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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68화 (369/420)

< <368화> 인간이 아닌 증거 >

잠시 우리의 기색을 살피던 블랑코가 신중하게 물었다.

“인간의 대표라, 마치 당신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그대는 누구지?”

“우리는 에레페이노리안, 인간들이 페리아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

블랑코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런데 이렇게 막 공개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페리아족과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은 좀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든가 말이야.

내가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구상하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착 가라앉은 블랑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페리아족이라.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종족의 이름을 여기에서 듣게 될 줄이야. 남작, 남작의 생각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면 전하의 생각이십니까?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시던 전하라면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네,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설마 여기에서 사라진 페리아족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엄한 사람을 잡아다가 페리아족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구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사람 정도로 보이는데 갑자기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이종족이라고 하면 누가 쉽게 믿겠어?

“다른 종족의 땅이라고 주장하겠다니, 발상은 좋습니다만··· 물론 여기 이 사람의 외모는 전설과 비슷하긴 하군요. 하지만 고작 이런 얕은 수로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블랑코 경!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페리아족에 대해 전혀 믿지 않는 블랑코에게 엘리안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녀야 오랜 시간 페리아족과 교류했으니 그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으면 믿기 힘든 법이지.

어떻게 하면 그들의 정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에 페리아족의 그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대체 뭘 하려고··· 설마 정신계 마법을 사용한다거나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가는 만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건데, 그건 저들에게도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사라락.

“으헛?!”

“지금 뭐 하는!”

자리에서 일어선 페리아족은 거리낌 없이 상의를 풀어 헤쳤다.

그대로 드러나는 그녀의 새하얀 살결.

급히 시선을 돌리기는 했지만, 여성형의 둥근 곡선은 이미 내 눈에 박힌 다음이었다.

매끈한 도자기 같은 밋밋한, 어, 밋밋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 급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녀에게는 인간이라면 있어야 할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여성의 상체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포유류라면 응당 있어야 할 돌기나, 탯줄이 이어졌던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리안 총독! 뭘 그렇게 보는 겁니까?! 지금!”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엘리안이 두 눈을 가리고 소리쳤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역시 얼굴이 빨갛게 변한 채 고개를 돌린 블랑코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오! 당장 옷을 입으시오!”

“잠시만요, 블랑코 경. 흥분하지 마시고 그녀를 보시지요.”

“뭐요?! 스펜서 남작! 나를 뭘로 보고!”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하신 것 아닙니까? 확인해 보시지요.”

“······.”

침착한 내 말에 블랑코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엘리안 역시 눈을 가리던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나저나 시니아 양은 뒤쪽에 있어서 그런가, 한 발짝 물러나기는 했지만, 우리 중에는 가장 침착해 보인다.

슬쩍 표정을 살피니 당황한 기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오히려 호기심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하여간 이 아가씨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니까.

“허, 허어!”

드디어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본 블랑코의 입이 벌어졌다.

“우리는 인간들처럼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는 충분한 증거가 되었을 것 같군요.”

“이, 이럴 수가. 그렇다면 진짜···!”

다시 옷을 여미는 그녀를 확인한 나는 그녀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녀는 확실히 페리아족입니다. 페리아족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인간은 아니지요. 그리고 제가 처음 섬을 발견하던 순간부터 이미 섬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상당히 큰 마을을 구성하고 있더군요.”

“잠시,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남작. 이런 부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블랑코의 요청에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워낙 감정을 잘 숨기는 자라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은 긴장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원래 끝이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옷을 다 입은 페리아족 그녀는 우리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인간족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날카로운 블랑코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인간족을 대표할 수 없소. 아니,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인간 자체를 대표하지는 못하지. 그건 저 제국의 황제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요.”

“그렇군요.”

옷까지 벗어 재끼는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했음에도 페리아족의 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선선히 인정했다.

이럴 거면 도대체 왜 그 난리를 피운 거야?

애초에 나에게 먼저 상의를 했으면 조금 더 안전하고 원만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니 나랑 상의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구나.

블랑코의 말대로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굳이 대표를 찾는다면 각국의 국왕이 다 모이거나, 그 권리를 대리할 전권대사가 모여야 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할 방법이 있기는 한가?

“하지만!”

그때 블랑코가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인간의 대표 중 한 사람인 프레티아 왕국의 국왕 폐하께 그대의 종족에 대한 말 정도는 꺼내 볼 수 있소.”

그사이에 계산이 끝났다고?

말도 안 되는 블랑코의 상황 분석 능력에 감탄하고 있는데, 감정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인간족 전체와 언약을 맺고자 하는 겁니다. 이미 인간들의 마법사 집단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인간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마법사 집단이라면 마법사 길드를 말하는 거겠군. 이번에 남작과 함께 폰테 섬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은행 관련 인사들이겠어. 그들의 대답은 어땠소?”

어, 잠깐만? 일이 이렇게 풀린다고?

“마법사들은 우리에게 충분한 대가를 받았고,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두 섬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으하하하, 그렇군!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그대들에게 제안을 해도 되겠소?”

응? 두 섬이라고?

나는 그녀가 말한 두 섬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블랑코는 미처 거기까지 인지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감정을 잘 숨기던 사람이 큰 소리로 웃어젖힐 정도니,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블랑코의 말에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모습으로 블랑코를 바라보았다.

이를 허락이라고 생각했는지 블랑코는 급히 표정을 수습하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본인이 스펜서 남작과 엘리안 전하에 대한 일은 폐하께 전권을 위임받았지만, 감히 타 종족과의 교섭권까지 받지는 못했소. 하지만 내가 아는 폐하라면 결코 그대들과 적대하려 들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본국으로 함께 가서 폐하를 알현하지 않겠소? 내 명예를 걸고 그대들과 본국의 동맹을 성사시키겠소.”

“하지만 당신은 인간의 대표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왕도.”

“물론 그렇소.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결국 당신들은 당신들의 고유 영토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그런 것이라면 본국과의 동맹이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블랑코의 말은 과장이 섞여 있었다.

강대국들이라면 또 모를까, 약소국인 프레티아 왕국의 인정이 국제 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발휘하겠는가.

극단적으로 말해서 벨로키나 왕국이 페리아족의 영토 따위 인정 못 한다고 버티면 프레티아 측에서는 딱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 말이 이렇게 되면 내 총독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설마 페리아족이 나를 적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좀 걱정이 된다.

“우리는 인간의 계약에 대해서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대의 제안이 어떤지 판단하기 어렵군요. 그러니 그대의 제안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구원자이자 보호자인 리안 님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전개에 나도 모르게 맹한 반문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뜬금없이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나에게 맡긴다고?

내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당신들을 모조리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거 알아?

내가 그동안 저들의 존재를 왜 숨겼다고 생각하는가?

이미 사라졌다는 고대의 종족.

그들의 아름다움은 고문헌에 충분할 정도로 나와 있으니, 높으신 분들은 공생보다 공격을 택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

머릿수로 봤을 때 그들은 인간 전체는커녕 인간의 국가 하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니 말이다.

물론 그들의 마을을 둘러싼 결계가 있고, 지금 당장 인간에게 그 결계를 뚫을 방법이 없으며, 그나마 결계를 뚫을 가능성이 있는 마법사 길드와는 협약을 맺었다고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약속도, 영원히 불가능한 것도 없는 법이다.

“스펜서 남작, 그대가 이들의 존재를 숨겨왔던 이유는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을 공개하겠다는 것은 역시 생각해둔 방법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아니요, 저도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만.

“크흠, 생각해 둔 것이 있지만 제 생각이 블랑코 경의 생각과 같지는 않겠지요.”

“이런 중요한 내용을 미리 알려주었다면 제가 미리 준비를 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물론 남작의 입장에서 이들의 존재를 함부로 발설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그러게요, 이런 중요한 내용을 왜 내가 당신과 같은 타이밍에 알아야 하는지 나도 의문입니다.

미리 알았다면 내가!

···말렸겠지, 그래, 분명히 절대 반대를 외치면서 말렸을 거야.

그래서 안 알려준 건가?

“제가 바라는 것은 별게 아닙니다. 섬에서 평화롭게 그들만의 삶을 영위하는 페리아족을 외부의 위협에서 보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폰테 섬을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본국은 절대적으로 남작의 의사를 존중할 테니까요. 아마 폰테 섬을 페리아족의 왕국, 아니, 종족의 영토로 인정하고 본국이 그 보호국을 자청할 수도 있을 겁니다.”

보호국? 와, 엄청 흥분한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날로 드시려고 말장난을 하시네?

“보호국이라니요, 페리아족은 프레티아 왕국의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들이 숨기고자 마음을 먹으면 종족 전체는 물론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까지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는데 무슨 보호가 필요하겠습니까? 단지 이들은 우리 인간들과 어쩔 수 없이 접촉을 해야 한다면 그들의 삶이 번잡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내 말을 들은 블랑코의 눈이 빛났다.

역시 똑똑한 놈이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캐치한 모양이다.

“마법, 마법이군. 그래서 마법사 길드와 협약을 맺은 것이야. 좋소, 남작. 그대가 하는 말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페리아족은 그렇다고 해도 남작은 보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저는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만.”

대답을 하면서도 이건 외통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충분한 보호는 개뿔, 당장 델라 항구로 돌아가는 것도 꺼림칙한 판인데 무슨.

“표정을 보아하니 굳이 내가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남작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닐 겁니다. 어차피 페리아족이 남작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으니 우리도 그대를 내치기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전하의 반려가 될 남작을 굳이 내칠 생각도 없습니다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으로 들렸다.

프레티아 왕국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딱 벨로키나 왕국이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의 국력만 갖추고 있었어도 냅다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벨로키나 왕국을 배신하고 프레티아 왕국에 붙는 꼴인데 국력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블랑코 경의 제안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이죠.”

일단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말을 꺼냈지만, 블랑코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일단 본국으로 가서 국왕 폐하를 알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전하와 남작이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국왕 폐하께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왕이면 이 기회에 성대하게 결혼식도 하시고 말이죠.”

“일단 저도 무리를 이끄는 입장이라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우기는 힘듭니다. 그러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내일 꼭 가부간에 확답을 드리겠습니다.”

블랑코의 말대로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 목은 예쁘게 잘려서 성문에 걸리고, 엘리안은 방에 유폐되었다가 늙은 귀족 놈에게 팔려 가고, 페리아족인 친구는 커다란 새장에 갇힌 수집품이 될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그렇다고 ‘너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워 내 발로 왕궁에는 못 가겠다’라고 할 수도 없으니 일단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지.

“으음··· 그렇기도 하군.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보안이 매우 중요해 보이니 왕궁에 따로 연락은 하지 않도록 하지요. 내일 꼭 좋은 대답을 받았으면 좋겠군요.”

* * *

눈감고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선장실로 돌아오자, 자연스럽게 엘리안이 나를 따라 들어왔다.

“총독님···.”

정신력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탈진하기 직전인 나를 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런데 왜 다시 총독님이지?

“아가씨, 그냥 리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 그래요, 리안. 리안도 이제 아가씨니 왕녀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크흠. 두 분 좋은 분위기에 죄송합니다만.”

갑작스러운 관계 변화에 따라 서로 호칭을 정리하고 있는 달콤한 시간은, 갑자기 난입한 시니아 양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이 아가씨는 도대체 왜 따라다니는 거야?!

그보다, 언제 따라 들어왔지?!

살짝 짜증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총독님께는 일단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하지만 여기 이분의 의지가 확고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뭐, 우리도 얼마 전에 내용을 알게 된 것도 있지만.”

시니아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어느새 페리아족의 그녀 역시 방 안에 들어 온 상태였다.

후우, 이 사람들이 선장실을 무슨 공용 홀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알겠습니다, 시니아 양. 이미 끝난 일이니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적당히 대답하고 달달한 시간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페리아족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리안 님, 당신은 그의 제안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지 않다기보다는···.”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일단 저들의 소굴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에 하나 블랑코가 한 제안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프레티아 왕궁에서 국왕의 제안을 ‘거절’하면 과연 곱게 프레티아 왕국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리안 님의 마음에는 불안함이 가득하군요.”

“후우, 혹시 그 다른 사람의 기억이나 정신에 개입하는 거, 최대 몇 명까지 됩니까?”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이라 지금까지는 궁금함을 꾹꾹 참아왔지만, 이번에는 꼭 물어봐야겠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할 것 아냐?

“지금은 안 됩니다.”

“네?”

“우리는 음, 그러니까 ‘나’는 우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하지 못하면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하, 그래, 그래야 말이 되지.

그런데 그럼 우리 안전은?

아무리 약소국이라도 무려 왕궁이다.

기사만 최소한 수십 명은 있을 거고, 근위병도 수백은 있겠지.

네이선을 포함해서 선원들까지 몽땅 끌고 가도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 필패다.

벨로키나 왕국을 등에 업기에는 내 신분이 너무 보잘것없고, 원래 내 뒷배가 되어줘야 할 스코타 후작은 반쯤 적대 관계이니, 원.

“총독님, 저들을 따라갔다가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것이 두려운 거죠?”

음?

시니아가 내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이 아가씨도 아카데미에서 천재로 유명했다고 했지?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니 나보다는 낫겠다 싶어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왕녀님, 아니, 엘리안의 말대로라면 현 국왕은 엘리안과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저 역시 귀족이라고 하지만 영향력은 아예 없는 수준이죠. 저들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그 마수를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후후후, 그러실 줄 알았어요. 총독님의 성향은 진즉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총독님에게도 쓸만한 패가 있잖아요?”

어? 내가 그런 게 있어?

“쓸만한 패라니요? 상대는 무려 국왕입니다. 최소한 비슷한 왕국 수준이 아니라면···.”

말을 하다 보니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말끝을 흐리자 시니아 양이 씩 웃었다.

“그래요, 왕도 아니고, 심지어 귀족조차 아니지만, 그 어떤 나라의 왕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심지어 총독님과 친분도 있고 말이죠.”

친분 정도가 아니지.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폰테 섬에 잡아 놓고 싶은 사람인데 말이야.

그동안 나에게 받은 것도 많고, 본인의 이익과도 직결되는 문제니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안, 일단 방으로 돌아가 계세요. 몇 가지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알았어요, 리안. 그대는 늘 방법을 찾아내곤 했죠.”

엘리안이 나에게 신뢰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인사에 화답한 나는 페리아족을 보며 물었다.

“일단 이것만 확실히 합시다. 그쪽이 원하는 것이 폰테 섬에 당신들의 왕국, 그러니까 나라를 세우고 인정받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평온하게 살면서 인간과 조금씩 교류를 하고 싶은 겁니까?”

“우리는 결국 하나가 될 겁니다. 다만 하나가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지요.”

“시간만 있으면 된다는 거죠?”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잠시 바라보던 페리아족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대충 이쪽 제안은 틀이 잡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데 하나가 된다는 게 무슨 말이야?

종족 구성원 전체의 의식이 완전히 합쳐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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