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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62화 (363/420)

< <362화> 구멍 난 바가지가 어디선들···. >

날씨가 이제 좀 풀리는 걸 보니 곧 봄이라는 것이 실감이 된다.

여기보다 남쪽인 대륙 쪽은 훨씬 더 따뜻하겠지.

시간이 흐른 만큼 섬의 재개발(?)도 제법 틀이 잡혔다.

포로 중에 사고나 질병으로 죽은 이가 몇 명 나왔지만, 그 정도야 뭐, 이 세상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부상자나 감염자를 바로 죽이지 않고 일단 치료하려고 하는 내 태도에 감동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나는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은행 건물을 향했다.

외관은 그럭저럭 형태를 갖추었지만, 내부는 지금 한참 공사 중이다.

제먼 씨를 비롯한 마법사 길드 인원들이 은행 시스템을 구축 중인데, 이게 기밀에 속하다 보니 세 사람의 힘으로만 일을 진행해서 진척이 상당히 느렸다.

그렇게 길을 걷고 있는데 모퉁이 너머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이 목소리는 애꾸 레건 같은데?

“이 새끼들아, 내가 벌써 몇 번을 말했는데!”

“아, 거 적당히 합시다. 노예 놈들 관리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 뭐.”

“맞소, 이건 대장이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 거요. 혹시 이놈이랑 친했소?”

“클클클, 여자는 안되니까 남자라도 끼고 사시려고?”

“으헤헤헤헤, 그거 말이 되네! 그런데 나는 싫소, 나한테 엉기지 마쇼.”

“뭐? 너희는 지금 웃음이 나와? 이게 웃을 일이냐고?!”

애꾸 외에 세 놈, 대충 들어보니 내가 우려하면서도 기다렸던··· 그런 상황인 것 같은데?

나는 무장을 점검했다.

사실 점검하고 말 것도 없었다.

위협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내 구역’에서 굳이 무장까지 하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늘 지니고 다니던 단검 정도는 허리춤에 걸려있었다.

쯧, 행크라도 데리고 왔어야 하나?

하지만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는 은행 건물에 가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다 끌고 가는 것도 웃기잖아.

“무슨 일이야?”

그렇다고 현행범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일부러 기척을 내며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헛, 제, 제독!”

“어? 남작 나으리?”

“고용주님 아니십니까! 어디 가시는 길이길래 혼자 돌아다니십니까?”

“흠···.”

나와 정면으로 마주친 레건의 눈이 두 배쯤 커지며(그래도 작다) 놀라고, 나를 등지고 있던 세 놈이 나를 돌아보며 껄렁껄렁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작은 신음성과 함께 내 눈치를 살피는 가장 오른쪽 놈을 조용히 경계하며 위치를 잡았다.

오른쪽 놈과 거리는 두 발 반, 가장 왼쪽 놈은 내가 손만 뻗으면 바로 목을 딸 수 있는 거리다.

레건까지 놈들과 합세해서 달려들지 않는 이상 쉽게 당하지 않을 자리를 잡고 나서야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복장을 보니 예상대로 포로였다.

날이 아무리 풀렸다고 해도 바닥은 여전히 차가운데 저렇게 미동도 없다는 것은 이미 기절했거나 죽었다는 말이겠지.

피범벅은 아니지만 반쯤 드러난 얼굴에 멍과 핏자국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말이야. 레건 대장?”

“네? 네, 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어, 그게.”

내 시선을 따라 쓰러진 남자를 본 레건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포로 중에 아픈 사람이 있는데 이 멍청한 놈들이 꾀병이라고 우기길래 질책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독께서 포로들에게 관대하다는 것을 눈치챈 놈들이 꾀병을 부리는 경우가 꽤 되기도 하고···.”

레건의 말은 반쯤 사실이었다.

포로들이 잔머리를 굴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부상자에 대한 처우였다.

일단 전투를 겪었으니 포로로 잡힌 자 중의 절반이 크고 작은 부상을 가지고 있었고, 개중 노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이들은 닥터가 며칠 밤을 새워가며 치료를 해 주었다.

치료가 끝난 이들은 별다른 조건 없이 회복이 될 때까지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이후로도 공사를 하다 보니 크고 작은 부상자가 나왔는데, 그들에게도 같은 처우를 해 주다 보니 꾀병 환자가 상당히 나오는 것이다.

물론 꾀병은 닥터 선에서 죄다 걸러졌고, 걸린 놈들은 더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워낙 멍청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 아니겠나.

“레건 대장, 이런 식이면 굉장히 곤란한데. 나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부리지 않아.”

뻔한 거짓말이 애처로웠지만 이미 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기호지세였다.

지금 상황에서 유야무야 넘어갔다가는 다음에는 더 큰 사건으로 돌아오겠지.

“하하, 제독, 제가 다음에 따로 말씀을···.”

“아, 거, 뭘 그렇게 빌빌대슈?”

어떻게든 상황을 유예시키기 위해 억지웃음을 짓던 레건의 노력은 가운데 서 있던 덩치 큰 용병 놈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무슨 말을 지껄이나 싶어서 내가 놈에게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는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거 고용주께서는 그냥 가던 길 가시면 되는 것 아니겠수? 이 노예 놈, 아니, 포로 놈들은 아무도 사고 치지 못하도록 우리가 잘 관리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지금처럼 아주 잘. 예? 그러라고 우리에게 포로 관리를 맡긴 거잖소?”

“포로를 관리하라고 했지,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아아! 거 말을 심하게 하시네! 죽이긴 누가 죽였다는 거요?”

“그럼 저 사람은 자네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쓰러졌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어? 못된 생각을 하는 놈들을 바로잡으려고 적당히 말이오, 적당히 어루만져준 거지. 그런데 저렇게 꾀병을 부리잖소?”

“그러니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 몇 대 때렸더니 저렇게 꾀병을 부리는 거다?”

내가 그에게 동조하는 듯 결정적인 단어를 섞어서 묻자, 가장 왼쪽에 있던 놈이 먼저 반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놈에게는 불행하게도 가운데 있는 덩치는 눈치가 영 젬병이었고, 결국 결정적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오, 역시 배우신 분이라 이해가 빠르시구만! 진짜 몇 대 쥐어박았는데 저렇게 누워서···.”

“이런 젠장, 도르만! 닥쳐!”

제일 왼쪽 놈은 급히 도르만이라는 덩치의 입을 닫게 만들고는 굳은 인상으로 내게 말했다.

“남작님, 이런 사소한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여기 레건 대장도 있으니 이만 볼일을 보러 가시지요.”

용병 놈치고는 꽤나 정중한 어조였지만 내용은 강요이자 암묵적인 협박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내 위아래를 살피는 것도 모자라 주변에 다른 사람, 그러니까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 더 있는지 살피는 것을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게 나쁜 쪽으로 발현되어서 문제일 뿐.

“레건 대장, 거기 그 친구 업고 따라오지.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지금 당장 놈들과 부딪히는 것은 하책이었다.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돼버리면 앞으로 있을 벌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호해진다.

도주할 수도 없는 섬이고, 놈들의 신상이야 레건이 알고 있을 테니 지금은 보내주는 것이 좋았다.

쓰러진 남자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일단 환자부터 살피는 것이 우선이기도 하고.

“아니, 그 친구는 우리가 알아서 데려가겠습니다. 그래도 대장인데 이런 사소한 일까지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왼쪽 놈의 말에 다른 두 놈도 상황이 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눈치를 보면서 허리춤에 달린 무기로 슬금슬금 손을 움직였다.

하여간 용병놈들이란.

수틀리면 일단 무기부터 쥐고 보는거냐?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것은 나 뿐만이 아닌지라 레건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 새끼들아! 남작님 말씀 못 들었어?! 당장 꺼져! 이 친구는 내가 업고··· 야, 슈르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말을 하면서 급히 쓰러진 남자에게 몸을 굽히던 레건이 차가운 목소리로 왼쪽에 서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슈르케라는 남자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오른쪽 다리로 레건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레건이 그대로 더 허리를 숙였다면 정확히 안면과 놈의 무릎이 충돌할 수 있는 각도였다.

“대장, 우리가 한다고 하지 않았소?”

“너 이 새끼, 당장 이 발 치우지 못해?”

개판이군.

급하게 끌어모은 용병 놈들이 레건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저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인간이 할 짓인가?

고작 이 자리만 모면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레건 대장?”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화를 내며 놈들 목을 따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적당한 수준의 사고를 못 본 척, 못 들은 척 넘어가 준 것이 쓸데없는 짓이 될 판이기에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했다.

스르릉.

움찔.

몸을 일으킨 레건이 이를 악물더니 아밍 소드를 뽑아 들었다.

동시에 세 사람이 움찔하며 재빨리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대장?”

가장 덩치도 크고 무식해 보이는 도르만이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아직 이름을 모르는 내 앞에 있던 놈도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허리에 달린 도끼를 단단히 움켜쥐며 고정 띠를 슬그머니 풀었다.

“칼까지 뽑을 일은 아닐 텐데, 레건. 칼은 한 번 뽑으면 그냥 못 집어넣는 거 알지?”

슈르케가 차갑게 말하며 한발 물러서 거리를 확보했다.

그대로 있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다리가 베일 판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네놈들이 뭐하던 놈들이건 지금은 내가 대장이야. 그리고 고용주가 지시를 하는데 그걸 막아? 네놈들이 그러고도 용병인가?”

“에이 씨벌, 용병이 뭐 얼마나 대단한 짓이라고.”

“이것저것 다 지키는 용병 새끼가 어딨다고 새삼스럽게?”

그러게 말이다.

아무래도 레건 역시 용병이랑은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정리를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이렇게 험악해서야 원.

저놈들이 뭘 알고 하는 짓인지 그냥 자존심이 상해서 하는 짓인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강경하다.

솔직히 레건이 칼을 뽑아 드는 것까지는 나도 예상 못 했거든.

웅성웅성.

“저쪽인 것 같은데?”

“뭐야, 누가 소란이야?”

“비켜!”

다행히 기막힌 타이밍에 내 맞은편 골목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제독! 여기에서 뭐하십, 이런, 레건! 무슨 짓이냐!”

몇 명의 선원, 용병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아인델프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하다 말고 칼을 뽑아 든 레건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어, 미안한데 그거 오해야.

내가 괜찮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손을 살짝 드는 순간 한발 빠르게 슈르케라는 놈이 소리쳤다.

“애꾸 놈이 남작님을 죽이려고 한다!”

말과 동시에 칼을 뽑아 든 슈르케가 교묘하게 새로 등장한 인물들의 시야를 가리며 레건에게 칼을 휘둘렀다.

챙! 퍼억!

“끄어억!”

피를 흩뿌리며 튕기듯이 날아간 남자가 나무로 만든 벽에 부딪히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사람이 무방비 상태로 맞으면 날아가기도 하는구나.

이게 네이선 같은 괴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날았다기보다는 균형을 잃으며 한쪽으로 쓰러진 것에 가까웠지만, 내가 보기에는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내가 한 일은 조금 과장을 보태도 되는 법이니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 그대로 굳어버린 가운데 나는 얼얼한 주먹을 움켜쥐며 지시를 내렸다.

“아인델프, 여기 세 놈 포박해서 가둬놔. 그리고 레건, 빨리 저 친구 업어. 닥터에게 가자.”

“네? 아, 네, 넷!”

슈르케가 무기를 휘두른 것은 나름 최선의 한 수였다.

일단 칼부림이 나면 내가 뭐라고 소리치건 사람들에게 잘 들리지도 않을 테고, 보통 사람은 관성에 의해 원래 하고자 했던 행동(레건을 공격하는)을 하게 마련이니까.

그렇게 레건도 죽고, 쓰러진 남자도 죽으면 사건은 유야무야되기 십상이다.

내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냐고?

죽은 레건은 말이 없으니, 살아남은 세 놈이 같은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이기겠어?

정황상 레건이 진짜 칼을 뽑아 들고 있었고, 재수 없게도 바라보는 방향이 내 쪽이었으니 ‘칼을 뽑아 든 레건을 상대로 고용주를 지키려는 훌륭한 용병들’ 코스프레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을까?

남작이자 총독의 권위를 이용해서 불문곡직하고 세 놈을 잡아 죽일 수도 있지만,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고.

아,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물론 난 세 놈을 그냥 죽였을 거다.

일관성은 개뿔, 저런 사회의 암적인 놈들을 살려두느니 그냥 내가 욕을 좀 먹는 게 낫지.

어찌 되었건 그렇게 슈르케는 칼을 휘둘렀고, 레건은 깜짝 놀라면서도 말을 하기보다 먼저 칼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칼을 부딪치는 그사이에 이미 말로 뭔가를 하기에는 늦었음을 깨달은 내가 냅다 달려서 슈르케 그놈의 무방비한 얼굴에 한 방 먹인 거지.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원 펀치 KO승이다.

···사실 나 엄청 세진 것 아닐까?

* * *

“허허허, 그 짧은 거리를 걸어오면서 한바탕 난리를 치렀구먼. 그래, 앞으로 어찌할 셈인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제먼 씨의 말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놈들 알고 보니 그 전부터 말이 많았던 놈들이더라구요. 포로들을 이유 없이 구타한 게 처음도 아니고. 지금까지 그걸 숨긴 레건도 못마땅하지만 뭐, 그걸 보고하라고 한 것도 아니라서 뭐라고 할 수는 없죠.”

“그 친구야 이미 자네 사람이 되려고 안달이 나지 않았나. 나름대로 잡음 없이 부하들을 이끌어서 자네에게 인정받고 싶었겠지.”

“그렇게 좋게 해석도 가능하네요.”

“그보다 그 사고 친 용병들은?”

“일단 가둬놨어요. 정확하게 죄목을 명시해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형할 겁니다.”

“처형? 목숨을 거두겠다고?”

“네.”

그럼 그놈들에게 벌금을 내게 하겠어, 감금을 하겠어?

감금은 오히려 놈들이 좋아할 수도 있다.

노역을 시켰다가는 대형 사건이 터질 것이 뻔히 보이니 그냥 가둬둬야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먹여주고 재워주는 그게 그놈들이 원하는 삶 아니야?

“그, 아무리 그래도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겠나?”

제먼 씨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견을 내놓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황상 놈들에게 맞아서 죽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도 꽤 되는 것 같아요. 닥터가 봤다면 알았겠지만, 이미 사망한 사람까지 닥터가 보지는 않으니까요.”

“뭐라고?”

“지들이 때린 놈들을 아프다고 닥터에게 안내해 주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다 골병 나서 죽으면 사고 현장에 대충 끼워 넣거나 일부러 사고를 내서 사망자로 처리하고··· 뭐, 그런 짓을 한 것 같더군요.”

“그걸 아무도 몰랐다는 말인가?”

그의 의문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

이게 아무리 말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

아인델프를 비롯해 몇 명은 분명히 그런 낌새가 있다고 느끼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딱히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것.

물론 레건은 알고 있었지만 숨겼었고.

개중에 우르타의 말이 아주 걸작이었는데···.

“음, 숨기는 건 알았지! 그런데 몰래몰래 포로들 때리는 건 그 사람들만이 아닌걸. 그리고 음식 훔쳐 먹는 놈도 있고, 몰래 여자 만나, 아앗, 이건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까 놈들이 거짓말을 한다, 뭔가를 숨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용병 놈들 대부분이 크건 작건 구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니 나에게 보고를 한다면 용병 대부분이 의심스럽다고 해야 할 판이니 차마 보고를 못 했다는 것이다.

하 씨. 그냥 용병 놈들 한 놈도 쓰지 말고 다 내보낼까?

“아무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상황이 좀 그래요. 그래서 며칠 더 살펴보려는 거고. 그보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아아, 그것 때문에 왔다고 했지?”

내가 오늘 그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은행의 아이덴티티, 바로 마법 통신망의 구축 상황을 알기 위해서였다.

섬에 처박혀 있으니 대륙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일단 통신망이 구축되면 간단한 소식 정도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잠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먼 씨가 난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미안하지만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기간이 좀 애매하구만.”

“제먼 씨야 처음이지만 다른 분들은 경험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게, 자네도 알다시피 은행 지점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려 22년 만에 생긴 새로운 은행 지점 개설이라고 하네. 저 친구들이라고 경험이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변화가 적은 세상이라도 그렇지, 22년?

그 정도면 통신망 구축 방법이 잊혀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이왕이면 경험이 있는 사람을 보내야지, 초짜를 보내는 건 또 무슨 경우야?

22년 전이면 그때 참가했던 사람이 충분히 살아있을 수도 있는 시간이구만.

“어··· 그, 문제가 없는 것은 맞죠? 혹시 뭐 재료가 부족하다거나, 방법을 까먹었다거나?”

“거, 걱정 말게! 재료비가 비싸서 직접 해보지는 못했지만, 연습은 충분히 하고 왔으니까!”

의심스러운 내 눈초리에 제먼 씨가 슬쩍 눈을 피했다.

오늘따라 영 미덥지 못하네.

콰당!

뭐, 뭐야?!

갑작스러운 소음에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한 박자 늦게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소음의 진원지 -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환희에 찬 채피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헥, 헥, 드디어, 드디어 끝났어요! 헥헥헥!”

“채피 견습 사제님, 도대체 뭐가 끝났다는 겁니까?”

확실하게 말하는데 신전 공사가 끝났다는 말은 아니다.

신전은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한 땀 한 땀 공사를 하느라 아직 기둥도 다 못 올렸거든.

답답하기는 한데 그게 원래 신전 짓는 방식이라는데 어쩌겠어.

“후우, 후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제독님! 빨리, 빨리! 지금 가야 한다구요! 후우, 후우, 예쁜 분들이 오고 있어요! 이제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예쁜 분들이면 페리아 족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한다는 거지?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내가 다시 대륙으로 가야 할 시간이라는 말인가?

지금 당장? 그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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