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52화 (353/420)

< <352화> 시작되는 균열 >

델라 항구에는 이미 우리가 정박할 부두가 준비되어 있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두 개의 부두.

항해 일정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 틀리는 일은 예사이니 며칠 전부터 두 개 부두를 비워놨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작이 지시를 내린 것인지 항구관리관이 독단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 되면 찔리는 것이 있는 티벡 선단 사람들은 가시방석이 따로 없을 것이다.

델라 항구처럼 붐비는 교역항에서 두 개 부두를 비워 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항구관리관이 직접 부두까지 나와서 기다리는 것을 확인한 티벡 선단 선장들의 표정들이 아주 볼만했다.

물론 항구관리관은 입항 즉시 성으로 오라는 후작의 전갈을 전달하기 위해 나와 있던 것이었지만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겠나.

“다들 모인 것 같군. 항구관리관,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잘 부탁하지.”

“걱정 마십시오, 남작님.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음.”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내가 미리 준비된 마차로 향하는데 뒤쪽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제독님, 제독님!”

이제 나름 익숙한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구르듯이 뛰어오던 채피 견습 사제가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아, 채피 견습 사제님. 그렇게 뛰어다니시면 다치십니다.”

물론 치유의 기적을 사용할 수 있는 채피 견습 사제에게 넘어져서 무릎 좀 까지는 것이 무슨 대수겠냐마는, 그래도 아플 것 아냐?

콰당!

···거봐.

“하하하, 괜찮아요! 아야···.”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

사제복 해진 것 좀 봐, 지금도 무릎 쪽에 또 구멍이!

넘어지자마자 벌떡 일어서려던 채피가 잠시 무릎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더니 다시 활짝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제독님,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네? 제가 어디 가는지 아십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사제들에게 내 일정을 보고하지는 않는다.

배에 타고 있는 손님들이니 항해 일정 정도야 간단하게 말해주지만, 굳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내 일정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모르죠!”

어우, 너무 당당해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조금 불편한 자리입니다, 길도 멀구요. 그냥 여기에서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사제라면 몰라도 견습 사제면, 약속도 없이 후작가에 방문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물론 내가 후작에게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마차가 타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전 가야 해요. 네, 가는 게 맞아요.”

“네?”

“괜찮아요! 전 작아서 아무 데나 끼어 앉아도 되거든요! 마부석도 좋아요!”

그런 문제가 아닌뎁쇼.

내 부하도 아니고 견습 사제를 굳이 달고 온 것을 후작에게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

하지만 말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피 견습 사제란 말이야.

“견습 사제님, 굳이 가셔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어? 이유요? 이유··· 음··· 몰라요!”

해맑게 웃는 채피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이유를 묻는 순간에 결론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최소한 30년을 살아온 규격 외의 존재다.

그런 이가 하는 말이 쓸데없는 말일 리가 없었다.

“이쪽에 저와 함께 타시지요.”

“아앗, 역시 허락해주실 줄 알았어요! 헤헤헷! 저 이렇게 좋은 마차는 처음 타봐요!”

말을 흩날리며 마차 쪽으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문득 걱정이 들었다.

나 지금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게 이성적으로 옳은 결정이 아니잖아?

* * *

가는 길은 평온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와 아인델프, 네이선, 우르타(···얘가 왜 동행인지 알 사람은 다 알겠지) 그리고 채피 견습 사제가 탄 마차만 평온했다.

마차가 한 번씩 쉴 때마다 다른 마차에 타고 있던 티벡 선단 선장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왜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인지 알 수 있었다.

스코타 성까지 마차로 이틀거리여서 망정이지, 한 보름쯤 이동했다면 아마 스코타 성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와 네 구의 시체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어서 오십시오, 리안 스펜서 남작님.”

“음, 오랜만이군.”

그리고 집사가 나를 반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거의 절정에 이르러서, 저러다 호흡 곤란으로 죽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저쪽이 티벡 선단의 선장들이군요. 흠, 다들 안색이···.”

이제 한 명쯤 기절할 타이밍이 아닌가 싶을 때, 내 뒤에 있던 채피 견습 사제에게서 따뜻한 빛··· 도대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따뜻하고 빛나지 않는 빛?

하여간 표현할 방법도 없는 빛이 부드럽게 흘러나왔고, 선장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며 호흡이 안정되었다.

나는?

어, 뭐랄까? 상쾌해졌다고 할까?

불안하던 마음이 안정되고, 방금 샤워를 마친 것처럼 기분 좋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3초 정도 유지되던 기묘한 침묵은 경비병들의 칼 뽑는 스산한 소리와 함께 깨졌다.

스릉!

스르릉!

스릉!

“뭐, 뭐얏?!”

“물러서라!”

“무슨 짓이냐!”

“집사님 뒤로!”

완전 무장한 경비병들이 허둥지둥 칼을 뽑으며 채피를 향해 겨누었지만, 채피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어, 저요? 그냥 기도를 올린 것뿐인데···.”

내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섰던 집사가 다시 앞으로 나오며 먼저 말을 꺼냈다.

얼마나 놀랐는지 표정 관리가 기본 스킬인 집사의 표정이 보물을 본 것처럼 빛나··· 응?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아?

“설마, 이 빛, 당신은··· 신성의 증거라던···.”

“네? 저는 채피인데요?”

“아, 채피 사제님. 스코타 성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견습 사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리는 채피를 말을 가로챘다.

“크흠, 폰테 섬에 신전을 짓고 싶다는 교단의 요청이 있었네. 여기 채피 사제님은 그 대표로 파견되신 분으로, 후작 각하께 허가를 구하려고 오셨다네.”

내 말에 집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폰테 섬에 신전을 말입니까? 그런데 저분은··· 아니, 아닙니다. 후작 각하께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이리 들어오시지요.”

급한 나머지 마차에서 줄곧 생각하던 채피를 데리고 온 이유 중에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댔는데 이게 잘한 짓인가 싶다.

‘신성의 증거’라니. 대충 생각해 봐도 채피가 꽤나 유명한 모양인데, 후작과 만날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도저히 예측이 안 되는군.

일단 사람들이 없을 때 채피 견습 사제에게 꼭 필요한 주의사항이라도 알려줘야겠다.

지고스 님의 뜻을 대변하면 뭐 하나, 정신연령이 일곱 살 수준인데.

* * *

그래, 이제 포기할 때도 된 것 같다.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을지도 몰라.

이 정도면 누가 내 삶에 일부러 가시밭을 일구고 있는 것 아닐까?

도대체 왜 오늘따라 오자마자 후작을 만나게 되는 건데?

심지어 후작이 먼저 만나겠다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어차피 후작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조금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성안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집사님, 후작 각하께서 사제님과 지금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

말을 건네는 대상은 우리를 안내하던 집사였지만, 그의 말은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내가 화들짝 놀라서 뭐라고 하려는 순간 채피가 먼저 나섰다.

“네? 저는 제독님과 함께 가야 하는데요?”

집사의 무표정한 얼굴이 채피를 향했다.

“사제님, 후작 각하께서는 사제님과 만나고자 하시는 겁니다만. 남작님은 차후에 접견하실 겁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요. 전 제독님과 함께 가요.”

생각이 없는 건가, 겁이 없는 건가.

아무리 성직자들이 귀족조차 함부로 하기 어려운 대상이라지만, 상대는 무려 이 나라 권력의 최상위 티어인 후작이란 말이다.

네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후작이 상당히 싫어하지 않을까?

집사에게도 예상외의 반응이었는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두 분이 함께 가시지요.”

그렇게 내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을 내린 집사는 후작의 명령을 전달한 하인에게 말했다.

“자네는 먼저 가서 각하께 스펜서 남작님이 함께 간다고 전하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음, 자네는 말만 전하면 되네.”

이봐, 내 의견은?

내 말도 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냐?

설마 나 이렇게 가서 입구 컷 당하는 건 아니지?

나는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산만한 채피를 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앞에 집사가 있으니 슬쩍 주의사항을 말해주기도 그렇고 미치겠구만.

하긴 주의사항을 백날 이야기해 줘 봐야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야.

내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과 상관없이 후작의 집무실에 도착한 우리는 별다른 절차 없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채피 사제. 그대의 여정에 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어··· 후작 각하? 당신 이런 이미지 아니었잖아?

“안녕하세요, 후작님!”

아니야! 후작님 아니리고! 각하라는 존칭을 붙여야 해!

“그래, 내 영지에 신전을 건설하는 문제로 방문하셨다고 하셨는가?”

“네? 어, 그러니까 원래 신전은 로쉬암 사제님이 담당하시는 일인데···.”

오 씨발, 신이시여. 제발 저 어린양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허락···.

“하지만 지금은 아프시니까요! 제가 대신 할 수 있어요!”

어? 소원을 들어줬어?

나 방금 너무 급한 나머지 신성모독 비슷한 것을 한 것 같은데?

“담당이 아니다? 그렇다면 채피 사제는 도대체 왜 폰테 섬을 가려는 것인가? 그대의 담당이 아니라면 굳이 힘든 길을 갈 필요 없이 내 성에 머물며 신의 말씀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으면 하는데.”

후작의 말에 채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 그건 안 돼요. 저는 아직 견습 사제라서 가르칠 수 없거든요.”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텐데?”

“그리고 음··· 저는 여기 리안 제독님이랑 꼭 같이 가야 하거든요. 그래야 해요.”

지금까지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후작의 차가운 눈이 나를 향했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네.

더럽고 치사해서 진짜.

“맡기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하지만 원래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다 그런 법이지.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기에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다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꽤 그럴듯하게 임무를 마친 것처럼 느끼겠군.”

“······.”

애초에 무리한 요구를 한 건··· 휴, 말을 말자.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채 말싸움을 벌이기에는 후작과 나의 파워 차이가 너무 크다.

“오는데 이틀이니까, 아하? 후작님!”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던 채피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며 후작을 부르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운 미소까지 띠며 채피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채피 사제.”

“저랑 리안 제독은 빨리 가야 하거든요. 오늘 출발해야 해요.”

후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채피 사제, 그 말이 매우 무례하다는 것은 알고 있나?”

“어. 어? 무례했나요? 죄송해요.”

채피는 냉큼 고개를 숙이며 후작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후작의 화가 풀릴 리가 없지.

솔직히 이만큼 봐주는 것도 신기할 정도다.

도대체 후작이 왜 저러는 거지?

“하지만 진짜 가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밥은 다음에 와서 먹으면 안 될까요?”

···내 생각에 벨로키나 왕국의 왕자가 와도 후작 앞에서 이따위로 말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한 녀석이다.

역시 뒷배가 신이라서 무서운 게 없는 건가?

그런데 나도 뒷배가 신이잖아.

나 얼마 전에도 신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선물 받은 사람이란 말이야.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채피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후작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거야 원. 좋소, 그럼 채피 견습 사제는 폰테 섬에서 볼일이 끝나면 본인에게 시간을 줄 수 있나?”

“으음···.”

따박따박 쉽게 대답하던 채피가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 제안까지 거절하지는 않겠지.

직진밖에 모르는 저놈이라면 거절 할 것 같기도 하고···.

참다못한 후작의 표정에 금이 가려는 순간, 채피가 박수를 한 번 치더니 밝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섬에서 돌아오면 말이죠?”

“···그렇네.”

“그럼 저는 견습 사제가 아닐 테니까 괜찮아요!”

“후후, 그 말 꼭 지켜야 할 거요. 설마 신의 말씀을 대리하는 분이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지.”

“그럼요! 채피는 약속을 잘 지키는걸요.”

이봐요, 견습 사제님. 그게 그렇게 막 허락해도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방금 전에 후작이 한 말에서 대충 후작의 생각을 유추할 수 있었거든.

신의 말씀을 대리하는 자, 채피는 무려 지고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자다.

우리 같은 평민들은 몰라도 고위층들은 이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니까 채피를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 사실상 신언(神言)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채피만 억류하고 있다면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은 후작에게 아무것도 아닐 테니 후작의 말에 신의 권위까지 얹혀진다는 뜻이지.

“후후, 그런가. 알겠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후작이 내게 냉랭하게 말했다.

“스펜서 남작, 원래라면 질책을 해야 했겠지만, 다음 명령의 수행 여부를 보고 공과를 판단하겠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망할 놈이 뭐? 질책? 아무래도 슬슬 손절 각을 재야 할 것 같은데?

다른 말 없이 일단 돌아오라고 할 때부터 느낌이 영 좋지 않기는 했지만, 이놈은 나를 완전히 버리려는 것 같다.

가능하면 전 후작과의 관계처럼 좋게 좋게 이어가려고 했는데, 지금 후작은 나와 함께 갈 생각이 전혀 없다면 나라고 별수 있나.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살길을 찾아봐야지.

“채피 사제님을 무사히 폰테 섬에 모시고 갔다가 돌아오도록. 너무 늦지 않아야 할 거야. 설마 이런 쉬운 일도 못 하지는 않겠지?”

“명을 받듭니다.”

* * *

얼떨떨해 하는 아인델프와 네이선, 우르타를 재촉해 성을 나서려는데 집사가 마차 안으로 상자 하나를 넣어 주었다.

“후작 각하께서 신전 건설에 유용하라고 기부하셨습니다.”

“어? 고마워요, 아저씨!”

“후작 각하께서 주시는 겁니다.”

“네, 후작님께도 감사해요.”

발랄하게 대답하는 채피를 묘한 표정으로 보던 집사가 내게 조금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봄이 되기 전에 돌아오시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겨울이 다 끝나가는 판에 뭐?

그 정도면 폰테 섬에 입항하자마자 바로 출발해야 겨우 맞출 수 있을 거다.

“집사, 바다라는 곳이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네. 아무리 후작 각하의 명이라도···.”

“그렇다면 더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그리 전하겠습니다.”

집사는 내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마차에서 멀어졌다.

역시 후작은···.

후우, 이렇게 되면 대해전에서 세 나라가 공평하게 다 박살이 나 줘야 내가 사는 건가?

“우와, 제독님! 이거 보세요, 엄청 많아요!”

어느새 상자를 열어 본 채피가 양손에 가득 은화를 들고 활짝 웃었다.

솔직히 나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조금 상했다.

죽어라 고생한 나는 이제 내가 쌓아온 거의 모든 것을 잃게 될 판인데 뇌물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사제라니.

아, 견습 사제였지.

“마차가 움직이면 위험하니 놓고 앉으시지요. 로쉬암 사제님께 전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이건 제독님이 가지세요.”

“네?”

워낙 뜬금없는 말이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채피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제독님은 앞으로 돈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음, 물론 많이 벌겠지만. 또 많이 쓰고, 또 벌고?”

“하지만 이건 신전 건설을 위한 헌금이 아닙니까?”

보통 헌금이라고 쓰고 뇌물이라고 읽기는 하지만 말이야.

“어··· 그럼 이건 제독님이 갖고, 제독님이 신전을 짓는 분들에게 자재와 식사를 준비해주세요. 이런 걸로 신전을 지을 수는 없잖아요?”

‘이런 것으로 지으면 신전이 너무 작아...’ 이런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채피를 보며 나는 혼란에 빠졌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건가 아니면 설마 신전을 짓는 데는 돈이 필요 없는 거야?

그냥 자원봉사로 짓나?

물론 폰테 섬은 돈이 있다고 해서 멋지고 웅장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곳은 아니지만···.

모르겠다, 아무래도 돌아가서 로쉬암 사제랑 이야기를 해봐야지.

일곱 살짜리 아이의 경제관념을 가진 것 같은 채피와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지.

어느새 속도를 내기 시작한 마차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믿고 나는 채피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아! 빨리 가야 해요. 섬에 계신 분들이 제독님이 돌아오시기를 바라고 있거든요.”

물론 폰테 섬 사람들이야 내가 자재와 생필품 등을 가지고 오는 것을 기다리고야 있겠지.

현실적으로 외부와 소통하는 수단이 내 선단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후작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오늘 당장 출발해야 할 이유가 되나?

···설마, 에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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