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화> 결별 선언 >
“리안!”
‘나 화났어!’라고 얼굴에 쓴 것처럼 적나라한 표정으로 달려오던 네이선은 큰 소리로 나를 부르고는 옆에 서 있는 베기어 함장을 힐끗 보더니 마지못해 호칭을 붙였다.
“···선장님.”
평소 같았으면 농담이라도 하겠지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 갑판장.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지금 무슨 일이라는 말이! 어후··· 지금 제가 왜 달려왔는지 모르··· 십니까?!”
알지. 지금 네 얼굴을 보면 모르던 사람도 알게 되지 않을까?
“그,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베기어 함장과 하던 중이야. 그렇지요, 함장?”
당황해서 말이 살짝 엇나왔지만, 나는 뻔뻔하게 베기어 함장을 바라보았다.
···간절한 눈빛으로.
“네, 그렇지요. 뭐··· 네이선 갑판장,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베기어 함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왜 자기를 끌어들이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결국 제독의 권위에 굴복하고 어쩔 수 없이 네이선에게 말을 걸었다.
“함장님?”
“아니, 그게 말이야, 나는 누구를 데리고 와야 하는지 잘 모르지 않나. 아무래도 자네가 따라가 주는 쪽이 좋지. 자네도 알다시피 아인델프 그 친구는 오트라스를 지휘해야 하니까.”
당신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베기어를 바라보던 네이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함장님, 죄송하지만 잠시 제독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불길하게 들리는 네이선의 말에 나는 급히 개입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베기어 함장 쪽이 조금 더 빨랐다.
“그러게. 그렇지 않아도 볼일은 다 끝났으니. 제독,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가 들어본 그의 말 중에 가장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마친 베기어가 내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떠나자 네이선의 살기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리아아안···!”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일 보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네이선. 우리 여기에서 이러지 말고 방에 가서 이야기할까?”
제독으로서의 체면이라도 지켜야지.
* * *
“그렇게 위험한 곳에 왜 나를 빼놓고 가겠다는 거야?!”
선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네이선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를 냈다.
“뭐가 또 위험하다고 그래. 별일 없을 거야. 후작이 미친놈도 아니고 외교사절인 나를 어떻게 하겠어?”
그럴 수도 있지만, 상황이 그쯤 되면 네이선이 있다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하, 위험하지 않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괘, 괜찮다니까?”
“그리고!”
“어?”
“나 말고 우르타를 보내면 되는 건데 굳이 나를 보내는 이유가 뭐야?”
“···음.”
나는 차마 네이선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하지.
나와 다르게 네이선에게는 가족이 있다.
젊고 예쁜 아내와 귀여운 갓난쟁이 아들까지.
나야 뭐, 일이 잘못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지만, 네이선은 좀 다르잖아.
“우르타에게 일을 맡기면 제대로 하기는 하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들 챙기는 일이야. 우르타가 좀 멍청하게 보이지만 그것도 못 하지는 않아.”
“그게 아니지. 일단 그 사람들도 미지의 장소로 터전을 옮기는 일이잖아. 제대로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드웰 씨는 어떻게 하려고? 그 아저씨, 다시는 제 발로 폰테 섬을 안 밟는다고 한 사람이잖아.”
“그, 그렇기는 한데.”
네이선이 당황하며 살짝 수그러드는 기미가 보이기에 나는 쉴 새 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보라 양이랑 네 아들 리안··· 크흠, 응? 리안은 어떻게 하라고? 그 사람들도 데리고 와야 하는데 아무래도 네가 직접 가는 게 좋지 않겠어?”
“후우···. 좋아. 네가 왜 나보고 가라고 했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이건 양보할 수 없는 일이야.”
어라? 이게 아닌데?
“뭘 양보해, 임마.”
“내가 없는 사이에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잘못될 일이 없다니까 그러네?”
“너는 네가 거짓말을 잘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랑 우르타는 다 보이거든? 너 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 분명히 위험하다는 뜻이겠지.”
“······.”
정곡을 찔렸다.
“하여간 나는 널 따라갈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가 포기해.”
하아, 어떻게 한담?
저놈 표정을 보니까 이번에는 진짜 단단히 고집을 부릴 것 같은데.
* * *
결국 네이선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리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잘 부탁드려요, 닥터.”
“음. 내 걱정은 말고 제독이나 조심하도록 하게. 내가 보기에도 갑판장의 말이 맞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니 든든한 무력을 갖춘 이가 있는 편이 좋겠지.”
“저 녀석 고집 때문에 데리고는 가지만··· 닥터도 알다시피 그쪽에서 마음을 먹으면 네이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내 말에 닥터 롱베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제독이 잘못 생각하는 것 같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물론 자네 입장에서야 후작이 진심으로 수를 쓰면 한두 사람의 무력이 보태진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후작의 입장은 생각해 봤나?”
후작의 입장?
네이선이 있고 없고가 후작의 입장에 차이가 생길 게 있나?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던 닥터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자네 일행에 특별히 무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다면 후작이 상황을 쉽게 생각할 수 있네. 하지만 네이선 정도의, 말 그대로 한 나라의 근위기사 수준의 무력을 갖춘 이가 일행 중에 있다면 한 번 더 고민해야만 하지. 그가 일을 벌이려면 생존자가 한 명도 없어야 하지만, 규격 외의 무력은 늘 예상외의 변수를 만들어 내거든.”
“아!”
“그러니까 자네는 가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후작이 네이선의 무력에 대해 어림짐작은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을 흘리도록 하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는 아닐 거야.”
“으음, 알겠어요. 한 번 방법을 생각해 보죠.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드라이언에 잠시 옮겨 탈 인원을 확정한 나는 쉴 틈도 없이 다음 사람을 만나야 했다.
바로 델라 항구의 내 최고 파트너, 오스팔트 가문의 란데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작님.”
앞으로 꺼내야 할 말이 너무 미안한 말인지라 나는 호칭을 차마 지적하지도 못하고 괜히 턱을 긁었다.
“음, 오랜만이네, 란데르.”
“네, 게론드에게 듣기로는 이번에는 가지고 온 상품이 없으시다고 하셨는데 긴히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게 말이지,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나는 란데르에게 최대한 자세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불러들인 용건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그래서 자네가 원한다면 자네 일가의 폰테 섬 이주를 도와주고 싶은데 말이야.”
내 말이 끝났지만, 표정의 변화도 없이 말을 경청하던 란데르가 나지막하게 질문을 던졌다.
“게론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네. 왕궁까지 나와 동행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게론드니까.”
“그렇다면 게론드의 가족을 먼저 챙기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이야기를 했지. 그런데 그 친구는 괜찮다고 하더라고. 어차피 자기는 집을 나온 지도 오래고, 이미 가업은 동생이 이어받기로 했으니 후작이 거기까지 손을 쓰지는 않을 거라고.”
급한 내 설명에도 란데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의 생각이죠. 귀족들은, 음, 남작님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괜찮아, 계속하게.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네, 그럼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귀족들은 우리와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우리야 저놈은 가족과 별로 친하지도 않으니까 굳이 가족까지 손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귀족들은 단지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족에게 보복을 해야 속이 풀리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현 스코타 후작 각하는 전형적인 귀족이시죠.”
“그렇다면?”
란데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벌여놓은 사업이 있는지라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왕도까지 다녀오는 일정은 얼마나 잡고 계십니까?”
“후작의 성에서 이틀은 있어야 할 테고, 스코타 성에서 수도까지 마차로 열흘쯤 걸린다고 하던데. 그러면 왕궁에서 특별히 일이 지연되지 않는다면 넉넉하게 한 달이면 다시 델라 항구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네.”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란데르는 내게 제안했다.
“혹시 델라 항구로 다시 돌아오셔야 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응? 당연히 자네 일가를 데리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지요.”
란데르를 떠나보낸 나는 새삼 노련한 상인의 임기응변과 처세술에 혀를 내둘렀다.
정치력만 보자면 우리 선단의 누구도 란데르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다.
솔직히 귀족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조차 없으니까 말이야.
* * *
항구관리관이 미리 전령을 보내서인지 스코타 성에 들어가자마자 후작과 만날 수 있었다.
보통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혹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 늘 기다리게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다른 대우였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후작 각하.”
적당히 예를 취하는 내 모습에서 뭔가를 느꼈기 때문일까, 그의 굵은 눈썹이 꿈틀하는 것이 보인다.
“그래, 리안 남작. 분명히 내가 맡긴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맡긴 일? 아, 채피 사제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던가.
“그보다 먼저 공적인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순간적으로 공기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부터 그리 표정이 다채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똑같은 무표정이라도 후작이 꽤나 화가 났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 공적인 이야기라. 자네와 나 사이에 내가 내린 명령보다 더 공적인 이야기가 있던가?”
“죄송합니다만, 각하. 프레티아 왕국의 외교사절과 함께 왔다고 이미 전달을 받으셨을 걸로 압니다만.”
내 말에 후작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그래, 고작 외교사절 좀 데리고 왔다고 자네가 헛바람이 너무 많이 들었군. 그 외교사절이 꽤나 중요한 말을 전하려는 모양이지? 그런 것치고는 사절의 격이 좀 떨어지는 것 같은데.”
베일리가 사절단의 단장이라고 생각하면 후작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보통 국가 간의 중대사는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이 대표로 사절단을 이끄는 것이 관례였으니 말이다.
“아쉬가른 남작(베일리)은 부단장입니다.”
“뭐?”
이번만큼은 의외였는지 후작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분명히 사절단을 데리고 왔다는데 단장이 없으니,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이리라.
그리고 후작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니까 빠르게 진실을 유추할 수도 있겠지.
그래, 딱 지금 정도?
“설마 자네가 단장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본국도 아니고 타국의 외교사절이라고?”
역시나.
나는 배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내용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괜히 주절주절 변명하는 것보다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 스코타 후작에게는 더 잘 먹힐 것이다.
아무래도 군인들과 많이 부대끼는 사람들이 좀 그렇잖아?
“프레티아 왕국의 백작으로서 요청드립니다. 후작 각하와 맺었던 봉신 계약을 철회해 주십시오.”
“···뭐?”
“물론 폰테 섬의 총독 자리도 반납하겠습니다. 이제 크게 의미는 없습니다만.”
뒷말은 일부러 붙인 거다.
그래야 궁금해서 물어볼 것 아냐?
그래도 내가 사절단 대표인데, 상대 국왕도 아닌 일개 신하에게 외교문서의 내용을 먼저 나서서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잠시 나를 노려보던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내게 다가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낮게 뇌까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내게 맹세했던 충성 서약을 거두겠다고 한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그리고··· 백작이시라고?”
“네. 리블르앙 백작위를 받았습니다. 왕실과 혈연으로 엮이려면 백작 정도는 되어야 한다더군요.”
“······.”
내 말에 후작은 위협적인 거리까지 다가왔던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는 씹어뱉듯이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은 몸이 불편해서 길게 이야기하기 어렵군. 오늘은 편이 쉬고 내일 다시 보도록 하지. ···리블르앙 백작.”
“그럼 몸조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대로 몸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나를 안내하는 집사는 무언의 압박을 주었고, 나는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을 겨우 참아가며 내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그쪽이 아닙니다.”
한참을 가던 도중 어디선가 나타난 시종과 몇 마디를 나눈 집사가 먼저 걷던 나를 불러세웠다.
“음?”
“타국의 사신이신 백작님께 어울리는 귀빈실로 안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와우, 내 생각보다 후작의 정신력이 더 견고한 모양이다.
이게 그렇게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수준의 정신공격이 아닌데 말이야.
폭주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보다 수습이 빨라서 곤란하다고 해야 하나?
“이 방입니다. 저 안쪽으로 왼쪽 세 번째 방은 일행이신 아쉬가른 남작께서 묵고 계시며, 오른쪽 두 번째 방에 백작님의 수행원들을 옮겨오게 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방 안의 줄을 당겨주십시오.”
“그래, 수고했네.”
집사가 물러가자 복도에는 휑한 바람이 불었다.
전에 왔을 때는 방문 앞에 시종이나 하인이 대기하고 있어서 불편했었는데, 이번에는 복도에 인적이 없다.
타국의 사절단이라서 그런 건가?
벌컥.
갑자기 왼쪽 복도의 문이 하나 급히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복도를 밝히는 촛불에 비친 베일리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 보인다.
저 소심한 사람이 혼자서 얼마나 불안했겠어.
성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나마 수행원들과 호위 병력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보다시피 괜찮네. 이왕 나온 김에 이야기 좀 나누도록 하지.”
“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아니, 내 방으로 가지. 내 수행원들도 불러야 해서 말이야.”