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왕의 매형이 된다는 것 >
저녁에는 페이트 후작 저택에서 만찬이 열렸다.
왕궁의 외문에서 마차를 타고 고작 10분 정도 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저택이었다.
참가자는 우리 일행과 엘리안, 페리아 족 그녀, 그리고 블랑코.
“허허허, 급하게 차리느라 부족하지만, 그래도 내 성의를 봐서 맛있게 즐겨주면 좋겠군. 엘리안 전하와 페리아 족 대사께서도 부디 편하게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영광입니다, 페이트 후작.”
우리를 대표해서 엘리안이 정중하게 화답했고, 후작의 옆자리, 손님 중에서 가장 상석을 차지한 페리아 족 대사(?)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라면 매우 무례한 태도겠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까 뭐.
그나저나 우리 일행들이 바짝 긴장한 것이 눈에 보인다.
후작 정도 되는 최고위 귀족과 겸상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실 나도 몰랐다.
아무리 내 일행들이라고 하지만 결국 평민에 불과한 이들, 후작이 굳이 이들과 겸상을 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같이 초대를 받아도 식사는 따로 할 줄 알았지.
스코타 후작의 봉신이었던 나조차도 후작과 함께 밥을 먹은 적은 없지 않나?
지금 후작이 아직 남작일 때는 같이 먹었던 것 같은데.
“잘 먹겠습니다!”
아차, 한 놈만 빼고.
“하하, 편하게 들지. 이런 자리에서까지 고리타분한 예법을 따질 생각은 없으니. 식탁 위에만 올라가지 않으면 되네.”
좌중에 어색한 웃음이 돌았다.
아무리 예의와 예절에 무지한 평민들이라도 밥 먹는 식탁 위에 올라가는 미친놈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식탁 위에 올라갈 기세로 열심히 음식을 흡입··· 하는 놈은 있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하하하, 많이 들게.”
정신없는 식사 시간이 지나자 각자 취향에 맞는 음료를 들고 작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먼저 대사의 의견을 묻고 싶소. 분명히 궁정 회의에서는 그대의 일족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지. 그 말은 다시 폰테 섬으로 돌아갔다가 와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너무 시간이 지체되지 않겠소?”
페이트 후작이 스타트를 끊었다.
그런데 첫발부터 많이 헛발질이다.
저들이 정신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옛날 문헌에 나오지 않는 것일까?
후작의 성격으로 볼 때 그녀와 교섭에 들어가기 전에 분명히 가능한 정보는 모두 수집했을 텐데 말이야.
일단 말을 아끼고 있자니 무감정한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에게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혼이라는 것을 우리가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르겠군요.”
혼인 동맹을 맺는 원초적인 이유는 두 세력의 피가 섞인 2세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 페리아 족에게 양쪽의 결혼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겠지.
인간의 세력이라면 자신들에게 의미가 없더라도 큰 손해가 아닌 이상 흔쾌히 혼인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수많은 구성원 중 한 개체를 결혼대상으로 내어 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겠어?
하지만 페리아 족은 한 개체를 지칭하는 이름조차 없는 완벽한 공동체 사회다.
그러니 그 한 개체의 희생이 가지는 의미가 인간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차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후작 각하, 그 전에 알고 계셔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내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내가 최대한 자세히 페리아 족의 정신 공동체에 대해서 설명을 마치자, 블랑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과 정신을 공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백작만 유일하게?”
“유일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저뿐입니다. 물론 양쪽에 상당한 페널티가 있어서 자주 행할 수는 없습니다만.”
솔직하게 말하면 페리아 족에 페널티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나도 기분이 좀 그럴 뿐 큰 페널티는 없다.
그런데 그 정신세계가 불특정 다수의 남에게 공개된다는 거, 생각보다 창피한 일이거든.
차라리 옷을 벗고 시장을 뛰어다니는 쪽이 덜 창피할 것 같다.
하여간 인간에게는 너무 생소한 개념이라 설명이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설명을 잘 해봐야 상대가 믿지 못하면 다 헛짓이 되는 것이고.
증거로 내밀만한 뭐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리안 경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던 엘리안이 확신에 찬 어조로 내게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그리고 대상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페리아 족의 대사에게 가 있었다.
이름이 없으니 아예 호칭하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жалпы аң-сезим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변형해서 말한다면, 네, 리안 님의 설명이 그나마 가장 비슷하군요.”
“휴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인간에게는 없는 개념이니 당연히 설명할 단어가 빈약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그렇지 않다고 서두를 꺼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순간적으로 저 인간, 아니, 페리아 족이 미쳤나 싶었다니까?
하여간 저 친구들은 아직도 말하는 방법을 한참 더 배워야 할 것 같다.
당사자인 페리아 족이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발음의 이상한 단어를 섞어서 말하자 블랑코와 페이트 후작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한줄기의 의심이 걷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표정이 밝아진 블랑코가 약간 톤을 높여서 빠르게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하긴 종족이 다른데 그런 마법 같은 일이 쉬울 리가 없지요. 그런데 여기 대사님은 굳이 폰테 섬에 가지 않더라도 혼인 동맹 건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쯧, 블랑코 경. 여전히 흥분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버릇을 못 고쳤군.”
눈에 띄게 흥분한 듯한 블랑코의 말을 페이트 후작이 저지하고 나섰다.
그러자 블랑코는 깜짝 놀라며 후작에게 사과했다.
“앗, 죄송합니다, 각하.”
“내무대신이라는 자가 그리 쉽게 평정심을 잃어서 되겠나. 조금 더 주의하도록 하게. 그리고 혼인 동맹 건은 이미 결론이 나왔을 것 같군. 그게 중요하지도 않고. 그렇지 않습니까 대사?”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시 후작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는 인간들에게 혼인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를 못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족을 버리지 않아요.”
“그러시겠지요. 애초에 그런 요구 자체가 페리아 족을 이해하지 못한 우리의 불찰입니다. 혹시 이 내용을 내일 회의에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응, 묘하게 페이트 후작이 기뻐하는 것 같은데.
말은 안 했지만, 요플하임 백작이 어지간히도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말이 끝나자 생각에 잠겨있던 블랑코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애초에 요청 자체가 잘못되었으니 굳이 페리아 족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죠. 아니, 오히려 듣지 않는 쪽이 낫겠군요. 결과는 같더라도 이쪽에서 요청을 취하하는 것과 거절을 당하는 것은 정치적 의미가 달라지니 말이죠.”
“이제야 머리가 조금 식은 모양이군.”
“면목 없습니다, 후작 각하.”
블랑코의 사과를 가볍게 받은 후작은 주의를 모으고 모두가 들리도록 말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도 있나? 허허허, 리블르앙 백작과 함께한 이후로 일이 술술 풀려서 오히려 두려울 지경이야. 아 참, 리블르앙 백작. 그러고 보니 내일쯤이면 요플하임 백작의 결혼 축의금이 도착할걸세.”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요플하임인지 요플레인지 하는 놈이랑 내가 축의금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블랑코가 작게 웃으면서 부연 설명을 했다.
“결투에서 패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몸값을 치러야겠지요. 몸값이라고 하기 창피하니 결혼 축하라는 이유를 댄 것뿐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자이니 금액이 꽤 될 것입니다.”
“아아, 그런 겁니까?”
역시 게론드의 예상대로인가.
얼마나 올지는 모르지만, 네이선이 원하는 대로 가지고 가라고 해야겠다.
진짜 네이선이 다 갖고 싶다면 다 줄 용의도 있다.
말 그대로 네이선의 목숨값인데 이걸 탐내면 진짜 쓰레기지.
“걱정이 많았던 결투였지만 리블르앙 백작이 승리를 거두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었네, 호벤 경이 근위 기사단을 포기한 것은 아쉽기는 하지만, 원래 근위 기사단은 실력 이전에 폐하에 대한 충심을 보여야 하는 곳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페이트 후작의 말에 반응한 것은 네이선이었다.
고기 요리에 욕심을 부리던 우르타의 포크를 찍어 누르고 있던 네이선은 포크를 놓칠 정도로 놀라며 되물었다.
“호벤이라면 저와 싸웠던 기사님이 아닙니까? 설마 제게 패했기 때문에···?”
후작의 시선이 네이선에게 잠시 머물렀다.
아차, 생각해보니 네이선은 후작에게 직접 뭔가를 먼저 물어볼 위치가 아니다.
블랑코라면 그나마 안면이라도 있지만 후작은···.
이놈의 식사 자리에 왜 아무나 다 불러서는 사람 피를 말리냐!
“네이선이라고 했나? 걱정 말게, 자네와의 대전사 결투는 직접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국왕 폐하를 지키는 근위 기사가 다른 귀족의 요청으로 그 의무를 내팽개쳤으니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지. 물론 본인이 부상을 핑계로 자진 사퇴한 것으로 처리하기는 했네만.”
“아···.”
다행히 후작은 역정을 내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멍하니 생각에 잠긴 네이선을 보니 꽤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평소였다면 자기가 지금 무슨 실수를 했는지 충분히 알아차렸을 법도 한데.
“근위 기사단은 사적인 결투의 대전사로 나설 수 없다는 내부 규정도 만들어졌습니다. 내전에서 근위 기사단의 손실이 커서 무리하게 덩치를 키웠더니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더군요.”
블랑코의 말을 들으니 내전에서 근위 기사단의 손실이 컸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한 게, 고작 몇 년 사이에 왕이 두 번이나 죽은 거다.
왕이 두 번이나 죽는 동안 왕을 근거리에서 지키는 근위 기사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겠어?
기사단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을 테니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무리하게 근위 기사단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니 예전 같으면 국왕과 왕실에 대한 충성으로 가득 찬 인간들로 채워졌을 근위 기사단에 호벤 같은 귀족파의 인물이 들어갔겠지.
“그리고 폐하께서 리블르앙 백작의 대전사를 직접 보고자 하십니다.”
“네? 네이선을 말입니까?”
“네. 폐하께서는, 음, 아직 젊으시니까요. 신기한 일에 열광하실 나이죠.”
“아, 네···.”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국왕이니 뭐니 해도 아직 십대 후반의 소년이다.
제대로 검술을 배운 적도 없는 평민이 평생 칼 쓰는 것만 수련한 기사를 이겼다는데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지.
심지어 그 결투의 결과로 자신이 반사이익을 봤다면 뭐.
적당히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용돈이라도 두둑하게 받아오지 않을까?
“물론 리블르앙 백작도 함께 가셔야 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그러네. 평민 따위가 국왕을 독대할 수는 없으니 내 수행원이라고 해서 들어가야겠구나.
* * *
화려한 응접실.
네이선은 어울리지 않게 계속 진땀을 빼고 있었다.
“리안, 아니, 백작 나으리. 결투할 때보다 더 긴장된다고. 어떻게 좀 해봐.”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럼 폐하께서 보자고 하시는데 도망이라도 갈 거야?”
“으히익! 폐하라니, 내가 왜···.”
울상을 짓는 네이선을 보니 더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네이선이 처음 배를 탈 때도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내 장난은 그만 접어야만 했다.
“국왕 폐하께서 드십니다!”
정면의 문이 활짝 열리며 시종의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를 갖추었다.
“자애로우신 국왕 폐하께 영광을. 신 리안 리블르앙, 폐하의 부름을 받잡아 대령하였습니다.”
“오랜만이오, 리안 경. 진즉 경과 향후 본국이 나가야 할 길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했으나 산적한 현안이 많아 이리 늦어졌구려. 고개를 들고 편히 앉으시오.”
국왕의 허락이 떨어진 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니 앳된 얼굴의 국왕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어려 보이는군.
올해 열아홉이라고 했던가? 오펜과 동갑인데 오펜이 열 살은 더 많아 보이··· 미안해, 오펜.
“그리고 이쪽은 이번에 백작의 대전사로 나섰다던 갑판장인가?”
“네, 폐하. 네이선이라고 하옵니다.”
국왕의 질문에 내가 얼른 대답했다.
다행히 네이선은 미리 언질을 준 대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오, 그 엄청난 무용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소. 그대도 고개를 들라.”
슬쩍 살펴본 국왕의 얼굴이 흥분으로 약간 상기되어 있다.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십대 소년, 한참 강력한 무력에 대해 동경이 많을 나이지.
심지어 전쟁까지 겪었으니 다른 아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관심이 적지는 않으리라.
비록 전쟁에서 바지사장 노릇밖에 하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물론 전쟁에서 국왕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는지, 하늘이 내린 희대의 천재 전략가였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당장 최고 권력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페이트 후작이 군인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심지어 전쟁 영웅이기까지 하고.
그러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영광이옵니다, 국왕 폐하.”
“하하하, 그대 같은 이가 진즉에 내 휘하에 있었다면 내전이 더 쉽게 끝났을 텐데 아쉽군. 어떤가, 지금이라도 내게 충성을 맹세하면 기사 작위를 내리고 근위 기사단에 배속되도록 해주겠다.”
이 인간들이 어째 인재 채용에 상도덕이 없어?
왜 내 면전에서 대놓고 스카우트를 시도하냐고?
하지만 그렇다고 ‘제 부하인데 빼가지 마시죠?’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잠자코 있었다.
이번에는 왕이 직접적으로 네이선에게 물은 것이니 내가 대신 대답할 수도 없었다.
“폐하의 은혜가 하, 하예와? 하해와··· 네, 하해와 같사옵니다만 제가, 아니, 소인이 무식, 배운 게 없고 성질이, 아니, 성정이 난폭하여···.”
네이선이 급하게 벼락치기한 고어와 극존칭을 더듬거리며 늘어놓자 왕이 작게 웃었다.
“하하하, 그만, 그만 되었다. 자유롭게 바다를 오가던 이를 내가 어찌 잡아 놓겠는가. 새도 새장 안에 있을 때보다 창공을 누빌 때 아름다운 법이거늘. 어차피 리블르앙 백작이 짐을 따르고 있으니 그대 역시 내 신하가 아닌가.”
그나저나 진짜 안 어울리네.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여서 고작 16~17세로 보이는 소년의 입에서 할아버지가 할 법한 말투가 나오니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말이 길었지만, 네이선의 영입 제안을 농담으로 돌리는 것 같기에 나는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저와 함께 폐하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자이니 굳이 갑갑한 왕성에 가두는 것은 오히려 손해일 것입니다.”
“그래, 경이 보기에도 이 왕궁이 답답해 보이겠지.”
왕이 쓸쓸한 웃음을 짓자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단어 선택을 잘못한 모양인데?
“그런 뜻이 아니오라···.”
“신경 쓰지 말게, 혼잣말이니. 하지만 누군가는 이 갑갑한 왕성에서 나라를 다스려야만 국체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겠나?”
“물론이옵니다, 폐하.”
괜히 또 엉뚱하게 말실수를 할까 두려워 짧게 말을 끊었다.
그러자 왕은 뒤에서 시립해 있던 시종에게 짧게 손짓을 했다.
“마음 같아서야 그대도 남작으로 임명하고 싶으나 이번에 리안 경의 봉작 문제로 말이 많아 작은 선물로 대신하고자 한다.”
왕의 말이 끝나자 시종이 다가오더니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를 네이선에게 내밀었다.
“받으라. 그대들은 짧은 검을 주로 사용한다지? 급하게 만들어서 명검이라 하기에는 손색이 있으나 왕가의 문장이 들어간 검이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시종이 내미는 나무 상자를 보았다.
일반적으로 왕가의 문장이 들어간 물건은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그런 물건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왕의 권위를 빌려 쓸 수가 있다.
도저히 일개 선원이 감당할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비록 그대가 귀족은 아니라고는 하나, 이 검은 그대의 신분이 왕실 근위 기사에 비해도 손색이 없음을 증명할 것이다. 유용하게 사용하였으면 좋겠군.”
“구, 국왕 폐하, 이는 제가 받기에 너무···.”
네이선은 우르타 같은 단세포가 아닌지라 대충이나마 검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한 채 완곡하게 거절을 표하려고 했다.
하지만 국왕은 짐짓 굳은 표정을 지으며 네이선의 말을 막았다.
“어허, 짐의 호의를 거절할 셈인가?”
“아, 아니옵니다.”
“그럼 어서 받게.”
“가, 감사합니, 아앗!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결국 네이선은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왕의 하사품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차마 받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계속 들고 있었다.
자세가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데···.
“그래, 그대는 이제 나가 봐도 좋다. 그리고 백작은 잠깐 남게.”
“네, 폐하.”
네이선이 시종의 안내를 받아 뒷걸음질로 방에서 나가자 국왕은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푹신한 소파를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 편히 앉게, 리블르앙 백작.”
“황공하옵니다, 폐하.”
내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그는 악동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 편하게 해도 좋다, 리안 경. 이제 곧 우리는 한집안 사람이 될 사이가 아니던가? 아니 그런가, 매형?”
“매, 매형이라니요, 받잡기 민망하옵니다, 폐하.”
어우 씨, 내가 일국의 왕에게 매형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배만 타다가는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죽을 줄 알았는데.
“하하하, 요즘 누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백작의 속이 편치는 않을 것 같은데, 어떤가?”
“괜찮사옵니다, 제가 비록 배움이 부족하여 야인과 다름이 없으나 왕궁에서 따라야 할 예절조차 무시할 정도는 아니옵니다.”
“그래? 이거 참, 누님을 시집보내는 아우 된 입장에서는 조금 속상하군. 나는 경이 누님을 조금 더 아끼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아무래도 국왕과 혈연으로 연결된다는 것,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
저 표정을 봐. 완전히 예비 매형 놀리는 개구쟁이 소년 표정인데 상대가 왕이니까 대거리도 못 하잖아!
용돈으로 매수를 할 수도 없고, 아오!
“농담이오, 농담! 하하핫, 경이 온 이후로 일이 너무 잘 풀리다 보니 내가 기분이 너무 좋았던 것 같군. 농은 이만하고, 오늘 경을 따로 부른 이유는 벨로키나 왕국의 스코타 후작가와의 문제 때문이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아니. 그건 아니지. 이제 그대는 내 누이의 남편이자 이 나라의 백작이오. 그대가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본국이, 우리 왕가가 모욕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런데 현 스코타 후작의 성정을 알아보니 그대의 봉신 계약 철회를 웃으며 받아줄 것 같지 않더군.”
글쎄, 그건 굳이 스코타 후작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귀족이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 부하가 자기 땅을 들고 다른 놈에게 가겠다는데 웃으면서 잘 가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심지어 그 부하가 자기 아버지가 발탁해서 밑바닥에서 끌어 올려준 사람이라면 말이야.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참 걱정이 많았다.
봉신 계약 철회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행해질 수도 있는 후작의 보복 말이다.
현실적으로 폰테 섬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은 힘들겠지만 델라 항구에 있는 내 기반이나 오스팔트 가문 같은 내 지인들에게는 불이익을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물론 앞으로 델라 항구에 기항할 때마다 눈치를 보는 것은 물론 갖가지 이유로 트집을 잡힐 각오도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