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67화 (368/420)

< <366화> 영웅의 필요충분조건 >

“제독, 그게··· 아가씨··· 께서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뭐? 왕녀님이?

“총독님, 문 좀 열어주시지요.”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은 나는 혼란에 빠졌다.

아니, 우리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잖아요, 왕녀님!

* * *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거의 패닉 직전이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정신줄을 부여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우리의 대화가 이쪽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블랑코에게 들렸을지도 모르고··· 아니, 네이선의 말은 확실히 들렸을 거다.

어찌 되었건 사람이 왔다는데 그냥 돌려보내라는 것도 모양이 이상한데다가, 가란다고 그냥 가실 것 같았으면 굳이 왕녀님이 여기까지 왜 왔겠나.

다시 말하지만, 왕녀님은 바보가 아니다.

“아가씨, 갑자기 왜···.”

어디서 구했는지 못 보던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왕녀님이 나와 눈을 마주치자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눈빛을 보면 분명히 나와 한 이야기들을 잊으신 것은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당연하다는 듯이 두 사람이 줄줄이 따라 들어오는데, 한 사람은 시니아 양이고 다른 한쪽은··· 페리아 족? 도대체 이게 무슨 조합이야?

미처 저지할 새도 없이 세 사람이 선장실 안으로 들어왔고, 왕녀님이 나타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블랑코는 시종일관 유지하던 포커페이스가 깨진 채로 그녀를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역시, 역시, 살아 계셨군요. 오랜만에 인사를 올립니다, 공주님··· 아니, 엘리안 전하.”

블랑코는 무너지듯이 그대로 자리에 꿇어 왕녀님께 예를 올렸다.

“과례는 거두세요, 블랑코 선생님. 선생님이 살아 계실 줄은 몰랐는데··· 다시 볼 수 있어 기쁘군요.”

“선생님이라니요, 당치않습니다. 주군이 시해당하고 후계자이신 1왕자 전하께서도 목숨을 잃으셨건만 비루하게 목숨을 연명한 소인배에 불과합니다, 저는.”

반쯤 숙였던 블랑코의 고개가 더욱 내려가며 일그러진 표정을 가린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는군.

왕녀님의 표정이 온화한 것으로 봐서 그녀에게 그리 나쁜 기억을 남긴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말하는 것과 태도로 볼 때 나름 충신(忠臣)에 가까운 사람 같기도 하고.

왕녀님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 그녀가 왕궁에 있을 때 그녀를 가르쳤던 선생님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그만 일어나세요. 과한 예를 감당하기 힘듭니다. 선생님이 살아계신 줄 알았다면··· 아, 지금은 내무대신이 되셨다고요?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부족한 능력에 비해 과한 직책을 받았지요. 어깨가 무겁습니다.”

내가 이상하게 이 오트라스 선장실에서는 자꾸 제삼자가 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 * *

겨우 두 사람의 감정을 수습하고 대화를 할 분위기를 만들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앉은 자리가 좀 그랬다.

내 옆에 왕녀님, 그 옆에 페리아 족이 앉고, 시니아는 왕녀님 뒤에 공손하게 시립했다.

페리아 족에게 인간의 예법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원래 이런 자리는 서로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는 법이다.

시니아가 빈자리에 앉지 않고 왕녀님의 뒤에 선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까 왕녀님 옆에 앉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위치가 왕녀님과 비슷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페리아 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앉을 자격이야 충분하지만, 상대는 그 사실을 모르잖아.

사실 인간의 기준에서 왕녀님 옆에 앉을 수 있는 위치의 여자가 몇 명이나 있겠으며, 그 여자가 여기에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고.

내 생각을 입증하려는 듯 블랑코의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예쁘기는 하지만 차림새도, 하는 행동도 신분이 높은 사람 같지 않은 그녀가 자리에 앉은 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나마 신중한 사람이니 직접적으로 말을 안 하는 것이지, 보통의 귀족들이었다면 일단 호통부터 쳤을 거다.

그리고 그 기색을 눈치챈 왕녀님이 선수를 쳤다.

“이분에 대해서는 우리 이야기가 끝나면 말하도록 하죠.”

그녀의 말에 블랑코의 눈이 커졌다.

“지금 ‘이분’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녀는 이 자리에 앉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졌어요. 그러니 우리 이야기를 먼저 하시지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던 블랑코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녀님의 말이니 일단 믿어보자는 것 같았다.

“먼저 남작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옳겠지요. 그동안 엘리안 전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흐음. 내용은 ‘감사’지만, 뉘앙스는 ‘지금까지는 감사했지만, 앞으로는 감사할 일이 없을 거다’라는, 그러니까 왕녀님을 데리고 가겠다는 뜻이겠지?

“별말씀을요. 왕녀님의 뜻에 따라 약간의 도움을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폐가 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물론 이런 말뿐만이 아니라 왕실로부터 남작의 도움에 대해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겁니다.”

온화한 표정의 블랑코가 갑자기 밉살맞게 보였다.

이 자식, 어떻게 해서든 왕녀님을 데려갈 심산이다.

그때 왕녀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분 모두 쓸데없이 혀에 칼을 세우실 필요 없습니다. 전 이미 총독님께 음, 몸을 의탁··· 했으니까요.”

“저, 전하!”

왕녀님의 발언에 블랑코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고, 나도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몸을 의탁하다니, 이게 사전적으로 보면 별거 아닌 말 같은데, 여자가 남자에게, 그것도 결혼 적령기의 여자가 비슷한 연배의 남자에게 이런 말을 쓰면 암묵적으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정상적이고 공식적으로 결혼한 아내는 아니더라도 약혼자, 애인, 첩··· 뭐 그런 게 되었다는 말이지.

그러니 블랑코가 소리를 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홱 소리가 나도록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았다.

이러면 나는 좀 억울한데?

아직 손도 못 잡아봤다고!

뭐라도 하고 오해를 받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블랑코 경, 흥분하지 마세요. 지금 경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니까.”

얼굴이 약간 상기된 왕녀님이 급히 진화에 나섰고, 그제서야 본래 표정으로 돌아간 블랑코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흠, 미안합니다, 남작. 충격적인, 음, 말을 들어서 그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미안하다는데 어쩌겠어.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때린 것도 아닌데 사과를 받아줘야지.

“그런데 엘리안 전하께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전하께서 다시 궁에 돌아오시기 위해서는 남작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방금, 고작 5초 전에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놈이 사과를 받아주기 무섭게 내게 쏘아붙였다.

이러면 진심으로 사과한 것은 맞는지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심은 의심이고, 일단 다른 오해만큼은 막아야 했다.

프레티아 왕국이 아무리 약소국이라지만 그래도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도 어떻게든 국가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후작과의 관계도 시원치 않은 지금 프레티아 왕국과 험악한 관계가 되는 것은 무조건 사양이다.

“허락이라니요, 저는 어디까지나 왕녀님이 몸을 피하실 곳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왕녀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섬을 떠나실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나는 슬쩍 왕녀님을 보았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그녀는 미동도 없이 블랑코를 보고 있었다.

“···그 시점이 지금이라고 해도, 저는 왕녀님의 결정에 따를 것입니다.”

저절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그녀가 이렇게 떠나면 나는 평생을 후회 속에 살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내가 평민의 자식이 아니라 고위 귀족이었다면.

아니, 왕자였다면.

차라리,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선원이었다면.

입 안에 비릿한 혈향이 차오른다.

“그렇다면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군요. 엘리안 전하, 국왕 폐하께서는 전하를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왕궁으로 돌아가시지요.”

드디어 블랑코의 입에서 그가 지금까지 벼르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끼어들거나 반대할 자격조차 가지지 못했다.

“데이먼 그 아이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은 왕실에 힘을 보태줘야 할 귀족이 있다는 말이겠죠. 내가 왕궁에 돌아가면 몇 달이나 왕궁에 있을 수 있나요? 석 달? 그보다 짧은가요?”

다행스럽게도 왕녀님의 첫 번째 대답은 간접적인 거절이었다.

대놓고 안가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프레티아 왕국에서는 대응하기 난감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다.

그렇다고 왕녀에게 ‘정략결혼은 안 하셔도 됩니다.’ 같은 다섯 살 먹은 애도 안 믿을 거짓말을 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역시 폐하의 말씀대로군요. 정략결혼이 그렇게 싫으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전하, 그렇다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쳇, 다 예상하고 모범답안을 뽑아 왔다는 건가.

현실적으로 외부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왕실의 공주님이 자유로운 연애 결혼을 하기는 힘들지.

연회나 파티에서 귀족 가문의 자제들과 얼굴도장 정도야 찍을 수 있겠지만, 첫눈에 반하는 불타는 사랑을 하지 않는 이상 정략결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날 수도 없다.

“그 말은, 결혼할 상대를 내가 선택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전하. 전하의 출중한 외모와 기품, 고귀한 성격은 이미 소문이 파다하니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게 누구라도 결혼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왕녀님이 누구를 선택해도 정략결혼이라는 뜻이잖아.

딱 정략결혼으로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 만나게 해주겠지.

자신감 넘치는 블라코의 표정이 이미 월척을 낚은 낚시꾼 같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리안 총독, 스펜서 남작을 선택해도 되겠지요?”

그녀의 말을 끝으로 선장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나 지금 프로포즈 받았어?

* * *

“엘리안 전하···.”

블랑코가 탄식하듯이 그녀를 불렀다.

그런데 반응이··· 내 예상이랑 조금 다르네?

“분명히 그대의 입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째서 가장 힘든 길을 선택하려 하십니까?”

물론 나도 그녀에게 고백을 받아서 기쁘기는 한데, 일단 내 의견을 좀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왜 너희끼리만 대화를 하는데?

내가 아직 결혼에 동의한 건 아니잖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무 놀라서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거지만.

“왕녀님,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꺼내자 엘리안이 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사정없이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초, 총독은 내가, 그, 그렇게···.”

“왕녀님, 이건 잘못된 겁니다.”

“···그런가요.”

“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치우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원래 이런 거 할 때 꽃다발 같은 것을 준비해야 했겠지만, 별수 없지 뭐.

“왕녀님, 원래 청혼은 남자가 하는 겁니다.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젠장,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짧게 숨을 쉬어 목에 긴장을 푼 나는 최대한 정돈된 목소리로 물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엘리안?”

짝, 짝, 짝, 짝.

결국 눈물이 터져버린 엘리안이 급히 고개를 흔들며 어색하게 내민 내 손에 그녀의 가녀린 손을 살포시 올리는 순간, 분위기를 확 깨는 느릿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이런 상황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진짜 이렇게 될 줄이야. 그래도 남작께서 출신과 어울리지 않게 양식 있고 품위를 갖춘 분이라서 다행입니다.”

블랑코의 말에 우리만의 세계에 빠져서 잠시 잊고 있었던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시니아 양은 좋은 건지 화가 나는 건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페리아 족의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박수를 친 사람은 블랑코였고.

그런데 예상했다고? 뭘?

“그것이 엘리안 전하의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이 꽤 되었으니 두 분의 감정이 미묘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본국에서도 하고 있었습니다. 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그래도 대응 방법을 구상해 둔 것이 다행이군요.”

두 사람의 감정은 개뿔, 험악하게 날 노려보는 것을 보니 내가 엘리안을 강제로 어떻게 하기라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구만.

그래도 대응책까지 생각해 놨다니 대단하기는 하다.

그녀와 내가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진다는, 극히 희박한 전개까지 생각했을 정도면 현 국왕이 진짜 그녀를 애타게 찾기는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내 여자’인 엘리안을 맥없이 내 줄 수는 없는 노릇, 수틀리면 박 터지게 싸우는 거지 뭐.

물론 높은 확률로 내 박만 터지겠지만.

“그래서 귀국의 대응 방법은 뭡니까?”

그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말이 생각보다 더 공격적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저쪽에서 우리에게 ‘아이고, 축하합니다, 행복하세요.’라고 할 리는 없으니 별로 상관없었다.

“두 분은 이제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쉬운 길은 남작께서 본국으로 망명을 하는 것입니다. 엘리안 전하의 반려가 되시니 합당한 작위와 영지가 주어질 것이고, 국왕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셔야 할 겁니다. 아마 해군과 관련된 일을 맡게 되시겠지요.”

응? 뭐야? 진짜 그렇게 쉽게 우리 관계를 인정한다고?

나와 엘리안 모두 예상하지 못한 블랑코의 대답에 당황해하자 블랑코가 싱긋 웃었다.

“지금 본국에는 굳이 왕녀님을 강제로 결혼시켜가면서까지 왕실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귀족은 없습니다. 이미 폐하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있거나 세력이 미미한 자들만 남았지요.”

그녀가 하기 싫은 정략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그게 나를 그녀의 짝으로 인정해 주어야 할 이유는 아니지.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저를 인정한다는 겁니까?”

“흠, 글쎄요. 남작은 스스로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남작, 고작 몇 년 전만 해도 일개 선원이었지요?”

나를 도대체 어디까지 조사한 거야?

나는 살짝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조사를 마친 놈들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까지 있겠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일개 선원이 고작 몇 년 만에 수 척의 선단을 이끄는 제독이 되고, 평민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귀족이 되고, 심지어 본국과 떨어진 섬의 총독까지 된 것이군요.”

어··· 그렇기는 하지.

갑자기 나를 추켜올리는 그의 말에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결론을 지었다.

“보통 사람은 방금 말한 세 가지 중 평생 단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남작은 그런 일을 무려 세 가지나 이루었군요. 우리는 보통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지요.”

영웅? 내가?

“물론 국왕 폐하의 유일한 혈육이신 엘리안 전하를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런 엘리안 전하께서 원하시는 일이 시대의 영웅인 스펜서 남작을 본국에 영입하는 것이라면 굳이 이쪽에서도 거절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내전을 겪더니 사람들이 아주 현실적으로 바뀐 건가, 원래 프레티아 왕국 분위기가 좀 그런 건가?

내가 평범한 이들보다 많은 것을 이룬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이 세상의 창조신께서 후원해주시는데 이것도 못 해서야 체면이 안 서지.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들에게만 적용되는 소위 ‘귀하신 분들’에게 나는 여전히 평민 출신의 근본 없는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그런 내게 왕실의 직계를 내어주겠다고?

“그건 제가 거절하겠어요. 그 말은 리안에게 폰테 섬을 포기하라는 말이겠죠?”

엘리안이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눈물 자국이 남기는 했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폰테 섬은 스코타 후작의 영지이니 내가 총독 자리를 포기하는 순간 폰테 섬은 다시 스코타 후작의 손에 들어갈 터였다.

그리고 지지기반도 없고, 기댈 곳도 없는 프레티아에서의 귀족생활이라.

그거 높은 확률로 왕따 엔딩 아니야?

그런데 왕녀님, 아니, 엘리안이 리안이라고 부르니까 음, 엄청 달콤하게 들리네.

그녀의 말에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몇 번 주무르던 블랑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두 번째 제안도 있습니다. 이건 두 분께 꽤나 어렵고 힘든 선택이라 가능하면 첫 번째를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만.”

“일단 들어보죠.”

“리안 스펜서 남작, 폰테 섬이라는 곳이 그대의 영향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 섬은 스코타 후작의 영지지요. 당연히 벨로키나 왕국의 영토구요.”

“네···.”

“반란을 일으키고 섬을 점유하십시오. 그리고 본국에 항복하면 폰테 섬은 본국의 영토가 되고, 남작은 폰테 섬을 영지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해상 강국인 세 나라가 전쟁의 후유증으로 당분간 무리한 군사행동을 벌이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본국은 이 상황을 이용해 벨로키나 왕국과 일레드 왕국의 중립 지대로서 폰테 섬을 활용할 것이구요. 물론 매우 위험한 줄타기가 될 겁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런데 가장 큰 허점이 있네.

“그렇게까지 해서 프레티아 왕국이 뭘 얻는 겁니까? 엘리안이야 강제로 데려가면 그만이고, 고작 나 하나 얻겠다고 벨로키나나 일레드 왕국과 척지겠다고 말하는 겁니까? 제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저에 대한 조사가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만.”

막말로 내가 반란을 일으키고 바로 프레티아 왕국에 항복하면 벨로키나 왕국이 가만히 있겠는가?

폰테 섬과 예쁘게 포장된 내 목을 달라고 압박하겠지.

그런데 고작 내 목과 내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강대국인 벨로키나 왕국의 협조를 빙자한 협박에 어깃장을 놓겠다고?

그런 거짓말을 누가 믿어?

냉랭한 내 말에 블랑코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물론 스펜서 남작의 능력이 출중하지만, 고작 남작 하나를 얻자고 강대국들과 싸울 정도로 본국이 강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최근에 내전을 겪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국력도 많이 소모되었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한 템포를 쉰 블랑코는 갑자기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약하다고 움츠러들기만 하면 영원히 약자를 벗어날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각국의 세력이 위축된 지금이 어쩌면 본국이 도약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폰테 섬의 지리적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심지어 특산품마저 가치가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일레드 왕국이 급속도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원인인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의 거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항로만 본국이 손에 쥘 수 있다면 벨로키나 왕국이나 일레드 왕국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강대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사람도 폰테 섬을 원하는 건가···.

“물론 남작에게는 최대한의 지원을 해줄 겁니다. 본국에 단 하나뿐인 함대를 파견할 수는 없지만, 사설 함대 창설 권한도 드리고, 본국의 항구 교역에 대한 면세권은 물론,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우선 수매권도 드리지요. 그렇게 해도 섬의 위치상 공격을 받으면 힘겨운 싸움을 벌이셔야겠습니다만···.”

“잠시만요, 리안은 굳이 반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어요.”

“네? 엘리안 전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명분이라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반란이라는 요식행위로서 스펜서 남작이 섬을 점유해야만···.”

엘리안의 말에 프랑코가 명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의를 시작하려는 순간, 그때까지 투명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페리아 족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블랑코 님, 당신은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처음으로 들린 낯선 목소리에 블랑코의 목이 천천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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