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순리대로 흘러 남김이 없도록 >
적당한 말로 제먼 씨를 돌려보낸 나는 머리털이 휘날리도록 달려서 왕녀님을 찾아갔다.
비상이다, 비상!
프레티아 왕국에서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증거만 없다면 대충 모른다고 하고 뭉개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콕 찝어서 나보고 왕녀님을 송환하라고 하냐고?
그것도 벨로키나 왕국을 통한 것도, 스코타 후작가를 통한 것도 아니고 은행을 통해서 말이야.
“아가씨, 리안입니다. 잠시 실례를···.”
마음이 너무 급해서 노크를 하자마자 문을 열었다.
사실 열었다기보다는 문이 잠겨있지 않아서 너무 세게 노크를 한 나머지 반쯤 지가 알아서 열렸다고 봐야겠지.
그리고 그 안에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왕녀님이 있··· 었다면 좋겠지만, 대낮에 집무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일이 뭐가 있겠나.
“남작, 너무 무례하신 것이 아닙니까?”
갑옷까지 갖춰 입은 이야기 속에 나올만한 기사, 알렌 경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선객이 있으니 평소였다면 무례를 사과하고 다음에 찾아온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예의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린 알렌의 기분을 맞춰줄 상황도 아니고 말이다.
“무례인 줄은 알지만, 사안이 워낙 심각하니 양해를 부탁합니다, 알렌 경. 잠시 자리 좀 비워주시지요.”
왕녀님의 표정이 나를 탓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알렌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요구하자 그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아무리 남작이라도 아가씨와 단둘이 남겨 놓을 수는 없소.”
“알렌 경.”
알렌이 거절의 말을 내뱉기 무섭게 딱딱하게 굳은 왕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가씨.”
알렌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왕녀님의 다음 말은 싸늘했다.
“제 손님을 왜 경이 내쫓는 겁니까?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자리를 비워주시지요.”
오우야,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고?
아니나 다를까, 알렌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후우, 알렌 경. 더 이상 불편한 일을 만들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나라 잃은 표정을 한 알렌은 문 쪽으로 멀어지면서 나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건 좀 억울한데?
솔직히 내가 알렌에게 못 해준 건 또 뭐야?
알렌과 엮여서 피해를 본 건 오히려 나잖아.
그에게 도움을 받은 거라고 해봐야 예전에 급습 당했을 때랑 이번 전투 정도인데, 도움의 총량으로 따지면 내 쪽이 훨씬 많을 거다.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알렌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 그렇게 말씀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총독께서는 제가 알렌 경과 무슨 사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바로 뾰족하게 되받아치는 그녀를 보니 괜히 주눅이 들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상대가 좀···.”
“총독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신가요?”
화가 난 듯한 그녀의 냉랭한 말투가 마음에 살짝 걸렸지만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고는 다급하게 소식을 전달했다.
“제먼 씨로부터 여러 가지 소식을 넘겨받았는데 그중에 우려할 만한 소식이 있어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혹시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발각당했나요?”
“어?! 어떻게?”
페리아 족이랑 좀 어울리시더니 마음을 읽는 법이라도 전수받으신 건가?
내가 깜짝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채피 사제님이 말씀하실 때만 해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어? 채피 사제 말입니까?”
“네, 마을 복구 문제로 한참 정신이 없을 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제게 오셔서 말씀하시더군요. 가족을 보러 갈 때 되었다고 말이죠.”
“가족··· 입니까.”
이제 그녀에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복동생인 프레티아 국왕뿐이기는 하다.
외할머니인 스코타 후작 대부인과 외삼촌인 스코타 후작이 있기는 하지만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관계니 말이다.
“후우, 사실 잘 모르겠어요. 데이먼과는 그리 친한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 아이는 가족보다 말을 더 좋아했거든요. 나이 차이도 조금 나는 편이었고··· 어머니도 다르니까요.”
“먼저, 제가 전달받은 내용은 프레티아 왕실로부터의 요청입니다. 아가씨를 송환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아가씨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데이먼 그 아이가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정치적 기반이 부족할 겁니다. 그러니 제 위치를 최선을 다해서 찾았겠죠. 왕가의 핏줄은 가장 써먹기 좋은 패니까요. 실제로 후작가에 있을 때 이미 제가 있는 곳을 파악했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똑똑하다는 것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굳이 알지 못해도 될 일을 너무 똑똑해서 다 알게 되니 말이다.
씁쓸한 그녀의 표정을 본 나는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
“아가씨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저는 아가씨의 존재를 불문에 부칠 겁니다. 아무리 프레티아 국왕이라고 해도 다른 나라의 귀족인 저를 상대로 과도한 일을 벌이지는 못할 테니까요. 게다가 명확한 물증도 없을 테니 지금처럼 송환을 요청하는 정도가 최선이겠지요.”
심지어 프레티아 왕국은 벨로키나 왕국에 비해서 약소국이다.
그러니까 고작 왕녀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만 가지고 벨로키나 왕국의 영토인 폰테 섬에 별다른 수작을 걸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벨로키나 왕국의 남작이라는 작위를 집어 던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 그렇게··· 네?!”
당연히 내 제안을 따르리라고 믿었던 그녀의 거절에 어리둥절한 나는 황급히 그녀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프레티아 왕국으로 가시겠다면··· 도와드리기는 하겠습니다만.”
이거 얼마 전이랑 정반대의 상황이잖아?
분명히 그때는 내가 섬을 떠나라고 하고 왕녀님은 안 간다고 버텼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말을 바꾸느냐고 욕할 사람도 있겠지만, 막상 그녀가 나를 떠난다고 생각하면 내키지 않는 걸 어떡하라고?
“채피 사제님이 말해주신 대로 계속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총독님께 계속 부담을 드릴 수도 없고, 사제님이 좋게 풀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 기회에 제 거취를 명확히 하려고 합니다.”
“어··· 그런···.”
나는 열심히 짱구를 굴렸다.
일단 채피가 늙어버리기 전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면 진짜 괜찮기는 할 거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왕녀님에게 해준 말이니, 그 일이 내게도 걱정이 안 되는 일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그녀를 막는 것도 못 할 짓이다.
그녀가 가고자 하는데 내가 그것을 막는다면 진짜로 그건 감금이나 마찬가지잖아.
자유를 찾아 이곳에 온 그녀가 오히려 자유를 잃게 되다니, 그게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아가씨께서 떠나고자 하신다면 제가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저도 상대의 의도 정도는 파악해야 하니 프레티아 왕국 사람들과 만나는 장소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살짝 딱딱해진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살짝 풀리는 것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그녀야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좀 걸리는 부분이 있지 않나.
그러니까 프레티아 왕국의 항구로 선단을 몰고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프레티아 왕국과 너무 멀지 않으면서 기항할 만한 곳은 어, 이거 왕녀님에게 좀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겠는데?
* * *
급하게 결정된 대륙으로 향하는 항해에는 오트라스와 드라이언만 함께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포로들이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일정 수의 성인 남성 인원을 유지해야 했다.
선원들을 죄다 끌고 나갔다가는 다시 돌아올 때는 빈 섬이 나를 반기거나, 일레드 왕국에게 점거당한 섬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또한 일레드 왕국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최소한 트리토나를 운용할 수 있는 인원이 필요했다.
최강의 전투함이라도 결국 사람이 조종하는 녀석이니, 운용할 사람이 없으면 맥없이 적에게 넘어가서 오히려 나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남는 인원의 수장은 발드 선장이 맡았다.
요즘 결혼한 아주머니와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니까 최적의 인사였다.
“일반적인 일은 촌장님이 처리하시겠지만, 섬의 방어에 대해서는 발드 선장이 책임을 졌으면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악의 상황이 되면 모든 배를 자침하고 트리토나만 건져서 도주하겠습니다.”
“응,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진짜 최악의 상황이 되면 미련을 남기지 마. 트리토나와 사람들만 살리면 돼. 나머지는 어떻게 해서든 복구할 수 있으니까.”
“네, 제독!”
그렇게 허비 촌장과 발드 선장에게 섬을 부탁하고 돌아서는데, 허비 촌장의 옆에서 쭈뼛거리던 슬레어 항해사의 동생인 레이튼이 건장한 몸에 어울리지 않은 수줍은 몸짓으로 나를 막았다.
“응? 레이튼? 할 말이 있어?”
“다음에 돌아오시면 새로 개발한 물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네. 재료도 부족했을 텐데 고생했어. 기대가 되네.”
“그, 전성관이라는 것, 트리토나에서 직접 봐도 될까요?”
나는 그 맹랑한 요청에 잠시 고민했다.
전에 양철통을 달라고 할 때 느꼈지만 호기심과 열정을 못 참는 타입이다.
이런 사람이 보통 좋은 연구원이 되기는 하지, 그 호기심과 열정을 잘 채워주는 상관을 만난다면 말이야.
트리토나가 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기밀(첫 번째는 왕녀님의 신분이니까)이지만 레이튼이라면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무려 아버지는 촌장, 형은 내 밑에서 일하는 항해사 아닌가.
게다가 레이튼은 현재 섬 내의 유일한 대장장이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이 부분은 발드 선장이 신경 좀 써 줘.”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는데요.”
감사하다면서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 레이튼은 용기를 얻었는지 추가 요청 사항을 내밀었다.
“전성관을 구경한 다음에는 배에다 직접 설치를 해보고 싶은데요, 혹시···.”
“이번에 나포한 선박 중에 제일 상태 좋은 녀석을 상대로 해봐. 그런데 구리나 아연, 주석 같은 금속괴가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이미 회계사에게 요청을··· 앗, 비밀이었는데.”
연신 죄송하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튼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광물은 필요하다.
비록 운 좋게 철광산이 발견되어서 개발을 시작했지만 제대로 된 철이 언제부터 공급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심지어 제철용 고로도 없다) 단순하게 철만 가지고 이런저런 금속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게론드라면 선체에 걸리는 하중을 잘 생각해서 구매량을 분배했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진즉 나에게 말했겠지.
레이튼과 이야기가 끝나자 말석에서 쭈뼛거리던 레건이 냅다 머리를 숙였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독님!”
“용병치고 자네는 꽤나 괜찮았으니까. 이번에도 잘해 주리라고 믿어, ‘임시’ 치안대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행복한 폰테 섬이 될 수 있도록 제가 불철주야 노력을!”
누가 들으면 선거라도 나가는 줄 알겠네.
당장 이 섬에서 치안대가 할 일이 뭐 얼마나 많다고 말이야.
“그렇게까지 불타오를 필요는 없어. 힘이 너무 들어가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는 법이니까 살살하라고. 다시 말하지만, 첫 번째 관리 대상은 치안대원들이야.”
하아, 이게 참 웃기는 일인데, 치안대가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같은 치안대였다.
배는 못 타겠다는 섬사람 몇 명과 배를 그만 타고 정착하고 싶다는 선원들을 최대한 집어넣었지만, 50명에 이르는 치안대원 중 절반이 용병 출신이었다.
그나마 행실이 괜찮은 사람을 가려 뽑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출신이 어디 가겠는가?
사실 제일 문제를 일으킬 것 같은 놈들에게 완장을 채워준 꼴이었다.
물론 섬의 방어를 맡은 발드 선장에게 배속된 인원이 더 많기는 하지만, 그들은 계속 섬에 붙어 있을 수는 없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넵! 허튼짓을 벌이는 놈이 있으면 바로 모가지를 그냥!”
“어휴, 그놈의 모가지는 내가 날린다니까? 문제 있는 놈은 그냥 가둬놓기만 해. 알았지?”
“네, 네.”
“그리고 지금 당장 치안대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는 포로 관리야. 우리가 빠지면 기회라고 생각하는 멍청한 놈이 나올 수도 있어. 그런 놈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
“제가 아침저녁으로 직접 관리할 겁니다. 그놈들 손발만 제대로 묶어놔도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니까요.”
냉정하게 빛나는 레건의 작은 눈을 보니 살짝 안심이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부분에서 방심할 만큼 허술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선원과의 분쟁은 무조건 발드 선장에게 맡기는 거야. 이건 무조건이야. 알았지? 혹시 발드 선장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건 내가 돌아온 후에 직접 이야기하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그런데 계속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다른 놈들이···.”
말끝을 흐리며 내 눈을 피하는 레건에게 나는 강하게 경고했다.
“이렇게 솎아냈는데도 그런 놈이 또 나오면 그건 리더의 문제 아닐까? 그리고 발드 선장은 같은 식구끼리 맡은 일이 다르다고 차별할 사람은 아니야.”
내 말에 레건은 옆에 선 발드 선장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닙니다!”
다행히도 레건이 발드 선장을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다른 놈들보다는 낫다지만 레건도 용병 짓으로 잔뼈가 굵은 이라서 걱정이 되기는 했었거든.
솔직히 육체적인 힘만으로 따지면 발드 선장이 레건에게 비벼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니 말이다.
뭐, 물론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다시 돌아온 내게 목숨을 잃기밖에 더 하겠냐마는, 그걸 알면서도 순간의 기분을 참지 못하는 게 인간의 특징이니까.
총독 대리를 훌륭하게 수행했던 왕녀님은 물론 회계일을 맡아보던 시니아도 섬을 잠시 떠나게 되니 아무래도 잔걱정이 끊이지는 않는다.
아, 시니아는 아무래도 임신을 한 것 같다며 더 늦어지기 전에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우리를 따라나섰다.
임신 초기는 원래 몸가짐을 더 조심히 해야 된다고 알고 있어서 나는 말렸지만 도통 들어먹지를 않으니 별수 있나.
그리고 시니아의 말대로 이 세상에서는 애를 낳고 나면 현실적으로 친정에 다녀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초췌한 얼굴의 로쉬암 사제 앞에 섰다.
“제독의 앞길에 그분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라겠습니다.”
“사제님, 부디 몸을 잘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걱정이 담긴 내 말에 로쉬암 사제가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허, 일이 순리대로 흐르는 것뿐인데 제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많은 분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모양입니다.”
그게 단순하게 순리대로 일이 풀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괜히 코끝이 시큰해서 하늘을 보니 맑은 하늘에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한 구름 한 조각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 * *
-출항 하루 전 늦은 오후 -
쾅!
터지듯이 열리는 문짝을 보며 한마디를 하려고 인상을 쓰고 있는데 의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로쉬암 사제님?”
“제, 제독! 어, 어, 어서! 빨리!”
“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답지 않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로쉬암 사제를 보며 나는 급히 코트를 집어 들었다.
성직자의 표본과 같던 로쉬암 사제가 저렇게 난리를 피울 일이라면 보통 일이 아닐 테니 일단 빨리 움직여야 했다.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로쉬암 사제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두 사제가 머무는 임시 숙소였다.
신전의 공사가 지지부진한 관계로 당장 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도록 신전 옆에 아담하게 지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신전이 완공되면 바로 해체할 수 있도록 대충 지어서 빈말로도 좋은 주거시설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거주하는 당사자인 두 사제는 오히려 아무런 불만도 없는 것 같았지만, 신전에 봉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민망해하더라.
“이게 도대체 무슨···.”
“채피 사제, 리안 제독을 모시고 왔네. 눈 좀 떠보게.”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당연히 늙어버리기 전보다야 활동량이 떨어졌지만, 오늘 낮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던 채피 사제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제독님, 오셨습니까.”
힘겹게 눈을 뜬 채피 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미소를 지었다.
“사제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닥터를···!”
“아니요, 아닙니다. 이건 병이 아니라 그저 제 생명이 다한 것뿐이니까요.”
살짝 떨리고 가늘기는 하지만 명확한 발음을 보면 크게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생명이 다했다니?
“그래도 일단 닥터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채피 사제가 뭐라고 하건 사람이 죽어가는데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급히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던 채피 사제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사제님···.”
겨우겨우 내 손목에 걸친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는 차마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내가 이를 악물고 다시 그를 돌아보자, 여전히 미소를 띤 채피 사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독, 제독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원한 일이고, 저는 그분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제독께서도 그분을 너무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행복한 삶을 살다가 편안하게 떠나는 것도, 제독께서 이만한 성과를 이루신 것도 다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글쎄요, 제가 오늘 이후로도 지고스를 좋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진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평생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의 말을 대신 전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이제 쓸모가 다했다고 갑자기 늙게 하더니 이제 죽으라고?
“그분은 전지와 전능에 한없이 가까우시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받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지요. 이 세상의 삶이 다한다는 것이 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화를 내실 것도, 아쉬워하실 것도 없습니다. 이 신전의 묘실에는 제가 가장 먼저 들어가는 호사를 누리겠군요.”
“죽고 나서 누리는 호사가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채피 사제가 활짝 웃었다.
“제독의 원망을 조금이나마 풀고 떠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이번에 가시는 일은 제독이 노력하지 않아도 잘 풀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지고스가 알려주었습니까?”
“그분께서는 한 번도··· 뭔가를··· 직접··· 알, 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갑작스럽게 채피 사제의 말이 끊기기 시작했고, 맑기만 하던 눈동자는 눈꺼풀 뒤에 숨은 뒤로 다시 나오지 않았다.
“채피 사제님?”
“···..”
“···매정한 사람, 내게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는 겐가.”
끝까지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채피 사제의 손이 스르륵 떨어지고,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로쉬암 사제의 볼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평생을 지고스의 입이 되어 살던 순종적인 사제가 지고스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장례는 생전 그가 원하던 대로 그날 밤에 단출하게 치러졌고, 아직 신전의 묘실이 지어지지 않은 관계로 화장되어 뼛가루만이 작은 그릇에 담겼다.
마지막까지 참 한결같은 채피 사제였다.
“채피 사제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제독께서 스코타 후작에게 채피 사제를 데리고 가기로 했는데, 정말 갈 생각이냐고 말입니다. 이곳을 워낙 좋아했거든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때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런 의미일 줄은··· 자기는 이 섬을 떠날 생각이 없지만, 제독이 곤란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