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응, 흙수저 출신이야. >
“으음,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차를 마시게 될 줄은 몰랐소.”
초로의 남자가 초췌한 얼굴로 차향을 음미했다.
그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궁벽한 곳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뜻이거나, 가벼운 점령전이 될 줄 알았던 전투에서 분함대가 전멸, 자신은 포로가 되어 나에게 차를 대접받을 줄은 몰랐다는 뜻이거나.
어느 쪽이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벨로프 오르틴, 일레드 왕국 해군 대령, 폰테 섬 공략을 위한 임시 분함대의 부사령관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아 포로로 잡힌 함장 네 명 중에 최고 선임자이기도 했고.
그가 지금 나와 독대하고 있는 이유였다.
“어제 사로잡힌 사람은 총 244명이오. 혹시 몰라 수색작업을 하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더 늘어나기는 어렵겠지.”
현재 기온은 대낮에도 영상과 영하를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춥다.
이런 상황에서 바다에 빠진 채로 하룻밤이 지나도록 생존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다.
내 말에 그의 안색이 한층 더 나빠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 벨로키나 왕국은 귀국과 전쟁 중이지. 그리고 그대가 본국의 적법한 영토를 공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 그대들은 포로로 취급될 것이고, 향후 본국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이 섬에 억류될 것이오.”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포로의 처우에 대한 인도적인 국제 협약 같은 것도 없는 세상이다.
포로가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생사여탈권을 상대에게 맡긴다는 뜻이니, 부하를 아끼지 않는 지휘관이라도 안색이 변할 만하다.
남의 목숨은 귀하지 않아도 자기 목숨은 귀할 테니까.
“이, 이 많은 인원을 굶겨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아, 그쪽이었어?
하긴 개발된 곳이라고는 손바닥만 한 면적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니 식량이 부족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물론 식량도 아깝고 관리하기 귀찮으니 다 죽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아직 내가 그 정도로 인성을 잃은 것은 아니라서 말이야.
게다가 이들은 전에 포로로 잡아서 과중한 노역형을 시키다가 죽게 만든 해적 놈들과 달리 군인들이다.
군인이라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돈을 벌자고 멀쩡한 사람 잡아 죽이는 해적은 아니라서 막 죽이기는 좀 그렇다.
“섬의 비축분도 여유가 있는 편이고, 우리가 가지고 온 것도 있고, 그대들에게 얻은 전리품도 상당하니 굶겨 죽이지는 않을 거요. 다만 밥값으로 우리가 시키는 일 정도는 해야겠지.”
“그 말은 우리를 노예로 부리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
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서 괜히 가슴 한구석이 찔리네.
하지만 고작 중세 수준의 문명임에도 ‘공식적’으로는 노예가 없는 세상에서 그 말에 긍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방법도 있지.”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내가 입을 열자, 그의 표정에 한 가닥 실낱같은 기대가 어렸다.
이미 죽이지 않겠다고 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포로들에게 밥을 주는 것도 애매한 일이니 어떤 식으로든 석방이 되리라고 여기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어지는 내 말의 기본적인 내용은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하루를 드리지. 부상자건 아니건 밥값을 못 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 바로 석방하겠소. 단, 무기도 식량도 내어주지 않을 거요. 이 정도 처우는 이해하리라고 믿소.”
“무, 물론이오!”
조건 없이 그냥 석방하겠다니 그가 깜짝 놀라며 급히 대답했다.
그런데 다른 세상에 그런 말이 있거든.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참고로 이 섬은 총독인 나의 권한으로 내가 허락한 사람과 섬의 거주민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고 있소. 그러니 석방된 이들은 내일 당장 이 섬을 떠나야 할거요. 내일 이 섬에서 발각된 자들은 무단침입자로 간주하고 발견 즉시 사살하거나 사형에 처할 생각이오.”
“아니, 석방을 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본국에 데려다줘야지, 그게 무슨···?!”
배신감과 분노에 얼굴이 붉어진 벨로프 함장을 보며 나는 천천히 몸을 의자에 기댔다.
하지만 말이야, 내 땅에 쳐들어와서 내 사람을 죽인 놈들을 뭐가 예쁘다고 곱게 배에 태워서 집까지 보내줘야 하는 거지?
가장 가까운 다른 지역이 일레드 왕국이기는 한데, 빠른 배로도 열흘이 넘게 걸리는 외진 곳이 폰테 섬이다.
만약 내가 배를 내어주더라도 식량도 없이 그 거리를 항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최소한! 이 섬을 떠날 수 있는 배와 물자 정도는 주셔야 하는 것 아니오, 남작!”
그러니까 그걸 내가 왜 해줘야 하냐고.
전투에서 패한 주제에 뭘 바란 거야?
게다가 너희들 중에 한 놈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가 감수한 희생이 얼마나 큰 줄 알아?
흥분을 참지 못한 벨로프 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부질없는 반항일 뿐이다.
“어째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포한 선박들은 전리품이니 정당하게 내 소유요. 그리고 총독으로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추방하는 것도 적법한 내 권한이지. 내 섬을 침략한 그대들이 뭐가 예쁘다고 배와 물자를 내어주겠소? 어차피 그렇게 돌아가면 다음 침략의 선봉이 될 것이 뻔한데 말이야.”
차가운 내 말을 듣고도 한참을 씩씩거리던 벨로프 함장은 이미 자신은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포기하면 편하다니까?
“그럼 언제까지 우리를 억류할 생각이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호오, 대령 계급장은 딱지치기로 딴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비록 구형이라지만 2급 전투함의 함장을 맡은 대령쯤 되면 전체적인 전황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대해전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고, 승패에 관계없이 대해전이 끝나면 적당히 전쟁이 끝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겠지.
“뭐, 전쟁이 끝나고 국왕 폐하께서 모든 전쟁 포로를 석방하라고 명을 내리신다면 당연히 명을 따를 것이오. 그런데 흠, 글쎄··· 그대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누가 알지 모르겠군. 그대들을 석방하려면 최소한 귀국에서 포로를 데려갈 배가 이 섬에 와야 하지 않겠소?”
내 말에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제야 내 의도를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신분은 포로이고, 대우는 노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인간적인 대접은 해줄 거고 상황을 봐서··· 아니, 이건 조금 더 생각해보자.
내 축객령에 영혼까지 탈탈 털린 표정으로 힘없이 일어서던 벨로프 함장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혹시 사령관을 죽게 한 그 폭약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소? 보아하니 은행, 아니, 이제 마법사 길드라지? 안정적인 마력 포탄의 이야기도 그렇고,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굳이 확인시켜드릴 의무는 없을 것 같은데. 그대도 짐작하다시피 군 기밀이라.”
“···당했군. 함정이었나.”
벨로프 함장이 문을 열고 나가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함정이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는 더 좋고.
* * *
복구 작업에서 내가 직접 나무나 돌을 나르고 땅을 파지는 않았지만 바쁘기는 내가 제일 바쁜 것 같다.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아직 왕녀님과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단 말이다!
내가 응? 무슨 사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래도 내가 총독이고 왕녀님이 총독 대리니까 최소한 보고를 위한 시간 정도는 가질 수도 있잖아?!
“제독?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엘리엇이 설명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역시 똑똑한 놈들은 피곤해.
나는 무식하고 힘만 센 네이선이나 착하고 멍청한 우르타가 더 편하다고.
“아니, 조금 피곤해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거의 끝났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설명드리겠습니다.”
나는 애써 집중해서 엘리엇이 설명하는 항구 건설 계획을 확인했다.
전략, 전술적 식견이 있어서 그런가, 그가 구상한 항구는 굉장히 좋아 보였다.
만 근처에 산재한 몇 개의 바위섬과 작은 무인도(수원이 없어서 자체 거주가 안되는 곳이다)를 이용한 그물망 같은 해안포, 만 근처의 언덕에 위장된 관측소와 포대, 심지어 평소에는 부표로 막아놓는 항해가 불가능한 함정구역까지.
거기에 규격 외의 트리토나까지 적당한 위치에 배치하면 이건 나보고 뚫으라고 해도 못 뚫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으음, 다 좋아, 좋은데.”
“네, 문제가 있지요.”
다행히 엘리엇도 그 문제에 대해서 아는 것 같았지만 나는 확인차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돈은 뭐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인력은 포로들 쓰면 되니까 그럭저럭 해결했고. 그런데 이거 대충 잡아도 건설 시간이···.”
중장비도 없는 세상, 모든 공사는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엘리엇의 계획대로 하려면 포로에 선원들까지 다 동원한다고 해도 1, 2년에 끝낼 수 있는 공사가 아니었다.
선원들은 계속 여기에 묶어둘 수 없으니 기간이 더 길어지면 길어졌지, 짧아지지는 않을 거다.
“그래서 여기, 그리고 여기를 먼저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트리토나를 이쪽에 배치하고, 여기에 포격이 가능한 배를···.”
“으응, 그건 그나마 낫긴 하네.”
그래도 대충 3개월은 잡아야 할 양이다.
그리고 당장 정보 유출을 막아서 재침공을 연기시켜 놓았다고 하지만, 그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게다가···.
“그런데 이 정도면 작정하고 들어오는 놈들을 상대로 좀 부족할 텐데.”
내 지적에 엘리엇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 것 같았다.
워낙 표정 변화를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 애매하긴 하지만.
“제 예상으로 이번과 비슷한 전력이면 낙승, 열 척 정도라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고, 열다섯 척까지는 어떻게든 격퇴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건 자네가 이번 전투를 해군의 평균 전력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고.
일레드 왕국 해군은 고작 이런 허접한 집단이 아니다.
나포한 함선들만 봐도 그렇다.
전부 상선과의 경계가 모호한 구형 군함이다.
제대로 된 군함이라기보다 반쪽짜리이다 보니 대해전에서 빼고 이곳으로 파견한 것이겠지.
그 정도로 일레드 왕국은 폰테 섬을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얕보여도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이번 전투의 주역··· 은 사실 다이너마이트지, 암, 이건 부정할 수 없군.
하지만 주연은 아니더라도 가장 비중 있는 조연 정도 역할은 충분히 한 트리토나는 이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초월적인 녀석이다.
그만큼 기존의 선박들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개사기 스펙을 자랑하지만, 그래도 결국 목조 범선이라는 한계는 있었다.
불에 타지 않는 것도 아니고, 돛 없으면 항해 못 하고, 포탄에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트리토나의 존재를 안다는 가정하에 일레드 왕국이 마음먹고 여기를 쓸어버리겠다면, 그들이 자랑하는 엘베도라급 전투함을 포함시켜서 주력 함선으로 한 10척만 파견해도 된다.
아무리 트리토나라도 엘베도라급 전투함에 2급 전투함 세 척만 붙어도 혼자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지적한다고 더 좋은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괜히 상대방 기분만 나쁠 짓을 뭐 하려 하겠어.
“하지만 지금 당장을 생각하면 완벽한 해결 방법은 아니지요. 그리고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아마 제독도 알고 계실 겁니다. 왜 그 방법을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으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갑자기? 무슨 방법?
날 너무 높게 평가하는 거 아냐?
“글쎄,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
내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평이하게 대꾸하자, 엘리엇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독께서는 벨로키나 왕국의 남작이시고 이 섬의 총독이십니다. 지리적 특성상 왕국에서도 꽤나 중요한 위치이니 해군의 파견을 요청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군사적 요충지이니 연안경비대 수준이 아니라 분함대 정도는 파견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야기였어?
그건 내가 지금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 말이지.
“흠, 이야기가 좀 길어지겠는데. 자네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세간에 도는 소문과 대장에게 몇 마디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흠, 그렇다면 내가 원래 선원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고향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친, 젊다 못해 어린 애새끼였지.”
엘리엇의 작은 눈이 살짝 커졌다.
아마 몰랐던 모양이다.
“어, 그건 몰랐습니다. 선원 출신이라는 소문 정도는 들었는데 제독의 나이와 이룬 성과만 보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었으니까요. 최소한 부모님께 받은 재산이 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재산은 개뿔, 진짜 바닥 중의 바닥, 같은 흙수저 물고 태어난 놈들도 학을 뗄 정도로 밑바닥 삶을 살았었는데.
10로스짜리 최하급 빵 한 조각, 그것도 곰팡이가 생겨서 버릴 판인 그 빵을 차지하기 위해 코피가 터지도록 싸워봤어?
그런 빵을 본 적도 없으면 말도 마라, 진짜.
그리고 그런 빵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죽은··· 후, 그만하자.
갑자기 떠오른 어린 시절의 거지 같은 기억을 털어낸 나는 후작과 나, 그리고 폰테 섬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윽고 내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엘리엇이 자신이 설명하던 계획서를 보며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짚어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소리가 작고 빠른데다가 단어 단위로 끊어서 말하니까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를 거의 10여 분, 드디어 엘리엇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후작을 제가 본 적이 없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데, 제독이 생각하기에 후작과의 관계 개선은 어렵습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음. 운이 없다면 다음에 델라 항구에 들르면 총독 해임 통보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최악이군요.”
“아니, 최악은 그게 아니야. 후작이 이미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통보하기 위해 해군이 이미 움직이고 있다면 그게 최악이지.”
“······.”
아니, 그렇게 심각한 반응을 보이지 말라고!
어디까지나 상황이 최악일 때의 이야기라니까?!
벨로키나 왕국 해군은 일레드 왕국 해군과는 다르다.
명목상 폰테 섬의 주인은 벨로키나 국왕이고, 지배권을 하사받은 자는 후작이며, 나는 후작에게 관리를 위임받았을 뿐이다.
벨로키나 왕국 해군을 공격하기는커녕 그들의 진입과 점거를 막을 명분조차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그들의 행사를 막거나 거절하면 반란군, 반역자가 되겠지.
“그렇다면 이 계획들, 의미 없지 않겠습니까? 먼저 이 섬을 제독의 적법한 영지로 만드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만.”
“내가 원하는 것도 그거야. 혹시 좋은 생각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엘리엇도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후작의 지배권을 배제하려면 이 섬을 제독의 적법한 영지, 그것도 옛날 연합왕국이 난무하던 시절에나 있던 강력한 자치권을 가진 영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왕실과 직접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엘리엇이 말끝을 흐렸다.
나도 딱히 기대를 하고 엘리엇에게 물은 것은 아니라서 일부러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너무 심각할 필요는 없어. 후작은 이 섬보다는 전후 처리에 더 관심이 많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조금 천천히 생각해봐도 충분해. 일단은 이대로 진행하자고.”
“후우,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어.”
어쩐지 조금 뻘쭘한 기분이 들어 엘리엇을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약간 당황한 표정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 아가씨?”
“아, 그, 그게, 총독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니까 지금 막 도착을···.”
“그러십니까? 그럼 들어오시죠. 조심히 가게, 엘리엇.”
나와 왕녀님의 얼굴은 한 번씩 보더니 각자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마친 엘리엇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 아니야! 우리가 이 방에서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하지만 어쩐지 호흡이 약간 거칠어진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니라 왕녀님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