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화> 오차 >
“어우, 일십백천··· 이거 숫자가 도대체···.”
외부와 격리된 VIP룸에서 은행 잔고를 확인한 나는 바보처럼 눈을 비볐다.
1억 하고도 몇 백만 로스가 남는다.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현물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길이만 봐도 절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만약 이 세상에 은행이 없었다면 도대체 이만한 금액을 어떻게 수령했으며, 어떻게 보관했을까?
돈 많은 상인이나 부유한 귀족들은 자신의 저택이나 성의 깊은 곳에 거대한 창고나 금고를 짓는다지만 나는 그게 안 되니 말이야.
심지어 이 세상 은행의 보안 부분은 지구 따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니, 안전한 거점이 없는 내게는 최고의 금고였다.
물론 마법사가 나타난 만큼 언젠가 마법이 일상에 스며들 때가 오겠지.
그때면 카드를 위조하거나 개인 마력 패턴을 위장하는 기술이 생겨날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그게 지금은 아니다.
“계좌를 나눠서 관리하시겠습니까? 보통은 그렇게 관리하십니다만.”
자신을 델라 항구 지점의 지점장이라고 소개한 중년의 남자가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개인 계좌와 상단의 공금을 따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계좌 하나당 관리비가 얼마나 들어가는데 쓸데없이 계좌를 나눈단 말인가.
“그럴 필요는 없고, 이쪽으로 천만 로스만 옮겨주게.”
내가 상단 공금용 카드를 꺼내자 그는 공손하게 카드를 받아 처리해 주었다.
천만 로스면 대포 살 돈밖에 안 되지 않냐고?
무슨 말씀을.
대포랑 포탄은 덤으로 받았다.
금액이 금액이니만큼 내가 받아야 할 몫에서 제하고 생색을 내는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쿨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애초에 고급 마정석 자체가 가치는 있을지언정 처분 자체가 매우 곤란한 녀석이었으니, 제값을 받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대포와 포탄값이라고 해봐야 전체 대금의 10% 정도에 불과하니 대충 수수료라고 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후작에게 바쳤을 때보다 개당 단가를 더 높게 쳐 줬다.
그럼 일단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매각 루트 중에서는 최고가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 * *
쾅쾅쾅!
은행에 다녀와서 새로 고용하기로 한 에반, 아슈번, 브로가넨에게 채용 소식을 전달하라고 한 뒤 잠깐 쉬고 있는데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누구야?”
“선자아아앙! 나야, 나!”
내가 문을 다 열기도 전에 머리부터 집어넣는 우르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아얏! 왜 때려!”
“‘선자앙’이 아니고 ‘선장님’, ‘나야’가 아니고 ‘포술장입니다’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냐?”
“하지만 아무도 없었는걸!”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네 방에 있는 고양이에게도 들리겠다.”
“응? 리아는 내 방에 없는데?”
그게 그 말이 아니잖냐··· 아니지, 내가 너에게 너무 어려운 말을 한 모양이다.
한숨을 내쉰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슬쩍 몸을 비켜주었다.
“······.”
“···?”
“뭐하냐?”
“응?”
“들어오라고.”
“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 화를 돋우던 우르타는 기어이 뒤통수를 한 대 더 맞고 나서 온 목적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경매장에 구경을 가자고?”
“응! 지금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리도 아니라니까?”
“너나 가, 난 못 가.”
“에엑?! 할 일도 없으면서!”
할 일이 없는 것은 맞는데 진짜 나는 못 간다.
내가 경매를 란데르에게 맡기는 것이 이번 계획의 키포인트인데 그 자리에 내가 나타나면 뭐가 되겠나?
하지만 단순한 우르타가 여기까지 이해를 할 리가 없으므로 나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어··· 그럼 변장하면 되잖아. 리안 그런 거 잘 하잖아.”
“어?”
우르타의 유혹에 깜빡 넘어간 내 위험한 시도는 다행히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복잡한 곳에서 인파에 휩쓸리면 경호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요즘 눈이 벌겋게 되도록 내 경호에 신경을 쓰고 있는 행크의 말이었다.
그런데 행크, 그냥 너희랑 같이 가는 것 자체로 변장이 의미 없지 않을까?
“왜 그런 위험한 시도를 하시는 겁니까?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요. 그리고 세상에 눈치 빠르고 눈썰미 좋은 사람이 한둘인 줄 아십니까? 분명히 걸릴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제가 설명해드릴까요?”
자기 돈도 아니고 나와 란데르의 돈인데도 나보다 더 예민한 게론드의 말이었다.
물론 게론드는 이후로도 거의 15분 이상 잔소리를 함으로써 우르타를 기어이 도망가게 만들고야 말았다.
* * *
성공적으로 경매를 마친 란데르는 다음 날 깔끔하게 정리된 장부와 함께 오트라스를 방문했다.
“이제 곧 출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남작님.”
“으음, 후작 각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니까 말이야.”
“최근 이 근처에 폭풍이 잦다고 합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폭풍이야 뭐. 그보다 앞으로 잘 부탁해. 거점 문제도 그렇고, 가능하면 전쟁이나 각국의 동향에 대해서도 좀 자세하게 알아봐 줘.”
“네, 그런 일이야 원래 제가 하던 일이니까요. 다음에 오실 때 보시기 편하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나는 파리한 안색의 트레비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었다.
“트레비스, 몸조리 잘하고 있으라고. 괜히 여자 엉덩이에 남은 돈 다 퍼주지 말고.”
“감사합니다, 제독. 이렇게까지 저를···.”
나보다 더 큰 덩치의 남자가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나는 질색하며 뒤로 떨어졌다.
“어우, 너 때문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냐! 그냥 내가 거점이 필요한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쓸만한 놈들 있으면 미리미리 영입해 놔! 알았지?!”
“걱정 마십시오, 제독!”
나는 닭살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빠른 걸음으로 현문을 통과했다.
뒤에서 트레비스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소리는 네이선이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현문 철거! 오트라스 출항 준비!”
조나단 이 새끼, 조만간 얼굴 한번 보자꾸나.
* * *
“그런데 선장님, 차라리 며칠 전에 출항했다면 티벡 선단을 찾기가 더 수월한 것 아닙니까? 굳이 이렇게 시간을 끄신 이유가···?”
오펜이 조심스럽게 묻는 것을 보니 자기 나름대로 한참 고민을 했는데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덩치에 맞지 않게 앳된 표정의 오펜을 보며 피식 웃은 나는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따라와 봐.”
오펜과 함께 해도실로 들어간 나는 해도를 앞에 두고 오펜에게 물었다.
“자, 네가 생각하기에 티벡 선단이 어떻게 움직였을 것 같아?”
“그야 당연히···.”
뒷골목에서 얻은 티벡 선단의 행적이야 이미 공유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오펜은 망설임 없이 손으로 곡선을 하나 그려냈다.
“좋아, 그럼 이날 여기를 출항해서 이동 했으니··· 오늘은 어디 쯤이지?”
내 말에 오펜이 머뭇거리다가 한 점을 손으로 짚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정답이 맞기는 한데 출제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학생의 표정이었다.
“맞아, 대충 그쯤이야. 어쩌면 론 항구에 이미 입항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리가 론 항구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들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르는데요! 괜히 쿠샤 왕국까지 따라가서 전투를 벌이면···.”
이제 국가 단위의 외교관계까지 신경을 쓰다니 제법 많이 컸다.
하지만 조금 부족하지.
나는 장난스럽게 오펜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말했다.
“요 녀석이 벌써 나를 가르치려고 드네? 그건 나도 안다, 임마.”
“그렇다면 왜···?”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찍은 것은 정식 항로잖아. 그렇게 움직이면 높은 확률로 델라 항구의 연안 경비대와 마주칠 수 있어. 저놈들이 과연 델라 항구의 연안 경비대와 마주치고 싶을까?”
연안 경비대는 해군 소속으로 후작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점이 델라 항구인데 과연 그들이 후작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저놈들, 후작 가문의 깃발을 단 배는 물론 이제 오트라스만 봐도 알아서 길을 열고 검문도 하지 않는 놈들이다.
그런데 뒤가 켕기는 조나단이 이 근방을 지나갈 리가 없지 않은가.
“아하! 그렇다면?!”
“그래, 저놈들은 당연히 이런 식으로 조금 멀리 돌 수밖에 없어. 그럼 만약 사흘 전에 우리가 출발했다면 저놈들이 어디쯤이지?”
“어, 대충 여기···.”
“그래, 하지만 우리는 놈들이 거기를 지났는지 아직 안 지났는지, 더 멀리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 당연히 놓칠 확률이 높지.”
“하지만 오늘은 대충 여기 쯤을 지날 테니까, 아! 그렇군요!”
“이제 알겠니? 저놈들이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지는 않았을 테니 지금부터 우리는 이 항로를 따라 추격만 하면 되는 거야.”
“역시 선장님은 대단하세요!”
무한한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오펜의 머리를 쓰다듬은 나는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놈들이 너무 빨리 움직이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추격을 위해서 무장과 식수, 식량을 제외한 어떤 화물도 싣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예상대로라면, 놈들이 론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물론 놈들이 너무 늦는다면 론 항구에서 조금 기다려야겠지만··· 가능하면 그쪽은 피하고 싶다.
후작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은 발레리아 백작이 곱게 넘어갈 것 같지가 않으니 말이다.
내가 발레리아 백작과 약간의 친분(?)이 있다고 하지만, 정적을 상대함에 있어서 그 정도 친분은 손가락에 박힌 가시 수준도 되지 않을 것이다.
* * *
우다다다다!
“꺄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우다다다다다···.
하얀 솜뭉치가 갑판을 빛살처럼 가로지르고 그 뒤를 하얀 곰탱이가 뛰어간다.
그리고 그 옆에는 덜떨어진 포술장··· 어휴.
저 두 바보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지금 굉장히 태평스러운 상황인 것 같다.
“선장님, 이제 곧 론 항구입니다만.”
그레이그의 어색한 말에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분명히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았을 텐데···.
심지어 선단을 넓게 퍼트려 지나가는 모든 선박을 감시했는데도 티벡 선단은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배를 돌려서 조금 더 북쪽을 살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새로 합류한 이등항해사 에반이 제안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재수 없는 놈이기는 하지만 조나단이 멍청한 놈은 아니야. 더 북쪽으로 움직였다가는 해군들 간의 전투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심지어 놈은 우리가 추격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테니 굳이 무리하게 위험한 길을 택할 리가 없어.”
나는 마음을 굳히고 명령을 내렸다.
“론 항구로 향한다. 전 함선에 이쪽으로 모이라고 신호 보내. 그리고 지금 당직이 누구지?”
“접니다, 선장님.”
그레이그가 살짝 손을 들며 대답했다.
“연안 경비대가 보이면 무조건 이쪽으로 불러. 그리고 내게 보고하도록.”
“연안 경비대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그레이그는 나의 뜬금없는 명령에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몇 시간 후, 근처를 지나가다가 오트라스의 호출을 받고 접현한 연안 경비함에서 귀찮은 표정이 역력한 소령 한 사람이 병사를 끌고 오트라스 호에 올라섰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호출···.”
“스코타 후작 각하를 모시고 있는 리안 스펜서 남작이다.”
“헛?! 나, 남작님?!”
소령의 귀찮은 표정이 삽시간에 긴장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면서 재빠르게 내게 군례를 올렸다.
시시덕거리며 올라오던 병사들 역시 두 배쯤 빨라진 속도로 그 뒤에 정렬하는 꼴이 조금 우스웠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고작 ‘남작’이 되었다고 이렇게 대우가 달라지나?
안타깝게도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소령에게 물었다.
“혹시 티벡 선단이 론 항구에 기항했나?”
“티벡 선단이라면 그러니까··· 아, 스코타 후작가의 6척짜리 대형 상선단 말씀이십니까?”
“잘 알고 있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령의 말을 곱씹었다.
스코타 후작가의 상선단이라.
결국 놈들은 내 예상대로 후작가의 상선단이라고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라면 어제 이미 출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제?”
“네, 언제 입항한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제 당직 중에 출항하는 모습을 얼핏 보았습니다.”
“어느 쪽으로 향했나?”
“네? 그것까지는 잘··· 아마 항구관리관이 알고 있을 겁니다.”
빠르게 항구관리관과 대면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좋아, 고맙네.”
당황하는 소령을 뒤로하고 내 뒤에 서 있던 그레이그에게 빠르게 말했다.
“이대로 계속 추격한다. 고작 하루거리니까 사흘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선장님, 식수와 식량이 위험할 겁니다.”
“돌아오는 것까지 계산하면 그렇지. 명령이다, 일등항해사! 각 함선에 지시 전달해!”
“···네, 제독!”
내 계산이 크게 빗나가면서 일이 틀어질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만회할 기회가 한 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론에서 서쪽으로 이틀만 가면 대륙의 최서단 지점에 도착하고, 그 아래로 이틀만 항해하면 쿠샤 왕국의 영해에 진입한다.
재보급에 하루, 아니, 한나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도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내 계산이 이틀이 넘게 틀린 거지?
항속이라는 것이 노력과 근성으로 막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당연히 오차가 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만약 놈들의 속도가 배를 거의 비우다시피 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노력과 근성은 오히려 우리가 보여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항해사 호출해! 당장 해도실로 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