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화> 애매하게 조금씩 거슬려! >
“당연히 함께하겠네. 어차피 페리아 족과 맺은 협약도 있으니, 우리 길드로서도 손 놓고 있을 입장은 아니니까 말이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제먼 씨는 흔쾌히 우리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리고는 엘리안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그동안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하.”
“아니요, 미리 밝히지 못한 내 잘못인데 어찌 그대를 탓하겠소?”
사과하는 제먼 씨의 표정을 보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겠다.
프레티아 왕국으로부터 반환 요청을 부탁받은 길드 측과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이 아닌가.
내가 비록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원숭이도 이 정도면 엘리안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지 않겠어?
“내일까지 확답을 주기로 했다고?”
“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서 부탁드리는 거구요.”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일단 은행에 다녀오겠네. 자네 말대로 혹시 모르니 길드에 내 행선지를 밝혀 놓는 것이 좋겠지. 함부로 밝힐 일은 아니지만 프레티아 왕국이라면 길드와 쉽게 척을 질 수는 없을 거야. 그쪽과도 꽤나 긴밀한 관계거든.”
익살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는 제먼 씨를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세계 경제의 큰 축을 맡고 있는 은행을 운용하는 것은 물론, 최근의 핫이슈인 마법사들이 모인 집단인 마법사 길드의 고문쯤 되면 아무리 일국의 국왕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제먼 씨의 말로 미루어보면 그 외에도 꽤 얽힌 일이 있는 모양이다.
* * *
제먼 씨가 급히 은행으로 떠난 뒤 나는 간부 회의를 소집했다.
지금까지야 기밀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간부들에게도 엘리안과 페리아 족에 대해서 숨겨왔지만, 이제 숨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와 동행할 사람도 뽑아야 했다.
예상은 했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간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며 가며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하던 아가씨가 무려 왕족이라니, 기가 막히겠지.
게다가 그냥 수줍음이 많은 이상한(?) 원주민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수백 년 전에 사라진 다른 종족이라니, 얼마나 황당하겠어?
중구난방으로 떠들며 정신적 충격을 해소할 시간을 준 나는 적당한 시점에 손을 들어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왕궁에 함께 갈 사람이 필요해. 선단 관리를 할 사람도 필요하고 번잡하게 움직일 수는 없으니, 최소 인원으로 한 세 명만 갔으면 하는데.”
“저요! 저 가고 싶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을 반짝이던 우르타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저거 안 데리고 가면 최소한 열흘은 삐질 기세다.
별수 없이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경쟁적으로 아인델프와 네이선의 손이 동시에 올라갔다.
“저도 가겠습니다.”
“제가 가지요.”
평소라면 네이선을 반드시 골랐겠지만, 이번에는 좀 애매하다.
네이선의 실력이 필요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네이선이 있건 없건 망했다는 뜻이니까.
차라리···.
내가 말석에 앉은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자 담담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작전관 엘리엇이 입을 열자 다른 이들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엘리엇의 능력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폰테 섬에서 전투를 경험한 간부들은 모두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크흠, 제 생각에 누가 가더라도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사실 안 가는 것과 다를 것도 없지요.”
“왜지?”
“상대해야 할 사람이 무려 국왕입니다. 누가 함께 가더라도 국왕을 알현하는 자리에 함께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고작 서너 명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에 대한 대비는 제독께서 이미 하신 제먼 님과의 동행 요청으로 충분하죠.”
“그럼 자네 생각에는 나 혼자, 아니, 엘리안 왕녀 전하와 나만 가야 한다고 생각해?”
“한 사람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한 사람이라면 본인을 말하는 것이겠지.
나도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엘리엇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여기에 앉은 대부분의 인원이 항해나 무력에 특화된 사람들인데, 왕궁에서는 두 능력 모두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지혜가 뛰어난 엘리엇은 그나마 내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할 만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라면 작전관 본인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저 역시 작전관의 능력은 인정합니다.”
“응?”
“하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하기 어렵군요.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게론드의 참전에 내가 그를 바라보니, 게론드가 눈에서 불꽃을 내뿜을 기세로 엘리엇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천재들의 자존심 싸움인가?
이게 그 자강두천인가 하는 거야?
게론드의 참전 선언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엘리엇은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회계사님도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셔서 힘든 일정이 될 겁니다. 그리고 동행할 사람을 고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일이라?
내가 뭘 빼먹었지?
계속하라는 뜻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장실에 걸려있는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점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먼저 여기, 니파 항구에 대한 입항 허가와 니파 항구 인근 함대에 대한 소개를 요청해야 합니다.”
“선단을 니파 항구로 옮기자는 말인가?”
“네, 제독께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선단을 안전한 이곳 필라비스에 두겠다고 하셨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애초에 이 선단은 제독이 없으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엘리엇의 마지막 질문은 앉아있는 모두를 향했고, 간부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민망하기는 했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내리며 질문을 던졌다.
“알았어. 왕궁과 가장 가까운 니파 항구로 선단을 옮기는 것은 그렇다고 해. 하지만 인근 함대의 소개를 요청하라니, 그런 요청을 받아 줄 리가 없잖아.”
“아마 받아 줄 겁니다.”
“어째서?”
“제가 알기로 프레티아 왕국에는 함대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있는 함대도 최근의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지요.”
“흠, 계속해봐.”
“저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면 굳이 함대까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고, 나쁜 마음이 전혀 없다면 니파 항구 인근에 주둔 중인 함대를 국내의 다른 항구로 순시를 보내거나 가벼운 임무를 맡기면 그만입니다. 아쉬운 것은 저쪽이니 이 정도 일은 들어주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나는 잠시 그의 말에 대해 고민했다.
원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작전관의 말은 이해했어.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무슨 이득을 얻는데?”
“일단 제먼 님이 일행 중에 있으니 제독 일행에게 공개적으로 큰일을 벌이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제독의 일행이 왕궁을 벗어난 후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요.”
“은밀하게 공작을 벌일 수도 있다?”
“네. 그러니 이동 거리는 짧으면 좋습니다. 그래서 선단이 니파 항구에 입항해야 하는 것이고, 연안 경비대의 소형 함정들은 몰라도 해군 함대 소속의 전투함들을 상대로는 요행을 바랄 수도 없으니, 함대를 일단 니파 항구에서 빼놔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장이 빈약한 연안 경비대라고 해도, 작정하고 선단을 적대하면 우리는 살아남기 힘들다.
고작 상선 한 척과 용병함 한 척을 제압할 수 있는 전력도 안 되면 경비대라는 호칭을 쓸 자격도 없겠지.
하지만 엘리엇의 말대로, 중소형 함정밖에 없는 연안 경비대라면 요행을 바랄 수 있어도, 중대형 함선으로 구성된 함대가 상대라면 요행조차 바랄 수 없기는 했다.
“물론 이런 조치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고, 상황이 그렇게까지 흐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준비는 최대한 많은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요청은 상대에게 상당히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거야. 국가를 상대로 무장을 해제하라고 말하는 꼴이잖아.”
“제독에게 먼저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들의 본거지로 오라고 한 것은 상대방입니다.”
“하지만···.”
이봐 엘리엇, 애초에 그들과 나는 동격이 아니잖아.
“제독께서 직접 말씀하시기 곤란하다면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 * *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보낸 엘리엇은 자신의 요구를 모두 관철시키고 돌아왔다.
그가 실패할 것을 대비해서 여러 가지 변명을 구상하던 내가 바보 같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굳이 우리가 말할 필요도 없이 프레티아 왕국의 함대는 지금 니파에 없다고 합니다. 벵가로쉬 항구 근방에 머물면서 일레드 왕국을 경계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프레티아 왕국이랑 일레드 왕국이 좀 험악한 관계이기는 하지.”
원래 국경을 마주한 나라들이 다 그렇듯, 애초에 프레티아 왕국과 일레드 왕국의 관계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레드 왕국의 꼬임에 넘어간 2왕자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 반란을 현 국왕이 제압하면서, 지금은 서로 대포만 쏘지 않고 있을 뿐, 관계는 이미 최악이었다.
약소국인 프레티아 왕국이 기분 나쁘다고 일레드 왕국을 상대로 선빵을 칠 확률은 낮았지만, 만약 일레드 왕국이 벨로키나 - 쿠샤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아마 프레티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프레티아 왕국의 함대가 일레드와 가까운 벵가로쉬 항구에 주둔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니파 항구의 연안 경비대 주둔지에서 가장 먼 부두를 내어주고, 인근 2km 내로는 연안 경비대도 접근시키지 않겠답니다. 다만 니파 항구로 이동할 때 본인도 태워달라고 하더군요.”
“일행이 많지만 않다면 상관없지. 그나저나 수고했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제독.”
* * *
니파 항구 인근에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난리가 났다.
연안 경비대 소속의 경비정 네 척이 우리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붙었고, 연안 경비대장이라는 늙은 중령이 오트라스에 탑승해서 블랑코의 시중을 들었다.
음, 솔직히 보기에 좋지는 않더라.
예를 들어 이런 거다.
한 1m쯤 떨어진 어린아이 손가락 두께의 로프를 보고는.
“아이고, 내무대신 각하, 발을 조심하십시오.”
한 10m쯤 앞에서 물건을 옮기는 선원들을 보더니.
“어허! 거기 당장 비키지 못해! 당장 그 위험한 물건을 각하 앞에서 치우게!”
심지어 입항 상황 보고를 위해 내게 접근하던 네이선에게는 칼까지 뽑아 들었다.
“네 이놈! 어딜 다가오는 거냐! 할 말이 있다면 거기에서 말해라!”
네이선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이 할아버지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다 늙어서 무슨 부귀영화를 더 누리시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원.
“으음, 중령, 그만하지. 이미 전달받았겠지만 앞으로 여기 오트라스 호가 부두를 떠날 때까지 연안 경비대는 접근 금지일세. 자네도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군.”
“하지만 각하! 그렇다면 각하의 호위는 누가 하겠습니까? 귀하신 분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는 것도 죄스러운데···.”
와, 이 할아버지 선 넘으시네?
내 오트라스가 어때서!
엘리안도 아무런 불만 없이 타고 있는데 당신이 뭐라고 내 오트라스를 누추하다고 해?!
블랑코가 살짝 언성을 높여가면서까지 겨우 연안경비대장을 쫓아내자, 이번에는 항구 경비대가 오트라스의 현문 아래에 도열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사람은 항구관리관이나 치안관이 아니라 무려 니파 항구를 관리하는 무슨 자작이셨다.
블랑코 당신, 조용히 가자고 했잖아!
“부두 인근부터 왕궁으로 향하는 가도까지, 잡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비워두었습니다. 저 앞에 준비된 마차를 타고 이동하시면 됩니다. 항구 외곽에 호위를 위한 기사단과 병력이 도착해 있습니다.”
“잘했네. 자네의 이번 일 처리에 대해서는 국왕 폐하께 상신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내무대신 경.”
아니, 미친놈들인가?
그러니까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우리가 위장을 하는 게 아니고 도로를 비웠다고?
이게 다 죽이면 목격자가 없으니까 암살이라고 주장하는 거랑 뭐가 달라?
내가 어처구니가 없거나 말거나 일은 진행되었고, 엘리안, 시니아, 페리아 족이 마차 하나를, 나와 블랑코, 제먼 씨가 마차 하나, 엘리엇, 게론드, 우르타··· 가 마차 하나를 탔다.
보안을 위한다는 이유로 창문도 닫고 한참을 달린 후, 마차가 느려지며 주변이 소란스럽기에 그제야 슬쩍 창문을 열어 밖을 살펴보았다.
장비부터 정예병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마차 주변에 도열하는 중이었다.
장창과 방패를 들고 번쩍이는 하프 플레이트까지 갖춰 입은 병사들.
한쪽에 보이는 인원만 30명은 넘어 보이니, 다하면 100명도 넘는 병력인 것 같다.
그리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기사들까지.
물론 전투를 위해서 마갑에 풀 플레이트 메일까지 완전 무장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사가 다섯은 넘어 보이니 이 정도면 웬만한 영지 하나는 찜쪄먹을 수준이다.
“호위대가 합류한 모양이군요.”
블랑코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병력이 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불안하다.
저 병력이 단순한 호위를 위한 병력이라면 상관없지만,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저항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니까.
“엘리안 전하께서는 국왕 폐하를 그리 믿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만, 전하에 대한 국왕 폐하의 호의는 진심이니까요. 아무리 국왕 폐하라도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이는 것이 쉬웠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네.”
글쎄, 그 말을 온전히 믿어도 좋을까?
지구나 여기나 권력투쟁을 위해 피붙이의 피를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걸.
차라리 우르타 대신 네이선을 데리고 왔어야 했어···.
물론 네이선이 아니라 알렌 경을 데리고 왔어도 결과가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 참, 알렌 경은 섬에 남았다.
알렌 경 본인은 엘리안을 호위하겠다고 나섰지만, 엘리안이 직접 그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꼭 본인을 호위하겠다면 이번에 프레티아 왕국 근위기사단에 복귀하라고 했더니 바로 찌그러지더라고.
결국 그의 진심은 프레티아 선대왕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엘리안 개인에 대한 충성, 아니, 애정이라고 인정한 꼴이다.
아, 그러고 보니 진짜 위험할 수도 있겠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돌아가서 날 죽이겠다고 난리 치는 거 아냐?
그런 거 있잖나,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 부숴버리겠어!’ 이런 똘끼를 부리는 미친놈들 말이다.
“그리고 창피한 말이지만 아직 국내의 치안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블랑코의 말에 고개를 드니, 그가 살짝 시선을 피하며 설명했다.
“비록 정의를 위해서라지만 한 해가 넘도록 내전이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고 국토가 황폐해진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들끓는 도적들입니다. 전투에서 패한 패잔병들이 주축이라 토벌도 쉽지 않구요.”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꽤 지나지 않았습니까? 상대할 적이 없으니 영주들도 도적들에게 꽤나 신경을 쓸 텐데요?”
영주들이 도적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도망친 농부들이 주축인 도적들이 감히 병사들이 호위하는 영주의 물건이나 대상을 건드리지는 못하니 말이다.
하지만 패잔병들은 다르다.
일단 조금이라도 군대를 겪어봤고, 대부분 실전경험도 있다.
거기에 무장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대상은 물론 작은 마을까지 습격할 수 있으니까.
자기 영지에 그런 위험한 놈들이 있다면 기를 쓰고 잡아 죽이거나 최소한 다른 영지로 쫓아내려고 노력이라도 하게 마련이지.
하지만 내 말에 블랑코는 난처한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당연히 쉽지 않겠지.
영주가 토벌을 하려고 한다면 이리저리 도망 다니거나 숨을 테니까.
그래도 아주 불가능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닐 텐데?
“사실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귀족들의 사병이 상당히 약해졌거든요.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국왕 폐하의 중앙군은 국경을 경계하기에도 빠듯한 상황이라.”
귀족 세력의 약화와 중앙집권화라.
이제 고작 20살도 안 된 철부지 국왕이 생각할 수 있는 발상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이 사람의 생각인가?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 *
내 불안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여행은 순조로웠다.
최고급 마차는 마차치고 꽤나 괜찮은 승차감을 자랑했고, 식사 때마다 길에서 먹는 것치고는 제법 먹을 만한 음식이 나왔다.
물론 마을에 들르지는 못했다.
경로 자체가 집단 거주지를 피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슬쩍슬쩍 열어서 본 창문 밖으로 문명의 흔적을 거의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정도 인원이면 식량은 몰라도 식수를 구하는 것도 일일 텐데 이런 꼼꼼한 계획을 며칠 만에 만들어 실행할 수 있다니, 내전의 여파인 걸까?
그렇게 닷새쯤 이동해서 슬슬 여행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봐야 하나 싶을 때쯤, 완전히 창문을 열어젖히고 밖을 내다보던 블랑코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왕궁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궁에 도착하시면 오늘은 일단 여행의 피로를 푸시고, 내일 국왕 폐하를 알현하게 될 겁니다. 모두 잘될 테니 걱정하시 마십시오, 남작. 국왕 폐하께서 건강한 전하의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눈에 선하군요. 어쩌면 오늘 밤에라도 엘리안 전하를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처음부터 정말 이상했는데 말이야, 정말 국왕이 엘리안을 좋아하는 거 맞아?
내가 몇 번이나 물었지만 엘리안은 그렇게 친하지 않다고 했다고.
물론 착한 데다가 왕위와 상관이 없는 그녀는 배다른 남동생을 특별히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딱 그 정도라고 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