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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38화 (339/420)

< <338화> 의혹(1) >

“게론드 회계사만 남고 모두 돌아가도 좋아. 닥터도 나가셔도 됩니다.”

“네···.”

빌리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잠시 떠올랐지만, 곧 사라졌고, 빌리와 머레이 회계사는 내게 인사를 하고 선장실을 나갔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

“네?”

머뭇거리던 닥터의 질문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재밌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말이야. 게론드 회계사의 의견은 나도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거든. 조금 더 듣고 싶은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닥터라면 뭐, 들으셔도 상관없죠.”

닥터를 신뢰하는 이유는 별게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 항생제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약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비슷한 효과를 가진 약을 만들어 내겠다고 아주 열심인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의심병에 걸렸더라도 이런 사람을 믿지 못하면 도대체 누굴 믿겠어?

그리고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가 무슨 엄청난 기밀도 아니고 말이야.

“고맙네. 그럼 회계사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지.”

“그래, 닥터 말대로 이야기 좀 해봐. 도대체 어디서 어떤 의혹을 가져야 그런 엄청난 스케일의 음모론이 만들어지는지 말이야.”

생각을 가다듬는 듯 잠시 침묵하던 게론드의 입이 열렸다.

“먼저 엔버딘 자작이 아무런 의도나 사심 없이 투자를 결정했을 경우를 상정해보죠. 그에게는 구리 광산이 하나 있는데 요즘 채굴량이 영 시원치 않습니다. 곧 광맥이 마른다는 이야기까지 들었구요. 그래서 다른 활로를 모색 중이죠. 놀랍게도 그는 영지민을 끔찍하게 아끼는 동화에도 안 나올 것 같은 착한 영주라서 영지민들의 생계가 불안해질 것까지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잠시 그의 말을 끊었다.

“너무 과장된 거 아냐? 영지민은 그냥 내게 둘러대는 말이고, 단지 자기 가문의 부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목적일 수도 있잖아.”

“저는 어디까지나 엔버딘 자작의 말이 모두 사실일 경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회계사의 말이 맞네. 애초에 제독을 기만할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거짓말을 섞을 필요가 없지 않나. 특히 원래 귀족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영지민이니 하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없지.”

닥터까지 동의하고 나서자 반박할 말이 궁했다.

그래서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알았어, 계속해봐.”

“네, 그럼 계속해보죠. 그런 와중에 전 후작이 죽고, 엔버딘 자작은 그 장례식에서 다른 귀족들의 무시와 비난을 감수하고 평민 출신인 선장님께 친근하게 말을 겁니다. 그리고 선장님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선장님이 폰테 섬의 총독이라는 것까지 알아냅니다. 거기에 전 후작이 죽으면서 폰테 섬 개발에 대한 후작가의 지원이 불투명해졌다는 것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선장님께 후작을 대신해서 자신이 투자금을 내겠다고 접근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날이 하필이면 베르엘라를 사려는 귀족들이 모이는 날이군요. 거기에다가 갑자기 베르엘라에 관심이 생겨서 새벽부터 부두에서 다른 귀족들과 난리를 피우고, 경매 시작 전에 괜한 말로 선장님의 관심을 끌고, 실제 경매에서는 갑자기 베르엘라에 관심이 없어져서 경매는 참여하지 않았죠.”

거기까지 말한 게론드가 놀랍게도 스스로 말을 끊었다.

게론드가 스스로의 말을 끊을 수 있다면 우르타도 철이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지, 보통 남자는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가 되어서야 철이 든다고 하던데, 과연 우르타가 철드는 날이 오기는 할까?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는 한데, 듣고 보니 조금씩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당연한 겁니다. 엔버딘 자작은 대를 이어 후작 가문에 충성해온 봉신입니다. 심지어 성을 포함하는 영지도 있지요. 후작 가문에서의 입지로 따지면 선장님과 비교도 안 되는 겁니다. 전 후작이 사망한 지금은 더욱 격차가 큽니다. 그런데 굳이 선장님께 접근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라면 그냥 후작에게 달려갈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접근 방식도 그렇습니다. 투자라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선장님께 도움이 되는 행위입니다. 게다가 지금 딱히 경쟁자라고 할 사람도 없죠. 무리해서 새벽부터 다른 귀족들과 부대끼는 것보다, 귀족답게 먼저 사람을 보내서 약속을 잡고 약속 날 품위 있게 만나도 상관없는 문제라는 겁니다.”

듣고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지난 기억들이 조금씩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 그럼 어쩌지? 거절도 쉽지가 않아. 적당한 핑계로는 물러나지 않을 것 같고, 억지를 부렸다가는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고 느낄 테니.”

내가 이래서 귀족들을 상대하는 게 껄끄러운 것이다.

거절도 마음 편하게 못 하니 원.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게론드가 씩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응?”

“호오?”

닥터까지 눈을 빛내자 그는 코를 약간 치켜올리며 말했다.

“우리에게는 무적의 변명이 있지 않습니까? 후작이요.”

“후작?”

“엔버딘 자작에게 폰테 섬은 후작의 영지이고 선장님은 단지 개발을 지휘하라는 명만 받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 없다고 하십시오.”

“오오!”

“아하?!”

나와 닥터의 감탄에 게론드의 코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뭔가 좀 분하지만, 저놈, 진짜 천재는 맞는 모양이다.

* * *

엔버딘 자작의 투자 건에 대한 대응을 세부 사항까지 조율하고 닥터가 방을 나가자, 게론드가 제안을 해왔다.

“선장님, 남은 베르엘라는 어떻게 파실 생각이십니까?”

“음, 대충 오늘 저녁쯤이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될 테니 조금 규모 있는 상인들을 초대해서 경매를 진행하려고 하는데, 왜?”

“이건 그냥 단지 제안일 뿐이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선장님은 란데르 형, 아니, 란데르 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해할 만한 말을 하면서 오해하지 말라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이야?

오해할 만하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건가?

“란데르 씨야 믿을만한 상인이지. 신의도 있는 편이고. 무엇보다 회계사를 내게 소개시켜 준 사람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친구의 여동생이 자네 약혼녀지.’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키며 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게론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은 베르엘라의 처분을 란데르 씨에게 맡기는 것은 어떨까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오스팔트 가문이 공예품을 주로 다루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그거야 잘 알고 있지.”

“공예품이라는 것이 가격 범위가 좀 넓지 않습니까?”

“음.”

“그래서 오스팔트 가문과 거래하는 귀족이나 부호들이 꽤 됩니다. 란데르 형의 할아버지는 준남작 작위도 산 적이 있을 정도로요.”

대충 감이 오기는 하는데···.

문제는 내가 한 상인에게 물량을 몰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

분산투자가 안전하다는 것은 진리 아니겠어?

그리고 이 사실을 게론드가 모를 리가 없다.

역시 약혼녀 때문에 오스팔트 가문에 더 이득을 안겨주고 싶은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렇지만 내가 한 사람에게 물량을 몰아주지 않으려는 이유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선장님, 선장님이 파시는 것은 단순한 고급 침대 내장재입니까,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킬 만족감입니까?”

나는 대답을 미루고 잠시 게론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확신을 담고 있었다.

“좋아,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지. 내가 직접 파는 것보다 란데르 씨에게 일임하는 것이 나은 이유를 말이야.”

“첫 번째는 신뢰입니다. 비록 밀약으로 오스팔트 가문에 교역 우선권을 약속하셨지만, 실제로 선장님이 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이번 경우야 아직 정상적인 항로가 개척된 상태도 아니니 오스팔트 가문을 통하지 않는다 하여도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장님이 이번 물량을 넘기면 신뢰를 살 수 있겠죠.”

“음···.”

“두 번째는 영향력입니다. 란데르 형은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서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야망도 있는 편이죠. 선장님이 기회를 준다면 아마 이 항구에서 오스팔트 가문의 영향력은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오스팔트 가문과 동맹관계인 선장님의 영향력도 함께 강해지겠지요.”

나는 잠시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 자네가 한 말은 내게도 좋지만 결국 오스팔트 가문에 득이 되는 말이야. 조금 더 직접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약간 퉁명스러운 내 질문에 게론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세 번째, 귀족인 선장님의 격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귀족들을 상대로 경매를 하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평민이 된다면 분명히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돌 겁니다. 귀족인 선장님이 주최하는 경매에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 참가한다면, 평민과 자신들을 구분 지으려는 귀족들 특유의 자존심을 짓밟는 꼴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혹시 이유가 더 있나?”

“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선장님이 팔고자 하는 희소성과 우월감을 더 잘 팔 수 있는 사람이 란데르 형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수익을 란데르 씨와 나눠야 하니 수익률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앞으로 교역 우선권을 가지게 될 란데르가 이번 물량을 독점까지 해서 뒤통수를 치면 적당히 아프고 넘어갈 수준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 자네에게 맡기지. 우리 쪽 손해가 가장 적은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 봐.”

믿어보자.

그래도 계산기까지 줘가며 충성도를 끌어올린 게론드인데 대놓고 배신을 때리지는 않을 거다.

“정말이십니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선장님은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다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이렇게 팔 병신이 되어가면서까지···.”

“그만, 그만! 나 오늘 자네 말을 제일 많이 들었거든? 적당히 하자고, 적당히. 그래서 언제 넘길 셈인데?”

“일단 오늘 밤에 란데르 형을 찾아갈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시하는 이들의 조바심이 폭발하기 직전쯤 되는 내일 저녁에 물건을 넘길 겁니다. 그러면 이후에는 란데르 형이 알아서 하겠죠.”

“내일 저녁이라고? 제길, 경비대에게 주머니를 하나 더 줘야겠군.”

* * *

“이봐, 일등항해사. 설마 내가 철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하자 그레이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자기 딴에도 민망한 거다.

“아하하하, 그게, 그놈들 중에 몇 놈이 돈이 떨어졌다고 해서 말이죠. 그래도 저녁 약속이니 시간이 좀 남지 않았습니까?”

“왜 내가 선원들보다 못 쉬는 거냐고!”

한바탕 소리를 질렀지만, 여전히 웃고만 있는 그레이그를 보던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진짜 그 사람들 믿을 수 있는 거야? 난 영 찜찜한데.”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확인했다니까요?”

아저씨가 영 미덥지 않아서 그래···.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사건과 이벤트에 온몸이 피로를 호소했지만, 나는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게론드에게 상품 매각을 맡긴 것이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몰랐네.

만약 그것까지 아직도 내가 쥐고 있었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레이그의 말대로 항해사를 충원하는 것이 급하기는 했다.

각국의 해군이 강화되어(징집당한 항해사나 선원들도 꽤 되는 모양이다.) 쓸만한 항해사를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금 상황에서, 탐험선을 타던 숙련된 항해사들은 탐나는 인재들이기도 했고.

게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폰테 섬의 상황이 안정적인 것도 아니다 보니 아쉬운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그리고 만약 그놈들이 딴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각 함선에 잘게 쪼개 놓으면 괜찮을 것 같기는 하다.

그레이그, 아인델프와 발드 선장, 네이선과 우르타를 대동하고 약속장소로 가고 있는데 베기어 함장이 합류를 청해왔다.

“함장은 굳이 갈 필요는 없는데요? 혹시 항해사가 부족한가요?”

베기어 함장이 지휘하는 드라이언의 인사권은 베기어 함장이 쥐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고용한 항해사를 집어넣을 수 없다.

그러니까 항해사를 더 고용하려면 베기어 함장이 직접 고용을 해야 하는데, 드라이언에는 일등항해사 한 명과 이등항해사 두 명이 있어서 딱히 항해사를 더 고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앞으로 함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친구들이니 얼굴이나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 이 친구들도 데리고 왔구요.”

함장의 말이 끝나자 뒤에 서 있던 오스발 일등항해사와 이등항해사 두 사람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 고용하게 되면 어차피 다 인사는 시키려고 했습니다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으니 같이 가시죠.”

“고맙습니다, 제독.”

어쩌다 보니 일행이 잔뜩 늘어나 버렸다.

호위를 위해 동행하는 선원들을 빼더라도 간부급만 도대체 몇 명이야?

* * *

“이 사람들 맞아?”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사람들을 면전에 두고 그레이그에게 이따위 질문을 던졌을까?

“어, 음, 그러니까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난감함과 당황이 뒤섞인 그레이그의 표정을 보니 그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리안 제독이십니까? 초면에 이거 못 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내 앞에 선 판다 한 마리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아, 지구의 판다와는 조금 다르다.

양쪽 눈 주변이 검붉은색으로 물들었거든.

그리고 그 뒤에는 다리를 절룩거리는 케첩 묻은 호빵맨이 하나, 그 뒤에는 좀비 코스프레를 한 괴인이 하나, 마지막으로 아직도 누군가의 다리를 뽀개고 있는···.

“끄아아아악!”

“그만, 그만해!”

“닥쳐! 알지도 못하면서 이빨을 털었으면 이빨이 다 털릴 각오도 했어야지!”

“그래서 미안하다고오오우억!”

방금 붉은, 아니, 하얀, 아니, 붉은색의 뭔가가 튀어 나간 거 맞지?

내가 몇 번 봐서 아는데, 사람을 그냥 주먹으로 때려서 치아를 날려버리는 일이 보통 완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무슨 난장판이람?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볼 꼴이라는 것을 알면 이제 그만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거든요.”

“아, 그래야지요! 이봐, 체임버! 그만하고 이리 와! 네가 만나고 싶다던 리안 제독님이 오셨다!”

저 덩치의 이름이 체임버로군.

몸 상태는 가장 양호하고, 정신 상태는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사람 말이야.

네이선이 선원들을 시켜 쓰레기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는 여섯 명의 남자를 밖으로 몰아내고, 아인델프가 주인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네는 것이 보인다.

한눈에 봐도 부러진 의자와 망가진 집기가 한두 개가 아니니 그냥 입 닦고 넘어갈 수 없었던 탓이다.

물론 내가 귀족임을 내세울 수도 있지만, 돈 몇 푼 아끼자고 평판을 깎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고는 저놈들이 쳤는데 엄한 내 돈이 깨져나가는군.

그렇다고 당장 숙식비도 없다는 놈들을 상대로 너희가 알아서 수습하라고 하면 답이 나올 리가 없잖나.

“그래서, 첫인사를 이렇게 화려하게 하신 이유가 뭐지?”

적당히 엉망이 된 자리를 피해 앉았지만 내 기분이 썩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약간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 나갔다.

이럴 때는 귀족이라는 것이 편하다.

아무에게나 대충 반말을 던져도 반발하지 않으니까.

“어허허허, 이거 민망한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제독. 하지만 저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는 팬더가 된 사람, 좀비 같은 사람, 호빵맨이 된 사람을 차례로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체임버가 급히 말을 이었다.

“저놈들이 기습을 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제대로 붙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그게 궁금한 게 아니야. 난 항해사들을 만나러 왔지 동네 양아치를 만나러 온 게 아니니까. 분명히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이 난리를 친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믿고 배를 맡기지?”

“항해사라면 모름지기 해적 놈들을 상대로 배를 지킬 수 있는 용기와 실력을 갖춰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당신들이 타려는 배는 군함이 아니라 상선이라고.

그리고 용기와 실력(무력)이 필수인 사람은 갑판장이지 항해사가 아니잖아!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관두고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지. 에이벌리 호의 항해사였다고 들었는데, 베일리건 선장은 어떻게 된 건가?”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주를 받았다느니, 살해당한 거라느니 그런 헛소문···!”

“체임버, 이건 내가 이야기하지.”

“쳇, 알겠소.”

아무래도 체임버라는 저 사람, 그레이그랑 같은 과 같은데?

그런 체임버를 말린 팬더 남자··· 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팬더가 조곤조곤 말을 하니까 뭔가 웃겨···!

“선장이 실종될 당시 당직을 맡았던 에반입니다. 베일리건 선장은 밤낚시를 즐겨 했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죠. 당직을 서기 직전에 선미 쪽으로 낚싯대를 들고 가는 모습을 봤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당직을 끝내고 내려올 때는 선미에 널브러진 낚싯대만 남아있었죠.”

“에반이라고 했나? 그럼 자네가 베일리건 선장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인가?”

“네, 아시다시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한밤중에 선미에 볼일이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나는 에반의 눈과 몸짓을 세심히 살폈지만, 어디에도 거짓말이라는 징후를 찾지 못했다.

거짓말에 아주 능숙하거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인데.

게다가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의혹 자체는 그대로였다.

아무도 가지 않는 선미갑판, 누군가가 선장을 살해하고 바다에 던져버렸다면 목격자도 없다는 뜻이 되니 말이다.

“저도 이게 저주라는 헛소문을 믿지는 않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베일리건 선장이 살해당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확실하다? 어째서?”

“그것은···.”

에반은 목이 타는 듯 앞에 높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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