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화> 무모한 도전 >
“남작님, 출항을 며칠 늦추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서두르시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건 거의 확실한 정보입니다.”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라고 했나?”
“네, 오늘 아침에 입항한 배들로부터 입수한 정보입니다. 교차검증이 끝나자마자 제가 직접 달려왔습죠.”
어울리지 않게 푸근한 미소를 짓는 항구관리관의 얼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전해준 이야기는 중요했다.
방금 전까지 출항 준비를 마치고 최종 점검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거지 같은···.
갑자기 오트라스를 방문한 항구관리관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델라 항구 븍서쪽 해상에 심각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심지어 진행 방향은 동쪽으로, 반나절 후면 델라 항구도 그 영향권에 들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가려는 항로와도 겹치지.
물론 폭풍의 속도와 방향을 절묘하게 피할 수 있다면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갈 수도 있지만 어떤 마친 뱃사람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폭풍이다.
해적, 암초, 와류, 무풍지대, 소문이 무성한 각종 괴물들까지, 바다라는 곳 자체가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녀석은 바로 폭풍이었다.
그러니까 항구관리관의 권고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옳았다.
한 사흘쯤 지나면 폭풍이 지나갈 거고, 그 뒤에 출항하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으리라.
지금도 출항하려던 배들이 줄줄이 출항을 연기하고 있고, 저쪽 부두에서는 나가던 배가 다시 돌아오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혀 모르던 사실은 아니다.
아침에 식료품 구매를 마친 게론드가 찜찜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해 줬기 때문이었다.
가격을 올리기는커녕 약간 저렴하게 대량으로 식료품을 내놓길래 무슨 일인지 알아봤더니 오늘 출항을 취소한 배가 몇 척 있다고 했었다.
아마 근처에서 폭풍이라도 부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마음이 너무 급했나.’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항구관리관에게 비센트 금화 한 개를 튕겨주었다.
“소식 고맙네. 약소하지만 좋은 술이나 한 병 마시게.”
“어이쿠,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남작님.”
말로는 겸양을 떨면서 재빨리 금화를 낚아채서 갈무리하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일부러 와 줬는데 발품 값은 줘야지.”
“하하하,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출항 신청은 취소해 드릴까요? 굳이 따로 사람을 보내실 필요 없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기름칠을 한 덕인지 꽤나 친절을 베푸는 항구관리관이었지만 자꾸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니, 일단 나도 간부들과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으니 자네는 그만 돌아가 보게. 출항을 취소하게 되면 내가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그러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항구관리관이 떠난 뒤, 나는 선원을 시켜 채피를 불렀다.
회의고 나발이고 일단 이 사태를 만든 이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잠시 후, 로쉬암 사제가 채피를 데리고 선장실로 들어왔다
“제독, 채피를 부르셨다구요?”
“아, 로쉬암 사제님도 오셨습니까?”
“혹시 제가 있으면 안 되는 자리입니까?”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채피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로쉬암 사제인 만큼 굳이 숨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미 채피가 다 이야기했을지도 모르고.
“아닙니다, 어차피 알게 되실 일인데요. 그보다 채피 견습 사제님. 혹시 빨리 가야 한다는 그 말, 지금도 유효합니까?”
“유효? 어, 유효가 뭐죠? 그런데 지금 출발할 것 아닌가요? 아까 선원님들이 출발할 거라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던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채피에게 로쉬암 사제가 작은 목소리로 부연 설명을 했다.
“아직도 빨리 가야 하냐고 물어보시는 거다. 어떤 것 같으냐?”
“어, 음, 빨리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직 늦지는 않은 것 같아요.”
별다른 고민 없이 순순히 말을 하는 채피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 근처에 폭풍이 부는 모양입니다. 지금 출항하면 높은 확률로 폭풍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빨리 가야 하는 겁니까? 이틀이나 사흘 정도 후에는 안 될까요?”
“우우왓, 폭풍! 그거 엄청 위험한 거죠?!”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만 하는 채피.
위험하다고 말은 하지만 호기심으로 채피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도 배 위에서 폭풍을 맞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 겪기 전에는 모르는데, 채피라면 더하겠지.
어쩌면 내심 ‘아주 멋진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위험 정도가 아닙니다. 아무리 큰 배라도 폭풍 앞에서는 무사 귀환을 장담하지 못하죠. 그러니 가능하면 이틀, 아니, 한 사흘쯤 후에 출발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반나절 거리라고 했으니 오차까지 넉넉하게 잡으면 내일 새벽쯤에 폭풍의 영향권 안에 들 테고, 하루나 이틀 정도 지속될 테니 사흘째에 출항하는 것이 정석이긴 했다.
물론 태풍이 빨리 지나가면 이틀째에 출항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으음, 글쎄요. 만약 제가 그 멋진 성에서 빨리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음? 뭐, 사제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한 이틀이나 사흘쯤 더 머물렀··· 아?!”
핵심을 찌르는 채피의 말에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만약 채피가 후작을 만난 자리에서 빨리 서두르자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스코타 성에서 이틀이나 사흘쯤 머물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폭풍이 지나간 후에 델라 항구에 돌아왔겠지.
물론 조금 더 머물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때라도 채피가 빨리 가자고 했다면 바로 출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면 굳이 스코타 성에서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두 분은 제가 별도로 말을 전하기 전에는 선실에서 절대 나오지 마십시오. 폭풍은 두 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제독님. 채피 녀석은 제가 잘 챙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축복하신 제독이니 고작 폭풍에 굴하게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로쉬암 사제님. 제가 지금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미친 짓을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이야.
* * *
다른 함선장들도 귀가 없는 것은 아닌지라 내가 출항 준비를 강행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오트라스 호로 모여들었다.
“제독,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제가 보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만.”
“아무리 급하더라도 고작 사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제독, 제 생각도 두 사람과 같습니다. 이번 결정은 너무 무모한 것 같군요.”
아인델프, 발드는 물론 베기어 함장까지 반대를 하니 진짜 내가 미친 짓을 하는구나 싶었다.
“후우, 나라고 이러고 싶겠어? 하지만 채피 견습 사제의 말이야. 다들 대충 눈치는 채고 있잖아? 그가 하는 말은 허투루 들을 수 없어.”
“하필이면···.”
“으음···.”
내 말에 모두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직접 겪지는 않았어도 일반적이지 않은 채피의 외모와 정신연령, 그리고 예언에 가까운(제먼 씨의 일이라던가) 말들 정도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신에 민감한 뱃사람들이다 보니 그 말의 무게감이 다르겠지.
이성과 감성의 충돌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렇듯 감성의 승리로 끝났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나가기로 마음먹었다면 한순간이라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좋겠지요.”
“빨리 일어들 납시다.”
나는 분분히 일어서는 함선장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예정과 다른 침로를 선택할 수도 있으니까 선행 선박의 신호 잘 받도록 하고, 후미에 서는 피오렐은 후방 경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
말을 끝내고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발드 선장을 불러세웠다.
“발드 선장, 이번 항해에서만 슬레어 항해사를 빌렸으면 하는데.”
“슬레어 이등항해사 말입니까? 그건 어렵지는 않지만 무슨 일로··· 아.”
“응, 아무래도 폰테 섬에 대해서는 슬레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대신 이번 항해는 크리스티앙이 리버티에 타는 것으로 하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발드 선장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해사 한 명만 데리고 항해를 했었고, 리버티 자체가 손이 그렇게 많이 가는 배가 아니라서 굳이 크리스티앙을 파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인력이 여유가 있는데 굳이 일을 힘들게 할 필요는 없잖아?
“크리스티앙은 내가 불러서 보내줄게. 빨리 움직이자고.”
* * *
상황이 급하다고, 마음이 불안하다고 괜히 초조해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인간의 체력과 정신력은 한계가 분명히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쉬고 싶다고 또 마음대로 쉴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겠지.
삐거덕거리며 흔들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코트를 여미며 밖으로 나왔다.
흔들리는 정도로 봐서는 파고가 2~3미터 정도로 꽤 높은 것 같다.
옷 사이를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을 떨며 선교에 오르자 일등항해사 탈리스가 당황하며 다가왔다.
“앗, 제독?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잠이 안 와서. 상황은 좀 어때?”
“선미에서 보면 서쪽 30~40km 정도 거리에 먹구름이 관측됩니다. 바람은 조금 센 편이고 파고도 2.5m 정도로 꽤 높습니다. 계속 높아지는 중입니다.”
예상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나를 원망하는 선원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선원들 분위기는 어때?”
“갑판장과 포술장이 잘 다독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분들 덕에 의외로 나쁘지는 않습니다.”
탈리스가 살짝 물러서며 갑판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현측에 고개를 내밀고 구토를 하고 있었다.
위험하게 저게 무슨 짓··· 아, 뒤에서 누군가 목덜미와 허리춤을 잡아주고는 있었다.
체격을 보아하니 뒤에서 잡고 있는 사람은 네이선 같은데, 토하는 놈은 누구야?
“설마 채피 견습 사제?”
내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묻자 탈리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선원들에게 축복을 내린다고 뛰어다니다가 아까부터 저렇게···.”
아니 저 녀석은 사제복은 어디다 팔아치우고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거야?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탈리스가 재빨리 말했다.
“처음 토할 때 사제복이 더러워져서 선원들에게 옷을 빌린 모양입니다.”
“사제복이 그거 한 벌 뿐이래?”
“그건 아닌데 남은 깨끗한 사제복이 한 벌밖에 없다며 지금 입으면 안 된다고 해서 말입니다···.”
지금 옷을 입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거야?
도대체 그런 사소한 일은 왜 예언이 가능한 건데?
그리고 분명히 내가 로쉬암 사제에게 나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지 않았나?
아무리 네이선이 잡아주고 있다지만 지금 저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데.
“잠깐만, 내가 분명히 사제들에게 선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저도 들어가시라고 몇 번이나 권했습니다만 막무가내라, 일단은 갑판장을 붙여두었습니다.”
“이봐, 일등항해사. 아무리 그래도 자네까지 그러면 어떡하나? 사제들과 제먼 씨 일행은 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야.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 가벼운 질책에 탈리스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축복을 받은 선원들이 눈에 띄게 안정이 되어서 그만, 지금 당장 들어가게 하겠습니다!”
나는 급히 선교를 내려가려는 탈리스를 붙잡았다.
“이제 와서 뭘 그래. 앞으로 좀 조심해달라는 거지. 만약 채피 견습 사제가 바다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랬어? 그래도 갑판장을 붙인 건 잘했네. 갑판장이라면 뭐.”
그래, 네이선이라면 어떻게든 채피를 보호할 수 있을 거다.
채피가 바다에 빠지면 자기가 뛰어들어서라도 어떻게든 구하지 않을까?
그렇게까지 하라고 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리고 저렇게 심하게 멀미를 할 때 선실에 집어 넣어봐야 나아지지도 않는다.
나도 겪어봐서 잘 알아.
“우에에엑! 왜, 왜애애! 우어억! 멀미에는, 우에엑! 치유의 빛이, 우에에엑!”
토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는 채피의 원망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애써 그 내용을 무시하며 탈리스에게 물었다.
“황천 대비는 끝났지?”
“네, 이미 갑판장이 확인까지 마쳤답니다.”
“제발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열을 2열로 바꾸고 거리를 좀 띄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흠?”
탈리스의 조심스러운 제안을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처럼 일렬종대를 유지하면 선두와 후미의 거리가 꽤 벌어질 수밖에 없고, 기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충돌을 대비해 평소보다 선박 간 거리를 벌리는 것이 정석이니까.
역시 탐험선을 10년 이상 탄 친구라 위기 대처 능력은 발군인 것 같다.
아직도 나를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이 흠이지만 말이야.
“그래, 좋은 생각 같네. 그리고 일등항해사도 가능하면 교대하고 좀 쉬어 둬. 진짜 상황이 벌어지면 자네와 내가 배를 책임져야 하잖나.”
“네, 제독.”
* * *
피가 마를 것 같은 이틀이 흘렀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큰 피해 없이 폭풍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를 잡아먹을 정도로 가까워졌던 폭풍우는 천천히 방향을 남쪽으로 틀었고, 끝내 남쪽 해상에서 점점 멀어지다가 사라졌다.
과도한 긴장과 몇 방울 들이친 비로 인해 감기와 몸살에 걸린 환자가 몇 명 생기기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폭풍을 회피한 것이니 자축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에엣취!”
“크흠, 괜찮으십니까, 채피 견습 사제님.”
“네, 네. 괜찮ㅇ··· 에, 에, 엣취! 괜찮아요, 제독님!”
문제라면 그 감기 환자 중에 이 녀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정도이려나.
말간 콧물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꼴을 보면 절대 괜찮지 않았지만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진짜 질병에는 치유가 통하지 않는지 의무실에 사제가 입원하는 꼴을 보게 되는구나.
지난 이틀 동안 멀미를 하면서도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녔으니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하긴 하지.
심지어 선원들도 잘 맞지 않은 비까지 쫄딱 다 맞았으니 원.
“그래도, 에엣취!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엣취! 다행이에요!”
코가 새빨갛게 부어서도 활짝 웃는 채피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순수한 선의.
그 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아닐까.
그래서 도저히 우리와 같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나이를 먹지 않는 인간이라,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시간이라는 순리를 빗겨나간 이 사람의 삶은 도대체 누가 책임지지?
* * *
여유를 되찾은 나는 슬레어 항해사를 호출했다.
이쯤 되면 폰테 섬에 대한 공격은 기정사실로 가정하고 움직여야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가능하면 많은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제독, 말씀하신 지도입니다.”
“응, 고생했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음, 잠깐 보자고.”
나는 슬레어가 가지고 온 폰테 섬 인근 탐사 지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상식적으로 공격을 위한 함대를 무턱대고 보내지는 않을 거야.”
“아마 그렇겠지요.”
전투를 위한 함대에는 많은 화물이 필요하다.
병력과 무기는 물론이고, 그 전투가 점령전이라면 점령을 위한 수많은 군수물자들까지 필요하다.
그러니 그런 무지막지한 화물을 싣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섬을 찾아 떠돌 수는 없는 노릇.
“분명히 탐사선이 폰테 섬의 위치를 특정한 후에 움직이겠지.”
“네, 채피 견습 사제의 경고가 사실이라면 이미 폰테 섬의 좌표를 일레드 왕국에서 알고 있다고 보셔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향할 곳은···.”
내 말에 슬레어가 조심스럽게 한 점을 짚었다.
“제가 만약 탐사선의 선장이라면 최소한 섬 남쪽 정도는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항구가 보였을 것이고, 공격을 한다면 당연히 항구 방향이겠지요.”
“그래, 어차피 섬의 다른 곳은 점령해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폰테 섬의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페리아 족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지금 대외적으로 폰테 섬은 거의 무인도에 가깝다.
내가 데리고 간 인원이라고 해봐야 100명이 채 안 되니, 우리가 ‘항구’라고 부른 간단한 접안 시설이 구축된 마을을 제외하면 공지(空地, 비어있는 땅)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폰테 섬을 ‘점령’하려면 무조건 항구와 마을을 공략해야만 했다.
“제대로 된 방어시설도 없으니 굳이 다른 방법을 취할 필요도 없겠지요.”
물론 섬에 남겨둔 바우어 항해사가 콘베르테를 타고 가끔 연안 순시 정도야 하겠지만, 무장은커녕 탑승 인원이 30명도 채 안 되어 겨우 항해만 가능한 콘베르테가 위협적으로 느껴질 리가 없었다.
“해안포대 건설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모르겠군.”
콘베르테의 무장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대포를 떼서 해안포대로 만들기로 했거든.
애초에 적이 쳐들어온다면 콘베르테 혼자서 막을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안정적인 육상에 포대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폰테 섬의 인력으로는 포대를 운용할 능력이 없겠지만, 우리가 도착하면 그럭저럭 포대를 운용할 인원 정도는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아니다, 시간이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옳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았다면 채피가 굳이 무리하게 서두르자고 했을 리가 없잖아.
일단 섬의 방어시설 증축은 포기하고 최대한 지형과 적들의 방심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자.
“여기, 이 뒤에 트리토나를 숨길 수 있을까?”
“트리토나 함 말입니까?”
“응, 솔직히 지금 우리 선단의 무장은 오트라스를 제외하고 좀 부실하잖아. 트리토나를 써야 해.”
“굳이 그 정도까지 필요할까요? 트리토나가 알려지면 제독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슬레어의 우려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응, 트리토나는 최대한 숨기는 게 좋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시죠. 정 안되면 그때 트리토나를 생각하셔도 되잖아요?”
“이봐, 슬레어.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이번에 오는 놈들을 물리치면? 그다음에는?”
“네?”
어리둥절해하는 슬레어에게 나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다시 설명해 주었다.
“폰테 섬의 입지 자체가 그래. 일레드 왕국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지. 그러니 우리가 일레드 왕국에 망명하지 않는 이상 일레드 왕국은 시도 때도 없이 폰테 섬을 노릴 거야. 이번 녀석들을 퇴치하면 우리의 전력을 더 완벽하게 분석해서 더 강력한 함대를 보내겠지.”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제독이라도 나라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어요.”
“우리의 전력을 분석할 수 없게 만들어야지.”
“그게 무슨?”
“이번에 오는 놈들,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다행히 폰테 섬 근처에는 헤엄치거나 쪽배로 탈출할 수 있는 육지가 없어. 그러니 선박만 다 잡을 수 있다면 섬의 소식은 외부에 전해지지 않아.”
“하지만 적은 최소한 일곱 척이나 되는 함대라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최대한 전력을 동원하더라도 고작 여섯 척인데요?”
심지어 그중에 리버티와 콘베르테는 전투에 부적합한 상태지.
그리고 여섯 척을 모두 움직일 정도로 인원이 많지도 않고.
“그래서 계획을 잘 짜야 해. 불행 중 다행이라면 놈들은 폰테 섬이 저항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그들의 방심을 이용하면 단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어.”
“그,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서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