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74화 (375/420)

< <374화> 모르면 몸으로 때워야지 >

후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굳은 표정의 블랑코가 안으로 들어왔다.

“적당히 마무리하고 왔습니다, 후작 각하.”

“고생했네. 표정으로 보아하니 일이 많이 어려워진 모양이군?”

“그것이···.”

잠시 나를 바라보던 블랑코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리블르앙 백작도 알게 될 일이니 굳이 숨길 것도 없겠군요. 리블르앙 백작의 파격적인 백작 봉작에 불만이 있는 자들이 꽤 되었던 모양입니다.”

“우습군. 오늘 모인 자들 중의 일부는 분명히 이번 전쟁으로 귀족으로 올라선 놈들일 텐데.”

페이트 후작이 비틀린 웃음을 짓자 블랑코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기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양입니다. 평민에서 백작까지 오른 사람은 리블르앙 백작이 처음이니 말입니다. 질투와 시기심의 발로겠지요.”

“쯧, 능력 있는 자를 영입하는 것까지는 찬성하지만, 자기들 위에 놓지는 않겠다는 건가.”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한 블랑코가 빈 의자에 앉으며 화제를 바꿨다.

“하여튼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결투라는 것이 딱히 뭔가를 걸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분위기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이미 작위 수여식은 끝났으니 리블르앙 백작의 봉작은 인정하겠지만, 전하의 혼인 상대가 되는 것은 당장은 힘들 듯합니다.”

이봐, 블랑코 씨.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말이 다르잖아?

당사자들은 물론 가족과 주변인들까지 찬성하는 결혼에 하객으로 초대도 안 한 놈들이 깽판을 치는 게 말이 돼?

정수리에 김이 날 정도로 화가 났지만, 일단 튀어나오려는 수많은 말들을 꾹꾹 눌러 삼켰다.

마음대로 땡깡을 피우고 기분대로 했다가는 단번에 절벽에서 번지하게 된다는 정치판이다.

말 한마디까지 주의해야겠지.

나는 천천히 머리를 식히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말을 경청했다.

상황 파악이 먼저, 방법은 천천히.

그렇게 내가 있다는 것을 잊은 듯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곧 내 시선을 눈치챘다.

“흠, 이거 당사자를 불러놓고 너무 우리끼리만 이야기했군. 결론적으로 말해서···.”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다시 설명하려는 후작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두 분 말씀으로 대충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다만 몇 가지 의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내가 아는 수준의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물어보시오, 백작.”

잠시 숨을 고른 나는 머릿속에 정리한 질문을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먼저 국왕 폐하에 반하는 귀족들은 크게 세력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저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그 바인이라는 젊은 백작의 태도가 매우 불손해 보였습니다만.”

“블랑코 경이 오기 전에 이미 대충 이야기했듯이 그는 서북부 귀족의 맹주요.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가끔 말은 건들건들하게 할지언정 우리의 일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지. 그래서 우리도 지금 당황스러운 상황이라오.”

“그러니까 동맹의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을 당한 셈이군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오.”

그러니까 어제까지 멀쩡하던 놈들이 오늘 갑자기 등을 돌렸다는 건데, 아무리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는 정치판이라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게다가 나름 굳건한 동맹을 깰 정도의 이익이 뭔지 추측도 못 하겠고.

“혹시 그들과 연합할만한 거대한 귀족 집단이 또 있습니까?”

이번에는 미간을 모으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블랑코가 대답했다.

“아니요. 사실 서북부 귀족들도 너무 많은 귀족들이 숙청을 당해서 차마 손을 대지 못했을 뿐이니까요. 최소한 그들과 연합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단은 현재 없습니다. 남은 귀족들은 대부분 중립적 성향이고 아직까지 드러난 특별한 연계 정황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들만의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럴 리가요. 주요 대신부터 중앙군까지 모두 국왕 폐하에 대한 충심으로 가득한 자들만 있습니다. 그들의 영지를 다 합치면 본국의 1/4 정도가 되기는 하겠지만, 영지의 크기가 정치력은 아니니까요.”

그럼 결론은 하나네.

이놈들, 지금까지 자기들이 힘이 없으니까 적당히 대가리 숙이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던 왕녀가 나타난 거지.

그녀만 잡으면 지금 국왕의 주변에 포진한 이들을 밀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진짜 국왕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좋아했다면 말이다.

아마 이 정도는 두 사람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 결투, 패하면 문제가 됩니까? 예를 들어 기권을 한다거나···.”

이번에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후작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결투에서 패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기권은 절대로 안 되오.”

“네? 어차피 이길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게 낫지 않습니까?”

“아니, 백작은 잘 모르겠지만 결투에서 싸우기도 전에 기권이나 항복을 한다는 것은 귀족의 명예에 치명적인 일이오. 엘리안 전하와의 결혼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다른 귀족들에게 멸시를 받게 될 거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직접 나가서 칼을 몇 번 맞대다가 적당히 패배를 인정하면 안 될까요?”

“그렇게라도 되면 좋겠지만, 아마 힘들 거요. 지금이야 많이 의미가 퇴색되었다지만 원래 ‘결투’란 두 사람의 목숨을 걸고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방법이니. 요즘에는 결투 상대를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고 패자에게 몸값을 받거나 대립하던 사안에 양보를 얻어가는 정도지만··· 혹여 결투 중에 상대를 죽인다고 해도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오. 당연히 호벤 경은 반드시 백작의 목숨을 거두려 하겠지. 백작이 패배를 인정할 여유도 없이 말이오.”

거기까지 후작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블랑코가 입을 열었다.

“대전사는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르토반 남작과 제가 친분이 깊으니 잘하면 허락할 수도 있습니다.”

“세르토반 남작이라면 근위 기사단의 벨페즈 경이군. 확실히 그의 실력이 대단하기는 하지. 하지만 호벤 경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지는 못 할거요. 무엇보다, 아무리 내무대신의 부탁이라고 해도 설마 기사단의 선배인 호벤 경을 상대로 허락이나 하겠소?”

“하지만 적당한 인물이 없습니다. 그나마 세르토반 남작 정도가 아니라면 호벤 경과 열 번 싸우면 열 번 다 패할 것이 뻔한 이들 뿐입니다.

“후우,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 더 고민 해 봅시다.”

내가 아는 기사가 없다는 것을 가정했는지 완전히 나를 배제하고 말하는 두 사람에게 살짝 할 말이 있다는 신호를 주었다.

역시나 눈치들이 귀신같아서 아주 작은 제스처에도 바로 반응하는 것을 보니 살짝 식은땀이 흐른다.

이런 사람들과 적대적으로 굴다니, 바인이라는 놈, 의외로 능력자 아닐까?

정치적으로 노련해지기에는 매우 어린 나이로 보이기는 했지만···.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 결투라는 것에 대전사로 참가하는 기준 같은 것이 있습니까?”

“기준? 아마 없을 거요. 실제로 기사단 같은 무력이 뛰어난 집단과 인연이 없는 이들은 용병 따위를 고용하기도 하니까.”

역시 그렇군.

그렇다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럼, 혹시 대전사로 나간 이가 패배하면 본인에게 큰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라, 요즘에는 결투에 대전사로 나온 이들끼리 서로 목숨까지는 빼앗지 않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요. 다만 패배한 자의 명성이 많이 떨어지겠지. 어찌 되었건 패배는 패배니 말이오.”

목숨이 위태롭지 않다면야, 뭐.

“아무래도 패배를 가정하고 이후의 행동을 정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호벤 경보다 뛰어난 실력자들이 누구인지 저도 알고 후작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착찹한 목소리로 블랑코가 후작에게 제안하자 후작은 내게 시선을 돌리며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물었다.

“으음, 그럼 리블르앙 백작. 엘리안 전하를 잠시만 왕궁에 머물게 해주지 않겠소? 내 명예를 걸고 백작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전하께서 다른 이와 혼담이 나오는 일은 없게 할거요.”

이런 패배주의자들 같으니라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무슨 포기가 이렇게 빨라?

흔들리던 마음을 정한 나는 두 사람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닷새의 시간을 줬으니 시간이 빠듯하군요. 급히 제먼 씨를 만나야겠는데요,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물론 당장 급하게 논의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만, 왜 그러시는 겁니까?”

블랑코의 물음에 잠시 갈등했다.

네이선의 실력은 잘 알고 있지만, 남들에게 설명하려니 그걸 믿기나 할까 싶은 거다.

보고 있는 나도 깜짝깜짝 놀라는데 말이야.

“사실은 제 동료 중에 칼을 귀신같이 잘 쓰는 녀석이 있습니다. 아마 해적 놈들 목을 100명도 넘게 땄을 겁니다. 게다가 ‘외날의 라프나’라고, 얼마 전까지 내해에서 악명을 떨치던 해적 두목을 상대로 압도했던 실력자입니다. 수도까지 오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리지만, 제먼 씨에게 부탁해서 지금 당장 은행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급하게 오면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나름 설득력 있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영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크흠, 리블르앙 백작의 능력이야 잘 알고 있으니 그 휘하에 뛰어난 자가 많다는 것 정도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기사를 상대로···.”

“블랑코 경의 말이 맞소. 내 비록 백작처럼 배를 타고 바다를 누벼본 적은 없으나 적어도 배 위에서의 싸움과 땅 위에서의 싸움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배 위에서라면 몰라도 땅 위에서, 그것도 1:1 대결에서 기사를 상대로 선원을 내보내 봐야 개죽음일 뿐이오.”

“그렇습니다. 이름 좀 날린다는 용병들조차 적당한 수준의 기사와 결투에서 싸우면 십중팔구는 패배하게 마련입니다. 애초에 기사가 아니면 ‘결투’라는 것을 겪을 일이 거의 없으니 실력이 동등하더라도 기사가 유리하기 때문이죠. 자칫 제대로 시간도 끌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소, 백작의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괜히 유능한 부하를 잃을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소.”

씁쓸하지만 문득 문득 이런 곳에서 이들과 나의 사고방식이 다른 것이 느껴졌다.

결국 이들도 귀족, 특권층인 것이다.

분명히 방금전까지만 해도 대전사끼리는 결투에서 서로 목숨을 노리지 않는다며?

그런데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내세운 기사가 아닌 대전사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 참, 그러니까 기사끼리 붙으면 적당히 목숨은 거두지 않지만 상대가 평민이면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다는 거지?

그런데 이 사람들 큰 착각을 하고 있군.

네이선이 시간도 제대로 끌지 못하고 죽는다고?

나도 네이선이 그 호벤인이 호빵인지 하는 놈을 이긴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쉽게 지지도 않을거다.

분명히 이번에 입항하기 전에 그랬거든, 이제 알렌 경과 정면에서 붙어도 꽤 오래 버틴다고 말이야.

그렇다고 알렌을 내가 데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니···.

* * *

“리블르앙 백작, 정말 괜찮겠소?”

“음, 이런 갑옷은 처음이라 어색합니다만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안 괜찮다.

두터운 흉갑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죄는 느낌이고, 어깨를 짓누르는 육중한 무게는 실시간으로 내 체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하체는 말할 것도 없이 한 발을 뗄 때마다 균형을 잡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할 지경이다.

투구는 뭐, 내 시야가 절반 정도로 줄어든 것은 물론 목을 움직이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도대체 이따위 장비를 착용하고 싸움을 할 수 있기는 해?

“하프 플레이트라고 해도 초심자가 사용하기는 쉽지 않은데, 생각보다 움직임이 자연스럽군요. 백작의 실력도 보통이 아닌 모양입니다.”

의외라는 듯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 블랑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날이 뭉툭한 롱소드 한 자루를 얼른 건넨다.

“아무리 날이 서지 않았다지만 무게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무기입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저도 어이없는 이유로 가장 아끼는 부하이자 친구인 녀석을 잃기는 싫으니까요. 일단 제가 기사라는 이들의 실력을 가늠해보면 조금 더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회의적인 표정이 된 블랑코가 한발 물러서자 페이트 후작이 다가와서 내 대련 상대가 되어 줄 남자를 소개했다.

나와 비슷한 복장의 남자였는데, 선이 굵은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이쪽은 내 호위장을 맡고 있는 라인스 경이오. 라인스 경의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호벤 경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시오.”

“후작 각하의 호위를 맡고 있는 라인스라고 합니다, 리블르앙 백작님.”

소개가 끝나자 고개를 까딱하는 남자가 외모와 어울리는 굵은 목소리로 마지못해 인사말을 던졌다.

이해는 된다.

후작의 호위를 맡을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일 텐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벼락출세한 평민 놈의 대련 상대를 하라니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후작의 심복일 게 분명한 이 자도 이런 반응인데, 다른 기사라는 작자들이 내 대전사를 해줄 리가 있나.

“후우,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소, 라인스 경. 잠시 몸을 풀 시간을 주시겠소?”

“얼마든지.”

네까짓 게 몸을 풀면 뭐가 달라지겠냐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가볍게 감사를 표한 뒤, 내 나름대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몸을 푼다기보다 몸에 달린 거추장스러운 갑옷에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게 옳았지만.

그리고 처음 잡아본 양손검인 롱소드도 문제였다.

무게도 어마어마한데, 이게 양손으로 쥐니까 움직이는 것이 영 어색하다.

“혹시 아밍 소드는 없습니까?”

참다못한 내가 움직임을 멈추고 블랑코 백작에게 묻자 그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밍 소드 말입니까? 그걸로는 금속 갑옷을 제대로 갖춘 기사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기 힘듭니다. 심지어 롱소드를 막을 수도 없지요. 기사들이 더 이상 실드와 아밍 소드를 주무장으로 선택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유효한 타격을 주기 힘들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내 눈에 금속이 미처 가리지 못하는 몇 군데가 눈에 들어왔다.

내 시선을 느낀 라인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상대가 허수아비도 아니고, 내 실력으로 저렇게 좁은 면적을 노리는 것이 불가능하기는 하겠지.

“음··· 그냥 일단 이걸로 해 보죠.”

라인스와 마주 서자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거의 온몸을 감싼 저 금속 조각들, 도대체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심하시오!”

내가 머뭇거리자 한 마디 외침과 함께 라인스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무거운 장비를 착용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쾌하게 달려온 라인스가 크게 칼을 휘둘렀다.

카앙!

가까스로 칼을 들어 첫 공격을 받아내자 양팔의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무게와 속도가 합쳐진 공격은 왜 롱소드를 든 기사를 상대로 아밍 소드를 쓸 수 없는지 단번에 깨닫게 해주었다.

이런 공격을 한 손으로 받았다가는 단번에 밀려나며 내 칼에 찍힐 판이다.

“제법!”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횡으로 날아오는 공격, 이를 악물고 다음 공격을 받아냈다.

움찔하며 내 칼이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어, 이거 네이선도 안될 것 같은데?

쨍그랑!

열 번? 어쩌면 그보다 적게.

그 정도가 내 한계였다.

이미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손에서 롱소드가 떨어져 나가고, 저 멀리 바닥에 나뒹굴었다.

“흠···.”

“후우, 후우, 고맙소, 라인스 경.”

“별말씀을. 생각보다 잘 버티셔서 놀랐습니다.”

라인스의 목소리가 약간 부드러워진 것 같다.

이 정도도 못 버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블랑코의 도움을 받아 무장을 해제하니 온몸이 땀 범벅이었다.

1분이 뭐야, 30초도 안 싸운 것 같은데 이렇게 땀이 흘렀다고?

“이런 수고를 끼치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내 갑옷 조각을 정리하고 있는 블랑코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가 작게 웃었다.

이런 잡일이 백작이자 일국의 내무대신인 양반이 할 일은 아닌데 말이지...

“하하,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의 입이 가장 무서운 적인데 시종을 들일 수도 없으니까요. 괘념치 마십시오.”

적당히 땀을 닦고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후작이 라인스 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가? 직접 상대한 자네가 백작의 실력은 가장 잘 알 테니.”

“후작 각하께서도 보셨겠지만, 백작의 반사신경과 근력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체계적인 무기술을 익힌다면 수년 안에 괜찮은 수준에 이를 것 같습니다.”

“음, 내가 본 바로도 그렇더군. 아직 갑옷과 무기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이야.”

아, 이 정도면 잘하는 거였어?

“이번에는 백작에게 묻고 싶소. 직접 겪어보고도 아직 부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오?”

“네.”

“응?”

후작이 깜짝 놀랐다.

당연히 내가 포기하겠다고 할 줄 알았겠지.

물론 기사라는 이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결투에서 기사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라인스의 실력이 호벤이라는 자보다 떨어진다지만 내가 그럭저럭 1분··· 쯤 버틴 거잖아?

네이선은 봐주지 않고 하면 나를 때려잡는 데 딱 한 방이 필요할 뿐이라고.

아니, 그래도 한 세 번까지는 버티려나?

갑옷을 입고 롱소드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네이선도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패배를 인정할 시간도 없을 정도는 아닐 거다.

내가 보기에 근력도 속도도 라인스보다 네이선이 더 나은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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