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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73화 (374/420)

< <373화> 결투 >

“요플하임 백작, 지금 뭐하는 짓이오? 당장 물러나시오!”

국왕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블랑코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호통을 쳤다.

어조는 힐난과 짜증으로 가득 차 있는데 목소리가 낮으니까 뭔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조용조용하게 말했다고 해도 무려 내무대신이 하는 말이다.

같은 백작이라고 젊은 백작 따위가 그 말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무례에 대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만, 폐하께 꼭 진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있구나?

미친놈인가, 아니면 내무대신에게 비벼 볼 정도의 권력자인가?

“백작! 지금 당장!”

“그만.”

조금 높아진 어조로 블랑코가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국왕의 제지로 인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젊은 국왕의 권위가 얼마나 높은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근왕파로 추측되는 블랑코가 국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하던 말을 멈추고 블랑코가 뒤로 물러서자, 요플하임 백작이라는 놈이 두어 발 앞으로 나서더니 당당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 무릎을 어떻게 당당하게 꿇는 거냐고 물어보면 딱히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기는 한데, 뒤에서 보고 있는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군주에 대한 존중과 존경, 복종의 느낌이 아니라 마지못해 무릎은 꿇지만 굴복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랄까?

“요플하임 백작, 내 명령보다 우선해야 할 진언이 뭐요? 당연히 중요한 일이어야 할게요.”

젊은 국왕은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을 왕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반역이나 항명까지는 아니지만 무려 국왕의 행사를 자기 멋대로 중지시킨 것이다.

절대 왕권의 국가였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언을 허락했다는 것은···.

“결례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폐하.”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백작을 보는 젊은 국왕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자기는 용서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용서를 받아버리니 열받는 것이 당연하지.

심지어 그게 1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라면 뭐,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눈치가 없는 건지 자의식 과잉인지 몰라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선 요플하임 백작은 갑자기 몸을 돌려 나를 한 번 쏘아보더니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시 왕을 보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는 폐하의 아름다운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신도 미천한 출신의 스펜서 남작을 포용하기 위해 백작이라는 과분한 작위를 주는 것도 찬성했사옵니다. 허나!”

물론 평민 출신 단승 남작이 단번에 고위 귀족인 백작을 받는 것이 파격이기는 하지.

그런데 과분하다던가, 미천한 출신 같은 이야기는 보통 본인이 없는 데서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나도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비하를 면전에서 듣다 보니 기분이 썩 좋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발작을 해봐야 누가 내 편을 들어주겠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다른 귀족들에게 ‘천한 것들이란’ 같은 말이나 듣겠지.

부글거리는 속을 겨우 가다듬는 사이에 잠시 말을 쉬었던 요플하임 백작이 말을 이었다.

“그런 자에게 고귀한 왕실의 피를 섞게 하다니요? 안 될 말입니다. 왕실과의 혼사가 아니더라도 그는 고작 허울뿐인 단승 남작을 버리는 대가로 본국의 고귀한 백작위를 받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중요한 섬의 종신 총독까지 보장받았으니 엘리안 전하와의 혼사는 재고해주십시오.”

뭐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놈 아비라도 죽였나?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말을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제대로 보지 못한 놈의 얼굴이 궁금해지고 있는데 페이트 후작이 한 발 나서며 국왕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요플하임 백작을 보고 입을 열었다.

“바인 요플하임. 먼저 리안 경은 이제 남작이 아니라 리블르앙 백작이네. 아직 벨로키나 왕국의 작위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작위 수여식이 끝났으니 본국에서만큼은 백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지. 그리고 왕실의 혼사는 원래 왕실 고유의 권한이네. 외인(外人)인 경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평온하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페이트 후작이다.

외모부터 천상 군인이고, 심지어 전쟁영웅이시기까지 하다.

당연히 그 발언의 묵직함이 차원을 달리했다.

“후작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어째서 외인이라는 말입니까?”

이 자식, 엄청난 거물 아냐?

이 상황에서도 무려 페이트 후작에게 저따위로 말한다고?

그때 살짝 표정이 굳은 페이트 후작이 작게 실소를 흘리며 되물었다.

“허허허···.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경이 어째서 외인이 아니라는 건가? 설마 수 대 전에 왕실과 피를 섞은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하하하, 재밌는 농담이군요. 설마 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려고 하겠습니까?”

“그래, 그럼 자네가 왕실 사람하고 주장하는 근거가 뭔가?”

“물론 각하의 말씀대로 저는 왕실 사람이 아닙니다.”

음··· 그냥 미친놈일지도 모르겠네.

왜 저런 놈을 가주로 세운 거지?

혹시 승계를 받고 나서 미친 건가?

“하지만 왕녀님과 혼약이 되어있던 사람이 바로 저 아닙니까?”

···?!

엉겁결에 고개를 들어 엘리안을 보니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국왕은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상태였다.

이게 무슨 막장드라마 같은 전개야?

드넓은 홀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어떻게든 집중해서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와중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잡아내려고 했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당장 내 멘탈이 박살 나게 생겼는데 주변의 웅성거림을 어떻게 필터링하겠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요플하임 백작이라는 놈의 발언이 아주 근거 없는 발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난리가 날 리가 없잖아.

“모두 조용!”

근엄한 페이트 후작의 목소리가 몇 번 울리자 드디어 웅성거림이 가라앉았다.

나도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후작을 보니 후작의 표정이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표정 자체는 내게 긍정적이기는 한데 뭐라고 하려나?

“이거야 원. 그게 언제 적의 일인가? 그리고 경과의 혼약이 확정된 상황도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네만?”

“물론 그렇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안 전하의 혼사가 늦어져 날짜까지 정해놓고 세 명의 후보 중에서 최종 선택만 남겨둔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전하께서 실종되지만 않으셨다면 이미 그 세 사람 중 한 사람과 결혼했을 것이 분명하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요플하임 백작이 완전히 돌아서서 군중을 바라보고 양손을 펼쳤다.

“애석하게도 어리석은 다른 두 후보는 반역자의 편에 가담했다가 목숨을 잃었군요. 그렇다면 당연히 유일한 후보인 저와 혼사를 진행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스펜서 남작,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주 유치하고 뻔히 보이는 도발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도발에 얼마든지 응해 줄 용의가 있었다.

“기억력이 나쁘군, 바인 요플하임. 방금 전에 후작 각하께서 리블르앙 백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이야. 그 후보라는 것도 잘못된 기억 아닌가?”

“뭐? 이 천한 놈이?!”

“호오, 그러니까 프레티아의 백작인 내가 천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그쪽도, 저기 내무대신 경도, 다른 백작들도 모두 천하다는 뜻인 건가?”

“하, 네놈 따위가 감히 고귀한 피가 흐르는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끔찍한 말을 하는군. 네놈과 같은 피가 흘렀다면 나는 진즉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다. 오, 그런 부분은 조금 대단하군. 그 나이를 먹도록 살아있다니 말이야. 매일 숨 쉬는 것도 역겨울 텐데.”

만약 귀족들의 고상한 대화로 돌려까기를 하게 된다면 이길 자신이 없다.

이건 단순하게 경험의 문제라서 임기응변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저렴하게 말을 받았더니 이 멍청한 놈은 좋다고 똑같이 따라왔다.

그런데 내가 입담 거칠기로 유명한 선원 놈들이랑 같은 선실에서 부대끼며 산 세월이 5년이다.

예의 따위 집어치우고 적나라하게 까는 걸로는 내가 또 어디서 안 지거든.

퍼억.

응? 뭐가 날아왔는데?

“천박한 놈과 말을 섞은 내가 어리석었군. 결투다, 천한 놈.”

어? 잠깐만? 너 막 그래도 되는 거냐? 왕이 있는 자린데?

* * *

내가 당황한 것과 달리 그 누구도 결투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매우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결투 그거, 둘 중 한 사람이 뒤질 때까지 하는 거 아니야?

기분 좀 나쁘다고 이렇게 장소, 분위기 가리지 않고 결투를 하면, 지금쯤 살아있는 귀족이 각국에 한 열 명쯤만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후우, 어쩔 수 없지. 엘리안 왕녀의 혼인은 잠시 미루도록 하지. 내무대신, 뒷정리를 부탁하오. 누님, 이만 일어나시지요.”

기어코 국왕까지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슬슬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리안과 당황한 표정의 블랑코, 페이트 후작이 보였다.

진짜 나 결투 하는 거야? 저 곰 같은 놈이랑?

어디 가서도 키가 작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바인 요플하임은 진짜 곰 같은 놈이었다.

나보다 15cm쯤 큰 키, 떡 벌어진 어깨, 탄탄한 허벅지를 보면 육체 능력은 확실히 월등해 보인다.

물론 운동 잘하는 놈이 무조건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싸움 잘하는 놈이 사람을 잘 죽이는 것도 아니지만, 스포츠랄게 없는 세상에서 귀족이 저렇게 몸을 만들만한 운동이 사람 죽이는 기술밖에 더 있겠어?

그리고 이놈들은 보통 사람 죽이는 기술을 배우면 잘 써먹는단 말이다, 그것도 전쟁에서.

심지어 이 나라는 최근까지 내전을 겪었지···.

“하, 이제야 좀 볼만한 표정이 되었군.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 팔 하나만 자르겠다. 어떤가?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어차피 팔 하나쯤 없어도 그깟 배 타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요플하임 백작의 비웃음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나는 다시 천천히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다시 보아도 선천적으로 뛰어난 체형을 타고난 것은 물론, 최근까지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 묘하게, 그러니까 확실히 살인을 해본 놈은 맞는데···.

아, 알았다.

독기(毒氣)가 없네.

맹렬한 분노와 살의를 표출하고 있지만 딱 그 정도다.

순한 맛 살기라고 해야 할까?

잘하면 내가 이길지도 모르겠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어차피 국왕은 물론 근왕파 전체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놈 같으니 실수인 척 죽여도 뒤탈은 없을 것 같다.

“호벤 경!”

“네, 백작님.”

“이번에 자네가 나서줄 수 있겠나?”

“영광입니다, 백작님. 반드시 백작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군중들 사이에서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를 불러낸 놈이 그냥 듣기만 해도 이해가 될 듯한 말을 주고받았다.

뭐긴 뭐겠어, 대전사를 시킨 거지.

표정을 보니까 자기가 못 이길지도 모른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수준이 안 맞아서 같이 어울리기 싫다는 느낌이다.

문제는 대전사를 뛰겠다는 이놈인데···.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상의 왼쪽 가슴에 박힌 문장이었다.

벨로키나 왕국의 문장과 왕실의 문장.

무려 알렌 경이 소속되어 있었던, 벨로키나 왕국의 근위 기사단 소속의 기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체격은 요플하임 백작보다 작아서 나와 비슷한데 풍기는 느낌이 딱 진짜 고수였다.

그것도 실전을 신물 나도록 겪은.

“후후후, 어차피 네놈을 위해 검을 들 기사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아량은 보여야겠지. 닷새. 닷새 후 왕궁 서쪽 연무장으로 네놈의 대전사와 함께 와라. 구할 수 있다면 말이야. 아니면 직접 상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하하핫! 물론 도망친다면 굳이 쫓지는 않도록 하겠다. 하지만 폐하께 약속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 알량한 백작위도 내놓아야 할 것이야.”

씨발···.

뭐가 그리 좋은지 신나게 웃으며 바인 요플하임 백작이 자리를 떠나자 그 뒤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어림잡아도 서른 명 이상, 여자도 꽤 섞여 있기는 했지만, 저들이 모두 귀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적은 수는 아니었다.

최소한 지금 바인 저놈을 쫓아간 사람들은 놈의 일당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세력이 작은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국왕에게 반하는 귀족들은 다 뒤지거나 세력이 약해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후우, 저자가 여기에서 이렇게 사고를 칠 줄이야.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리블르앙 백작.”

“아, 아닙니다. 내무대신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블랑코가 내게 사과하고 있는데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페이트 후작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쯧, 일이 엉뚱하게 꼬였군. 블랑코 경은 자리를 정리해주시게. 그리고 리블르앙 백작은 나를 따라오시오. 블랑코 경도 여기가 정리되는 대로 찾아오게.”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블랑코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서자 페이트 후작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당장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지라 나는 그의 뒤를 쫄래쫄래 쫓는 수밖에 없었다.

* * *

왕궁 안을 빙빙 돌다가 작은 방에 들어선 후작은 다탁 주변에 배치된 쇼파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았다.

“후우, 일단 좀 앉으시오. 시간을 조금 더 들여야 했는데 이 늙은이의 조급함이 일을 망친 듯하오.”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책이나 사과보다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자세한 논의는 내무대신이 오면 진행하더라도 상황 설명 정도는 미리 해 두는 것이 좋겠지.”

이어진 페이트 후작의 말에 의하면, 바인 요플하임 백작은 왕국 북서부에 대영주였다.

프레티아 왕국의 지리적 특성으로 볼 때 북서부에 위치한 영지의 귀족들은 아무래도 친 일레드 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옆집 깡패에게 처맞지 않으려면 친한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물론 일레드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이를 가는 귀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당연히 일레드 왕국을 등에 업고 왕좌를 탈취했던 에논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도 많았던 북서부.

원래대로라면 데이먼 국왕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대부분 숙청을 당했겠지만, 놀랍게도 요플하임이 북서부 영주들을 대표해서 데이먼 국왕에게 전격적으로 항복하면서 운명이 뒤틀렸다.

지금의 젊은 망나니가 아니고 그 부친이 되는 전대 요플하임 백작이 한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건 항복한 귀족들을 내칠 수도 없었던 데이먼 국왕과 근왕파 귀족들은 결국 그들에게 적당한 기부금(?)을 받는 선에서 항복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서북부 귀족들은 늘 근왕파에게 고분고분했었다고 한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고 나름 정정했던 전대 백작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한 것은 작년 여름, 장남은 이미 내전 중에 전사한 후였기에 작위는 둘째에게 넘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백작이 죽은 지 고작 닷새 만에 후계자였던 둘째 아들까지 사망하면서 셋째 아들이었던 현 백작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한 세력의 수장 노릇을 하기에 너무 어렸지만,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잘 이끌어왔다고 하는데···.

“물론 요플하임 백작의 말대로 내전이 있기 전에 엘리안 전하의 혼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오. 알다시피 당시에도 전하의 연치가 적은 편은 아니었고, 아무리 전대 국왕 폐하께서 와병 중이시다고 해도 언제까지 전하를 혼자 늙게 둘 수는 없었으니 말이오.”

“결국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거지. 고작 그런 이유로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거요. 하지만 문제는 바로 결투겠지.”

후작의 말에 나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되었건 내가 그놈을 도발하지만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니까.

그런데 나라고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겠냐고?

그냥 말싸움이나 좀 하다가 끝날 줄 알았지.

“후우, 일단 대전사를 해 줄 기사는 내가 수소문해 보겠소. 나와 친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호벤 경을 상대할 만한 이는 없어서 말이오.”

“어··· 호벤 경이라는 사람이 실력이 뛰어납니까?”

“근위 기사단에서도 꽤나 실력이 있다고 정평이 나 있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은 힘들지 몰라도 최소한 중간 이상은 될 거요.”

그럼 호벤보다 실력 좋은 이가 최소한 10명은 된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전쟁영웅이라는 분이 그 10명 중에서 한 명도 섭외를 못 한다고?

내 표정에 마음이 드러났는지 후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볼 것 없소. 근위 기사단은 기본적으로 국왕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높지. 그래서 대부분 다른 귀족, 특히 나처럼 정계에 발을 깊게 들여놓은 사람들과는 친분을 쌓는 것을 꺼리는 법이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번 결투가 내 일이라면 어떻게 부탁을 해 보겠소만···.”

그러니까 본인 일이라면 부탁할 수 있는 정도의 친분은 되는데, 차마 제삼자인 내 대전사를 부탁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말이 좋아 대전사지, 까놓고 말해서 남을 대신해 살인을 하거나 살해당해야 하는 짓인데 누가 좋다고 달려들겠나.

심지어 싸워야 하는 상대가 자기 직장 동료인 거다.

나 같아도 안 하겠다, 젠장.

“후작 각하, 혹시 왕녀님을 호종했던 알렌 경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알렌 미우라프? 당연히 잘 알고 있소. 정말 대단한 친구였지. 그 친구가 스코타 후작가에서 엘리안 전하를 호종했던 것은 확인했소만. 혹시···?”

흠, 알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나는 후작이 진실을 때려 맞추기 전에 빨리 말을 끊었다.

“네, 사실 알렌 경의 실력을 본의 아니게 몇 번 보게 되었는데 엄청나더군요. 그래서 알렌 경과 그 호벤이라는 기사의 실력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지 듣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기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내 말에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던 후작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호벤 경이 상당한 실력자이기는 하지만, 한때 프레티아 최고의 기사로 꼽히던 알렌 경에 비할 바는 아니오. 뭐, 다른 근위 기사들도 알렌 경에 비하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말이오.”

흠, 이거 잘하면···?

물론 알렌 경을 섬에서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내가 가진 결전 병기도 꽤나 날카롭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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