 오트라스의 현문 앞으로 왔다.

고귀한 귀족 나으리께서 천한 마부에게 직접 말을 걸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네이선이 나섰다.

“항구관리관님께서 보냈소?”

“네, 나으리. 스코타 후작 각하께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기다리지.”

마부와 말을 마친 네이선은 아직도 우리를 관찰하는 눈을 의식해서인지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며 내게 말했다.

“남작님, 그럼 말씀하신 대로 견본품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한 뭉치 정도는 잘 풀어서 내가 탈 마차에 넣어 둬. 후작 각하께 직접 보여드려야 하니.”

“알겠습니다.”

네이선이 선원들을 지휘해서 조심스럽게 미리 빼놓았던 짐들을 싣는 동안 나는 자리를 지키며 하역 작업을 감독했다.

평소라면 선장인 내가 직접 할 일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게 후작의 물건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려면 내가 좀 오버액션을 취해주는 편이 좋았다.

하역 작업이 마무리될 때쯤 게론드가 다가와서 물었다.

“선장님, 남은 물건들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회계사가 각 함선의 창고를 봉인해. 함선장들이 나와 함께 자리를 비우는 동안 대리를 맡을 사람에게 절대 사수하라고 전하고. 누가 오더라도 내 허락 없이는 풀 한 줄도 나가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보관에 최대한 주의하겠습니다.”

“음, 그리고 남은 물량에 대한 서류는?”

“여기 있습니다.”

“좋아, 그럼 일등항해사에게 내가 없는 동안 오트라스 관리를 맡으라고 전해줘.”

“무장은 어떻게 할까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동안 선박 무장은 그리 필요하지 않다.

개인 무장까지 파기하지는 않았으니 단순한 소요 사태 정도는 대응하기에 충분하겠지.

그리고 며칠 전에 있었던 전투에 대한 소식이 돌면 대포 가격이 조금은 떨어질 수도 있고.

“일단 내가 올 때까지 보류해.”

* * *

아무리 고급이라고 해도 마차가 아주 편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4인승 마차에 성인 남자 네 명이 타면 절대로 쾌적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그나마 춥지는 않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랄까?

그런 이유로 다들 불편한 침음성을 흘리며 몸을 이리저리 꼬고 있는데, 혀를 씹을 위험을 감수하고 아인델프가 말문을 열었다.

“그, 팔을 자른 남자 말입니다.”

“응? 왜?”

“무슨 백작의 부하라고 하던데 후폭풍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인델프의 질문에 나는 히죽 웃었다.

“보나후드 백작? 들어본 적도 없어. 그렇다면 별 볼 일 없는 작위만 남은 귀족일 확률이 높지. 이 나라의 실세인 스코타 후작의 봉신인 나를 공격한다고? 죽여달라고 비는 꼴이지.”

“이름은 유명하지 않더라도 백작입니다. 물론 후작 각하를 직접 상대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제독에게는···.”

“괜찮아. 잘못은 그쪽에서 먼저 한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대답에 아인델프는 약간 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에는 베기어 함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독 말대로 그자가 먼저 무례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백작 입장에서는 모욕을 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까요. 아마 팔을 잃은 자는 백작에게 목숨까지 내줘야 할 확률이 높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백작이 느낀 모욕감이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내가 평온하게 베기어의 말에 긍정하자, 아인델프와 발드 선장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큰일 아닙니까?”

“아, 아, 그래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자가 고작 백작 혼자 쓸 물량을 얻자고 그렇게 무리하게 달려들었을까? 거기에 모여 있던 다른 귀족가 사용인들은 바보 멍청이라서 달려들지 않은 것 같아?”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나후드 백작인지 뭔지가 내게 베르엘라를 최대한 많이 얻어서 판매할 생각이었던 거지. 백작이 장사에 손을 대야 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야. 물론 그런 교섭을 할 사람으로 자기 주인의 의도도 이해 못 하는 쓰레기를 보냈다는 것이 문제지만. 가문이 몰락해서 그런 쓰레기밖에 없었는지, 그런 쓰레기밖에 없어서 가문이 몰락했는지 모르겠네.”

“오, 그렇다면?”

“그래, 백작은 내게 복수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을 거야. 백작이라면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 권력과 재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백작이라는 작위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으니.”

내 말에 베기어 함장이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독은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단 말입니까? 정말 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제독을 보고 있으면 제가 나이를 헛먹은 것 같습니다.”

“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나는 그저 머슥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 천천히 마차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간만에 와서 그런가 저택이 꽤 멀게 느껴진다.

“내리지. 다들 복장 조심하고.”

“잠시만요. 제독.”

내가 반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발드 선장이 나를 제지했다.

“아무래도 후작 저택이 아닌 모양입니다.”

“응?”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의 말에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귀에 주의를 집중했다.

저 멀리서 산새 소리가 들린다.

사람의 소리라고는 마부와··· 잠깐, 이 정도면 보통 마차 문을 열어줄 때가 된 거 같은데?

내가 탄 마차는 항구관리관의 배려로 후작가의 문장을 달고 있다.

후작 저택에 도착하면 경비병이건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나 집사건 누군가가 문을 열어준다.

그런데···.

나는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다들 무기 준비하고 셋에 아인델프 선장을 선두로 뛰쳐나간다.”

다들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아, 베기어 함장은 용병함의 함장답게 짧은 커틀라스를 차고 있었기에 칼 손잡이만 움켜쥐었다.

“두 번째는 베기어 함장, 다음은 나, 마지막은 발드 선···.”

벌컥!

“안 나오시고 뭐 하십··· 으억?!”

문을 연 마부도 우리도 화들짝 놀랐다.

심지어 아인델프는 나갈 준비를 하다가 반사적으로 단도를 내질렀을 정도였다.

칼날이 딱 10cm만 더 전진했으면 불쌍한 마부는 오늘이 제삿날이 될 뻔했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새파랗게 질린 마부가 부들부들 떨며 묻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여기에서 마차를 세운 거지? 후작 각하의 저택은 아닌 것 같은데?”

“네에? 저, 저택이요? 아이고, 이 카, 칼부터 좀 치우시고···.”

“아인델프, 칼 내리게.”

내 말에 아인델프가 칼을 뒤로 물리자 마부는 그사이에 땀이 흥건해진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후작 각하를 뵈러 스코타 성에 가시는 것 아닙니까?”

“응?”

“스코타 성이라니?”

“후작 각하를 뵈려면 당연히···.”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전대 후작은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로 후작이 해야 할 대부분의 일을 현 후작에게 물려주고 저택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 후작은 한창때인 40대.

당연히 스코타 성에 머무르지, 굳이 저택에 머무를 리가 없었다.

“젠장, 매번 저택으로 갔더니 착각했군. 알았으니 물러서게.”

마부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또 그놈의 귀족이라는 위치 때문에 사과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인델프에게 눈짓을 했다.

아인델프 역시 상황을 이해했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마부에게 주었다.

“미안하군.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아닙니다요, 감사합니다, 선장님.”

마부의 눈치도 보통이 아닌지라 우리가 모두 선장이나 함장이라는 것을 알고는 눈치껏 고개를 숙였다.

은화가 이번 일을 잊는 대가라는 것도 아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 * *

짐마차에 타고 있던 항구경비대원 여섯 명과 마부 세 명은 빠르게 야영 준비를 마쳤다.

길 한쪽으로 짐마차를 모으고, 그 안에 야영지를 만들고, 눈이 닿는 곳에 말 세 마리를 묶었다.

인간처럼 하루 일과를 마친 말들이 기쁜지 연신 히히힝거렸다.

“상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제독.”

“수고했어, 아인델프 선장. 이리 와서 몸 좀 녹이지.”

“네, 남쪽도 이제 꽤 춥네요.”

“경비병들이 불침번은 서겠지만 우리도 별도로 불침번 하나씩은 서자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앞으로 하루는 꼬박 더 가야 하니까.”

그랬다.

스코타 성은 내륙에 위치한 성으로, 델라 항구에서 마차로 무려 이틀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다.

당연히 그렇게 오래 마차가 달릴 수는 없으니 적당한 곳에서 자주 쉬어주어야 했다.

어우, 앞으로는 후작 만날 때마다 이 거리를 마차를 타야 하는 거야?

차라리 승마를 배우는 게 낫겠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