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화> 귀족이 된다는 것 >
내 기분이 더럽거나 말거나, 조나단이 전대 후작의 아들, 그것도 사생아라면 모든 상황이 설명된다.
티벡 선단이 그렇게 빠르게 아무런 저항 없이 그에게 넘어간 것도, 현 후작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도.
그런데 진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전 후작에게 사생아라니,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고.
“아는 자가 많지도 않고 후작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도 아니지만··· 아마 사실일 겁니다.”
“아니, 씨···. 사생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정신 나간 귀족이 어딨, 어휴, 그만하죠. 하여간 그놈이 지금 후작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거죠?”
“···네.”
“쩝, 이거 귀찮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데 조심스러운 알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갑판장은 좀 어떻습니까?”
“네? 아, 갑판장. 걱정이 되기는 합니까? 그럼 직접 가보시던가요. 애를 아주 피떡을···.”
생각해보니까 또 열이 뻗치네?
만약, 만약이지만··· 진짜 네이선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맹세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자식 죽여버릴 테다.
내가 심각해지려는 찰나에 속없는 우르타가 손을 번쩍 들며 일어섰다.
“어? 나도! 나도 갈래!”
* * *
네이선을 같이 보러 가자는 내 권유에 한참을 망설이던 알렌은 다음에 혼자 가겠다는 말을 겨우 남겼다.
신나게 두들겨 패놓고 보니 막상 미안하기는 한 모양이다.
하여간 저 인간이랑 엮이면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선의님! 선의님! 네이선은 어때요?”
“응? 포술장인가? 어이쿠, 제독도 오셨군.”
이제 막 병실에서 나오던 닥터를 본 우르타가 우다다다 달려가서 묻자, 닥터는 내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는 걸로 봐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우와아앗! 다행이다, 네이선.”
쟤는 또 어딜 보고 말을, 어라?
“허허허, 포술장이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군.”
“그럼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는 겁니까?”
우르타가 보는 곳을 잠시 보다가 닥터에게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그 정도는 아니지. 그래도 한 닷새 정도는 누워있게 하게. 갑판장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나?”
“그러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역시 자네도 그렇··· 응? 자네 어디 보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닥터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 멍청이에게도 말씀 좀 해주시죠. 닷새는 쉬어야 한다고.”
“으헉!”
내 손을 따라 뒤를 돌아보던 닥터가 깜짝 놀라며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아니, 자네 어떻게 일어났나?”
“으으, 선의님. 아까부터 머리가 몽롱하고 자꾸 잠이 오는데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좀비처럼 비척거리는 네이선을 보던 닥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수면제를 먹었으니 당연히 졸리겠지. 푹 자라고 성인 남자가 하루 종일 잘 만큼 약을 먹였는데 잘도 일어났구먼, 허허허.”
으음, 마취제가 특히 심하기는 하지만 수면제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희석된 독이라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화학이 발달하지 못한 세상에서 멀쩡한 인간을 재우는 성분이 독이 아니고 뭐겠어?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내 입장에서는 영 께름칙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하고 말았다.
“닥터, 괜찮은 거 맞죠? 그렇지 않아도 머리를 다친 애한테···.”
“충분히 안전성이 검증된 약이니 걱정 말게. 그나저나 그 양을 먹고 어떻게 잠에 안 빠질 수 있지? 이보게 갑판장. 그만 들어가서 자게.”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으로 몇 번이나 눈을 껌뻑이며 닥터를 바라보던 네이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에에, 어우우, 그런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으아악! 네이선 거기는 바다 쪽이잖아!”
한바탕 난리를 피운 네이선이 우르타의 부축을 받아 겨우 병실에서 잠이 들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을 흘리던 닥터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닥터,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아무래도 수면제라던가 그런 거 위험할 것 같은데.”
“모르는 소리. 뇌는 인간의 장기 중에 가장 민감한 녀석일세. 비록 당장 큰 위험은 없어 보여도 분명히 충격을 받았을 테니 괜히 후유증을 남기지 않으려면 무조건 쉬어야 해.”
“그냥 대충 누워만 있으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요.”
내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닥터는 열정에 차서 설명을 시작했다.
“모르는 소리 말게. 만약 자네 팔이 부러졌다면 어떻게 하겠나?”
“에? 팔이 부러지면··· 일단 뼈를 맞추고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겠죠?”
“심각한 부상이나 근육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면?”
“일단 소독을 하고··· 아이참, 그걸 왜 물어보시는데요?”
“모든 신체가 똑같네. 회복을 하려면 안정을 취해야 해. 그러니 뇌를 다치면 뇌를 쓰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와··· 진짜인지 내가 의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설득이 된다.
그렇지, 머리를 다쳤으니 머리를 쓰지 말아야지.
머리를 쓰지 않으려면 자는 것이 최고고.
뭔가 거짓말 같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인데?!
닥터의 말에 설득당해 칭얼거리는 우르타를 얼러서 선장실로 돌아가는데, 게론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선장님, 지금 바쁘십니까?”
“응? 무슨 일 있어?”
“란데르 형, 아니, 상회장이 한번 뵙고 싶다고 합니다.”
“그럼 데리고 와. 현문에 있나?”
“그게 아니고 일단 허락부터 받아 오라고···.”
오스팔트 가문이 언제부터 우리랑 내외했다고 무슨 허락까지 받아?
심심하면 그 집 아가씨가 배에 쳐들어와서 우르타를 괴롭혔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그 아가씨가 한 번도 안 왔군.
분명히 자기 언니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말이지.
게론드의 목과 볼에 그어진 희미한 손톱자국을 보면, 게론드가 대신 매를 맞은 것 같기는 하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냥 편할 때 오라고 해.”
그렇지 않아도 조나단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대충 대답하고 가려는데 게론드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붙잡았다.
“선장님, 이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뭘?”
“더 이상 일개 선장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귀족이신데 최소한의 격식은 갖추셔야지요. 평민이 허락도 없이 귀족의 거처에 찾아가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상당한 무례입니다.”
“그, 그런가?”
괜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으며 급히 말을 바꿨다.
“그럼 내일 아무 때나···.”
“그, 혹시 지금 시간이 괜찮으시면 직접 방문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어? 너무 갑작스럽잖아.”
내 말에 게론드가 조금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선장님이 직접 방문하는 쪽이 내일 경매를 진행하는데 더 수월할 겁니다.”
“······그래?”
그 말은 즉, 돈이 되는 일이라는 뜻이렷다?
돈 버는 일이면 가야지, 그럼, 그럼.
* * *
오스팔트 상회의 앞에 모여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을 헤치고 우리가 다가가자, 커다란 상회의 정문이 열리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란데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스펜서 남작님, 누추한 곳에 직접 방문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부족하지만 식사를 준비해 두었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어··· 음, 그러지.”
그나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대꾸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어색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기분에 얼굴도 화끈거리는 느낌이···.
부랴부랴 란데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서 문이 닫히기 무섭게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하하, 어색하시죠?”
“아, 란데르 씨. 솔직히 이 정도로 어색할 줄은 몰랐습니다.”
“남작님,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다지만 이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전 평민이니까요.”
“하지만 그게 좀···.”
그렇잖아, 얼마 전까지 상호 존대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반말 찍찍 내뱉기가 쉽겠냐고.
하지만 란데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귀족의 권위는 아주 작은 곳에서 무너지는 법입니다. 물론 남작님은 출신도 그렇고 뱃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파격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말투만큼은 반드시 고치셔야 합니다.”
그렇긴 하지···.
“아, 알겠어요, 아니, 알겠네. 그보다 내가 도와줘야 할 일이 뭐지?”
눈을 딱 감고 평대를 하며 재빨리 화제를 돌리자 란데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편안하게 식사를 즐기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엥? 그게 끝?”
“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다들 자기 좋은 대로 상상을 하게 되겠죠. 오늘 남작님이 이곳에 방문했다는 것 자체가 내일 있을 경매의 권위를 살려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비록 남작님이 직접 진행하지는 않지만, 남작님이 관심을 기울이는 경매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테니까요.”
“으음···.”
미안하지만 실제로 전 경매에 매우 관심이 많은데요.
아무것도 없는 폰테 섬을 빨리 개발하려면 진짜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안녕하세요, 남작 오ㅃ··· 아니, 스, 음, 스파크···? 남작님.”
번쩍번쩍 발광이라도 해야 하나, 스파크가 뭐야 도대체?
갑자기 앞에서 들려오는 곤혹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자,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꼬마 아가씨가 어설프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베이지색 베이스에 하늘색 수가 놓아진 화려한 성장.
늘 보아 왔던 말괄량이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진짜 귀족가문 영애같은 모습이었다.
“어, 그러니까, 릴리안 아가ㅆ···, 릴리안 양?”
“네, 저희 상회를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스파크 남작님.”
그러니까 스파크가 아니라고.
슬쩍 시선을 돌리니 창피함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란데르가 보였다.
당신도 동생들 때문에 참 걱정이 많겠어.
“어, 어··· 어어엇?! 리리리릴리?”
리리리릴리가 아니고 릴리겠지.
그리고 너 진짜 언제부터 릴리안 양을 애칭으로 부르게 된 거냐?
얼빠진 표정의 우르타를 보니 나 역시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 * *
나는 서로 붙어 앉아서 뭔가 꽁냥거리는 릴리안과 우르타를 애써 외면하며 란데르의 말에 집중했다.
란데르도 쉴 새 없이 시선이 저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해서 수익금의 15%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 그렇게 하지. 어차피 회계사와 이야기가 다 끝난 것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크흠.”
점점 인상이 굳어지는 란데르를 보다 못한 내가 나지막하게 우르타를 불렀다.
“이봐, 포술장.”
“······.”
“포술장?”
“······.”
“포, 술. 장.”
“······.”
저 자식, 귓구멍이 막히기라도 했나?!
“야, 우르타!”
“응?! 아앗, 네넷! 선장님!”
“나가.”
“네?”
“나가라고 이 자식아! 당장 배로 돌아갓!”
“왜 나만···.”
“당장 꺼지지 못해?!”
“아, 알았어··· 요.”
시무룩한 표정의 우르타가 터덜터덜 식당을 나가자 안절부절못하던 릴리안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에 앉은 나와 란데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례인 줄 압니다만 제가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앉거라, 릴리.”
“하지만 몸이···.”
“앉거라.”
“어머멋.”
릴리안이 어설프게 휘청거리는 듯한 연기를 선보였지만 란데르가 아무리 동생 바보라도 그 정도 연기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었다.
“계속 그러면 아버님께 다시 외출 금지를 시키라고 할 거다.”
“···쳇, 쫌생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의자에 철푸덕 앉는 릴리안을 보던 란데르의 이마에 새파란 핏줄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내게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 다시 은은한 사회적 미소를 짓는 표정으로 돌아온 란데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막내라서 워낙 오냐오냐 키우다 보니 버릇이 없습니다.”
“아니네, 철없는 우리 포술장이 문제겠지, 휴.”
이미 끔찍하게 아끼던 동생 하나를 외팔이 놈에게 강탈(?)당한 란데르다.
그런데 하나 남은 동생마저 배 타는 놈팡이가 좋다고 저러고 있으니 속이 말이 아니겠지.
미안하다, 우르타.
양심상 차마 네 사랑(?)은 지켜주기 힘들겠구나.
“그보다, 내 몫은 돈이 아니라 이곳에 거점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싶네만.”
“거점이라면 창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창고는 저희 상회의 창고를 이용하셔도 됩니다. 남작님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안에 상당한 이점을 가지게 되니 부담스러워하실 필요도 없구요.”
“창고 말고 우리 선원들, 그러니까 부상 당한 선원이나 잠시 배를 타지 않는 선원들이 생활할 곳이 필요하네.”
내 말에 란데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배에 타지 않는 선원을 굳이 왜···?”
정상적인 반응이기는 했다.
이 세상의 선원이라는 것은 필요할 때 잠깐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같은 취급을 받고 있으니까.
부상 당한 선원을 위한 장소라든가, 배에 태우지도 않을 선원이 거주할 공간 따위가 왜 필요한지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내가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대며 거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자 그제야 겨우 납득한 란데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운영비가 많이 들지는 않겠군요. 말씀하신 운반일이야 늘 수요가 있으니 알선하기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규모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목적이 뚜렷하니 항구 근처에 거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시다시피 항구 근처는 건물 가격이 좀 비쌉니다.”
“대충 100명 정도가 묵을 수 있는 크기면 좋을 것 같은데.”
“100여 명이라··· 쉽지 않군요. 그래도 몇 군데 괜찮은 곳이 있으니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그런데 비용이 꽤 많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만.”
당연히 고작 수익금의 15%로 항구 근처의 부지 혹은 건물을 사서 인테리어를 다시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 벌어 놓은 돈이 있으니···.
“부족한 부분은 회계사에게 이야기하게. 회계사, 이 일에 대해서는 자네가 직접 관리해 줘. 숙련되고 충성도 높은 선원을 수급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이곳에 ‘우리 사람’을 심어 놓는다는 의미도 있으니 시설이 부족하면 곤란해.”
“알겠습니다, 선장님.”
내 옆에서 이례적으로 조용히 식사만 하던 게론드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저러고 있으니까 나보다 게론드가 오히려 더 귀족 같아 보인다.
나와 게론드를 한 번씩 바라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던 란데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는 게론드 회계사와 의논해서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게론드의 말대로 란데르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나와의 거래가 얼마나 큰 이윤을 가지고 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 고작 이번 일의 비용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게론드가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도 않을 테고.
게론드는 어떻게 믿냐고?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게론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빌리와 머레이를 키우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게론드가 빠진 선단 운영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막말로 게론드가 마음먹고 나를 엿 먹인다고 하면 곱게 엿을 먹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아이템(계산기)까지 하사한 게론드를 믿지 않으면 도대체 누굴 믿겠어?
* * *
오스팔트 상회에서 호화로운, 하지만 조금은 불편했던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게론드가 란데르와 세부적인 협의를 위해 남았기 때문에 인원은 꽤 단출했다.
나와 행크, 그리고 돌격대원 다섯 명.
무력이 형편없어진 게론드를 호위하기 위해 돌격대원의 절반은 오스팔트 상회에 남겨두었다.
물론 오스팔트 상회의 본점은 번화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그곳에서 항구까지는 꽤 큰 길이 닦여있으니 딱히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조심한다고 손해는 아니지 않는가.
어둠이 내려 앉은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평소라면 종종 인적이 보였을 거리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날이 추워지니 밖을 나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은 모양이다.
“어우, 춥다. 코트를 더 두꺼운 걸 사야 하나?”
“그래도 바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선장님이 차려입는다고 얇은 재질의 옷을 입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런가? 하여간 귀족 놈들은 이런 옷을 입고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야?”
의복의 첫 번째 목적은 보온이 아니던가.
그런데 고오오급 의복이라는 귀족용 옷이 그 첫 번째 목적조차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에이, 선장님이나 이렇게 걸어 다니시죠, 보통 귀족이라 하면··· 음?”
너스레를 떨던 행크가 갑자기 안색을 굳히며 슬그머니 품 안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뭐야?”
“잠시, 모두 경계 태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긴장을 끌어올리며 물었지만, 행크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돌격대원들에게 주변 경계를 명령했다.
행크의 말에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돌격대원들 역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분분히 품에 손을 넣는 순간, 저쪽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급히 뛰어나왔다.
“누구냐?!”
“으악! 깜짝이야! 어어엇?!”
날 선 행크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뛰어나온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제풀에 발이 꼬여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평소라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사과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행크는 긴장을 놓지 않고 재차 물었다.
“남작님의 행차를 가로막다니 뭐 하는 놈이지?”
“아구구구, 시원찮은 허리가 완전히 나가버렸나, 늙으니 별게 다 말썽이군.”
늙기는 개뿔, 머리카락이 새카만 것이 끽해봐야 30대나 된 것 같구만.
“대답해라.”
“젠장, 사람이 넘어졌으면 먼저 사과하고 일으켜 주는 게 정상 아니오? 뭐 어디 얼마나 잘나가는 남작 나으리시길래··· 으응?! 자, 자네?”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남자가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아니, 누군데 초면에 손가락질을··· 응?
“어···? 제먼 씨?”
“그래! 남작이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 여기에서 딱 마주치는구만!”
나는 당황하는 행크를 살짝 밀치고 앞으로 나가서 급히 그를 부축했다.
“아이고, 잠시만, 잠시만! 아무래도 진짜 허리가 삐끗 한 모양이야. 조금만 기다리게.”
“많이 아프시면 닥터를 모시고 올까요?”
“아니, 잠시만 기다리라니까.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부축하는 나를 물러서게 하고는 혼자 뭔가 중얼거리던 제먼의 손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어어어?!”
“저, 저게 무슨?!”
“사, 사제님이신가?!”
행크와 돌격대원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빛나는 손을 허리에 대고 몇 번 문지르던 제먼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원래 잘나가는 마공학자였던 이 아저씨는 나를 만나고 도망자를 거쳐 망명자가 되더니, 얼마 전에는 마법사가 되었다고 좋아서 방방 뛰었잖아.
이제 사제가 된 거야?
무슨 직업이 이렇게 휙휙 바뀌는데?
“제, 제먼 씨? 지금 이게 무슨···?”
“으하하하, 놀랐나? 내 말했잖는가. 마법사가 되었다고. 자네도 지혜의 탑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
“소문이야 들었습니다만···.”
“놀라지 말게, 내가 그 지혜의 탑에 초청을 받았다네!”
“···어, 축하합니다?”
나는 얼떨결에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거 축하해 주는 게 맞는거지?
저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 축하할 일인 것 같기는 한데···.
“으흐흠, 이제 다시 소개할 필요가 있겠군. 지혜의 탑에서 고문을 맡고 있는 마. 법. 사. 제먼 인피니토라고 하네.”
···나 아직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별일을 다 겪는구나.
그런데 원래 마법사가 막 치료 마법도 쓰고 그러는 건가?
그거 원래 사제 쪽 스킬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