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36화 (337/420)

< <336화> 경매의 오묘한 이치 >

급하게 준비한 아침 식사치고는 꽤나 그럴듯한 식사가 준비되었지만, 음식에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쭉 둘러보니 긴장한 표정, 화가 난 표정, 호기심 어린 표정··· 다들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바다뱀의 노래' 중앙 홀에 모여 있는 인원은 54명, 수행원을 두 명씩 데리고 왔으니 18명의 귀족이 모인 셈이다.

물론 다른 손님은 없다.

굳이 주인장이 다른 손님은 안 받는다고 말하지 않아도 이런 분위기에 누가 들어오겠어?

하여튼 초대한 인원이 대략 20명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내 초대에 응하지 않은 놈이 대략 대여섯 명쯤 되는 셈이다.

나를 보겠다고 새벽부터 달려온 주제에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예가 아닌 줄은 알지만 제가 감히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어···."

"그걸 아는 사람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거요?"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내 말을 자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고, 왕반지를 양손에 여섯 개나 끼고 있는 주옥같이 생긴 남자였다.

상인의 눈은 그가 입고 있는 옷감과 장신구가 꽤 비싸다고 알려왔지만, 전체적인 감상은 글쎄, 순한 맛으로 표현하자면 어릿광대?

"예의 바르게 호스트(주최자)의 첫인사를 자르신 귀하는 누구십니까?"

귀족이나 평민이나 이런 자리에서 호스트의 첫인사를 자르는 것은 상당한 무례다.

당연히 내가 한 말은 반어법으로 그의 행태를 비꼬는 것이었고.

그 정도를 못 알아먹을 정도로 멍청이는 아닌지 그의 얼굴이 바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너무 화가 나서 할 말을 잃었는지 입만 뻐끔거리는 그가 첫 마디를 꺼내려는 순간 내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아차,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분에게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던졌군요. 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셔도 됩니다."

내가 웃는 표정으로 말하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그는 의자에서 반쯤 떼었던 엉덩이를 은근슬쩍 다시 붙였다.

하지만 내가 그 꼴을 두고 보겠는가?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 자체가 별 볼 일 없는 귀족이라는 뜻, 좀 세게 나가도 후환을 걱정할··· 아, 나 이러다가 습격당했지?

"행크, 뭐해? 자리가 불편하시다는데 문이라도 열어드려!"

"네, 선장, 아니, 남작님."

훗, 저런 잔챙이의 후환까지 신경이 쓰였다면 애초에 후작과 외줄타기를 하지도 않았을 거다.

솔직히 어제의 습격도 갑작스럽게 바뀐 상황 때문에 대비가 부족했던 것이지, 호위가 없다고 생각하고 인원을 준비했다면 위험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각설하고 이쯤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심지어 다른 귀족들과 수행원들의 눈이 그에게 쏠려 있으니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챙기려면 일어나야지.

뭐, 그 자존심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상대로 이번에는 창피함으로 얼굴이 붉게 물든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당탕탕!

애꿎은 의자가 뒤로 나자빠지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정정하지, 의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바닥을 뒹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120kg은 훌쩍 넘어 보이는 돼지 인간의 거대한 엉덩이를 계속 짊어지고 있다가는 다리 하나쯤 부러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흥! 역시 미천한 출신이라 하는 짓도 조잡하군! 저런 놈이 귀족이라고?! 가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진즉 문을 열고 있던 행크부터 각 선장들의 눈초리가 차갑게 변했다.

아마 상대가 귀족이 아니었다면 행크는 칼을 뽑아 들었을 거다.

나는 행크를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했으니 적당히 찔러주는 것은 좋지만, 너무 과하면 다른 귀족들에게도 좋지 않게 보일 수 있었다.

지금처럼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가 보기 좋을 터였다.

돼지 인간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뜨자 한쪽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쯧, 저자는 저 천박한 근성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군. 스펜서 남작, 잘 참으셨소, 저런 자와 말을 섞어봐야 남작의 격만 떨어지지."

내게 호의적인 말을 한 사람을 자세히 보니 낯이 익었다.

후작의 장례식에서 말을 섞었던 몇 안 되는 귀족 중의 한 명이었다.

"오, 엔버딘 자작님 아니십니까? 자작님이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허허, 괜찮소. 이렇게 연락도 없이 온 사람을 반겨주어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하군."

"아닙니다, 자작님을 이렇게 누추한 곳에 모셔서 죄송하죠. 물론 다른 분들께도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배라는 곳이 귀한 분들을 모시기에는 너무 형편없는 곳이라 이렇게 편법을 취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처음에는 불편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도 나와 자작의 이야기에 이어진 내 사과에 슬며시 표정을 풀었다.

여기서 어깃장을 놓아봐야 방금 쫓겨난 돼지와 같은 수순을 밟게 되리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오트라스 앞으로 달려와서 진을 친 순간 체면은 이미 구겨진 셈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체면을 더 상해가면서 목표도 이루지 못하면 도대체 그게 무슨 뻘짓인가.

나는 적당히 상황이 무르익은 것 같아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들 이해해 주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 듯하니, 질질 끌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예의상 던진 질문에 대부분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 자리가 딱히 편한 것은 아니니 차라리 잘 된 셈이다.

"다들 대충은 아시겠지만···."

행크와 돌격대원들을 시켜 샘플을 돌리게 하고 베르엘라에 대해 과장 섞인 설명을 곁들였다.

원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방금 만들어진 뽀송뽀송한 샘플을 직접 확인한 귀족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좋아, 이 정도면 밑간은 대충 끝난 것 같고 슬슬 요리를 시작해 봐야지.

"하지만 모두 예상하시다시피 1등급의 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기 보시는 상자로 종 12상자가 있을 뿐이죠. 물론 상자 한 개에 들어간 양이면 침대 하나 정도는 채울 수 있습니다만, 여러분을 만족시킬 양은 확실히 아닐 겁니다."

"스펜서 남작,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나누겠다는 겁니까? 지금 여기 모인 인원만 해도 벌써 17명인데, 인원수대로 나누면 침대 한 개도 채우지 못한다는 거 아닙니까?"

좋아, 아주 적절한 질문이야.

나는 질문한 젊은 남자를 보며 물었다.

"이제 그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적절한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오신 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음, 소개가 늦었군요. 스치포니아의 남작, 체일렌 번스타인입니다."

스치포니아가 도대체 어디야?

어느 시골구석의 남작까지 온 거냐?

"반갑습니다, 번스타인 남작. 남작의 말대로 똑같이 나누어봐야 별 의미가 없죠."

그럴 리가 있나.

모자라는 것은 2등급으로 채우면 되지.

솔직히 1등급이나 2등급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1등급과 2등급을 나누는 순간 귀족들은 2등급을 섞는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최고급이 아닌 것을 쓴다? 귀족의 자존심에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나는 본론을 던졌다.

"제 결론은 이겁니다. 죄송하지만 한 분당 한 상자만 판매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단 상인이니···."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개중 눈치가 가장 빠른 사람이 손을 들며 말했다.

"10만."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셋을 세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금액을 부르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1만!"

"12만!"

"12만 5천!"

"13만!"

와우, 확실히 경매라는 방식 자체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장난이 아니었다.

고가품이나 희귀품의 경매는 거의 부호와 귀족들의 취미생활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신없이 튀어나오던 호가 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누군가가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러버린 것이다.

"100만."

미친놈인가?

고작 침대 내장재에 100만 로스(약 1억 원 가치)를 태운다고?

어마어마한 가격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자 100만을 부른 용자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는 이벤트였습니다, 스펜서 남작. 나는 후스 자작이라고 합니다."

"아, 후스 자작님. 반갑습니다. 리안 스펜서입니다."

이제 막 40이나 되었을 법한 깔끔한 이미지의 남자였다.

이 사람은 처음에 사람들을 둘러볼 때부터 눈에 띄긴 했었다.

외모만 놓고 보면 절대 여기에 있지 않을 사람 같아 보였다고나 할까?

다른 사람들은 기분 탓인지 조금 격이 떨어져 보였다면, 이 남자는 진짜 고위 귀족인 백작이나 후작이라고 해도 믿게 생겼다,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요. 어차피 여기 계신 다른 분들은 나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12상자를 모두 내게 넘기는 것은 어떨까요? 내 침대가 조금 커서 말이죠, 남작은 상인이라고 했으니 그편이 더 유리할 것 같습니다만. 다 해서 1,000만 로스를 드리죠, 그 정도 융통성은 발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순간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는 고작 몇 년 전에 1만 로스에 벌벌 떨었고, 지금도 10만 로스라고 하면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그런데 미친, 천만이다.

천만이면 중형 상선이 두 척이라고!

하지만···.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후스 자작이 1등급의 물량을 모두 차지하게 되면 그는 말 그대로 '독점'을 이루게 된다.

본인의 능력에 따라서는 더 비싼 값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나라도 폰테 섬에 있는 베르엘라를 이 자리로 순간이동 시킬 능력은 없고, 설혹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폰테 섬에도 남은 베르엘라가 없기 때문에 내가 그를 제어할 방법도 없다.

시간이 지나서 베르엘라 재배가 정상궤도에 오른다면 모르겠지만, 하여튼 지금은 나를 제외한 누군가가 베르엘라의 독점권을 쥐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내가 임의대로 정한 '1등급'에 국한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겨우 입을 열었다.

눈앞에 번쩍거리는 금화의 산이 어른거리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져간다.

"미안합니다, 자작.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스펜서 남작의 말이 맞소. 처음부터 한 상자씩 나누기로 한 것 아니오!"

"그럼, 귀족의 약속은 천금보다 무거운 법이지."

후스 자작의 말에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흐르던 홀이 단번에 시끄러워졌다.

심지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녀석도 보인다.

그런데 말이다, 그러는 너희 중에 귀족이 아닌 평민과의 약속을 꼬박꼬박 지킨 놈이 몇 놈이나 될까?

살짝 배알이 꼴렸지만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다른 분들 말씀처럼 귀족이 되어서 두말을 하는 것도 못 할 일이지만, 상인으로서도 신용을 버려가며 작은 이득에 연연하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자작께는 한 상자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치 않으신다면 이번 회차는 없었던 것으로 하죠. 저도 한 상자에 100만 로스를 받기는 조금 불편하군요."

"흐음, 남작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첫 상자는 말한 대로 100만 로스에 사겠습니다."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스 자작."

"게론드 회계사, 가장 좋은 녀석으로 자작님께 드리게."

"알겠습니다, 남작님."

"상품은 직접 받아야겠지요? 오트라스 호가 있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 두겠습니다. 전 오늘 일정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도록 하죠."

"자작님? 2등급은 수량이 꽤 됩니다만."

"하하, 그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후스 자작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고, 그와 수행원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실컷 데워놓은 분위기가 이렇게 축 처질 수도 있나?

자작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덕분에 오늘 수익이 대충 20% 정도는 증발한 것 같다.

내 예상대로 두 번째 경매부터는 그다지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뒤에 열 상자나 남았으니 딱히 급할 게 없다는 생각, 즉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쓸데없이 열 올려가며 두 번째 상자를 차지하느니, 돈 좀 있는 놈들이 다 빠진 후에 낮은 가격으로 얻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두 번째 상자의 낙찰 금액은 고작 34만 로스.

물론 물건의 가치에 비하면 엄청난 고가였지만, 방금 전의 100만 로스에 비하면 1/3 정도에 불과한 가격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씩 상자를 차지하고 드디어 열 번째 상자, 낙찰 가격은 14만 로스.

그리고 열한 번째 상자의 경매가 시작되었다.

"그럼 열한 번째 상자를 시작하겠습니다."

"······."

이런 젠장.

이건 너무 예상외인데?

아직 경매 참가권을 가진 사람은 7명, 적어도 12상자 모두 15만 로스 이상에 팔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내가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며 마지막 수단, 파기 혹은 판매 포기를 선언하려는 순간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5만."

어떤 매너 없는 놈이냐.

방금 전까지는 시작 가격이 10만이었다고!

내가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남자가 내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애초에 시작 가격이 정해진 경매도 아니잖소."

"크흠."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긴 하네. 그럼 난 5만 천, 아니, 2천."

"5만 5천."

첫 번째의 열기가 완전히 사라진 듯 남은 귀족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10만도 안되는 가격을 불러대기 시작했고, 그전에 낙찰을 받았던 귀족들의 표정이 빠르게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경매라는 것을 참여해 본 적도 없는데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겠나.

그리고 원래 경매라면 처음에는 가격이 낮고 비교적 귀하지 않은 물건으로 분위기를 올리고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경매의 본 상품들을 올리는 것이 정석이잖아.

그렇지만 귀족들을 상대로 '등급외'의 상품을 먼저 경매로 내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고.

내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와중에도 호가 릴레이는 계속되었다.

"으음··· 10만."

"11만."

"12만."

응?

뭐야, 분위기 왜 이래?

"20만."

"이익! 25만!"

"제기랄, 30만! 더 부르실 분 있소?"

"32만."

으응?!

"40만!"

이쯤 되니 먼저 한 상자씩 구매했던 귀족들의 표정이 마약을 한 사발 들이켠 것처럼 헤실헤실 풀어졌다.

이미 두 번째 상자보다 10만 로스나 더 비싸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이전에 구매했던 사람들은 미리 싸게(?) 구매한 자신이 꽤 자랑스러워지는 것이다.

특히 방금 전에 고작 14만 로스로 한 상자를 차지한 귀족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실룩거리는 중이었다.

결국 42만 로스에 낙찰된 열한 번째 상자.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상자의 경매가 시작되었다.

42만 로스라는 두 번째로 비싼 가격에 낙찰을 받은 귀족의 표정은 상당히 여유가 넘쳤다.

마지막 경매는 분명히 가장 치열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기는 했다.

당장 낙찰받지 못한 사람들 중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든.

그리고 마지막 상자는 시작과 동시에 30만을 부른 한 귀족의 손에 들어갔다.

낙찰자는 서로 노려보던 두 사람 중 바짝 마른 50대 남자였는데, 그 사람이 30만을 부르자마자 같이 노려보던 대머리 남자가 피식 웃으며 경매를 포기한다는 제스쳐를 취한 것으로 볼 때 저놈, 낚였다.

결국 마지막과 바로 전에 낙찰을 받은 사람들은 꽤나 열이 받는 모양새가 되기는 했지만, '1등급 베르엘라'의 경매는 무사히 종료되었다.

하지만 경매 참가 자격이 없어도 후스 자작 이후로 단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은 최소한 '2등급'까지는 관심이 있다는 표시겠지.

다들 여유가 생겼는지 살짝 식은 음식을 조금씩 입에 넣으며 잠시 여유와 환담을 즐기고 있는데 한 젊은 귀족이 나를 보고 물었다.

"스펜서 남작. 2등급이라는 것도 한 상자씩 경매를 할 생각이시오?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것 같은데."

"그보다 2등급이라는 것은 수량이 얼마나 되는 거요?"

나는 입 속에 들어있는 살짝 익힌 연어를 삼키고 입을 닦은 후 천천히 말했다.

"이 자리에서 100상자를 풀 생각입니다."

"으음, 100상자라면 한 상자씩 하기에는 좀."

"남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 대리인을 두어도 괜찮겠습니까? 나도 100상자의 경매를 지켜볼 정도로 시간이 많지가 않군요."

나는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목례를 한 뒤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더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2등급은 열 상자씩 묶어서 진행하겠습니다. 이미 견본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1등급과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촉감과 내구성이 조금 부족한 정도지요. 아직 베르엘라의 생산지가 완비되지 않아 다음 물량이 언제쯤 들어올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끊었다.

"남작, 말씀 중에 미안하오만 그 정도야 다들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어서 시작합시다."

경매에서 단 한 상자의 1등급 베르엘라도 낙찰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몸이 달아오를 만하군.

"네, 그렇게 하죠. 이번에도 역시 열 상자를 낙찰받은 분은 더 이상 경매에 참가하지 않는 걸로···."

* * *

"게론드 회계사, 다른 회계사들과 함께 기록한 물량을 내어드리도록 해. 행크, 자네는 회계사와 함께 가서 불미스러운 사태가 없도록 주의하고. 각 함선의 인원을 원하는 대로 차출하고, 특별 수당은 은화 한 개씩."

"네, 남작님."

"알겠습니다. 데리고 온 돌격대는 남겨두겠습니다."

"어차피 함선장들도 있는데··· 아니, 그렇게 하지."

설마 같은 일이 두 번이나 생길까 싶지만 그래도 미리미리 대비해 놓는 것이 낫겠지.

내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남아있던 귀족들도 하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1등급이건 2등급이건 최소한 하나씩은 챙겼기에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그들을 배웅했다.

이들은 앞으로 내 상품을 홍보해줄 홍보대사들이니 잘해주는 게 맞다.

그리고 미적거리던 엔버딘 자작이 마지막으로 느릿하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스펜서 남작,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네? 아, 그러고 보니 엔버딘 자작께서는 하나도 낙찰받지 못하셨지요? 제가 따로 챙겨둔 것이 있으니 그것이라도 받아 가시겠습니까?"

거의 투명 인간 취급받던 전 후작의 장례식에서 그나마 말이라도 붙여주던 정상적인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니 이 정도 호의는 베풀어도 괜찮겠지.

그보다 이 사람, 경매 자체에 거의 참가를 안 하던데?

슬쩍 보니까 거의 추임새 넣는 정도로 입을 열었을 뿐 어느 정도 가격이 올라가면 슬그머니 발을 빼곤 했었다.

복장도 좀 검소해 보이고, 돈도 많이 없는 모양인데 도대체 왜 온 거야?

아차, 베르엘라 가격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높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허허, 그렇게까지 배려를 해 줄 필요는 없소. 어차피 2등급 정도는 조만간 시장에도 풀 생각이 아니오?"

호오, 이 할아버지 꽤나 머리 회전이 빠르시구만?

그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베르엘라가 소모품이라고 하지만 고객층을 고작 인구의 2% 정도에 불과한 귀족들로 한정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야 신상품이라는 프리미엄으로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지속적으로 가격이 떨어질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2등급' 약간과 '등급외' 품목 정도는 일반에도 약간 풀어 놓는 편이 좋았다.

일단 얼마나 좋은지 알아야 사람들이 구하려고 노력이라도 할 것 아냐.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너무 푹신한 침대는 좀 별로라오, 허허허."

나이랑 푹신한 침대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가 베르엘라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그런데 베르엘라 문제가 아니면 굳이 새벽부터 나를 찾아올 이유가 있기는 한가?

그와 나의 접점이라고 해봐야 장례식에서 몇 마디 말을 섞은 것뿐인데.

"그렇다면 오늘 일찍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어허허, 예의가 없다고 너무 구박하지 마시오, 늙을수록 원래 잠이 없어지게 마련이니. 그보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소?"

"네, 이쪽에 앉아서 편히 말씀하시죠."

"그럽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