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화> 전쟁과 마법사 >
“허, 이것 참 어디서부터 질문을 드려야 할지···.”
“어우, 춥구만. 나도 할 말이 많으니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않겠나?”
안 보는 사이에 얼굴이 두꺼워지셨네?
“선장님? 설마 이분이···?”
“어, 행크 자네도 얼굴은 봤잖아? 전에 우리 배에 타셨던 제먼 씨.”
“네에?! 설마 그 일레드 왕국의··· 에쉬노르 항구에서···.”
“오오, 잘 아네. 제먼 씨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함께 가도록 하지.”
내 말에도 불구하고 행크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선장님, 제가 아는 제먼 씨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만?”
“어? 그게 무슨 먈··· 아!”
그러고 보니 행크는 제먼 씨가 마법사가 되면서 매우 젊어졌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심지어 지금 제먼의 모습은 30대 중후반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어려 보이는 상태였다.
제먼이 50대 중늙은이라고 알고 있는 행크가 인지부조화를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회춘하셨단다. 예전에 후작 저택에서 봤었어.”
“···그게 가능합니까?”
어이없다는 투로 묻는 행크에게 나와 제먼은 동시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먼 씨는 마법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회춘의 이유는 찾지 못한 모양이다.
“아, 혹시 사제가 되면 어려진다거나, 그, 우리 배에도 한 분 있지 않습니까?”
“사제?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난 마법사일세.”
제먼의 말에 이번에는 행크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마법사··· 말입니까? 그 동네 꼬마들에게 손장난을 보여주는?”
“손장난이라니! 이게 얼마나 엄청난 힘인 줄 아나? 응? 세상의 법칙을 강제로 흐트러트리는···.”
벌컥 확를 내는 제먼을 상대로 행크가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 네, 네. 방금 전에 그 손에 빛나는 것은 정말 그럴 듯했습니다.”
“그럴듯한 게 아니라 그게 바로 마법이네!”
“네, 그 마법이요. 사제님들이 내뿜는 빛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저도 깜빡 속을 뻔했지 뭡니까?”
“사제? 그런 신만 찾는 멍청이들과 다른 거라니까? 이게 얼마나 대단한···!”
“아이고오, 제먼 씨. 동네방네 다 소문내시려고 그러세요? 자리 옮기고 이야기해요, 자자, 행크 자네도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 * *
잔뜩 흥분한 것 같은 제먼과 함께 오트라스로 향하면서 행크에게 조용히 물었다.
“요즘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괜찮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 제먼 씨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이라면···.”
“아니 아니, 처음 제먼 씨가 나타나기 전에 말이야, 사람이 열댓 명씩 달려오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 사람인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잖아.”
“아, 그것은···.”
잠시 말을 고르던 행크는 결국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게··· 설명하기가 좀 어렵습니다만, 갑자기 그런 느낌이 왔습니다. 약간 숨쉬기가 거북할 정도의 압박이랄까요? 그냥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살기와는 조금 다른데 뭔가 몸을 긴장시키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호오?”
뚱딴지같은 행크의 말에 반응한 것은 제먼이었다.
“이보게, 압박이라고 했나? 지금은? 지금은 어떤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 제먼을 보고 살짝 당황한 행크가 말을 더듬었다.
“아, 지, 지금은 좀 괜찮습니다만.”
“조금 괜찮다? 그렇다면 아직도 그런 느낌이 남아있다는 말이군?”
제먼의 과도한 관심 때문인지 한 발 뒤로 물러선 행크가 난처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기분 탓인 모양입니다. 아까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제먼 님.”
“아니, 죄송은 무슨. 그보다 자네 마력에 민감한 체질인 모양이군? 흥미로운걸?”
“네?”
잠깐만, 마력에 민감한 체질이라고?
그렇다면 행크를 마법사로···.
“제먼 씨, 그렇다면 행크도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응? 마법사? 하하하, 글쎄, 잘 모르겠군. 마력에 민감하다고 해서 모두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도 한 번쯤 체크를 해 보는 것도 좋겠어.”
마법사, 마법사라니!
방금 전에 보았지 않은가?
고작 손가락에서 라이터 불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다.
다친 허리를 바로 고칠 수 있는 기적 같은 기술! 그리고 마법이라는 것이 과연 그것만 있겠냐고!
마음 같아서야 제먼을 배에 태우고 싶지만, 분위기를 볼 때 우리 배에 타겠다고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행크가 마법사가 된다면···!
아닌가? 마법사가 되면 저놈도 배에서 내린다고 하려나?
복잡한 기분이 드는 가운데 저 멀리 오트라스 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 * *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선장실에서 내가 내어준 술을 한 모금 마신 제먼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에잉, 자네 돈도 많이 벌었다던데 아직도 이런 걸 마시나?”
나름 비싼 술인데 도대체 얼마나 비싼 술을 마시라는 것일까.
그리고 애초에 내 방에 비치된 술의 대부분은 네이선의 뱃속에 들어간다.
굳이 비싼 녀석을 갖춰놓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하지만 구구절절 늘어놓기도 애매해서 그냥 대충 둘러대었다.
“뱃놈이 이 정도면 충분히 호사를 누리는 거죠. 선원들은 진짜 싸구려를 마신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네는 이제 남작 아닌가, 응? 스펜서 남작 나으리. 흐흐흐하하하!”
“아, 농담하지 마시고요. 진짜 왜 오신 건데요?”
“알겠네, 흠, 흠.”
잠시 목을 가다듬은 제먼이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폰테 섬의 총독인 리안 스펜서 남작께 마법사 길드, 지혜의 탑에서 요청드립니다. 폰테 섬에 새로운 은행 지점을 설립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지만 정해주시면 건물의 건설부터 시설의 설치까지는 탑에서 전담합니다. 물론 지점이 정상적인 활동을 시작하면 합당한 세금도 납부할 겁니다.”
“어, 그게···.”
나는 말을 늘이며 갑자기 진지해진 제먼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채피 견습 사제의 예언(?)을 들은 이후로 계속 고민한 일이지만 여전히 답이 명쾌하지 않았다.
단순한 은행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정보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집단이 은행, 아니, 마법사 길드라는 것을 감안하면 섬의 정보를 통제하고 싶은 내게 독약이나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단 말이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그게 아니고 아! 폰테 섬은 제 영지가 아닙니다, 허락을 받으시려면 후작 각하께 받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에 제먼은 오히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폰테 섬의 총독 아닌가? 섬의 개발에 대한 전권은 자네에게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건 그렇지만 폰테 섬의 영주는 결국 후작 각하니까···.”
“아이고, 그러지 말고 내 입장 좀 고려해 주게. 전 후작이라면 몰라도 지금 후작과 내가 응? 관계가 좋을 리가 없잖나. 고문이라고 감투는 받아놓고 하는 일 없이 놀다가 처음 받은 임무란 말일세.”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생각만큼 힘 있는 위치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자네가 대신 보고하면 어떻겠나? 적당히 폰테 섬에 은행을 세워도 되겠냐고 물어보면 후작이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급하게 둘러댄 변명에 카운터를 맞아버리니 반박할 말이 궁해졌다.
그리고 그런 내 표정을 살피던 제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응? 설마 자네 내 제안, 그러니까 길드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별수 없이 내 상황을 털어놓자 제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해는 되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알다시피 일레드 왕국의 미친놈들은 전국의 은행 지점을 공격하면서 마법사 길드를 적으로 돌렸으니 정보가 샐 리도 없고, 비록 지금은 협력 중이라도 마법사 길드는 중립이라 특정 국가에 필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거든.”
“그래도 일단 은행이 벨로키나-쿠샤 연합군에 합류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 연합을 주도했던 사람이 후작입니다. 아무리 은행이라도 후작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그것도 다름 아닌 자기 영지에 관한 정보잖아요.”
“어, 음···.”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제먼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자네는 언제까지 섬의 정보와 출입을 통제할 생각인가?”
“최대한 오래요.”
“하지만 섬이라는 지형은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네. 언젠가는 통제를 풀 수밖에 없다는 거지. 특히나 자네 말대로라면 후작이 마음만 먹으면···.”
“그래도 최소한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안 됩니다. 섬의 정확한 위치만 알려져도 일레드 놈들이 반드시 일을 벌일걸요? 후작이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일 테니까요.”
“전쟁? 걱정 말게. 전쟁은 곧 끝날 거야.”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제먼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소위 천재라는 족속들은 자기의 예상과 예측이 반드시 맞을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고, 제먼 역시 그 천재과에 속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인적 자원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 머리는 되지 않겠어?
“그런 장담을 하시기에는 시기상조 같은데요.”
“조만간 시논 섬을 두고 대해전이 벌어질걸세.”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일레드 왕국은 방어를 하는 입장이니 전장을 선택할 수 없고, 공격을 담당하는 후작은 이미 대해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당연히 대해전 장소는 연합군의 최종 목표인 시논 섬이 되겠지.
물론 일레드 왕국이 얼마 전에 한 천재 전략전술가의 유인 작전에 걸려들어 큰 피해를 입었지만, 크흠···.
냉정하게 따지면 벨로키나-쿠샤 연합군과 일레드 왕국의 전력비는 백중세에 불과하다.
은행이 돈은 많을지 몰라도 당장 전투에 동원할 배는 없으니 큰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고.
오히려 방어시설이 완비된 시논 섬에 들이받아야 하는 연합군 쪽이 더 불리할 확률이 높은데 뭘 근거로 전쟁이 끝난다고 자신하는 걸까?
만약 시논 섬 공략이 어렵게 돌아가면 결국 연합군은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전쟁은 계속 늘어질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비밀유지서약 때문에 말하기 어렵군.”
“아니, 그럴 거면 왜 말을 꺼내신 건데요?”
김이 빠져서 내가 불퉁거리자 제먼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자네는 곧 마법사가 참여한 전쟁이 어떻게 되는지, 마법사가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될 걸세.”
어?
설마.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마법사처럼 불덩이를 쏘아서 배를 가라앉히고, 폭풍과 해일을 불러일으키고, 거대한 방어막으로 포탄을 막아내고 그러는 건가?
그러면 진짜 전쟁의 신이 강림하지 않는 이상 일레드 왕국은 개박살 날 것 같기는 한데.
“마법이 부활하고 마법사가 활동을 시작했으니, 이제 전쟁의 패러다임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지.”
흔들리는 촛불이 제먼의 얼굴에 음울한 음영을 만들었다.
* * *
다음 날 슬슬 정리할 필요가 있던 투자 건에 대한 거절 의사를 밝히기 위해 엔버딘 자작을 만났다.
“죄송합니다, 자작님. 아무리 제가 폰테 섬 개발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다지만 그 권한을 마음대로 양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 듯합니다. 괜한 욕심으로 후작 각하께 누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하지만 남작, 내가 원하는 것은 아직 말하지도 않았잖소?”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던 엔버딘 자작은 내가 거절 의사를 밝히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마치 내가 당연히 승낙하리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말이다.
게론드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의 예상대로 되었을 테니,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어차피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인데 조건을 들어서 뭐 하겠습니까? 괜히 속만 더 쓰리지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차라리 후작 각하께 직접 요청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각하의 명령서나 허가서를 가지고 오셔서 저와 세부적인 내용을 이야기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후, 후작 각하 말이오?”
게론드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살짝 당황하는 그를 보니 점점 의심이 짙어졌다.
“네, 생각해 보면 그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문제는 무슨! 그게 그러니까.”
잠시 말을 고르던 자작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남작도 만나봐서 알겠지만 지금 후작께서는 경제라던가 무역 같은 부분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오. 그리고 우리 영지의··· 음, 그러니까 치부, 아니지, 영지의 좋지 않은 상황을 주군께 알리는 것도 죄송한 일이고. 그냥 그런 아주 작은 거리낌이 있었을 뿐이오. 남작의 말대로 각하께 먼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옳겠지.”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후작 각하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 다시 뵐 수 있겠습니까?”
“어, 음, 그럽시다. 그··· 아니오.”
“네,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작님의 시간을 낭비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하군요.”
“아니요, 일을 급하게 처리하려던 내 탓도 있겠지. 그럼 살펴 가시구려.”
자작이 머물던 여관을 나와서 한참을 걷고 있는데 동행하던 아인델프가 물었다.
“그런데 제독,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실 겁니까? 그 티벡 선단을 따라잡으려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 그들이 진짜 향료 제도로 향한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발드 선장이 대포 재무장에 대해 알아보고 있어. 그런데 요즘 대포값이 너무 비싸서 말이지···.”
제먼의 말대로라면 곧 전쟁이 끝날 것이고 그러면 무기값이 많이 떨어지겠지만, 아직 시장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무기와 화약의 가격은 역대 최고치를 연일 갱신하는 중이었고, 중고 대포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여어! 리안 제독! 여기에서 만나는군!”
“제먼 씨? 그 뒤의 분들은?”
은행이 있는 쪽에서 세 명의 남자를 데리고 걸어오던 제먼이 손을 번쩍 들며 아는 척을 했다.
폰테 섬의 은행의 구축과 초기 관리를 맡을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더니 그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말한 친구들이네. 앞으로 폰테 섬의 지점을 맡을 거야.”
“안녕하십니까, 폰테 섬 지점의 지점장을 맡게 된 에리코바 스왈로우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리안 스펜서 남작님.”
“아, 앞으로 잘 부탁하네, 지점장.”
일행을 대표해 지점장이라는 40대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그런데 지금 배를 타면 바로 폰테 섬으로 가는 건가?”
“아니요,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어차피 일이 끝나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그렇군. 그런데 표정이 영 좋지 않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나?”
“별일 아닙니다. 사소한 일이 조금 있어서요.”
“그러지 말고 이야기해보게. 혹시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줘서 체면치레하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도와줌세.”
제먼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대포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딱히 숨겨야 할 일도 아니었고 돈 많은 은행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니 혹시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흐음, 그 일이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출항일이 언제인가?”
“별일이 없으면 사흘 정도 후로 보고 있습니다.”
티벡 선단의 일만 없다면 한 열흘쯤 더 쉬어도 되지만 아무래도 계속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아인델프의 말대로 너무 늦어서 티벡 선단을 따라잡지 못하면 문제가 복잡해지기도 하고.
“그렇다면 흠, 에리코바. 혹시 탑에서 준비한 추가 물량 말이야, 이쪽으로 돌릴 수 있겠나?”
“하지만 고문님, 그 물건들은 마법사 없이는 운용이 불가능합니다.”
“마법사라면 내가 있지 않나! 하하하하.”
“그게···.”
“내가 여기 스펜서 남작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처지라서 그러니, 큰 문제가 없다면 이쪽으로 돌려주게. 수량도 대충··· 이보게, 남작. 대포가 몇 문이나 필요한가?”
“전 선단을 무장하려면 적어도 70문은 필요하죠.”
내 말에 제먼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그렇게 많이?”
“이것도 최소로만 말한 겁니다. 대포 한두 문이라면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고민까지 하겠습니까?”
“어···.”
우리를 보고 있던 에리코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문님, 70개는 무리입니다. 한 10개까지는 노력해보겠습니다만. 그리고 어차피 마법사가 한 명밖에 없으니 여러 배에서 운용도 불가능하구요.”
“어허허허허, 그, 그런가?”
대충 대화하는 맥락을 짚다 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필요한 신형 대포, 혹은 그에 준하는 무기.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다고 했던가?
이러면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써서라도 받아내야지!
“감사합니다, 제먼 씨. 덕분에 제가 부담이 많이 줄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염치없이 공짜로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어, 어? 잠시만, 내가 생각을 해 보니···.”
“그럼 그렇게 알고 전 나머지 대포를 구하러 가보겠습니다. 아인델프, 어서 가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내 뒤에서 제먼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더 빠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