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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76화 (377/420)

< <376화> 꿩 대신 닭 >

블랑코의 저지 때문에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네이선은 천천히 갑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바닥에 내려 둔 롱소드를 집어 들고 있었다.

서늘한 롱소드의 검 면에 햇빛이 반사되어 번쩍 빛난다.

저 롱소드, 무려 날이 서 있는 녀석이다.

맨몸으로 맞았다가는 단 한 방에 팔다리가 잘려 나가거나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녀석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스치기만 해도 근육이 쩍 갈라져서 운이 좋으면 심각한 부상, 재수 없으면 치명상이다.

“후우,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네이선이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상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투구에 가려서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아무리 배운 것이 없는 천한 놈이라지만 감히 나를 모욕하려 드는가!”

거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호벤 경의 말에도 네이선은 평온하기만 했다.

“결투라는 것이 처음이라··· 혹시 결투에 반드시 갑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습니까? 제겐 너무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죠.”

“······.”

상식적으로 그런 규칙이 있을 리가 없지.

아마 무기를 꼭 롱소드를 써야 한다는 규칙도 없을 거다.

다만 최소한 롱소드 수준의 파괴력은 있어야 갑옷을 입은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으니 암묵적으로 다들 롱소드를 사용하는 것일 뿐.

상대방이 떡장갑을 덕지덕지 붙이고 나왔는데 손바닥만 한 단검을 들고 달려들 수는 없지 않나.

오히려 둔기류나 대형 도끼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롱소드보다 자신의 무기를 쓰려고 하겠지.

“하, 결국 계속해보겠다는 거군. 그 목이 떨어지고 나서도 똑같이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기가 막히다는 듯 분노를 담아 한숨을 내쉰 호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번개같이 네이선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챙!

네이선이 있던 자리를 내리쳤던 호벤의 롱소드가 어느새 횡으로 휘둘러졌고, 네이선이 그 칼을 막아내며 연속으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전과 비슷한 공방이 이어졌다.

다만 한 가지는 달랐는데, 더 이상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간간이 막기는 하지만, 네이선은 호벤의 공격을 대부분 회피하고 있었다.

“놀라운 움직임이군. 저런 몸놀림이라면 갑옷이 방해가 될 만도 하지. 허허허.”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후작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 죽겠다.

번쩍거리는 롱소드의 궤적이 네이선의 몸이 있던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데 어떻게 침착하겠어?

괜한 내 욕심과 자만 때문에 엄한 네이선이 죽거나 다치는 것은 아닌지,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다.

터엉!

둔중한 소리와 함께 다시 두 사람이 떨어져 섰다.

호벤의 왼쪽 견갑이 눈에 띄게 구겨져 있었다.

잠시 시선을 돌려 자기 견갑을 보던 호벤이 묵묵히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재빠른 놈이군. 하지만 운은 여기까지다.”

“이번엔 제가 가죠!”

처음으로 네이선이 먼저 호벤에게 달려들었다.

갑옷을 입었을 때와 전혀 다른 속도, 이번에는 연속으로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과 달리 네이선의 공격이 연속으로 이어졌고, 호벤은 방어에 급급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 눈에는 네이선이 휘두르는 롱소드의 궤적이 두어 개씩 동시에 보인다.

그러니까 전에 휘두른 칼의 잔상이 내 눈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공격이 들어간다는 말인데, 저 공격을 정면에서 받는다고 생각해봐라, 공격할 엄두가 나겠냐고?

게다가 호벤의 몸은 주춤거리며 계속 물러날지언정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네이선의 몸은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도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닌데, 여긴가 싶은 순간 이미 위치가 미묘하게 이동해 있어서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내가 만약 호벤의 자리에 있었다면, 네이선이 공격을 하지 않고 저렇게 움직이기만 해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공격을 하지.

다만···.

“저렇게 움직이면 금방 지칠 텐데···.”

걱정스러운 내 혼잣말에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들려왔다.

“그 전에 결판을 내겠지. 타고난 승부사로군. 확실히 움직임이 엄청나기는 하지만 호벤 경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요. 그러니 그 속도에 호벤 경이 적응하기 전에 승부를 내려는 것이고.”

“네?”

무슨 말인가 싶어서 후작에게 짧게 반문했지만, 그는 완전히 자신만의 세상에 빠졌는지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저런 몸놀림을 가진 자가 짧은 칼을 들고 복잡한 선상에서 싸운다면··· 글쎄, 그 어떤 기사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겠지. 백작이 자신 있게 대전사로 내세울 만하군.”

그런 건가? 그럼 네이선이 이기는 거야?

퍼억!

챙강!

내가 다시 결투장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둔탁한 타격음이 울리고 뒤이어 맑은 쇳소리와 함께 롱소드 한 자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갑옷 곳곳이 구겨지거나 보기 싫은 칼자국이 새겨진 호벤이 오른쪽 건틀릿(장갑 형태의 방어구)을 왼손으로 움켜쥔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네이선은 그런 호벤 앞에서 당당하게 서서 칼을 내리고 있었다.

네이선이··· 이겼다! 이겼다? 이겼나?

승부가 났음에도 장내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급히 고개를 돌려 요플하임 백작을 보니 거의 악귀처럼 구겨진 그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 나도 의외의 결과라서 어안이 벙벙한데 너는 어떻겠어.

“내가··· 졌소. 패배를 인정하지.”

결국 호벤의 입에서 적막을 깨는 패배 선언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호벤의 오른쪽 건틀릿에서 붉은 피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피가 저렇게 흘러내릴 정도면 부상이 작지는 않을 터, 저 손으로는 도저히 다시 무기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뭐, 애초에 네이선이 끝을 내지 않았을 뿐, 무기를 놓친 순간 목숨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으아아악! 그게 무슨 소리요, 호벤!”

요플하임 백작의 악다구니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미 승부는 끝났는데 니가 소리를 지른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왼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롱소드를 집어 들고 묵묵히 퇴장하는 호벤의 표정이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인다.

* * *

승부가 갈리고 자리를 마무리한 우리는 후작과 블랑코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론드, 엘리엇, 우르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아아! 네이선! 이 괴물 같은 놈!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선 우르타가 전속력으로 달려서 네이선에게 안겼다.

남자끼리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심지어 우르타가 긴 생머리에 호리호리한 체격이다 보니 이상하게 어울려 보인다.

아니, 잠깐만! 이게 왜 어울려 보이는데?

“무거워, 이 자식아. 내려와.”

“윽, 땀 냄새.”

다행이다, 감동이 없어서.

어찌 되었건 승리에 대한 축하가 끝나자 나는 지금껏 참아왔던 질문을 던졌다.

“이제 이유 좀 들어보자. 도대체 왜 그랬어?”

“뭐, 뭘?”

찔리는 것이 없지는 않은지 냉랭한 내 말에 네이선이 찔끔하며 말을 더듬었다.

“내가 분명히 적당히 상대하다가 패배를 인정하라고 했잖아!”

“아, 그거야···.”

“갑옷 벗을 때! 그때 그냥 패배를 인정했으면 내가 마음 졸일 필요도 없었잖냐!”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말이야···.”

난감한 듯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네이선이 말을 이었다.

“전에 라인스 경을 상대할 때도 그랬지만, 이 결투라는 게 굉장히 정직한 싸움이더란 말이지.”

“정직한 싸움?”

“어,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랬어. 눈에 보이는 정석적인 공격, 정석적인 대응. 말 그대로 서로 간의 순수한 기량만 겨루는 시합 같은 거랄까? 사실 싸움이랑 좀 다르지.”

우리가 말하는 싸움, 전투는 말 그대로 난전이다.

눈에 보이는 적을 되는대로 때리고 찌르고 보는 개싸움.

뒤통수 잘 치는 놈이 싸움 잘하는 놈이고, 합공하는 놈이 똑똑한 놈이다.

하지만 결투는 다르다.

일단 1:1이니 뒤통수 맞을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눈앞의 상대만 집중하면 되니까 꼼수를 부리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갑옷을 벗은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 갑옷 없는 상태에서 한칼만 맞았어도 최소한 팔다리 하나는 날아갔어! 알아?!”

심지어 고작 팔다리 하나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여기에 닥터가 있는 것도 아니니 재수 없으면 출혈 과다나 감염으로 사망할 수도 있었다.

왕실 전속 의사들도 나름대로 실력이야 있겠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기사들과 나는 아예 싸우는 스타일이 다른 걸 어떡하냐. 기사들은 늘 두꺼운 갑옷을 입으니까 적당한 수준의 공격은 그냥 몸으로 받는다는 생각으로 움직여. 하지만 우리는 아니잖아. 아무리 짧고 무딘 칼이라도 일단 맞으면 위험하니까.”

이어진 네이선의 말에 의하면, 기사들이 싸우는 스타일은 굵직한 한 방을 노리는 타입. 자잘한 공격이야 어차피 갑옷을 뚫지 못하니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네이선은 그게 아니지 않나.

해적이나 선원이나 갑옷을 입은 놈이 있을 리가 없으니 몸 어디건 칼에 맞기만 하면 전투력이 떨어진다.

당연히 네이선은 적의 공격을 모두 막거나 회피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둘 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니, 네이선이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한 거다.

만약 갑옷을 벗고 변칙적인 공격을 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빠른 움직임으로 공격권을 가지고 올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과는 네이선의 생각대로였다.

“물론 다시 붙으면 승률이 많이 떨어지겠지, 상대도 준비를 할 테니까. 그리고 그다음에는 내가 불리할 테고. 그래도 이번에는 이겼잖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길 자신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길 것 같은 싸움에서 굳이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심지어 결투에서 패배하면 내가 어떤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어휴, 말을 말자. 어쨌건 결과는 좋으니까.”

이긴 놈에게 계속 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해서 내가 한숨을 내쉬며 항복을 선언하자 네이선이 다시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그래도 꽤 재밌었어. 자극도 된 것 같고.”

“자극은 나도 잘 된 거 같다. 심장이 아직도 쫄깃해 아주.”

말은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솔직히 너무 미안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위험한 판에 네이선을 밀어 넣었을까.

고작···.

“그런데 이제 이겼으니까 어떻게 되는 거야? 그 백작이라는 사람이 부하가 되나?”

맹한 우르타의 의문에 상념이 끊겼다.

“그게 말이 되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핀잔을 주는 네이선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사실 뒷일이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결투라는 걸 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네이선이 죽을 뻔했다는 죄책감과 이겼다는 고양감에 취해 그런 것은 물어보지도 못했지 뭐야?

다행스럽게도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흠, 제독. 혹시 결투에서 조건을 건 것이 있습니까?”

“어? 조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일단 내가 뭔가를 건 것 같지는 않다.

발단은 엘리안과의 결혼 문제지만, 그 문제는 내가 당사자임에도 결정권자가 아니라서 상관없는 문제고, 애초에 그놈이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단지 내가 말을 좀 험하게 했다는 이유였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이 결투, 졌을 때 페널티는 큰데 이겨도 얻는 게 없네?

내 말을 들은 게론드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제독을 말대로라면 일단 왕녀님과의 혼인은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패배에 대한 몸값으로 돈을 보내지 않을까요?”

“엥? 몸값?”

“네, 결국 결투가 그 백작 놈이 모욕을 느껴서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옛날 방식을 따르자면 대전사 결투에서 패했으니 대전사와 백작 모두 죽어야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니까요. 전투에서 패해 사로잡혔다는 의미로 몸값을 줄 겁니다.”

“잠깐, 잠깐. 그렇다면 결국 엘리안··· 음, 전하와의 혼약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지는 거잖아?”

내 의문을 받은 것은 엘리엇이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결투에서 패한 것은 곧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이번 안건에 대해서만큼은 요플하임 백작은 발언권이 없습니다. 뭐, 억지를 쓸 수야 있지만 그렇다면 본인의 평판이나 명예에 큰 마이너스 요인이 되니까 말이죠. 결국 엘리안 전하와의 혼인을 하려고 한 이유가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인데, 그렇게까지 부담은 안으면 본말전도가 됩니다.”

“귀족이란 참 피곤하군.”

살짝 안심이 되었다.

그까짓 돈 몇 푼에 네이선의 목숨을 걸었다고 하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

“그런데 있잖아, 만약에 그 백작님? 하여간 그 사람이 그냥 왕녀님이 예뻐서 그런 거면 어떡해?”

에이, 설마.

그런데 자네들 표정이 왜 그래?

나는 한 대 맞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론드와 엘리엇을 번갈아 가면서 보자, 두 사람이 낭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으음···.”

“그건··· 확실히 엘리안 전하께서 아름다우시긴 합니다만.”

이 망아지 같은 놈이 감히 내 여자에 눈독을 들였다고?!

* * *

뭐, 결론부터 말하면 바인 요플하임 백작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엘리안을 포기했다.

다음 날 나와 엘리안의 결혼이 발표되었지만,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푸우웁!”

브랜디를 마시던 네이선이 입에 머금은 술을 내뿜으면서 몇 방울이 내 얼굴에 튀었지만, 욕을 할 정신도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그 요플하임 백작이라는 자, 정말 강적이군요.”

엘리엇이 신음성에 가까운 감탄을 내뱉자 소식을 전한 블랑코가 조용히 품에서 손수건을 빼서 내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이 일로 오늘 회의에서 페리아 족과의 동맹 문제가 결정되지 못했습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요플하임 백작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서 말이죠.”

오늘 궁정회의에서는 페리아 족과의 동맹과 제반 사항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페리아 족의 그녀도 종족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고, 그 자리에서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

청혼이란다.

이 미친놈이 혈연에 의한 공고한 동맹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과 페리아 족의 그녀와 혼인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외쳤다는 것이다.

문제는, 왕실에는 더 이상 결혼 상대로 내세울 사람이 없고, 왕당파 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중년이나 노년이니 혼인 대상이 없다는 것.

그에 반해 요플하임 백작도 미혼은 아니지만 이미 사별했다니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타당하고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잠시만요, 물론 본인들이야 나이가 있어서 어렵다고 해도 자식들은 있을 것 아닙니까? 설마 미혼인 일족이 한 명도 없다구요?”

내 다급한 반박에 블랑코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대귀족의 자식이라도 이미 작위를 받은 자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가문의 후계자쯤 되면 대부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혼약을 맺습니다. 솔직히 엘리안 전하께서 특이한 경우지요. 전하께서 어렸을 때는 각 파벌 간의 정치 문제로, 성년이 되신 후로는 선대 국왕 폐하의 와병 때문에 계속 결혼이 늦춰졌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재수 없는 놈이 페리아 족의 음, 첫 번째 사위이자 매형이자 형부이자··· 와, 페리아 족의 특이한 정신 공유 체계를 알고 있다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그런데 페리아 족에게 결혼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하나?

“그녀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나를 대신해서 게론드가 질문을 던지자 블랑코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에게는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더군. 배꼽이 없다는 것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뜻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며 결정을 보류했네.”

역시!

아니, 그런데 그쪽 얼굴이 왜 죽상인데?

“문제는 귀족들 절반 이상이 혼약 정도는 되어야 본국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보호할 명분이 되지 않냐는 말에 동조하고 있다는 거야. 애초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미 말이 나온 이상 여론을 뒤집기가 쉽지 않아.”

하아, 이제 페이트 후작이나 블랑코에게 공감이 간다.

진짜 절대왕정 마렵겠네.

“아무래도 그녀와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오늘 저녁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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