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화> 리블르앙 백작 >
논의를 마친 제먼 씨와 게론드, 엘리엇이 돌아간 뒤, 나는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에게 물었다.
“엘리안 왕녀 전하를 뵙고 싶으니 좀 전해주지.”
“네?!”
내 말을 들은 시종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남작님,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 시간에 전하를 뵙자고 하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납니다.”
시종의 완곡한 거절에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두컴컴하다.
우리만 있을 때라면 몰라도 이 시간에 결혼도 안 한 공주님께 만나자고 하는 것은 충분히 무례한 일이기는 하지.
그런데 당장 내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바로 엘리안이잖아.
여러 사람의 운명이 걸려있으니 전적으로 그녀의 의견을 반영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의견을 들어주기는 해야 하는 것 아냐?
살짝 민망해진 내가 열심히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데 문득 방금 떠난 제먼 씨와 다른 사람들이 떠올랐다.
분명히 그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게 만든 것은 후작이겠지.
그렇다면 엘리안에 대한 이야기도 이미 전달해 두었을지도 몰랐다.
“흠, 혹시 후작 각하께서 특별히 명하신 일은 없었나?”
“네? 아, 남작님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잘 모시라는 주의는 받았습니다만.”
응? 이게 아닌데?
“아니, 그런 것 말고 엘리안 전하에 대해서라거나 하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냐고 묻는 거네.”
“죄송합니다만 그런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내가 겪어 본 페이트 후작이 이런 일에서 실수를 할 사람은 아니니 의도적으로 엘리안을 이번 상황에서 배제시켰다는 말이다.
단순하게 여성의 인권이 바닥이라는 사회적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나를 압박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
그녀와 의견을 나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은 결국 그들의 의도를 따르는 것뿐이니 말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시종을 닦달해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었기 때문에 하릴없이 나는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그녀를 생각했다.
금빛의 찰랑이는 머릿결,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코, 일부러 근엄한 척하는 표정과, 낭랑한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전적인 말투까지.
고작 하루쯤 못 봤을 뿐인데 벌써 보고 싶다.
그전에는 몇 달이나 그녀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버텼나 싶을 정도로 보고 싶다니, 나도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다.
요 며칠간 그저 몇 마디의 말이 오갔을 뿐인데 생각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 * *
아침 식사를 물리고 차를 달라고 해서 마시고 있는데 페이튼 후작이 나를 찾아왔다.
꽤나 바쁘신 분일 텐데 이렇게 열심인 것을 보면 내가 중요하긴 중요한 모양이다.
대충 쓰다가 버려질 위험은 조금 줄어든 셈인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후작의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내 출신만 제외하면 프레티아 왕국에서 영입할 수 있는 인재 중에 나만 한 이를 찾기 어려우니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선원에서 시작해서 그럴듯한 대형 선단을 만들어 낸 것도 그렇지만, 그들의 말대로 폰테 섬에 대한 영향력은 정말 그 어떤 인간도 대신할 수 없다고 자신한다.
애초에 신분제 사회에서 능력이 있다고 평가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타국의 귀족이기도 하고.
약소국인 프레티아 왕국으로서는 타국의 귀족이 혹하게 할만한 조건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
나라는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말이야.
“그래, 생각은 정리되었소? 데리고 온 사람들이 남작의 참모들인 듯하여 함께 할 시간도 주었는데 말이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엘리안 전하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겠습니까?”
적당히 감사를 표한 뒤 벼르던 말을 꺼냈지만 바로 되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좀 힘들겠소. 밖에 계실 때야 어쩔 수 없다지만, 궁내에서 일국의 왕녀가 어찌 외인을 함부로 만나겠소?”
“그렇습니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안 되는 건가.
“크흠, 아직 젊어서 그런지 혈기가 왕성하군. 하지만 남작, 그대의 대답에 따라 전하는 그대의 배필이 될 수도 있는데 뭘 그리 조바심을 내시오? 허허허.”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황급히 변명하려던 나는 그의 미묘한 웃음을 보고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어차피 뭐라고 해도 이건 안 먹힌다.
“그래, 알현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테니 대답부터 듣도록 하지. 이쪽도 남작의 대답에 따라 준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 말이오. 남작의 선택은 무엇이오?”
언제 웃었냐는 듯 날카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페이트 후작과 잠시 눈을 마주치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과분한 제안이지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역시! 내 그럴 줄 알았소. 남작처럼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앞으로 잘해 봅시다, 스펜서 남작. 이 나라가 날아오르기 위한 마지막 조각이 완성되는군.”
밝은 표정으로 기뻐하는 그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건넸다.
“저, 후작 각하. 다만 몇 가지 도와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응? 도움이라···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오.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릴 테니.”
나는 천천히 어제 이야기한 조건들을 읊었다.
“흐음··· 요구사항이 꽤 많군. 일단 폰테 섬에 대한 징수권은 당연히 내어드릴 것이오. 폰테 섬에 기항하는 선박에 대한 관세는 본국의 세율에 따른다면 당연히 총독에게 징수권이 주어질 것이고. 다만 우선 교역권은 쉽지 않은 문제군.”
“이미 약속해 놓은 상단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비록 제가 벨로키나의 남작위와 총독 자리를 버리지만, 여전히 폰테 섬의 총독으로 남아있는데 그들과의 약속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알겠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최대한 좋게 이야기 해 보겠소.”
“감사합니다.”
폰테 섬에서 생산되는 상품 중에는 아직 전략물자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아직 철광은 언제 개발될지 알 수 없는 데다가 외부에 알려져 있지도 않으니 예외다.
그 외에 아이렌 목재가 있기는 한데, 아직 풀린 양도 극미량에 불과하고 애초에 난 이것만큼은 외부에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월등한 내구성으로 선박 재질로는 최고 수준에 해당하는 녀석을 굳이 다른 놈들에게 넘길 필요는 없지 않겠나.
생산성이 얼마나 나올지도 아직 모르는 상태고.
“그리고 경비정을 내어달라, 쉽지 않은 문제군. 그대도 알겠지만, 본국의 해군력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오. 심지어 최근의 내전으로 적지 않은 경비정이 파손되었지. 다른 곳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에 밀려서 복구도 지지부진한 상황이오.”
“파손된 배라도 괜찮습니다. 자력 항해가 어렵다면 제가 예인하여 따로 수리를 해서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몇 척 정도는 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다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오. 연안 경비대에서도 정말 못 쓸만한 녀석들만 내어놓을 게 뻔하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조선소의 건립은 뭐, 굳이 허락까지 받을 필요는 없는 일이지. 어차피 사설 함대 창설 권한까지 주었는데 조선소도 당연히 필요할 테니. 다만 따로 인력지원은 어려울 것 같으니 그 부분은 남작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거요.”
이후로도 적지 않은 말이 오갔다.
솔직히 요청하는 내 얼굴이 뜨뜻해질 정도로 과한 요구였지만 후작은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막 퍼줘도 되는 건가?
“이제 대충 끝난 거요? 이거야 원, 혼수를 따로 줄 필요도 없겠군.”
“무리한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무리한 요청이라. 무리하긴 했지. 나도 아주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오.”
“······.”
아마도 이 정도가 후작이 허락해 줄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던 모양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있는데, 그런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후작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남작은 왕이 되고 싶은 거요?”
“···네?!”
너무 뜬금없이 튀어나온 질문이라 반응이 한 박자 느려졌다.
왕이라니, 갑자기 무슨 단두대가 어른거리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가 어찌 감히!”
황급히 부정하는 대답을 던졌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은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평온한 표정으로 자기 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그대가 요구한 대로 다 주면, 사실상 그대는 폰테 섬의 왕이나 다름없지 않나. 적당히 자리를 잡은 후에 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면 새로운 왕국이 탄생하는 거지.”
내 요구 조건을 너무 잘 받아줘서 내가 조금 방심했던 모양이다.
제대로 정치판에 뛰어든 적도 없는 제먼 씨조차 생각한 것을 저 노회한 후작이 생각을 못 할 리가 없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어젯밤에 생각한 변명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외부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본국에서 적시에 지원을 해주는 것이 어려우니까요.”
“본국은 폰테 섬과 페리아 족의 관계를 밝히면서 폰테 섬에 그 어떤 나라의 해군도 입항할 수 없게 할 생각이오. 본국도 해군을 주둔시키지 않겠다면서 말이지. 그러니 공식적으로 폰테 섬에 존재할 수 있는 무력은 남작의 사병밖에 없소. 그런데 남작이 말하는 규모는 내 예상을 꽤 웃돌아서 하는 말이오.”
이런 젠장, 전쟁하는데 누가 허락받고 병력을 움직이냐고.
본토에서 폰테 섬까지의 거리는 벨로키나 왕국과 프레티아 왕국이 비슷비슷하고, 일레드 왕국의 북단에서 출발하면 가장 가깝다.
하지만 프레티아 왕국에는 이번에 얻은 케르빈 제도가 있지.
케르빈 섬 자체는 조금 애매할지 몰라도 케르빈 제도의 북동쪽에 제대로 된 항구가 하나만 개발되면 일레드 왕국이나 벨로키나 왕국이나 폰테 섬에 대한 접근성은 비슷해진다.
심지어 프레티아 왕국은 두 나라보다 국력이 떨어지지 않나.
“하지만 전쟁 상황이 되면 그런 조약은 공허한 약속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정도 전력을 갖추어 놓아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남작이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손을 들어주는 거요. 어떻소?”
슬슬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원래 좋게 좋게 하하 호호 웃으면서 끝났어야 할 대화가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처음부터 그냥 트집 잡아서 날 죽일 생각이었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후작의 태도가 너무 예의 바르다.
“제가 이미 한 번 떠난 벨로키나로 돌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이미 원수 사이인 일레드에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과한 염려십니다.”
“남작은 개인의 영달을 중시하는 편이지. 그렇지 않소?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면 더 큰 보상을 위해서 감정 정도는 접어둘 수도 있지 않겠소?”
와, 진짜 내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나?
별걸 다 알고 있네?
막말로 내가 갑자기 프레티아 왕국에 엄청난 충성심이 생겨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은 아니잖나.
어디까지나 내게 유리하니까··· 응?
“그렇다면 더더욱 프레티아 왕국을 배신할 수 없겠군요.”
“호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엘리안 전하를 연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앞장서서 프레티아 왕국을 배신하면 전하께서는 매우 슬퍼하시겠지요.”
“허허허,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하는 법이지.”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후작의 말을 제대로 분석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고 했지?
말은 부정적으로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후작의 제안은 유효하다는 뜻이다.
말뿐인 충성을 맹세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제가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편을 든다면 필연적으로 폰테 섬은 전쟁터가 되어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합니다. 제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지요.”
“남작 정도의 능력 있는 이가 편을 갈아탈 정도면 쉽게 상대 국가의 방어를 깨뜨리고 전장을 다른 곳으로 정할 수도 있을 것 같소만.”
“그렇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폰테 섬은 두 나라의 경계에 있기에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경계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면, 아마 저는 높은 확률로 버려질 겁니다.”
내 대답에 후작이 벌떡 일어서더니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이러니 남작이 무식한 선원 출신이라고 어찌 믿겠소? 머리에 똥만 찬 귀족 놈들의 혓바닥이 무디게 느껴질 정도군.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다행이구려.”
역시 최종 시험 같은 거였나.
다행히 합격점을 받은 모양이다.
“부족한 머리지만 최대한 짜내 보았습니다.”
“남작의 말대로 폰테 섬은 결국 두 나라 사이에 있어야만 의미가 있소. 또한 그래야만 아슬아슬하게라도 안전할 수 있지. 마지막으로 본국이 힘을 가져야만 그대가 아끼는 폰테 섬을 제대로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제가 배신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군. 내 사과하리다. 남작은 본국의 왕실과 피가 섞이게 될 사람이오. 어찌 배신을 생각하겠소? 다만 혹시라도 그대에게 과분한 자리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놈들이 시답지 않은 공격을 할까 싶어 미리 연습을 한 것뿐이오. 이미 남작도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잖소?”
진짜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
걱정이 돼서 연습을 시켜줬다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하겠나.
“그렇다면 각하께서 허락하신 요청은 그대로 받아주신다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대부분 괜찮을 것이오. 하지만 명심하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잠시 뜸을 들이며 다시 자리에 앉은 후작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폰테 섬에서 남작이 왕처럼 살아도 상관없소. 본국과의 관계만 잘 유지한다면 말이오. 하지만 노던테라, 그곳까지는 욕심을 내지 마시오. 새로 발견될 노던테라와 본국과의 중계지로서 폰테 섬은 남작의 대대손손 번영을 누리게 될 테니 말이오.”
“···명심하겠습니다.”
노던테라, 결국 신대륙인 건가.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도 내가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구의 미국과 같은 곳이 될 수 있는 기회의 땅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에이, 그래도 미국은 좀 너무 갔다.
* * *
“······리블르앙 백작에 임명한다. 또한 폰테 섬의 적법한 주인인 페리아 족의 친우이자 동맹국으로서 리블르앙 백작을 폰테 섬 파견 대 페리아 족 대사, 폰테 섬의 총독을 겸임하게 하여 인간과 페리아 족의 사이에 영원한 우정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리블르앙 백작에게 주어지는 총독은 종신직으로, 반역에 준하는 중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 직위를 해임하지 않도록 하겠다.”
길고 긴··· 거의 10분 정도 긴 대사를 마친 젊은 왕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나도 일어설 준비를 한다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내게 다가온 시종이 커다란 금장식된 쟁반을 내밀었다.
화려한 쟁반 위에는 더 화려한 치장이 된 두루마리가 세 개나 놓여 있었고, 손가락에 끼우면 무거울 것 같은 반지가 세 개, 곱게 개어진 고급스러운 천이 두 장 놓여 있었다.
백작, 대사, 총독에 해당하는 임명장과 인장 반지, 그리고 천은 프레티아 왕국기와 내 가문기였다.
실물을 보니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되었다.
이제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르는 허접한 단승귀족 따위가 아니다.
물론 내 대에서는 근본 없는 놈이라고 꽤나 무시도 당할 것이다.
내 자식, 손자, 어쩌면 증손자까지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몇 대가 흐르면 결국 내 후손들도 진짜 귀족이 되는 것이다.
다른 왕족, 귀족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국왕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충실한 폐하의 신하로서 살 것임을 신 앞에서 엄숙히 맹세합니다.”
“그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네, 리블르앙 백작.”
“황공하옵니다.”
임명식을 마치고 어전에서 뒷걸음질로 물러나서 겨우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드니 홀을 가득 메운 인파가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기심과 질투심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일부는 얕보는 듯한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유난히 돋보이는 한 사람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살포시 웃는다.
누구보다 높은 곳에 앉은 어린 왕과 왕비, 그리고 그 옆, 조금 덜 화려한 의자에 앉은 아름다운 그녀.
그녀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아 보이는 왕비가 꽤나 요란하게 치장을 했지만, 원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모두 주목하십시오! 국왕 폐하께서 중요한 발표를 하실 것입니다!”
시종의 커다란 목소리가 홀에 울리고, 나를 보며 제각각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닫으며 왕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모두의 이목을 충분히 집중시킨 후에 왕은 다시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 엘리안의 앞에 가더니 정중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늘 리블르앙 백작의 작위 수여와 함께 중요한 왕실의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국왕 폐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연습이라도 한 듯이 홀에 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복창했고, 나도 얼른 다른 사람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속성으로 왕실 예법이라는 것을 배우기는 했는데 전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솔직히 작위 수여식을 어떻게 잘 넘겼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실수투성이였지만 그냥 봐준 걸지도 모르지.
“전란으로 인해 왕궁을 떠나 모진 고초를 겪은 내 누이, 엘리안 미르바 프레티아 왕녀를 다시 내 곁에서 떠나보내는 것은 아쉽지만, 왕녀의 나이가 이미 혼기를 지났기에 더 이상 혼사를 미룰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왕녀를 이번에 백작이 된 리안 리블르앙 백작과 짝을 지어주기로 하였다.”
“?!”
내 작위 수여식은 다 알았어도 결혼 이야기는 못 들은 사람이 많은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웅성거리는 바람에 대번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젊은 놈들 중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보는 놈들도 있었다.
엘리안이 환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 작위 수여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얼굴도장이나 찍으려고 온 놈팡이들이겠지.
“리블르앙 백작, 앞으로 나오게.”
어린 국왕의 말에 내가 다시 앞으로 나가려는데, 군중들 가운데서 갑자기 소란이 일더니 웬 덩치 한 놈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폐하! 신이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어, 그래.
이게 이렇게 쉽게 진행이 될 리가 없지.
분명히 어디선가 내 운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놈이 있는 게 분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