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화> 다시 다가온 기회 >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궁이라는 곳에 와 봤지만, 딱히 감회가 새롭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더 크고 화려한 스코타 성 정도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규모도 상당한 차이가 나고, 방어력 강화에 집중한 스코타 성과 달리 편의와 화려함에 중점을 둔 왕궁은 전혀 다른 공간이었지만, 어차피 내게는 그냥 나와 상관없는 불편한 공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일행이 모조리, 정말 하나하나 다 쪼개졌다는 것이었다.
엘리안은 당연히 마차까지 마중 나온 시녀들에 둘러싸여 원래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향했고, 페리아 족의 그녀는 외국의 사신이 머무는 건물에, 시니아 양은 하급 귀족 자제가 머무는 곳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타국의 귀족들이 머무는 곳, 제먼 씨는 국왕의 개인적인 손님이 묵는 곳, 게론드, 엘리엇, 우르타는 귀족들의 시종이나 호위병이 머무는 곳에 방을 배정받았다.
남자들만이라도 같은 곳에 있게 해 달라고 했는데, 블랑코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왕궁의 예법상 그럴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방으로 배달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혹시 엘리안이라도 왔나 싶어서 급히 문을 열었더니 시종의 뒤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낯선 노인이 보였다.
“음?”
“페이트 후작 각하십니다. 스펜서 남작님.”
페이트 후작이라면 뒤늦게 데이먼 국왕 측에 가담해서 전세가 기울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람이 아닌가.
프레티아 왕국의 내전에서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라 소문은 꽤 들은 적이 있었다.
내전의 일등 공신이니까 지금쯤 상당히 높은 자리를 맡고 있을 텐데?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리안 스펜서 남작입니다.”
“만나서 반갑소, 남작. 늦은 시간에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굳이 이 시간에 나를 방문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나는 일단 태연하게 그를 맞이했다.
어차피 용건이 있어서 왔으니 결국 스스로 밝히게 될 테니 말이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신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허허, 우유부단한 늙은이가 무슨 공을 세웠겠소. 그저 소문일 뿐이지.”
겸양의 말을 하며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시종이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와인을 요청해서 마시던 중이었기에 나는 잔을 하나 더 꺼내며 물었다.
“혹시 와인을 한잔하시겠습니까?”
“대양을 누비는 사나이의 호쾌함이 묻어나는군. 허나 지금 할 이야기가 술과 함께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양하겠소. 물이나 한잔 부탁해도 되겠소?”
술을 마시면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상대가 술을 마실 상황이 아니라서 안 마시겠다는데 나 혼자 마시는 것도 뻘쭘한 일이라 나는 물 두 잔을 들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맙소, 스펜서 남작.”
“별말씀을요. 그런데 후작 각하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일부러 발걸음 하신 겁니까?”
비록 후작이라고 하지만, 엘리안과 관계있는 국왕도 아니고 단지 타국의 귀족일 뿐이니, 나로서는 별다르게 아쉬울 것도 없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무대신에게 그간의 이야기는 들었소. 먼저 엘리안 전하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바요. 그대가 아니었다면 전하께서는 벨로키나의 스코타 후작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 아니, 그 전에 살아서 반역자의 손에서 탈출도 못 하셨을지도 모르겠군.”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엘리안을 플라비스 항구에서 밀항시킨 것까지 알아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고드실카 호가 실종되기는 했지만, 아는 사람이 결코 많지는 않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일단 내가 대답을 좀 해야겠지?
“후작 각하. 죄송하지만 스코타 후작께서는 제 주군이 되십니다. 어휘 선택에 있어서 조금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관계가 파탄 직전이라지만 일단 나는 스코타 후작의 봉신인데 대놓고 ‘스코타 후작의 마수’라니, 충성심 높고 성질 더러운 놈들은 당장 결투를 신청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작 정도 되는 이가 실수로 그런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 일부러 그랬겠지.
내 예상대로 나를 떠보기 위함이었는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남작은 스코타 후작의 봉신이었지. 무례를 사과드리겠소. 나이가 들어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오.”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지만 이미 상대가 사과한 마당에 붙잡고 늘어질 만한 일도 아닌지라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고 그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알겠습니다. 손님 된 입장에서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가시를 하나 집어넣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얻어맞기만 하는 건 내 취향에 맞지 않아서 말이야.
“허허, 그렇지,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지. 내일 국왕 폐하를 알현해야 할 남작과 분란을 일으키면 폐하께서 이 늙은이를 얼마나 싫어하시겠소? 앞으로 조심하리다.”
도대체 왜 떠본 걸까?
단지 스코타 후작과 나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스코타 후작과 나의 관계 정도는 굳이 내게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내가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자 페이트 후작이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남작은 참으로 의심이 많으시군. 하긴, 맨손으로 그만한 위업을 이루려면 당연히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야 하겠지. 사실 이 늙은이가 남작을 찾아온 이유도 바로 그것이오.”
“네?”
뚱딴지같은 말에 내가 반문하자 그는 품에서 정갈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것을 좀 보시겠소?”
펼쳐진 종이는 세계지도였다.
그 세세한 정도로 볼 때 국가에서 군사 기밀로 취급할 수준의 지도로 보였다.
보통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항해용 지도에는 군항의 위치가 표기되지도 않고, 각 항구와 해안의 방어설비에 대한 기록도 없으니 말이다.
“이것은 제가 봐도 되는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허허, 걱정 마시오. 정말 중요한 내용은 지워놓은 지도니까.”
“글쎄요, 괜찮다고 하시지만 저로서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군요.”
“그럼 일단 들어보시오, 남작. 아마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왜 지도를 꺼내 놓았는지 알게 될 거요.”
별수 없이 내가 자세를 고쳐 앉자 후작이 설명을 시작했다.
“남작도 잘 아시겠지만 일레드 왕국과 벨로키나 왕국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소. 최소한 수년, 두 나라의 해상 패권에 대한 욕심을 감안하면 십수 년 정도는 두 나라가 화해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
그랬다.
두 나라가 서로를 아무리 미워하더라도 총력전을 펼치기 어려운 이유다.
고금을 통틀어 상륙전만큼 위험하고 어려운 전투는 없고, 두 나라 사이에는 케이라, 바티아넨, 프레티아 세 왕국이 있으니 현실적으로 육로로 서로를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국력이 엇비슷한 나라에 총력을 다한 상륙전을 펼친다? 오히려 대패를 당하고 역공당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 바다 위에서만 죽어라 싸울 수밖에 없겠지.
이번에 연합을 맺었던 쿠샤 왕국은 아예 극서에 있는 나라이니 두 나라의 총력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하지는 않을 테고 말이다.
이번 연합은 그나마 시논 섬이라는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가 있으니까 성립되었지만, 쿠샤 왕국이 대륙 반대쪽에 위치한 일레드 왕국 본토에 욕심을 낼 리가 없지 않나.
“이번 전쟁의 결과로 일레드 왕국은 내해 서부, 그리고 서해 항로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어버렸소. 그러니 어떻게든 시논 섬과 케르빈 제도를 탈환하고 싶겠지만 해군 전력에 심대한 피해를 입은 당장은 어렵겠지. 반대로 벨로키나 왕국도 마찬가지요. 전쟁에서 이기고 케르빈 제도를 통제하게 되었지만 딱 거기까지요. 감히 일레드 왕국의 본토에 대한 공격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지.”
당연한 말이다.
일레드 왕국의 해군이 완전히 소멸한 것이라면 몰라도, 해안포대로 도배된 항구에서 전력이 비슷한 함대와 싸우는 것이 말이 되겠나.
애초에 전력이 한참 상회하는 벨로키나-쿠샤 연합군이 시논 섬 인근 대해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이유도 그런 지리적인 문제 탓이었으니까.
쿠샤 왕국이 발을 뺄 것이 확실한 본토 공략에서 벨로키나 왕국 해군의 승리를 바라는 것은 솔직히 좀 무리다.
물론 쿠샤 왕국에게 적당한 대가를 제시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글쎄? 도대체 얼마나 큰 보상을 제시해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쿠샤 왕국은 이미 내해의 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정한 모양이요. 함대를 철수시켜서 서해 항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더군.”
“일레드 왕국의 영향력이 거세된 서해 항로라면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쿠샤 왕국의 안마당일 텐데요?”
“흐음, 국가 간의 문제는 그렇기는 한데 다른 문제가 있소. 바로 해적들이지.”
“고작 해적이···.”
“허허허, 그러고 보니 남작도 참가하지 않았소? 해적 토벌전 말이오.”
“아, 네. 그렇습니다만.”
“덕분에 굵직한 해적들이 거점을 서해 항로에 위치한 에스피온사, 발바라스 제도로 대거 옮겨간 모양이오. 최근에 쿠샤 왕국의 소규모 분함대가 공격당하는 상선을 보고도 차마 구원하지 못한 일이 보고되었다더군.”
세상에, 아무리 분함대라고 해도 최소한 네 척은 되었을 군함들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면, 도대체 해적선이 몇 척이나 있었다는 거야?
대항해시대가 아니라 대해적시대가 오게 생겼네.
“결국 상황이 묘하게 균형을 이루게 된 거요. 쿠샤 왕국은 서쪽을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고, 내해의 서부는 벨로키나 왕국이, 동부는 일레드 왕국이 가지게 된 거지.”
얼핏 생각하면 쿠샤 왕국과 연합이 끝난 벨로키나 왕국을 일레드가 공격할 수 있지 않나 싶지만, 시논 섬이 쿠샤 왕국에게 넘어갔다.
그러니 일레드 왕국이 케르빈 제도를 되찾겠다고 달려들면 쿠샤 왕국도 어쩔 수 없이 참전해야 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니 시논 섬과 바짝 붙어있는 케르빈 제도를 일레드 왕국이 점령하면 그다음 목표는 시논 섬이 될 것이 뻔하니까.
예상은 했지만 폰테 섬의 위치가 진짜 폭탄이 돼버렸네.
“후우, 결국 폰테 섬은···.”
“그렇소. 지금 벨로키나 왕국과 일레드 왕국의 최대 관심사는 남작이 가지고 있는 폰테 섬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시 말하지만 나는 폰테 섬의 관리만 위임받았을 뿐, 내 영지조차 아니다.
하지만 후작은 내 눈을 빤히 보며 물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시오?”
“······.”
나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버린 곳이 폰테 섬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섬이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
실질적으로 섬을 가진 사람이 난데.
“솔직히 말하지. 지금 상황은 이게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소. 아, 물론 본국의 입장에서 말이요. 남작은 많이 불안하고 불편하겠지.”
“이 상황이 프레티아 왕국에 좋을 이유가 있습니까?”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세력, 그 가운데 위치한 본국. 그리고 본국과 연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두 나라의 신경을 자극한 섬. 멋지지 않소?”
“글쎄요,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프레티아 왕국의 힘으로는 일레드 왕국이나 벨로키나 왕국의 욕심을 저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프레티아 왕국의 대귀족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말했다.
화를 내면 사과야 하겠지만, 그게 현실인 걸 어떡해.
의외로 내 말에 후작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지, 남작의 말이 맞소. 본국의 힘으로 두 나라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지. 하지만 말이오, 두 나라가 섬을 갖기보다 상대의 손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 것이라면?”
“네?”
뭐야, 발상의 전환인가?
그런데 듣고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두 나라는 서로의 본토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폰테 섬의 위치는 일레드 왕국 본토에 대한 비수이자 케르빈 제도를 향한 비수다.
그러니 상대가 폰테 섬을 가지게 되면 굉장히 불편해지는 상황인 것이지.
그런데 이 폰테 섬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다고 엄청 유리하게 되냐고 하면 이게 좀 애매해진다.
폰테 섬은 일단 두 나라의 본토에서 거리가 있고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당연히 상대방의 공격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자면 엄청 날카로운 칼인데 내구력이 쓰레기인 꼴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도 벨로키나 왕국이라는 뒷배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고.
“원래는 본국으로서도 찬반이 엇비슷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지. 하지만 페리아 족의 존재가 해결책을 제시했소. 페리아 족의 대사라는 자를 만나봐야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폰테 섬에 대한 영구적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 아니겠소?”
“지배권이라기보다는 그들은 그들의 삶을 우리 인간들이 침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저와 제가 이끄는 사람들에게 섬 한쪽에 자유롭게 거주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줬으니까요. 우리가 먼저 도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를 적대하지 않을 겁니다.”
“더 좋군. 본국은 페리아 족의 자주, 자치권을 인정하고 폰테 섬을 그들의 왕국에 준하는 대우를 할 것이오. 그리고 그들이 원한다면 섬의 외부에 대한 보호, 통제도 맡을 생각이 있소. 그리고 그 핑계로 폰테 섬을 중립 지대로, 주변에 대한 무장 함대 진입 금지를 주장할 거요. 벨로키나 왕국과 일레드 왕국을 상대로 말이지. 외교적인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두 나라도 폰테 섬이 상대방의 통제하에 놓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리라고 보오.”
그러니까 폰테 섬을 완충 지대로 만들고 중재자라는 명목으로 프레티아 왕국이 슬쩍 끼어들겠다는 말이군.
원래라면 벨로키나 왕국이 발끈하고 달려들 일이다.
자기 땅(?)을 눈뜨고 강탈당하는 꼴이니까.
하지만 그 섬에 페리아 족이라는, 결코 어떤 나라에도 속할 수 없는 이들이 원주인이 있다고 하면 입장이 달라지게 된다.
지금까지 남의 집에 들어가서 자기 집이라고 우긴 꼴이 되어버리니까.
“그 외교적 방법이라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제게 해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페리아 족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겠소? 페리아 족에게 본국은 그저 이번에 처음 만난 낯선 나라에 불과하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인간이 우리와 같은 입장이겠지. 남작을 제외한다면 말이오.”
“······.”
“우리가 모든 계획을 성공시키더라도 부족한 것이 있소. 바로 폰테 섬에 대한 영향력, 즉 페리아 족과의 관계 말이오. 보호를 위해 나섰는데 막상 보호받는 이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소?”
쿵, 쿵, 쿵, 쿵, 쿵···.
귓가에 심장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내가 바라 마지않았던 일.
하지만 손잡이 없는 칼과 같은, 독이 든 성배다.
페리아 족과의 연결고리로서 내가 필요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나 말고 다른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고민이 되시겠지. 하지만 남작도 알고 있을 거요. 이미 벨로키나 왕국에서 그대의 위치는 끊어지기 직전의 줄에 매달린 꼴이라는 것을. 다행히 남작이 명석하여 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테니 잔소리는 그만하고 본국의 제안을 전달하겠소.”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던 후작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작이 벨로키나 왕국의 귀족을 포기하고 스코타 후작과의 봉신 서약을 철회한다면! 본국은 즉시 남작과 엘리안 전하의 혼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추진할 거요. 전하의 배필이 되려면 평민일 수는 없으니 백작 정도의 작위가 수여되겠지. 명목상이지만 영지도 수여될 거요. 영지 관리는 왕실에서 맡고 그대에게는 영지 수입 명목으로 매년 일정 금액이 주어지겠지만 말이오.”
일국의 후작이다.
물론 내무대신인 블랑코의 말이 가볍다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본국과의 의견교환을 할 여유가 없던 블랑코가 하던 말과 페이트 후작의 말은 다른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후작의 독단으로 결정하지는 못했을 것 아닌가.
국왕은 물론 국정을 운영하는 귀족들의 대표들과도 이미 교감이 있었다고 봐야 했다.
“또한··· 본국의 해군 소장에 임명하며 사설 함대 창설 권한을 부여하겠소. 매년 창설된 함대 유지를 위한 지원금이 나갈 것이고, 그 함대는 본국이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남작의 지휘하에 있게 될 거요.”
미친, 사설 함대 창설 권한이라고?
여기에 섬에 대한 독립적 지위만 인정하면 말 그대로 군벌, 반독립적 번국으로 인정한다는 뜻인데?
“마지막으로 본국의 대 페리아 족 대사, 페리아 족이 허용한 폰테 섬의 인간 거주 구역에 대한 행정, 사법, 자위권을 가진 종신 총독에 임명될 것이오. 이만하면 인생을 걸어 볼 만하지 않겠소?”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오. 이 내용은 이미 국왕 폐하의 허락을 득한 것이고, 지금 그대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일 알현을 할 때 폐하께서 공언하실 것이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달콤한 제안이다.
문득 테일러의 제안을 듣고 열정에 불타오르던 그때가 떠올랐다.
제안의 크기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같다.
신분 상승, 지금 상황에서 평범하게 살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위치까지의 도약, 여전히 판돈은 내 목숨.
그러고 보니 이제 나 하나의 목숨도 아니다.
엘리안은 물론이고 네이선, 우르타를 비롯한 내 사람들의 운명까지 걸려있다.
“마지막,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편하게 물어보시오, 남작.”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저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그 이면에 도사린 위험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이번 일을 위해서 귀국이 감당해야 할 위험은 저 못지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발생하는 이익인 폰테 섬에 대한 것은 모조리 제게 주겠다고 하시는군요.”
개인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위할 수 있지만, 국가는 그럴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까지 기를 쓰고 폰테 섬을 중립 지대로 만들어도, 막상 그 중립 지대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내게 다 줘버리면 프레티아 왕국에는 뭐가 남겠나?
“대신 본국은 이 시대의 가장 유능한 해군 제독을 얻겠지. 그리고 노던테라 서부에 대한 탐사 우선권도 말이오.”
“노던테라 서부라니, 누구도 확인 한 적이 없는, 소문도 확실하지 않은 곳입니다.”
“지난 내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완벽하고 빠른 정보력이었고, 지금도 본국은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소.”
“제가··· 제가 프레티아 왕국을 배신한다면요?”
아, 원래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왜 자꾸 부정적인 말만 나오는지 모르겠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페이트 후작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내가 본 남작은 바보가 아니오. 본국을 배신해서 그대에게 남을 것이 없는데 왜 그런 짓을 하겠소? 폰테 섬은 결코 혼자 설 수 없는 곳이고, 벨로키나 왕국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으며, 일레드 왕국과는 적대관계잖소. 무엇보다 엘리안 전하의 반려가 되실 텐데 본국이 왜 그런 걱정을 하겠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후작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거절이라면 끝내 벨로키나 왕국의 남작으로 남겠다는 것을 말하는 거요?”
“그렇겠지요.”
“허허허, 마법사 길드의 제먼 고문까지 동행한 남작의 준비성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굳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소. 만약 남작이 우리의 본국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일행들과 함께 떠나시면 되오. 본국은 결코 남작에게 위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거요. 다만 엘리안 전하께서는 함께 가지 못하시겠지.”
“엘리안··· 전하께서 원하신다고 해도 말입니까?”
후작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족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오. 만약 그대가 본국의 제안을 거절했음에도 전하께서 그대와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다시 탈출을 감행하셔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