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화> 온당히 가져야 할 것 >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호들갑을 떠는 채피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밖으로 나왔다.
채피의 기묘한 행동에 이끌린 듯 제먼 씨도 함께 나왔으나, 채피는 딱히 그를 막지는 않았다.
그리고 채피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마을 외곽, 그곳에서 우리는 페리아 족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형제나 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비슷한 얼굴이었다.
물론 하나같이 아름답기는 한데, 십여 명이 저렇게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위화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원래 이 친구들 혼자 다니지 않나?
이렇게 다수를 보는 것은 그들의 마을을 갔을 때 말고는 처음인 것 같은데.
애초에 서로 의식이 연결되어 있으니 굳이 여럿이 다닐 필요가 없는 자들이 이들이다.
그런데도 굳이 여럿이 왔다는 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등에 짐이 들려있는 것을 보니 특별한 이유가 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그렇게 들고 오셨습니까?”
“······.”
나름대로 친근하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들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짝 분위기가 민망해지려는 찰나, 드디어 내 손목을 놓은 채피가 홀린 듯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페리아 족들 역시 예의 표정 없는 얼굴로 채피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흐응, 흑, 나를, 나를 안내해 주실 건가요?”
왠지 모르게 울음이 반쯤 섞인 채피의 질문에 짐을 들지 않은 페리아 족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의 거룩한 희생에 존경을 표합니다. 당신에게 안배된 축복이 있으니 따르시지요.”
“아, 아, 드디어···.”
뭐야, 이거 마치 채피를 인신 공양이라도 하려는 분위기잖아?
“잠시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봐요, 채피 견습 사제님, 말을 제대로 해주셔야 제가 도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걱정이 담긴 내 다급한 말에도 불구하고 채피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페리아 족이 인간의 정신에 손을 대는 수준의 위험한 마법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에게는 꽤나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페리아 족이 성심으로 모시는 신, 사실상 종족 전체가 그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같은 지고스를 모시는 채피에게 그렇게까지 할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혼란에 빠져있는데 짐이 없는 페리아 족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향은 마을 안쪽이었다.
“이봐요,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리안 님?”
움직이는 이들을 향해 말을 걸었지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홀로 남아있는 페리아 족이 있는 곳이었다.
“네?”
얼떨결에 대답을 하자 그 페리아 족은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리안 님과 마력에 눈을 뜨신 분도 함께 가시지요.”
“아니, 나는 그쪽들과 달라서 음성으로 된 설명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다짜고짜 어디를 가자는 겁니까? 저들은···.”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을 보니 내 정신에 개입한 것 같지는 않은데···.
“흠, 리안 제독. 저들의 말을 따르도록 하지.”
“네에? 제먼 씨, 정신 차리십시오. 혹시 저들이 정신계 마법이라도 쓴 겁니까?”
물론 정신계 마법을 썼다고 해도 제먼 본인이야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전에 내가 약간 멍한, 그러니까 반쯤 꿈에 걸친 듯한 상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신계 마법에 당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정신계 마법? 아, 전에 자네가 당했다고 했던?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네. 난 지금 충분히 제정신이야.”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저들을 따라가자고요?”
“자네는 저들의 공동의식에도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뭘 그렇게 의심하는 거야? 저들은 개인적으로 범죄나 일탈을 저지를 수도 없고, 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수도 없는 이들이네. 그런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그것도 채피 견습 사제가 관련된 일이라면 딱히 해가 될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막거나 거절한다고 그렇게 끝날 일이 아니지.”
···듣고 보니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뭔가 좀 찝찝하단 말이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짐을 든 페리아 족들은 어느새 마을 안쪽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에 대해서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왕녀님에게 듣기로 그들이 한밤중에 섬 주민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마을에 두고 가는 일이 꽤 있었다고 했으니 비슷한 일이겠지.
그게 대낮에 일어난 일이라서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제 그들의 존재를 섬 거주민들은 물론이고 선원들에게까지 공개해 버려서 그냥 시간대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 * *
결국 급하게 마을 안쪽으로 뛰어가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왕녀님이나 촌장님, 아니면 선단의 간부들에게 나와 채피, 제먼 씨가 원주민(마을 사람들은 페리아 족이 그저 섬에 먼저 살던 원주민이라고 알고 있다)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을 알리라고 부탁하고 페리아 족을 따라나섰다.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제먼 씨의 말에 허점이 없기도 했고,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을 데리고 갈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쪽에는 채피가 페리아 족과 함께 걸으며 작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그걸 대화라고 해야 하나? 말하는 사람은 채피 뿐이고, 페리아 족은 가끔 속도를 늦추고 허리를 숙여 채피에게 귀를 대어줄 뿐이었다.
계속 혼자서 말을 하는 채피나, 그걸 대답도 없이 듣기만 하는 페리아 족이나,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짓이었다.
“제먼 씨, 상황도 잘 모르시면서 상당히 신나 보이시는데,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어? 그게 보이나?”
그렇게 싱글벙글 웃고 있으면 눈치가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알지 않을까요?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크흠, 사실 저들에게 가장 먼저 부탁한 것이 그들의 공동의식에 넣어달라는 것이었네. 물론 보기 좋게 거절당했지만. 사실 거절이라기보다 나는 안 된다더군. 그래서 자네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리고 그다음에 부탁한 것이 그들의 마을을 가 보는 것이었네.”
“지금 마을로 간다는 보장이 없는데요?”
“이런, 내 말을 오해했군. 내가 그들의 마을에 가고 싶은 건 고작 마을이 궁금해서가 아니야. 그들의 놀라운 마법, 그리고 자네가 말한 순간이동이 가능했다는 그 차원문, 그리고 마을을 감싼 결계 따위가 궁금했던 걸세. 그런데 저들이 나서서 우리를 안내하는 곳이니 그게 어디건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는 곳이 아니겠나? 섬사람들이 모르는 곳일 테니.”
논리적 비약이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라서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채피가 저렇게 좋아할 일이라면 설마 지고스 님이라도 만나러 가는 걸까?
말을 속 시원하게 안 해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들의 공동의식에 연결해 달라고 하기에는 찝찝하고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체력이 약한 마법사라는 고정관념에 충실한 제먼 씨가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턱까지 차오른 숨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니까 진짜 오래 걷기는 한 모양이다.
한··· 한 시간 반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게, 일단 평지가 아니고 산길인 데다가 제먼 씨는 50줄의 노인(?)인 것도 모자라 평생 육체노동과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다.
마공학자나 마법사나, 몸을 쓸 일이 뭐가 있겠어.
건장한(?) 나도 슬슬 숨이 가쁘니까 한참 전부터 제먼 씨의 입이 숨 쉬는 것에만 사용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허억, 허억, 어, 언제까지 걷는 거지? 헉, 헉, 헉, 이렇게 멀다고는···.”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보다 괜찮으세요? 좀 쉬었다가 가자고 할까요?”
“아, 아니, 괜찮, 헉, 헉, 아니, 부탁 좀 해 보게. 어이구.”
나도 살짝 숨이 가쁘고 다리가 아파서 핑곗김에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우리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페리아 족과 채피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이참,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제먼 아저씨! 힘을 내세요!”
착한 채피는 단순하게 말로만 응원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신성한 기운이 흘러나왔고, 제먼 씨의 안색이 빠르게 좋아졌다.
물론 나도 허벅지와 발바닥의 통증이 줄어들며 호흡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하기는 했지만 나름 힘을 쓰는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슬쩍 찌푸린 제피의 표정을 보면 확실히 그렇게 효율적이거나 뛰어난 기술은 아니었다.
시선을 돌려 페리아 족을 보니 채피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인간보다는 확실히 지고스 님과 더 가까운 이들이니 저런 간단한 치유의 빛 정도는 다 쓸 수 있는 거 아냐?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괜한 말을 한 번 했다가 제먼 씨에게 페리아 족에 대해서 아는 대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그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거의 조사당하듯이 쉴 새 없이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경험은 결코 두 번씩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어, 어? 이건!”
채피의 치료로 힘을 되찾은 제먼 씨와 10여 분을 더 걸었을 때, 제먼 씨가 눈을 부릅뜨더니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덩달아 채피도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고, 의도치 않게 잠깐이나마 페리아 족과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동안 너무 경황이 없어서 묻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굳이 당신들에 대한 비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것은 리안 님에게 주어진 일이 아닙니다.”
“네?”
주어진 일이라니, 비밀을 지키라고 한 적이 없다는 거야, 비밀을 알릴 필요가 없다는 거야?
하여간 화법하고는.
“지금 고민하시는 일은 리안 님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니 마음에서 지우셔도 됩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나름대로 열심히 부연 설명을 했지만, 여전히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마음에서 지워도 된다니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몇 분을 걷자 황홀한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는 제먼 씨와 그 주변을 뛰어다니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채피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 왔을 때에는 너무 힘들고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공간 자체에 일렁거림이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마을로 가는 모양이다.
어쩐지 얼마 전부터 주변 풍경이 한 번 본 것 같은 애매한 기시감이 들더라니.
그런데 채피 견습 사제는 무슨 체력이 무제한인가?
아직도 저렇게 전력 질주에 가깝게 뛸 수 있다니, 이건 젊다는 말로 해결이 안 되는 수준이잖아?
* * *
차원문을 통과하자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다른 점이라고는 집들과 조화를 이룬 나무들이 많이 헐벗었다는 것과, 모여든 페리아 족들의 얼굴이 괴물 같던 이전과 다르게 모두 비슷한 예쁜 얼굴이라는 것 정도였다.
이러면 서로 얼굴 구분이 되기는 하는 거야?
여전히 고개와 눈만 돌려서 우리를 따라올 뿐 누구도 말 한마디를 내뱉지 않아서 기묘하고 약간 공포스러웠지만, 제먼 씨도 채피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우와, 예쁜 누나들이 엄청 많아!”
“흐음, 생각보다 규모가 크구만. 천은 확실히 넘겠어.”
천 명이라고 하면 적은 수가 아니기는 한데, 한 종족의 개체 수, 그것도 인간 크기의 대형 영장류의 개체 수라고 하면 정말 초라한 숫자다.
고작 손바닥만 한 폰테 섬의 전체도 아니고 일부 지역을 차지한 이들이 수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되겠지만 말이다.
마을과 페리아 족들을 보며 감탄하던 채피는 마을 중앙에 있는 거대한 신전을 보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안내하는 페리아 족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천천히,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확신에 가득 찬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채피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멀쩡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가면 걱정이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채피의 뒤에 붙여서 함께 걸었다.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래도 되는 모양이었다.
“저곳이 신전인 모양이군. 독특한 건축양식이야. 시간이 있다면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데 그건 어렵겠지?”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저들이 이곳에 왜 데리고 왔는지도 모르는데.”
“채피 견습 사제의 모습을 보니 주된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네. 그런데 자네와 나는 왜 데리고 왔을까?”
드디어 신전의 앞에 도착하자 채피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따르던 우리도 당연히 함께 들어가려고 했다.
“어?”
“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야?
분명히 두어 발만 앞으로 가면 신전의 입구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걸어도 그 두 발, 고작 1미터 정도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제먼 씨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거 마법입니까? 뭐, 공간 왜곡 이런 거?”
“모, 모르겠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공간 자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는 마법이 있기는 한데···.”
보이지 않는 벽이면 나도 그냥 마법이구나 하겠지.
그런데 이건 그냥 상식 자체를 파괴하고 있잖아.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는데 걷는 것 자체는 전혀 위화감이 없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우리가 혼란에 빠져서 뒤로 돌아갔다가 옆으로 돌아서도 가 보고 별짓을 다 하는 동안 페리아 족들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기만 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게 살짝 소름 돋는 일이었다.
무려 자신들의 신전을 범하려는 외부인들을, 가벼운 제지조차 하지 않았다니 말이다.
나야 이전에 들어갔다 온 사람이니 그렇다고 하지만, 제먼 씨는 그런 사람도 아니지 않는가.
단순한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인지, 우리 정도는 마음대로 하게 두어도 된다는 생각인지.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신전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채피가 모습을 드러냈다.
“채피 견습 사제님?”
“채피 견습 사제!”
우리가 걱정을 담아 그를 부르자 그는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리안 제독님, 제먼 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상적인 말투는 도대체 뭐지?
“견습 사제님, 말투가···.”
“다시 한번 거듭 감사드립니다, 리안 제독님. 제독님 덕분에 그분께서 긴 잠에서 깨어나셨고, 그 덕분에 저도 오랜 시간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채피 견습 사제가 도저히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문장을 말하며 정중하게 내게 고개를 숙였다.
짐을 내려놓았다니 좋은 일인 것 같기는 한데, 갑작스러운 말투의 변화도 그렇고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짐이라니? 채피 견습 사제, 조금 자세히 설명해 주게.”
제먼 씨 역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채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채피는 제먼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저 그분께서 저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던 일을 모두 이루셨으니, 그 짐을 다시 거두어 가셨다는 말입니다.”
얼핏 들으면 축하할 일인 것 같은데 뉘앙스가 좀 이상하다.
채피에게 주어진 짐이라면 신의 말씀을 듣는 자, 신의 말씀을 대리하는 자, 뭐 그런 쪽인데 말이야.
다시 질문을 하려는데 채피의 몸이 움찔했다.
어디가 아픈가 싶어 급히 그를 부축하려고 다가서니, 나와 제먼 씨의 앞을 막았던 기현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다음이었다.
그렇게 내가 채피의 한쪽 팔을 잡으니, 그가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제독님. 힘이 조금 없군요.”
말을 하는 채피의 얼굴이 묘했다.
오펜보다 어려 보이던 얼굴이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말투가 바뀌니까 바로 나이가 달라 보이는구나.
원래 덩치는 십대 후반 정도의 덩치, 즉 성인과 비슷한 크기였으니 딱히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동안이던 사람이 갑자기 늙어 보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20대 중반이면 늙었다는 말이 어울릴 나이는 아니지만 말이야.
나와 제먼이 채피를 부축해서 조금 걸어 나오자 페리아 족 한 사람이 우리 앞으로 다가와서 명확하게 제먼 씨를 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당신이 원하던 것,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도 인간인데, 왜 나는 안 줘?
긴장이 조금 풀려서인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제먼 씨와 많은 의미가 담긴 눈빛을 교환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제먼 씨가 페리아 족과 떠나고, 나와 채피는 다른 페리아 족을 따라 근처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제먼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잠시 머물라는 뜻이겠지.
“두 번째 방문인데 이들의 집에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몸은 좀 괜찮··· 견습 사제님?”
장식을 제외하면 인간 세상의 집과 비슷한 내부 구조를 가진 방을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아 있던 채피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보자마자 페리아 족의 집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날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듯한 채피의 눈가에 주름이 보인다.
탱탱하던 얼굴에 팔자주름이 파여있고, 이마에도 희미한 선이 눈에 띄었다.
최소한 30대로 보이는 얼굴.
심지어 가슴 앞에 모아 잡은 손의 피부에서도 탄력을 잃은 모습이 보였다.
착각이나 기분 탓이 아니라, 채피가 늙어가고 있었다.
최소한 수십 년간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채피 견습 사제가, 남들보다 수십 배, 어쩌면 그 이상의 속도로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게 생기는 일이 아님에도 머리가 쭈뼛할 정도로 두려운 기현상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사, 사제님! 이게 무슨!”
내 목소리에 눈을 뜬 채피 사제가 부드럽게 웃었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온당히 제가 가져야 할 것을 다시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니까요.”
“어, 어, 그, 그게 무슨···.”
채피 견습 사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온당히 가져야 할 것’이라니. 건강과 젊음을 잃고 있는데 도대체 그게 왜 ‘가져야 할 것’이 되는데?
“좋았습니다. 늘 그분과 함께하고, 그분을 느끼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니,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행복했지요. 하지만 저는 결국 인간에 불과합니다.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죽기를 원하지요. 그분께서 다만 제 작은 소망을 들어주셨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채피의 얼굴은 이제 40대로 보였다.
이마에는 숨길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겨났고, 피부조차 거칠어졌다.
최소한 수십 년을 신의 도구로 살아온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고작, 고작 ‘노화’라는 말인가.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채피 견습 사제가 왜 이런 꼴을 당한단 말입니까?!”
솔직히 화가 났다.
나와 채피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결국 지고스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생겨난 존재라는 것은 동일했으니까.
이제 실시간으로 눈에 띄게 늙어가는 채피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유한하기에 가치가 있고, 유한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는 법입니다. 인간 또한 그렇지요. 제독께서는 영원한 삶을 원하십니까?”
“······.”
당연히 영원한 삶을 원한 적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삶을 살지 못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