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화> 부담스러운 선물 >
시간이 흘러 출항을 하루 앞두고, 각 함선장과 회계사 게론드, 탈리스 일등항해사가 선장실에 모여 앉았다.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끝내 조나단의 행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를 전폭적으로 돕기로 한 케일린이 바흐카덴 항구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의 선원들을 대상으로 알아보았음에도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고 하니, 확실히 이쪽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애초에 우리가 그들을 며칠씩 추적한 것도 아니고 방향만 대충 확인한 채 뱃머리를 돌렸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조나단이 하루쯤 서쪽으로 가다가 되돌아서 움직였다면 이미 론 항구에서 재보급을 마치고 떠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물론 케일린이 론 항구의 소식도 물어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자기 구역도 아니고 거리도 있다 보니 정보의 질도 그렇고 시점도 애매했다.
오히려 케일린이 론 항구의 소식을 빠삭하게 아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지.
아, 케일린은 명실상부한 바흐카덴의 어둠을 지배하는 흑막이 되었다.
폭풍의 6인조가 뒷골목을 싹 정리한 이후로 굵직한 세력은 모조리 와해되고 고만고만한 녀석들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굴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산하의 작은 조직들이 조금 말썽을 부리는 것 같지만 그 정도면 감히 ‘평화’라는 단어를 써도 될 정도였다.
조금 크게 사고를 칠 것 같으면 케일린이 직접 중재에 나서 물리치료를 감행하니 감히 큰 사고를 치는 녀석도 없고 치안관도 꽤 만족스러워한다고 했다.
결국 행복하지 못한 건 나뿐인가.
“조나단은 결국 행방불명이 되어버렸군.”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탄식이 섞인 내 혼잣말에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이면 열흘이야, 지금까지야 재정비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야.”
“지금쯤 하루나 이틀거리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인델프의 말이 옳았다.
항복한 선장들의 말대로 식료품이 8일 치 정도 남았다고 해도 조금 무리한다면 열흘 이상 버티지 못할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렇게 항로를 짰다면 며칠 후에나 이곳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약 없이 기다린다는 말인가.
정말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량의 절반만 배식하고 사흘쯤 굶은 것도 감수하면 앞으로 보름 후에 도착할지도 모르는 녀석을 말이다.
심지어 놈의 목적지가 이곳 바흐카덴이나 론이라고 확신할 수조차 없었다.
“쯧, 내가 못 잡은 것은 아쉽지만 어차피 놈은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 물고기가 되지 않는 이상 결국 항구에 들러야 할 테니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잡히겠지.”
‘살아’ 있다면 말이지.
내가 더 이상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을 깨달았는지 베기어 함장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후작의 반응이 많이 안 좋습니까? 요즘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후우우, 차라리 뭐라고 했으면 좋겠어. 은행 통신망에 여러 말 쓰는 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내게 전달된 메시지는 일단 복귀하라는 것뿐이라서 더 불안해.”
“그러면 별문제 없는 것 아닐까요?”
발드 선장이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내밀었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몇 번 보지 못했지만 현 후작은 만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심지어 전 후작처럼 나에게 특별히 호감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그에게 칼자루를 쥐여준 꼴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있나.
다시 생각해봐도 조나단의 생사를 확인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 고민은 나눈다고 작아질 수 있는 그런 종류는 아닌지라 바로 말을 돌렸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올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그보다 이번 인사이동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나?”
“아, 제독의 의도는 모두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럼 모두들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그럼···.”
대충 분위기가 수습되자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탈리스 일등항해사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등항해사, 보고 부탁하지.”
“네넵! 각 함선의 수리는 완료되었습니다. 티벡 선단의 수리 상태도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알다시피 델라 항구까지 한 번에 이동하는 장거리 이동이 될 거야. 문제가 없도록 다시 한번 확인해. 혹시 조금이라도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보고하도록.”
“넷!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기함의 일등항해사는 미묘한 자리다.
특히 지금처럼 부선장이 없다면 선단 전체의 관리를 맡아서 해야 하니 각 함선장들도 함부로 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레이그와 아인델프간에 있었던 의견 충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 인사이동에서 그레이그를 아인델프가 선장으로 있는 피오렐의 일등항해사로 발령했으니 그에게 중임을 맡길 수 있는지는 이제 알게 되겠지.
경력과 상관없이 선장의 명을 따르지 않을 정도로 제멋대로인 항해사와는 함께할 수 없다.
“그리고 각 함선의 물자 상황은 오트라스 호의 경우···.”
한겨울임에도 뚱뚱한 몸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탈리스가 조금은 불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레이그의 검증이 끝난다면 다음 선박의 선장을 맡을 이는 그레이그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그의 빈 자리를 채울 일등항해사가 필요할 것 아닌가.
다행히 탈리스 일등항해사는 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능력이 있는 친구니 잘 적응할 것이다.
* * *
그날 저녁 나는 네이선과 우르타만 대동하고 조용한 술집에서 케일린을 만났다.
오늘따라 유난히 화사한 미모를 부각시킨 케일린의 모습에 옆 테이블에 앉은 네이선과 우르타의 시선이 연신 이쪽을 향한다.
“내일이면 떠나시는군요, 남작님.”
케일린의 말에 나는 입에 머금었던 술을 꿀꺽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야 며칠 더 쉬고 싶지만, 알다시피 매인 몸이라. 그리고 그대가 준 선물도 확인해야 하고.”
“흐응,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대해전과 폰테 섬에 대한 공세는 비슷한 시점에 이루어질 거에요. 조금 더 서두르셔야 하지 않을까요?”
“폰테 섬의 위치가 발각되었다면 말이지.”
“아직 제 말을 안 믿는군요?”
그녀의 추측에는 낮은 가능성 외에도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일레드 왕국은 아직도 폰테 섬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것.
평시라면 막강한 해군 함선의 물량 공세로 어떻게든 찾아내겠지만, 버거운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고작 섬 하나 찾겠다고 수십 척의 군함을 뒤로 돌릴 수는 없을 터였다.
그녀가 내게 알려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행적이 묘연한 일곱 척의 선박이 폰테 섬을 공격하려고 해도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야 공격을 할 것 아닌가.
심지어 마지막으로 섬을 떠나올 때 섬의 위치를 찾으려는 놈들에게 내가 직접 빅 엿을 선사하고 왔으니 탐색이 상당히 움츠러들었을 확률이 더 높기도 하고.
“그 일은 내가 할 일이고, 부탁한 일이나 잘해주시오.”
“물론이에요, 덕분에 꼬여가던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으니 남작님의 부탁은 최우선으로 처리해 드리겠어요. 연락은 델라 항구의 오스팔트 가문으로 하라고 하셨죠?”
“잘 기억하고 있군. 명심하시오, 혹시라도 놈이 나타난다면 쓸데없이 접근하지 말고 놈의 행적만 알려주면 되오.”
“물론이죠.”
상큼하게 대답하며 케일린이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뭐요?”
“남작님 말대로 제 선물이 빈 상자일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전 남작님의 미움을 받을 테고, 전 그게 싫으니까요. 만약 선물이 마음에 드신다면 이건 다음에 돌려주세요.”
“······.”
주머니 크기로 볼 때 은화만 들어있다고 해도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런데 굳이 내게 이런 돈을 건넬 필요가 있나?
폰테 섬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나도 인정한 일이니 혹시 공격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굳이 이렇게 보험을 들어 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약간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로 길게 그녀를 표정을 살폈지만 약간의 장난스러움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쯧, 표정 관리만 놓고 보면 닳고 닳은 늙은 상인인 수준이군.
“그렇다면 일단 보관하고 있지.”
“휴우,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하군요.”
뭐, 굳이 주는 돈을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 * *
“제독, 이번 항해 일정과 항해 당직표입니다.”
“음.”
이등항해사 크리스티앙이 건네주는 항해 일정과 당직 순서를 살피는데 출항을 지휘하는 탈리스 일등항해사의 긴장감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이봐, 일등항해사.”
“넷, 제독!”
“평소처럼 해, 뭘 그렇게 긴장해?”
“아, 아닙니다!”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처럼 대답한 탈리스는 목각인형처럼 뻣뻣한 움직임으로 전방을 주시하다가 소리쳤다.
“조타수! 좌로, 아니, 340도, 아니, 345도 잡아!”
아무리 입출항이 미세 조절이 필요하다지만 5도 정도는 보통 괜찮지 않아? 당장 눈앞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 5도 정도는···.”
“시정하겠습니다! 조타수, 340도 잡아!”
내 말이 그 말이 아니잖아.
코트를 여며야 할 정도로 추운 날씨에도 식은땀을 흘리는 탈리스를 보던 나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빨리 사라져 주는 것이 항해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경력이 짧은 사람도 아닌데 적응이 꽤 오래 걸리네.
“선장실에 있을 테니 문제 있으면 호출하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선장실에 내려와 잠시 쉬려고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선장님, 선교에서 호출입니다.”
“어? 알았어.”
30분 후.
똑똑똑.
“뭐야?”
“선장님, 일등항해사가···.”
똑똑똑
“들어와.”
“선장님, 좌현 쪽 40km 정도에 먹구름이···.”
똑똑똑
“또 왜!”
“그게, 일등항해사가 선장님을 모셔오라고···.”
뭐지?
이 정도면 일부러 나 엿 먹이는 거 아니야?
금방 적응하리라고 믿었던 탈리스의 기행은 열흘 가까이 이어졌고, 나는 그 시간 동안 계속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 * *
혼자서 들기에 약간 무거워 보이지만, 그렇다고 둘이 들기에는 애매한 크기의 나무 상자.
자고 일어나서 테이블에 올려진 커다란 이 나무 상자(대충 감 박스 크기)를 보았을 때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요즘 지고스 님이 센스가 생기셔서 선물 포장을 잘하시는 것 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상자의 뚜껑을 열기 전에는 약간 두근거리기도 했더랬다.
사이즈가 큰 것을 보니 꽤나 신경 써서 준비해 주신 물건 같았으니까 말이다.
“어, 이거 그거 아닌가···?”
나는 나무상자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얇은 원통형 물건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실물로 본 적은 없지만, 왠지 낯이 익은 형태의 물건들.
5x5묶음이 6개니까 150개나 되는 양이었다.
이런 걸 이렇게 많이 막 주셔도 되려나 모르겠네?
그보다 이걸 도대체 어디에 보관한단 말인가.
창고에 보관하기에는 불안하고 선장실에 보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탈리스 일등항해사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분명히 불면증으로 죽어버릴 거야.
···그, 그래도 그냥 여기에 둬야겠지?
그래, 가만히 내버려 두면 별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
뚜껑을 닫고 꼼꼼히 밀봉한 상자를 옷장 구석에 밀어 넣었다.
조금 더 세련되고 멋진 녀석들도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것을 주신 이유를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필요할 만한 일이라면 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지고스가 보내주는 선물은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때 그 상황에 적절한 선물들이 없었다면 내 운명 자체가 변하거나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것들이 꽤 된다.
그러니까 결국 ‘선물’이라는 것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지고스의 ‘도움’이나 ‘가이드’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물론 트리토나(전열함) 같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규격 외의 선물이 있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경향이 강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선물과 약간 결이 다른 이 선물도 필요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이런 선물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휴우···.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법을 알려줘야 하나? 아니, 애초에 이걸 어디서 구했다고 하지? 케일린? 제먼 씨? 씨알도 안 먹히겠지. 일단 돌격대만, 아니지, 네이선과 행크에게만? 그건 너무 적은 것 같고···.”
선물까지 받은 상쾌한 아침인데도 내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