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화> 미션! 충성심 증명 >
지루한 마차여행이 끝났다.
마차는 성저마을을 지나 거대한 스코타 성문 앞에 정지했고, 이번에는 작은 창을 열어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우리는 차례대로 마차에서 내렸다.
경무장의 저택 경비병들과 달리 중갑과 장창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스펜서 남작님.”
“음, 후작 각하께서는 안에 계시나?”
“곧 집사가 나올 테니 그쪽과 이야기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투구 안에 감춰진 눈빛이 단단하다.
비록 후작의 사병이지만 기세만큼은 정규병 못지않아 보였다.
이런 병력을 수백이나 동원할 수 있다니 새삼 후작의 힘이 크게 느껴졌다.
이 정도 무장을 갖춘 수백의 병력이라면 내가 이끄는 선원들은 순식간에 몰살시킬 수 있을 거다.
배 위에서 싸운다고 해도 우리가 약간 유리해지기는 하겠지만 결과 자체는 달라지지 않겠지.
이건 네이선이 아니라 알렌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걸?
그나저나 알렌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처음 뵙겠습니다, 스펜서 남작님. 후작 각하께서 안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경비병들과 마차는 저들이 알아서 챙길 겁니다.”
“음, 반갑소. 이쪽 세 사람은 우리 선단의 선장들인데 함께 가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세 사람의 방도 따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집사를 따라가다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전대 후작 각하를 모시던 집사장은 아직 저택에 머물고 있소? 아니면 이곳의 집사장을 맡은 거요?”
“아, 그는 노령을 이유로 은퇴했습니다. 그에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무래도 얼굴을 자주 보던 사람이니 인사라도 하려고 했지. 그대도 알다시피 전대 후작 각하를 평생 모시던 사람이 아니오? 상심이 클 테지. 노령에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조금 걱정이 되더군.”
“그렇군요. 그를 만나게 되면 남작님의 호의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는 그의 눈이 묘하게 빛난다.
아니, 그냥 기분 탓인가?
어찌 되었건 그가 은퇴했다니 다행이군.
다음에는 모르아 갑판장을 데리고 와도 괜찮을 것 같다.
“여기에서 잠시 쉬고 계시면 됩니다. 하녀들을 시켜 목욕물을 데워두었으니 몸을 씻고 편히 쉬십시오. 혹시 네 분 모두 각하를 뵙고자 하십니까?”
“각하께서 나만 보겠다고 하시지 않는다면 인사를 드리고 싶소. 선단의 선장들이니.”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 * *
저녁나절에 스코타 성에 도착한 우리는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점심때가 지나서야 후작의 호출을 받았다.
저택의 집무실 문이 소박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소파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는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앉을 거면 도대체 왜 소파를 사용하는 거야?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스펜서 남작인가, 장례식 이후로 처음이군.”
“네, 폰테 섬 주민들에게 섬이 후작령이 되었음을 알리고 오는 길입니다.”
내 말이 끝났음에도 그는 무심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기랄, 뭐지? 내가 뭘 빼먹었나?
“아,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베르엘라라는 식물이 있는데···.”
“보고는 들었다. 집사장의 말로는 이전에 가지고 왔던 것보다 품질이 더 좋다고 하더군. 잘 쓰도록 하지.”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예?”
부지불식간에 반문이 튀어나왔다.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저렇게 추궁하는 듯한 질문을 들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반응할 것이다.
아차, 하나 있구나.
“혹시 항구에서 각하의 위세를 빌린 것이라면···.”
후작 입장에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해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그게 또 아주 틀린 말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지금 가지고 온 분량만큼은 확실히 후작에게 세금이라는 느낌으로 주기로 한 부분이었고, 판로(?)가 후작과 겹치면 상당히 곤란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의 판매에 대해 그와 협의를 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막말로, 악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내 말을 꼬투리 삼아 물량을 모조리 꿀꺽할 수도 있는 것이니 후작에게 딱히 나쁠 것은 없을 텐데?
“그딴 것은 상관없어. 역시 상인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것을 보면 뭔가 기분이 잔뜩 상한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저렇게 기분이 나쁜 거지?
이럴 때는 그냥 냅다 대가리를 박는 게 최고다.
괜히 변명을 한답시고 상관도 없는 남의 다리 긁는 짓을 해봐야 부스럼만 더 생길 뿐이니.
“제가 출신이 미천하여 예를 잘 알지 못합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잘못한 부분을 지적해 주십시오.”
“흠.”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호박색 술을 한 잔 따라 마신 그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전투 보고가 아닌가? 그딴 풀 쪼가리 따위보다 말이야.”
“전투라면, 혹시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탕!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그가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거세게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에 받은 보고서다. 쿠샤 왕국 해군이 일레드 해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보고서지.”
“그게···.”
무슨 소식이 이렇게 빨라?
그놈들도 빨아봐야 이제 막 론 항구에 기항했을 텐데?
“스코타 후작의 리안 상단을 뒤쫓던 일레드 왕국 해군 함선 열다섯 척을 상대로 전투 발생. 주공은 쿠샤 왕국 제1함대 12전대, 그리고 지휘는 12전대의 임시 전대장 미르바프 중령. 벨로키나 왕국 해군의 조력을 받아 여섯 척을 나포하고 세 척을 격침시켰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투로 보고서를 친히 읽어주시는 후작 각하의 표정이 대단히 험악해졌다.
진 것도 아니고 전투에서 이겼는데 반응이 왜 저래?
“나는 전 후작과 다르다. 자네는 여유롭게 마차로 오기 전에 전투에 대한 보고를 먼저 해야 했어.”
“아,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당황한 척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차피 보고도 받았으면서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난 자네가 총독이 되는 것을 반대했었지. 폰테 섬은 상인 따위가 통제할 섬이 아니야. 일레드 왕국을 향한 가장 강력한 비수니까 말이야. 당연히 군인이 통솔하는 것이 맞겠지.”
슬슬 위기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많았지만 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를 모른다.
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 아니라면 말은 아낄수록 좋았다.
“내가 전 후작보다 나은 분야가 딱 하나 있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전 후작은 전쟁에 별 관심이 없었어. 그는 이미 이긴 싸움만 했을 뿐이니까. 실제로 이번 전쟁을 계획하면서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전쟁이라고 했을 정도로 말이야.”
잠시 시간을 끌던 후작이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평범한 상선단이 일레드 왕국 해군의 포위망을 뚫는 것은 불가능하지. 심지어 그들을 유인해서 아군에게 승리를 안기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고. 뒤처리는 미흡했지만, 자네의 전략 전술적 식견은 조금 두고 봐도 되겠군.”
“부족한 실력을 높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십년감수했네.
하지만 안심하기는 너무 일렀다.
바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증명해보게. 본가를 배신한 티벡 선단을 처리하고 수괴인 조나단을 잡아 와.”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내서 회피기를 펼쳤다.
“각하의 명이라면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재고해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저는 그저 상선단을 이끄는 상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은 차라리 해군을 동원하는 것이···.”
“지금 왕국의 사활을 건 전쟁 중인데 해군을 동원하라고? 농담에는 재능이 없군.”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용병함대를 고용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분에 넘치는 임무를 맡았다가 일을 그르칠까 염려됩니다.”
내 말에 후작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말하지 않았나, 전쟁에 관해서는 내가 전 후작보다 낫다고. 이미 전국에 용병함에 대한 소집령이 떨어졌네. 조만간 이 전쟁을 결정지을 대해전이 터질 거야. 이번 승리로 적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아군의 기세는 올랐으니, 대해전을 벌인다면 지금이 적격이지.”
망할, 외통수군.
여기에서 내가 더 거절을 하면 저놈은 반드시 전쟁이 끝나는 즉시 내 총독직을 거두고 자신의 심복을 섬에 파견할 거다.
능력을 증명하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충성심을 증명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대해전에 참가하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 * *
“제독,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지.”
후작과 면담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아인델프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자세히 설명하기에 여기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도대체 조나단 이 새끼는 무슨 재주로 상단 하나를 꿀꺽한 거지?
후작의 말투로 볼 때 티벡 상단이 완전히 후작가를 등진 모양인데, 말이 안 되잖아.
선박 한 척만 해도 선장 혼자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런데 무려 6척짜리 선단을 조나단 혼자서 집어삼켰다니,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재밌는 농담이라고 웃었을 거다.
물론 한 10년쯤 있으면서 자기 사람을 심었다면 모르겠는데, 심지어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니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놈을 찾아서 족쳐··· 어우 씨, 그러고 보니 그놈들 우리보다 숫자도 많잖아?!
아무리 상선이라도 세 척(리버티는 빼자···)으로 여섯 척을 때려잡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가 타고 온 마차에 오르려던 나는 곧 이상함을 눈치챘다.
마차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와 함께 왔던 짐마차 두 대가 출발 준비를 마치고 있었지만, 물건의 성격상 나와 상관없는 항구경비대가 타고 있는 짐마차에 실었을 리는 없었다.
그 물건의 무게나 부피가 엄청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마차에 오르려던 발을 뒤로 빼고 배웅을 위해 나와 있던 젊은 집사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집사.”
“네, 남작님.”
“혹시 후작 각하께서 내게 전하라고 하신 것이 없었소?”
“흐음, 아, 기한은 빠를수록 좋지만 늦어도 대해전이 끝나기 전에 일을 해결하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망할, 그런 쓸데없는 시간제한 통보 말고, 내가 받아야 할 베르엘라 두 마차 분의 대금 말이다!
전대 후작은 그래도 내가 뭔가를 바칠 때마다 수고비나 하사품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을 주곤 했었다.
“그건 알겠소만, 마차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무표정하게 잠시 나를 보던 집사가 뭔지 알았다는 듯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진상품은 잘 받았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항구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은 없던 일로 해줄 테니 선적품 처분은 남작님 임의대로 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 엄청난 양을 받고도 그냥 입을 닦으시겠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 곤란한데 말이야.
이따위 생각이 들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대 후작이 그립다.
* * *
“끄응, 쉽지 않군요.”
“티벡 선단이 비록 상선단이기는 하지만 꽤나 큰 선단입니다. 게다가 후작에게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었다면 무장 비율을 꽤 높였을 겁니다.”
“어쩌면 후작이 건드리기 힘들 정도의 다른 뒷배를 만들었을지도 모르죠.”
마차 안에서 내 말을 들은 함선장들은 한결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다름 아닌 발드 선장이 마지막에 말한 부분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후작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리고 갈 수 있는 나라는 일레드 왕국뿐인데, 놈들이 그쪽으로 깃발을 바꿔 달았다면?
아마 전쟁 기간 동안 일레드 왕국이 제해권을 장악한 지역 안에서만 놀지 않을까?
그쪽이나 이쪽이나 상대국의 상선을 상대로 무차별 공격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흔들어 그 우려를 털어버렸다.
새 후작이 개새끼이긴 하지만, 대놓고 나를 축출할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목표를 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닐 것이다.
그가 말하는 뉘앙스는 어디까지나 내 능력과 충성을 증명하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거지 같은 일을 시키더라도 일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는 넘겨줘야 할 것 아냐?
어쩔 수 없이 일단 뒷골목이라도 가서 뭐라도 건져 봐야지, 뭐.
“발드 선장의 우려는 잠시 접어 둬도 괜찮을 것 같아. 만약 놈들이 일레드 왕국으로 전향했다면 애초에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니까. 그런 일을 시켰을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일단 돌아가서 무장부터 단단히 하시죠. 노련한 녀석으로 선원도 충원하고요.”
“그런데 전쟁이 오래 지속돼서 괜찮은 녀석들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걱정을 태산같이 하는 와중에도 마차는 쉬지 않고 덜그럭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몇 번이나 중간에 쉬어야 하려나?
그나마 뒤에 짐마차들이 가벼워졌으니 올 때보다는 덜 쉬어도 될 것이다.
그날 저녁, 또다시 마차가 멈춰 섰다.
작은 창문을 열어보니 아직 해가 넘어가기 전, 야영을 하기에는 조금 이른 느낌이었다.
“응? 조금 더 달려도 될 것 같은데 왜 벌써 멈췄을까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마차나 말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아인델프와 발드 선장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곤혹스러운 마부의 외침이 들려왔다.
“남작님, 잠시 밖으로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음, 일단 나가보자고.”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낯선 목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누가 리안이라는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