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75화 (376/420)

< <375화> 가장 강력한 설득은 실력 >

“여어!”

제먼 씨에게 은행 통신망 이용을 부탁한 지 사흘 만에 네이선이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보다 이틀이나 빨리 온 것은, 아무래도 우리는 인적이 없는 곳을 이용하느라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물론 일행의 수도 엄청나게 많았고.

“고생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지?”

“엉덩이는 아프지. 이놈의 마차는 몇 번을 타도 적응이 안 되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해서 오기는 했는데.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그게, 골치 아픈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는데 네이선이 갑자기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되물었다.

“백작?! 백작이라고?!”

놀라는 포인트가 좀 이상했다.

아니지, 원래 이게 놀랄 일이기는 하려나?

“그래, 백작이나 남작이나 그게 그거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백작이라고! 백작이면 엄청 높은 거잖아!”

흥분한 네이선을 겨우 자리에 앉히고 설명을 마치자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그 결투라는 걸 대신해달라는 거잖아?”

“그래. 섬에서 대련이라면서 그 알, 아니, 발리에(알렌의 가명)와 자주 어울렸었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게 좀···.”

반응이 영 신통치 않기에 무리인가 싶어서 살짝 물러설 여유를 주었다.

정 안되면 엘리안을 빼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네이선을 사지(死地)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왕궁에서 왕녀를 빼돌리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는 하려나?

“혹시 자신 없어?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알아보면 돼. 고작 이런 일에 네 목숨을 걸게 하고 싶지는 않아.”

“으응, 미안. 아무래도 아직 발리에 정도 실력자를 이길 자신은 없네.”

이 자식, 내 말을 도대체 어떻게 들은 거야?

“상대는 발리에 정도의 실력이 아니고, 무엇보다 굳이 이길 필요 없어. 적당히 상대하다가 위험하기 전에 패배를 인정하면 된다니까?”

“하지만 이기지 못하면 왕녀님과 결혼을 못 한다며?”

“그거야 뭐, 후작이 어떻게든 해준다고 했으니 믿어봐야지.”

후작은 나라는 놈의 가장 강력한 구속구가 엘리안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와 폰테 섬을 압도하는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무조건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뭔가 좀···.”

“그 발리에랑 요즘은 좀 해볼 만하다며?”

내 말에 네이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처음에 비하면···. 그리고 그 사람, 나와 같이 커틀라스를 들고 상대했으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롱소드랑은 좀 다르겠지.”

내가 직접 상대해 보니 롱소드가 강력하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움직임이 커서 부족한 민첩성과 방어를 커버해 줄 갑옷이 필수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 위에서 갑옷을 입는 것은 너무 멍청한 짓이고, 삭구를 비롯해 수많은 장애물이 있는 선상 전투에서 롱소드 수준의 장병기는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밖에 사용할 수 없다.

결국 대련이라는 것도 실제 전투에 도움이 되니까 하는 것이니, 당연히 알렌과 네이선의 대련은 선상 전투에 맞춰져 있을 수밖에.

네이선을 압도하는 알렌의 강력함에 잠시 잊고 있었던 부분을 상기시키자 나도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네이선도 롱소드를 든 알렌과는 붙어 본 적이 없다는 거잖아.

“어, 그럼 지금이라도 안 된다고 할까?”

“그러지 말고 일단 나도 그 갑옷이랑 무기 좀 써볼 수 있을까?”

* * *

이번에도 블랑코에게 수고를 끼칠 수 없어 서툰 손길로 네이선에게 갑옷을 다 입히고 나니 거북한 표정의 네이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 끝났어. 어때?”

“음. 솔직히 말할까··· 요?”

말을 놓으려다가 우리를 주시하는 페이트 백작과 블랑코를 의식한 네이선이 말투를 정중하게 했다.

그래봐야 격의 없는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어, 솔직하게.”

“이딴 걸 입고 어떻게 싸우나 싶습니다.”

“···힘들겠어?”

“잠시···.”

손짓으로 나를 물러나게 한 네이선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빠르게, 마지막에는 살짝 점프까지 해 보더니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때?”

“몸이 굉장히 둔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많이 줄어들기는 하네요. 무기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내가 말없이 무거운 롱소드를 집어서 건네주자 네이선이 공손하게 받아서 몸을 돌려 몇 번 휘둘렀다.

야, 그거 양손검이야. 한 손으로 휘두르는 거 아니야.

“그거 양손으로···.”

“아, 알고 있습니다. 무게를 가늠해 본 겁니다.”

괴물인가?

그렇게 내가 보기에도 약간 어색하고 어설픈 자세로 네이선이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페이트 후작 뒤에서 지켜보던 라인스 경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음? 라인스?”

“후작 각하, 이런 말씀을 드리기 민망하지만, 결정을 번복해도 되겠습니까?”

“오, 그래 주겠나?”

“네, 저 남자라면 상대하기에 아깝지 않겠군요.”

···뭔가 자존심이 팍 상하는데?

나는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는 뜻이잖아?

그럴 거면 괜찮은 편이라고 입 발린 소리를 하지 말던가!

사실 네이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부탁을 했었다.

그런데 내 면전에서 평민까지 상대해줄 필요는 못 느낀다고 대놓고 인상을 구기는데 더 이상 어떻게 말하겠나.

심지어 ‘후작 각하의 명이라면 따르겠습니다만.’이라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후작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돈이 들지 않는다고 부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정치인에게 신세 지는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다.

어찌 되었건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상대해주겠다는데 기분이 좀 상했다고 그것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고맙소, 라인스 경.”

내 말에 고개를 살짝 숙여 대답을 대신 한 라인스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네이선의 앞에 섰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인스 경.”

네이선이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어조로 꾸벅 고개를 숙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라인스가 양손검이 나무막대라도 되는 듯 가뿐하게 좌우로 한 번씩 휘둘렀다.

“최선을 다하게.”

탓, 탓, 타다다닥!

라인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자리에서 몇 번 발을 구르던 네이선이 번개 같은 속도로 튀어 나갔다.

나는 네이선의 뒤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경악하는 라인스의 표정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네이선이 나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선원’이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평민’ 기준에서 생각했겠지.

콰앙!

내려치는 네이선의 검을 라인스가 받아치자 쇳소리가 아니라 듣기에도 살벌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방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짧은 커틀라스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금속성 광채가 흩날린다.

터엉!

“엇?!”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챙강거리는 금속음 사이에 이질적인 소리가 하나 끼어들며 두 사람의 공방이 멈춘 것이다.

물론 금속음이기는 마찬가지지만, 뭔가 조금 더 둔탁한 소리.

그리고 두어 발 물러선 라인스가 다시 자세를 잡는 것이 보인다.

“방심했군. 이번에는 다를 거다!”

인상이 참혹하게 구겨진 라인스가 먼저 달려들었다.

“설마 방금 전에 라인스 경이···?”

내 말에 블랑코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이, 이럴 수가. 아무리 라인스 경이 방심했다고 해도···.”

“흐음, 라인스가 방심을 했나? 글쎄?”

페이트 후작 역시 놀란 표정이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이 강하다.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네이선이 라인스의 몸에 일격을 넣은 것이 맞는 모양이다.

“그! 지금 공격을 허용했으니 결투라면 이미 끝난 것 아닙니까?!”

“아, 그건 아니오. 결투는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거나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법이니.”

“그렇습니까···.”

그럼 적당히 상대하다가 적당히 한 대 맞고 패배를 인정하면 되겠네?

이기면 좋기야 하겠지만 아무리 네이선이라도 그건 좀 힘들 것 같고.

처음에는 기세 좋게 공격을 하던 네이선이 이번에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다.

아직 유효타를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방어에 급급한 것이 진짜 상대해야 할 호벤은 물론, 라인스조차 이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무래도 처음에 압도했던 것은 상대의 방심과 허를 찌르는 선공이 한몫을 했겠지.

채앵!

마지막 쇳소리를 끝으로 두 사람이 적당히 거리를 벌려 섰다.

두 사람의 호흡이 불규칙하다.

생각해보니 나랑 상대할 때는 호흡이 조금 빨라지기는 했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던 것 같···.

내가 약한 거냐, 네이선이 강한 거냐?

“후우우, 이건 정말.”

잠시 할 말을 찾는 듯 시간을 두던 라인스가 말을 이었다.

“상상 이상이군요. 솔직히 지금 실력만 가지고도 세상에 이 친구를 단번에 때려눕힐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기사 수업을 받아 볼 생각이 없나?”

이봐, 매너는 지켜야지.

어디 고용주 앞에서 대놓고 영입질이야?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제독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아, 백작의 부하라고 했지. 백작의 명성이야 들었지만 휘하에 이렇게 멋진 부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갑자기 내게 부러운 눈빛을 보내는 라인스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부하라, 겉으로 보기에는 부하가 맞기는 한데 나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짝, 짝, 짝, 짝, 짝.

우리를 지켜보던 페이트 후작이 천천히 다가오며 박수를 쳤다.

“대단해. 기사 수업을 받지도 않았는데 그런 실력이라니. 용병 출신인가?”

그의 말에 네이선이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역시 후작 정도면 평민이 상대하기는 어렵다는 거지.

“아, 아닙니다. 여기 리안 제독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용병 일은 해 보지 않았구요.”

네이선이 과도한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내가 앞으로 나섰다.

“선원 생활부터 함께하던 동료입니다. 지금은 제가 타는 기함의 갑판장을 맡고 있고, 보시다시피 칼 쓰는 솜씨가 상당한 친구지요.”

“그래, 백작의 전투 기록을 보면 백병전을 잘 이용하더군. 상선답지 않게 말이야. 애초에 상선이 그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하여튼 이런 멋진 부하가 있었구만.”

자꾸 부하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네이선이 이걸로 나중에 얼마나 저를 갈굴지 벌써 골치가 아프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일모레 있을 결투에는 이 친구를 내보내도 되겠습니까?”

“음, 그렇지 않아도 참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다행이오. 네이선이라고 했던가? 저 친구라면 충분할 것 같소. 승패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맥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 같구려.”

승패를 말하면서 후작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블랑코도 그렇고 두 사람의 표정이 네이선을 처음 볼 때보다 밝아진 것을 보면, 대전사를 구하는 것이 난감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 * *

“괘, 괜찮지?”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러자 몸을 풀던 네이선이 피식 웃는다.

“내가 싸우러 가는데 왜 네가 떨어? 걱정 마, 이제 꽤 적응했으니까.”

“야, 진짜 다시 말하지만 이기려고 하지 마. 그냥 적당히 상대해주다가 위험해지기 전에 패배를 인정하란 말이야. 알았지?”

“아이고, 걱정 마시죠, 제독.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까.”

“진짜 위험한 짓 하지 마. 부탁이다. 엉?”

이 자식이 우르타에 비하면 내 말을 잘 듣는 편인데, 오늘따라 영 개운하지가 않다.

“네이선 꼭 이기고 와야 해! 알았지?!”

빠악!

이번만큼은 진심을 담아 우르타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겼다.

이 자식은 왜 처음 봤을 때보다 전혀 안 컸지?

세월을 비켜 가나?

혹시 너도 채피 사제처럼 나이를 안 먹는 저주에 걸렸냐?

“아아악! 왜 때려! 이번에는 진짜 아파!”

“이 자식아!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어?!”

내가 역정을 냈지만 우르타는 발끈하며 마주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이왕 싸우면 이겨야지! 왜 자꾸 지라고 해?! 무패의 네이선! 무적의 네이선! 다 쓸어버려!”

말은 바로 하자, 무패도 아니고 무적도 아니잖아.

“아우, 시끄러. 가자. 시간 다 된 거 같은데.”

“나도 가면 안 돼?”

“안 돼!”

다시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하는 우르타를 단박에 밀어냈다.

결투는 왕궁 내의 연무장에서 진행될 예정이고 이 결투에 관심이 많은 귀족나으리들이 참관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저 천방지축을 데리고 갔다가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그때 시종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왔다.

“가자.”

내가 앞서자 갑옷을 차려입은 네이선이 뒤를 따랐고, 제먼 씨가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따라왔다.

“회계사, 내가 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 특히 저놈. 저놈 어디로 못 가게 꼭 붙잡고 있고.”

남는 사람은 게론드, 엘리엇, 우르타.

나는 세 사람 중에 굳이 게론드에게 뒷일을 부탁함으로써 엘리엇과 게론드의 상하관계를 은근슬쩍 규정해 주었다.

게론드가 워낙 경쟁심을 불태워서 말이지.

아, 우르타는?

쟤는 그냥 열외다.

포대 말고는 믿고 맡길 수가 있어야지.

* * *

함성같은 것은 없었다.

상대측에는 요플하임 백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갑옷을 입어 더욱 거대해 보이는 호벤 경이 대기 중이었다.

그 뒤로 보이는 십여 명의 귀족들은 아마 요플하임을 따르는 서북부 귀족들이겠지.

몇 사람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이 굳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기억해 두었다.

혹시 모르잖아?

“쯧, 아무리 출신이 그렇다지만 고작 대전사 하나를 구하지 못해 선원 따위를 대전사로 세우다니, 수완이 부족하군. 리블르앙 백작.”

네이선을 본 요플하임 백작이 뻔한 도발을 시전했다.

전에 그렇게 대판 깨지고도 다시 공격을 하다니 그 용기가 가상하지만···.

“요플하임 백작의 위세와 수완은 확실히 대단하군요. 폐하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근위 기사를 대전사로 내세우시다니요. 저 같은 평범한 이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배포인 것 같습니다.”

요플하임 백작의 입이 반쯤 벌어진다.

좋게 포장했지만 ‘국왕을 지켜야 할 근위 기사를 네 멋대로 부리는구나’라고 말한 꼴이니 이 말이 국왕의 귀에 들어간다면 국왕이 좋아하지는 않을 게 뻔하지 않나.

그리고 이 말은 반드시 국왕의 귀에 들어갈 거다.

여기에 대기 중인 시종이 몇 명이고 귀족이 몇 명인데.

이건 무조건 국왕 귀에 들어간다.

아마 내일쯤에 근위 기사는 타인의 결투에 대전사로 나설 수 없다는 규정이 만들어질지도 모르지.

시원하게 한 방을 먹인 나는 괜히 반격당할 시간을 주지 않고 네이선의 등을 살짝 밀었다.

“혹시라도, 만약에, 진짜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이겨버려. 죽여도 된다니까.”

“어?”

“아니, 마음대로 하라고.”

“훗, 알았어.”

호벤인가 호모인가 저놈도 분명히 라인스 경처럼 네이선을 얕잡아보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라인스 경을 상대로 했던 것처럼 초반에 빠르게 몰아치면 잘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급조된 무대 위에서 적당히 예를 갖춘 두 사람이 동시에 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로 튀어 나가려던 네이선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뭐야?

그리고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로 마주 보며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너무 지루해서 영원할 것 같던 대치는 지켜보는 내 긴장이 떨어지는 순간에 끝났다.

잠깐 눈을 깜빡한 것 같은데, 벌써 두 사람은 정중앙에서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까아앙!

생각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첫 금속음을 시작으로 쉴 새 없이 쇳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롱소드라는 것이 워낙 길다 보니 눈에 보이지도 않게 휘두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두 사람의 공방을 눈으로 따라갈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날이 워낙 길어서 궤적은 보이지만, 당장 방향 전환이나 두 칼이 부딪치는 순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건 봐도 본 게 아닌 거다.

지켜보던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는 것이 느껴진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면 탄성 비슷한 것도 들린다.

네이선이 이렇게까지 버틸 줄은 몰랐는지 준비된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있던 요플하임 백작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쯤 일어나 있었다.

물론 나는 애초에 의자에 앉지도 못했다.

백중세라고 보던 내 예측을 비웃듯이 1분쯤 지나자 승기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방어만 하면서 연신 물러서는 네이선.

아무래도 승리까지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흡!”

까앙! 빠악! 키잉!

이번에는 내 눈에도 보였다.

네이선의 칼을 쳐낸 호벤의 검이 네이선의 좌측 흉갑을 때리고 바로 이어서 아슬아슬하게 오른쪽 뱀브레이스(팔 하박을 감싸는 방어구)를 스치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네이선이 빠르게 자세를 수습하며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선다.

호벤은 그런 네이선을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지켜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계속할 텐가?”

“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투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호벤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 중에 기다려달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무례지만 실력이 제법이니 한 번 봐주도록 하지. 그대의 주인과 이야기라도 할 셈인가?”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짤그락.

철컹.

짤그락, 짤그락.

철컹.

뭐 하는 거야?

내가 조급한 마음에 네이선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블랑코가 조용히 내 손목을 잡았다.

“앉으십시오. 결투 중에는 아무리 당사자라고 해도 함부로 나서지 않는 법입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는데 지금 저 꼴을 보면서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저 새끼는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이제 패배를 인정하고 내려오면 깔끔하게 끝나잖아!

우르타가 가만히 있으니 이번에는 네가 사고를 치는 거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